-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말씀: 다니엘 1-3장
요절: 다니엘 3:17
다니엘 1장은 포로로 잡혀온 유대 청년들의 믿음의 결단과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자할 때 시험이 옵니다. 믿음은 시련을 거쳐 정련되고 강해집니다. 단련된 믿음은 정금보다 귀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기사는 믿음의 삶에 대한 전형과 같습니다. 1:8,9절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 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내시들의 우두머리에게 간구하니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사
내시들의 우두머리에게 은총과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시니라.] (단1:8~9). 비록 패망한 민족, 패망한 왕조의 씨들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환경이 변하면 믿음도 변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와 철학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환경의 변화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삶입니다. 자기를 이방인들의 음식으로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왕이 정해 준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요,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한 음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 속에 작정하였으므로] 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단지 마음에만 있고 육신은 따르지 않는
것, 소원은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말씀에 따라 믿음의 결단을 했고 그 결정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는 율법에
말하기를,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지니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땅에서 기어다니는 그 어떤 것”(레11:44), “또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함께 눕는 일”(레18:20), “수간(獸姦)”(레18:23-24a). “이교도들의 가증한 풍속”(레18:30)
등으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이 말씀에 따라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규례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알고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더럽히지 밀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1).
[오직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8).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마음속에 가득한 것들이 입을 통해 나오는데 이런 것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하시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구약의 유대인들에 흔히 있었던 우상 숭배의 죄에 필적하는 오늘날 교회 내에 성도들을 더럽게 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다음으로
일상적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한 가지는 ‘말’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 불로 불타느니라.](약3:6). 다음으로는 쓴 뿌리입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12:15).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고
합니다. 다니엘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말씀에 따라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께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a. 진리에 순종하라.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a). 진리를 듣고, 배우고, 알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거룩하게 되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읽었고, 성경 공부를 했고, 설교를 들었지만 육과 영과 혼이 더러움에 있다면 순종의 문제입니다.
b. 빛 가운데 걸으라.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c. 자백하고 회개하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믿음의 삶은 악을 거절하고, 불의를 거부하고, 말씀에 따라
자신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택하고 믿음에 순종하며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에는 필연적으로 위험, 피해가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나 믿음이 아니라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피해를 당할 마음을 하고 받아들이리라고 작정하는 결단입니다.
17절입니다. [이 네 소년들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으며 또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단1:17). 하나님은
믿음의 결단을 하고 시험을 이긴 이들에게 믿음의 보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이성과 학문이 중요시 되고 교육이 우상이 된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꿈에도 소원하는 한 가지가 주님께 이런 것을 얻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이런 것을 얻기를 원합니다. 출세와 성공, 존경과 명예와 부를 얻는
가장 쉽고도 합법적인 방법이 좋은 대학, 높은 학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명철, 솔로몬의 지혜는 마음의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구할 것들이
아니라 악을 피하고 시험을 이기며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지혜를 얻고 싶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명철을
얻고 싶습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2장입니다. 2장은 느부갓네살이 꿈을 꾼 것과 다니엘이 그
해석을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핵심은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꿈을 해석케 하신 분이 모두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제이년에 느부갓네살이 꿈들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영(靈)이 근심하여 잠이 깨서 달아나니라. 이에 왕이 자기 꿈들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갈대아 사람들을 부르라 명령하매 그들이 와서 왕 앞에 서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내 영이 근심하는도다, 하니] (단2:1~3). 이 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꾸는 의미없는 꿈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꿈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꿈은 주님의 주요 계시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왕은 꿈을 꾸었지만 깨면서 그 꿈을 잊어 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꿈과 꿈의 해석을 동시에 알고자 하여 마술사들과 점성술가들을 총동원했습니다. 하지만 남이 꾼 꿈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꿈의 해석은 나름대로 해석해 줄 수 있지만 꿈을 알아내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 밖의 일입니다. 마술사들도 인정하기를,
