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다니엘 4장

요절: 다니엘 4:


다니엘 4장은 누가 이 땅의 통치자인가? 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당대 최강 바빌론 제국의 통치자는 느부갓네살이었지만 실제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통치자들은 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세계 최초의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느부갓네살에게 주님은 하늘과
땅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상의 통치자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권자시며,
통치자이십니다. 지금은 마귀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주님께서 위임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마귀는 분명 이 세상의 통치자이며,
권세자입니다. 누가복음 4:5,6 [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주며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이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 까닭은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줄 것이기
때문이니]
, 마귀는 자기 입으로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마귀에게 세상 모든 왕국을 넘겨주셨음을
말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고린도후서4:4a,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은 이 세상의 불신자들 안에 역사하며 그들의 추종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그러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로마서 13:1, [모든 혼들은 위에 있는 권력들에게 복종할지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니라.]
주님은 이 권세를 한시적으로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맡겨 두셨지만
지상 재림과 함께 모든 권세를 다 폐하시고, 친히 권세를 잡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느부갓네살은 바로 그 점을 깨우쳐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 위정자들이 알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이 이 점에 대해 조명을 받는다면 결코 권력 다툼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바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온 땅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너희에게 평강이 많이 있을지어다. 나는 높으신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알리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였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분의 표적들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분의 이적들이여! 그분의 왕국은 영존하는 왕국이요, 그분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1-3). 이것은 왕이 직접 내리는 국가의 공식 칙령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다스리는 전 제국에 이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느부갓네살이 미쳤다가 제정신이 든 B.C. 562인 죽기 1년 전에 공포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교만에 대한 죄를
회개하고 제정신이 든 원인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신이신 하나님께로 향한 회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 칙령을
선포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많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쓴 인사말과 흡사합니다. 이방 제국의
왕이요, 세계를 제패한 정복자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의 꿈과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그는 왕국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으며, 영원한 왕국은 “돌 왕국”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왕국은 결코 인간이 세운 왕국과 같지 않는 세세에 영원토록 지속될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지상의 물질적이고,
정치적이고, 눈에 보이는 하늘의 왕국과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로 일치된 진정한 왕국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한 일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제국의 백성들과 통치자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왕국이 저 하늘로부터 부여 되었다는 통치 목적에 이용하려는 것에 가깝습니다. 많은 왕들이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니, 천자(天子)라느니 하는 식으로 권위를 높이듯이 느부갓네살 역시 효율적인 통치와 권력 강화를 위해 조서를 내렸음이
분명합니다.


칙령의 주요 부분은 왕이 꿈에서 배운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것의 해석과 자신이 경험으로 터득한 주님의 주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절만 떼어놓고 본다면 너무나 위대한 찬양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만 같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높이면 높일수록 자신의 위상도 동시에 높아지는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틀림없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적 진리는 사람이 마음으로 깊이
인정하고 신뢰하지 않는 지식은 결코 그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점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찬양을
마음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높아졌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7년간이나 혹독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앙, 교회에 다니며 풍월로 들은 신앙 고백을 통해 자신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경배,
믿음과 확신에서 나오는 고백, 인격적으로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한 간증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아무리 빼어나게 뛰어나다 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해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시편66: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와서 들으라. 그분께서 내 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밝히 보이리로다.]
느부갓네살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찬양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
한 분만을 믿고 신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4-7절은 그가 예전처럼 한 꿈을 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느부갓네살에게 말씀하시고, 그 해석은 다니엘이 해 주도록 했습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서 안식하며 내 궁궐에서 번창한 가운데
있을 때에 나를 무섭게 하는 한 꿈을 보고 내 침상에서의 생각들과 내 머리속의 환상들로 말미암아 내가 근심하였노라. 그러므로 내가 칙령을 내려
바빌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데려다가 그들로 하여금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니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과 갈대아
사람들과 점쟁이들이 들어왔기에 내가 그 꿈을 그들 앞에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노라.]