[왕이 요구하시는 것은 드문 일이니이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여 줄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하매]
(단2:11)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역시 말하기를, [다니엘이 왕의 눈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다그쳐 물으신 그 은밀한 일은
지혜자들이나 별을 살피는 자들이나 마술사들이나 점쟁이들이 능히 왕께 보여 드릴 수 없는 것이오며 오직 은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마지막 날들에 있게 될 일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침상에서 /본/ 왕의 꿈 곧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이다.](2:27-28)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사람 외에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꿈의
해석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잊어 버린 그 꿈을 말씀해 주시고, 꿈의 해석을 알려 주었습니다. 왕이 꾼 꿈은 2:31-35절의 큰
형상입니다.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이요, 두 다리는 쇠이며, 그 두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아주 특이하게 생긴 형상이었는데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깎아낸 돌이 이 형상을 쳐서 산산조각 내었는데, 그 부위는 쇠와
진흙으로 된 두 발이었습니다. 형상은 산산조각이 나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바람에 쓸려가 그들의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이 형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꾸었다가 머리에서 떠나버린 그 꿈을 다니엘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6-45절은 꿈의 해석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
머리입니다(2:38). 바빌론은 형상에서 금 머리 부분에 해당합니다. 바빌론 왕국 이후에 다른 왕국이 일어나는데 메데-페르시아 제국입니다. 그
다음은 놋에 해당하는 그리이스 제국입니다. 그 다음은 로마 제국입니다.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게 됩니다(A.D 364). 그런데 주의할
것은 로마 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제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돌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지 초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을 초토화했지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로마 캐톨릭과 더불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다시 한번 로마 제국이 종교적, 정치적 형태로 드러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왕국의 특징을 보십시오. [넷째
왕국은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산산조각 내며 정복하는 것이라. 쇠가 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왕국이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상하게 할 것이요, 왕께서 그 두 발과 발가락들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신 것같이 그 왕국이 나누일
것이로되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신 것같이 그 /왕국/에 쇠의 강함이 있을 것이니이다.](40-41). 우리는 역사적 사건이
예언적 사실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철의 강함이 있고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는 그런 힘이 있지만 두 발과 발가락들이 얼마는 진흙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합니다.
43절은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있을 일입니다.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신 것같이 그들이 자기 자신을 사람들의 씨와 섞을 것이나 그들이 서로 결합하지 못함이 쇠와 진흙이 섞이지 아니함
같으리이다.](43). 철과 진흙은 완전히 결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사람들의 씨와 섞을 것이나”란 표현은 그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임을 말해 줍니다. 이 부분은 킹 제임스 성경이 보여 주는 위대한 계시입니다. “그들”이 누구일까? 이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해서 ‘거인들’을 낳았던 것과 같이 마지막 때에도 그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44절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이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니이다.](44). 하나님께서 쇠와 흙이 섞인 그 왕국을 완전히 멸하시고 친히 한 왕국을 세우시는데 결코
멸망하지 않을 왕국입니다.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섭니다. 이 왕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천년 왕국입니다. 장차 임할 이 왕국은 하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46-49절은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일을 한 후에 자신이 영광을
취한 다니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다니엘에게
경배하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봉헌물과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게 하니라.](46). 다니엘이 경배를 거부하지 않고 봉헌물과 향기로운
냄새를 받았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지위, 선물을 다 받았을 뿐 아니라 왕께 간구해서 친구 셋을 지방의
치리자로 삼도록 했습니다(49).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탁월한 은사를 지녔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간에 육신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죄를 짓습니다. 요셉은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은잔으로 사람을 속였고 돈으로 형제들을 시험하고 속였습니다(창44:1,2). 노아는 술에
취해서 범죄했고,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했고, 모세는 분을 참지 못했으며, 바울은 거듭되는 주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성령을 거스른 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3장입니다. 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를 거절함으로 용광로에 던져지는 사건입니다. 1-7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야에 금으로 만든 형상을 세웠습니다. 제국의 왕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지만 그는 사람 이상의 존경과 권위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의 높아지려는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4-5절입니다.