(4-7). 이 장면은
이미 앞에서 한 차례 겪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왕궁에서 평안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정복 전쟁에서 보낸 왕이기에 이제 쉴 때도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평안히 먹고 즐기면 되는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또 다시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이한 꿈이라야 태몽 정도나 복권에 당첨되기 전에 꾸었다는 돼지꿈 정도겠지만 왕은 심각한 꿈을 꾸었는지라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으로 인해 근심하는 것은 그 꿈이 매우 기이했다는 것과 상당한 영적 의미가 내포되었다는 점을 왕 스스로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바빌론의 지혜자들, 마술사들, 점성술사들을 모두 불러 꿈을 해석하게 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주신 분만이 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7절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영적 교훈이 있다면, 사람들은 항상 해답을 얻기
위해서 잘못된 곳으로 먼저 간다는 점입니다. 왕은 지난번의 값진 경험을 한 후에도 다니엘을 먼저 찾지 않고, 해답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답을 찾기 위해 먼저 누구에게 달려갑니까? 친구들에게 갑니까? 아니면 전문가 그룹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갑니까?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답을 준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이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왕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해답은
언제나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느부갓네살은 분명히 그들에게 꿈을 말해 주었음에도
그들은 해석을 못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게나 해석해 주어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정말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다니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백 명의 현자들의 거짓을 막을 수 있으며, 그들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성경대로 믿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 헌신된 한 명의 주의 종이 거짓
신자 백 명을 압도할 수 있으며, 그들의 위선과 가증스러운 의식을 막을 수 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마지막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의 이름은 내 신의 이름을 다라 벨드사살이요, 그 속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더라. 내가 그 앞에서 그 꿈을 말하여 이르되, 오
마술사들의 우두머리 벨드사살아, 네 속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어떤 은밀한 일도 너를 근심하게 하지 못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가 본
꿈의 환상들과 그 해석을 내게 말하라.]
(8-9). 느부갓네살은 위대한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신(神)이
있었고, 그 신(神)을 섬겼습니다. 그는 아직 다신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자신이 섬기는 여러 신들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이 넘쳐 났는데, 왕은 이것을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습니다. 왕은 다니엘 안에 있는 신들의 영을 거룩한 신들로 규정한 것을 볼 때, 바빌론에는 거룩하지 않는 신들이 넘쳐나고 있었음을 자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3000여 종이 넘는 신들 가운데는 똥개보다 못한 신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는
모두 거룩한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며, 거룩한 주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있음을 증거하고,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첫째, 증거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주님과 주의 말씀을 선포하고 찬양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함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저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나오고, 얼굴은 항상 밝게 빛나는가?”
의구심을 갖도록 살아 보십시오. 증거의 능력이 배가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서입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보게 됩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욕을 먹으면서도 순수한 양심과 신앙 원칙을 저버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저 사람 안에는
뭐가 있길래 저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맺는 삶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거둘 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존재를 알게 되며,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궁중에서 보여 준 다니엘의 말과 행실은 다신 숭배자요, 우상에 빠진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특별한 존재로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사람, 말씀이 사람,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란 평판을 받을 수
있도록 살기를 기도합시다.


10-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침상에서 본 내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라. 내가 보니, 보라, 땅의 한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높이가 심히 높더라. 그 나무가 자라서 강하게 되고 그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 모습이 온 땅의 끝에서도 보이며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그 나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있고 또
들의 짐승들이 그 밑의 그늘에 있으며 하늘의 날짐승들은 그 가지들에 깃들이고 모든 육체가 거기서 먹을 것을 얻더라.]
(10-12).