[그때에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오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아, /왕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시나니 너희는 코넷과 피리와 하프와
트럼본과 비파와 줄 달린 타악기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려서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라.](4-5). 이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행할 일을 보여 줍니다. 모든 것보다 높임을 받고 경배 받기를 원하는 것은 마귀의 본성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이 아닌 강제적으로라도 경배하게 합니다. 자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죽입니다. 6절을 보면 잘 나옵니다. [누구든지 엎드려서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즉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 던져지리라, 하니](6). 이 땅에서 쇠를 녹이는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는 지옥의 모형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하나님은 사람의 혼을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용광로에서 몸이 불타는 것이 두려워 용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지옥의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할 때 목이 베이는 것, 몸이 불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할 때 그는 혼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8-12절은 “고소받는 세 친구들”입니다. 다니엘의 천거로
지방을 다스리는 방백이 되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 형상의 봉헌식에 참석했지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세상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즉시 왕께 고소했고 비난했습니다. 주를 위해 살고자 할 때,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즉시 핍박이 다가오고, 대적자들과 거짓되이 비난하는 자들이
다가옵니다.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가까이 나아와 이런 까닭으로 유대인들을 고소하니라.] (단3:8). 마귀는 고소자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밤낮으로 고소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으니 이는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밤낮으로 고소하던 자가 내쫓기었음이라.](계12:10).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왕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경배를 요구하고 위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손에서 건져낼 하나님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다 함이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코넷과 피리와 하프오 트럼본과 비파와 쥴 달린 타악기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너희가 엎드려서 내가 만든 금 형상에게 경배하면
좋으려니와 만일 너희가 경배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그 즉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 가운데 던져 넣으리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 하니](14-15). 왕에 대한 이들의 도전이 느부갓네살을 당황하게 만들었던지, 그는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너희의 하나님은 신들 중의 신이시오, 왕들 중의 주시며,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는 분이심이 분명하도다.” 라고 찬양했던 것을 까마득히 잊고,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 며 정반대의 태도를 드러내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유대인의 하나님이 뭐 그리 대단한
하나님이겠느냐?는 조롱과 멸시의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이 다니엘 앞에서 한 고백은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아니면, 그 이후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이 일과 꿈의 해석과는 역사적으로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B.C.
598년에 예루살렘을 2차 침공해서 대부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왔으며, 성전에 있던 기명들을 가져왔습니다. B.C. 587년에 3차 침공을
통해 그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불태웠고, 거룩한 땅은 황무지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일로 인해,
유대인의 하나님을 하찮게 보았는지 모릅니다. 동양의 군주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상대 신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에 이겼다고 믿습니다. 느부갓네살 역시, 대제국을 건설한 후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가 최고의 신일 수는 없다고 단정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던 “메로닥”(Merodach)을 최고의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 고 외쳤던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께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아니하나이다.](16). 그들은 결연하고,
침착하였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소를 받아 왕 앞에 섰지만 그들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10:19, [그러나 그들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그 시각에 지시를 받을 것임이라.](마10:19). 문제는 언제나 마음입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주님께서 도우시며, 함께 하십니다. 이들은 왕 앞에서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도 없었습니다. 영적
기준과 가치관이 분명하고 말씀이 마음 속에 뿌리 내린 이들은 쓸데없는 일에 판단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며 시간을 보내고, 기도해 보겠다고 하다가 우물쭈물하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입니다. 생각해 볼 것도,
기도해 볼 것도 없는 문제를 시간을 질질 끌면서 고민하는 것은 불순종의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17-18).