느부갓네살이 “나무에 대한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의아해 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순찰자” 곧 “거룩한 이”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17절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순찰자 곧 거룩한 이’가 느부갓네살은 짐승처럼 7년간 살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예고해 주었습니다. 이 칙령의 목적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 땅과 사람의 왕국을 다스리고 계시며 자신의 뜻대로 원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학자들은 역사 연구를 통해 왕조의 흥망성쇠를 조사하지만 왜, 어떻게 그 왕조가
융성하고, 쇠퇴했는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피상적인 역사 연구에만 몰두할 뿐 실제로 역사를 움직이시고, 운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서를 통해 이 세상의 제국과 왕의 운명이 오직 한
분 하늘의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이 세상은 저 하늘의 영적 세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내 주셨습니다. 바빌론, 메데와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제국의 일련의 흥망성쇠와 유대의 역사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는 이 역사의 물줄기를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다니엘서는 예언적으로 보여 주었으며, 역사는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요, 한 권의 예언적 정치서란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9:10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방문한 것을 볼 수 있으며, 10:4-12에서 또 다른 영적 존재의 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1-12을 통해 우리는 하늘의 영적 군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으라.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땅에 있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하늘에 있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엡6:11-12)


성경은 이 우주를 3개의 하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늘은 우리 인간이 거하는 이 땅에서 대기권까지이며,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둘째 하늘은 바로 영적인 악이 거하는
곳입니다. 즉 사탄의 왕국이 바로 이곳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요, 영적 악의 머리로써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사역을 수행할 수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두 명이 바로 다니엘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페르시아의 왕”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의
왕”입니다(단10:32,20). 이를 통해 사탄은 각 국에 자신의 대리자를 보내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주관하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미가엘인데 다니엘서에는 이들이 하늘에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단10:13, 유9, 계12:7-9). 하지만 ‘영적 악’이나
이 세상의 주관자들의 권세는 위에 계신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니엘서를 통해 우리는 이 점을 배웁니다. “한 순찰자
곧 거룩한 이”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선포하는 말은 이 땅에서 반드시 실현될 권위의 말입니다. 느부갓네살을 괴롭힌 것은 나무에 관한 환상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던 나무가 ‘그 가지(his branch)’, ‘그 뿌리(his root)'로 인격화된 표현으로 바뀐 부분입니다.
나무가 대명사로 인격화된 것입니다.


13-15절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침상에서 내 머리 속의 환상들 속에서 보는데, 보라, 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크게 외치며 이같이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내고 그 가지들을 자르고 그 잎사귀를 흔들어 떨고 그 열매를 흩으며 짐승들을 그 밑에서 떠나게 하고 날짐승들을 그 가지들에서 떠나게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들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 줄로 매고 들의 연한 풀 가운데 있게 하라. 또 그것을 하늘의 이슬에
젖게 하며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들과 함께 자기 몫을 얻게 하라.]
(13-15). “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이”는 동격입니다. 이는
14절에서 그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he)란 단수로 부르는 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순찰자 즉 거룩한 이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순찰자란 말은 watcher로 파수꾼, 감시자란 뜻으로 다니엘서와 예레미야에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일들을
두루 감찰하는 임무를 맡은 영적 존재로 생각됩니다. 14,15절에서 갑자기 나무가 인격화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이는 그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다니엘의 해석은 아래에 자세히 나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그의 마음을 바꾸어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게 하고 짐승의 마음을 그에게 주며 일곱 때가 지나가게 하라.]
(16). 일곱 때란 7년을 말합니다. 이는 장차 다가올 7년
대환란에 대한 구절임에 틀림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사람이면서 짐승으로 변하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병은 현대 의학 용어로 ‘낭광’(lycanthropy)란
병입니다. 이는 마치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이야기처럼, 사람이 자신을 어떤 짐승으로 착각하는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소로 생각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환각 증세이지만 실제 외모가 짐승처럼 변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실제
행동 역시 소처럼 기어 다니며, 입으로 풀을 먹고, 생리적 습성 역시 동일하게 변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이나 이 병을 앓게 되어,
왕좌에서 쫓겨나 들에서 소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역사가들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제로 역사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지만
성경의 계시를 제쳐두고는 어느 누구도 이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예표적으로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짐승으로
불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일은 순찰자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요, 이같이 요구한 것은 거룩한 자들의 말에 따른 것이니 그 목적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고 자기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그 왕국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산 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느니라.]