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고백입니까? 이런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세상에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은 즉흥적으로 나온 감정에 쏠린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보고 답을 하고, 고민한 후에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항상 자신들의 삶의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기에 지체없이, 서슴없이 나온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토론이 일어나면 이미 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할까?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면 십중팔구는 패배합니다. 평소 성경 공부를 통해,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를 통해 신앙적 삶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서 있는 사람은
즉문즉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께 담대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형벌에 신경을 쓰지
않나이다.” 우리는 그런 문제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빌4:6-7).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 내실 수 있으며, 구해 내실
것이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지 아니할지라도 즉 구해내지 아니할 지라도, 우리의 결정을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왕이 세운 금 신상에도 절하지 않겠다고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안에는 순교자의 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생의 생명을 그대로 유지하기보다는 불타는 용광로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타협이나 설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였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삽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삶의 목적이 있고, 내가 사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기에 따라 살면 됩니다. 로마서 14:8, 고린도전서 10:3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음 세 마디로 요약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여(롬14:8),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골3:17).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17-18).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은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우리를 능히 건져낼 수 있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는 주님의 은혜와 보호, 긍휼의 손길에 대한 믿음으로 요약됩니다. 이들은 마치 이사야 51:12,13절을 펴서 읽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나 곧 내가 너희를 위로하는 자이거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무서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무서워하느냐? 또
하늘들을 펴고 땅의 기초들을 놓은 주 너를 만든 자를 네가 어찌하여 잊어버리느냐? 또 그 학대하는 자가 마치 너를 멸할 준비가 된 것같이 네가
그의 격노로 인하여 날마다 계속해서 두려워하느냐? 그 학대하는 자의 격노가 어디에 있느냐?](사52:12-13). 대부분의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믿지만 그분께서 나를 구해내 주실 것인가?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용광로에서 건져낼 수 있는 분이란 것은
믿습니다. 그러나 나를 건져내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이 바른지 그렇지 않는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if not),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
주님께서 건져낼 능력이 있지만 건져내 주시지 않는다 해도 나의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전능하시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신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이요, 무속입니다. 기도는 나의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아뢰는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원하시는 것에 내가 굴복하는 것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이들 셋과는 달리 용광로에서, 광야에서, 칼로, 톱으로,
돌로 죽었습니다. 어떤 이는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지고, 펄펄 끓는 가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장작더미에서 타 죽었습니다. 그대로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않는 것은 저 하늘에서 상급을 주시기 위함이며, 이 땅이 행한 악행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 사도는 칼에 죽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죽기로
되어 있었지만 무사히 건져냄을 받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야고보는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건져 주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이다.”란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if not) 나는 주님을 섬길 것이다.”는 더
큰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시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위해 죽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고,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순교할 수 있는 기회에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나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성도를 알고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안이숙 자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형상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너무나 확고해서 사람들은 기가 질렸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느부갓네살은 더욱 화가 났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에 느부갓네살이 분노가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해 자기의 얼굴 모습을 바꾸더라. 그러므로 그가
명령하여 말하되 그 용광로를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 하고](19). 이 장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란 세 이름이
13번이나 반복됩니다. 주님은 저 하늘에서 이들의 믿음에 놀라고 감탄하고 있으며, 자랑스러워하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계시며, 반복적으로 부르시는 것을 보십시오. 아들을 제단 위에 바치는 아브라함을 자랑스러워하시듯, 욥의 변하지 않는 순전함을 마귀 앞에
자랑하시듯이, 이들 셋의 믿음을 주님은 크게 자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교리적으로 예표적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지상의 대환란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킬 144,000명의 유대인들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지상에 쏟아지는 온갖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의 초자연적인 보호를 통해 건져냄을 받고, 환란 중에 들림 받습니다. 이들은 환란을 통과하는 유대인들의 예표이며, 동시에 구원받을
유대인들을 보여 줍니다. 불타는 용광로는 심판을 예표합니다. 이 자리에 다니엘이 없는 것은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두
들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은 몇 번이나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은 자”로 언급됩니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큰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형상, 짐승에게 경배할 때, 죽음을 불사하고 절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왕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불의 강도를 높이고 그들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주님의 권세하에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용광로를 통과해야만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로 용광로 속에 던져 짐으로 은혜를 입습니다. 용광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