(17).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세우신 것은 그가 위대했거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도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 왕국을 건설했고, 자기의 지혜로 부를 축적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왕에게 누가 이 우주의 통치자이며, 주권자인지를 분명하게 해 둘 필요를 느끼셨으며, 그런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
분명히 계시해 줄 목적으로 이 기사를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인간의 부류로 보았을 때 가장 말종에 해당하는 비천한 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름더미에서 올리셔서 왕국에 세우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하찮은 인간이 통치권자로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아도 그런 예는 허다합니다. 품성이나 자질면에서 인간 이하의 수준이며서 왕이나 황제로 등극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자기 뜻대로 다스리시고, 왕국을 주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한 주권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 왕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지위를 차지해 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왕국의 영광에 동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 왕국은 머지않아 끝이 나며, 모두 폐하여지고, 심판 받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오실 그날에 세워질 하늘의 왕국에 관심을 가지고, 그때 얻을 영광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스런
통치를 하게 될 자들이 썩어질 세상 왕국에서 무엇을 바라보겠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보았나니, 오 벨드사살아, 이제 너는 그 해석을 밝히 고하라. 내 왕국의 모든 지혜자들이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너는 할 수
있나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속에 있기 때문이라.]
(18). 느부갓네살은 드디어 꿈을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미리 경고를 주셨다면 피할 길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말해 준 꿈을 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한참동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꿈의 해석이 어려워서 놀란 것이 아니라 왕에게 좋지 않는 해석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다니엘에게 꿈과 해석으로 인해서 번민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다니엘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왕에게 임할
심판을 말하기 전에 먼저 마음 준비를 시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19절, [내 주여 그 꿈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향하고 그 해석이 왕의
원수들을 향하기를 원하나이다.]
(19c). 즉 이 말은 왕에게 임할 재앙이 왕의 원수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고 함으로써 왕에게 임할 진노의
심판에 관한 해석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는 매우 현명한 조처입니다. 다니엘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주시는 계시와 해석을 왜곡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 목회자들을 비롯해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코팅을 하는 죄를 자주 범하는 것을 봅니다. 듣기에 거슬리지 않게, 상대의 기분을 잡치지 않게 지혜를 발휘하여
전한다는 것이 오히려 성령의 능력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나 총독이나 자기와 껄끄러운 관계의 사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큼은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왕이 보신 나무는 자라서 강하게
되어 그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 모습이 온 땅에 보이며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그 나무 안에 모든 사람의 먹을 것이 있고
들의 짐승들이 그 밑에 거하며 하늘의 날짐승들이 그 가지들에 거처를 두었나이다. 오 왕이여, 이 나무 곧 자라서 강하게 된 나무는 왕이시니 이는
왕의 크신 위엄이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르기 때문이니이다.]
(20-22). 다니엘은 나무가 바로 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나무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37:35에는 월계수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사악한 자가 큰
권능을 가진 것을 내가 본즉 스스로 푸른 월계수같이 뻗어 나갔으되]
,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강가에 심기운 나무가 제 철에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하리로다.]
(시1:3).
마가복음 8:23, 24에는 주님의 치료로 눈을 뜨는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묻자, [그가 쳐다보고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처럼 걷고 있나이다, 하거늘](막8:24). 에스겔 31:3과 16절에는
마귀가 나무로 백향목으로 예표되어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내고 그것을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들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 줄로 매며 들의
연한 풀 가운데 있게 하라. 또 그것을 하늘의 이슬에 젖게 하고 일곱 때가 그의 위로 지나가기까지 들의 짐승들과 함께 자기 몫을 얻게 하라,
하였나이다.]
(23). 나무를 베어내고 뿌리의 그루터기(밑동이)는 쇠와 놋줄로 메었는데 이는 그루터기가 상하거나 썩어서 부스러지지 않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권능과 보호가 심판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나이다.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명령으로서 내 주 왕 위에 임한 것이니이다. 곧 사람들이(they, 사람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왕을
사람들에게서 몰아내리니 왕의 거처가 들의 짐승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들이 왕으로 하여금 소처럼 풀을 먹게 하며 하늘의 이슬에 젖게 하리니 일곱
때가 왕의 위로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왕이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아시리이다]
(24-25).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본 꿈을 이야기했고, 그 꿈의 해석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꿈은 왕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는데, 첫째, 왕이 사람들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왕에게 왕좌에서 쫓겨나는 일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둘째, 왕의 거처가
왕궁이나 사람의 집이 아니고 들의 짐승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왕이 낭광(lycanthropy)이란 병에 걸려 소처럼 풀을
먹게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 기간은 무려 7년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행인 것은 그 7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회복되며, 왕이 이 세상의 왕국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자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에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they란 대명사는 정확히 누구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궁의 신하들인지, 아니면 파수꾼과 순찰자들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17절에 나온 순찰자들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지상에서 군대가 있고 사법 기관이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악들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법 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순찰자들과 파수꾼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왕이
소처럼 풀을 먹는다고 한 것은 소가 바로 마귀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룹의 모양 중 하나는 마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부터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일곱 때가 지난다는 말은 7년 대 환란이 지난 다음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데, 그 누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들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명령하셨은즉 하늘들이 다스리심을 왕이 안 뒤에야 비로소 왕의 왕국이 왕에게 확실히 돌아가리이다.]
(26). 이
구절은 하늘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몇 안되는 구절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면서 '하늘에 거슬러 죄를 지었다'고 말할 때, 하늘은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하늘들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지만 주님께서 하늘들의 영적 존재들을 통해 이 땅을 다스리심을 분명합니다. 다니엘서는
페르시아의 통치자와 그리스의 통치자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나오는데 이들은 지상의 존재들이 아니라 저 하늘의 영적 존재들이었고, 그 중의
이스라엘의 통치자 이름은 직접 언급되기를 ‘미가엘’이었습니다(단10:13). 우리는 저 하늘의 일들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모세의 시체를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음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이 전쟁에 나갈
때는 저 하늘의 하나님과 천사들이 회의를 열어 아합을 어떻게 속일 것이며, 죽일 것인지 난상토론이 벌어졌고, 의로운 욥을 시험할 때는 하나님과
사탄이 2차례나 직접 담판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이 지상에 살지만 저 하늘의 하나님을 힘입어 공중의 악에 대항하는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엡6:12).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오 왕이여, 나의 권고를
받으시고 의로 왕의 죄들을 끊어 버리시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왕의 불법들을 끊어 버리소서. 그리하시면 혹시라도 왕의 평안함이 길게
되리이다, 하니라.]
(27). 꿈의 해석을 통해서 왕은 꿈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은 꿈의 해석을 마친 후 신실한 하나님의
대언자답게 느부갓네살 왕이 죄악된 생활을 단절하고 선정을 베풀며 겸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신하로서 왕에게 죄악과 불법들을 끊어 버리소서! 라고
촉구하는 것은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의 담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단 대언자가 범죄한 다윗 왕의 죄를 지적하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다니엘은 제국의 왕인 느부갓네살에게 “오 왕이여, 그 (나무)가 바로 왕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 회개와 회개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는 침례인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설교와 비슷합니다. 누가복음 3:10-13을 참고할 것. 이는 구약 시대의 구원 방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해 선을 베풀며 가난한 자를 돌본다면 높은 곳에 있는 영적 악의 존재들과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성이 바르게 정립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니라.]
(28). 왕은 다니엘의 조언을 마음으로 받지 않았고, 다니엘의 해석이 그대로 임했습니다. 악인들은 엄중한 경고의 말을 들어도
그 순간에만 마음이 잠깐 움직였다가 금방 굳어져 버리는지라, 왕 역시 다니엘이 준 해석을 깊이 마음에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이미 예언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겪은 후에야 겸손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 년간 은혜의 시간을 베푸셔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간이 흘러도 다니엘이 말했던 해석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해석이 틀렸으리라 생각했거나, 하나님께서
잊어 버리셨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열 두달이 막 끝날 무렵, 그는 홀로 왕궁을 거닐면서 자신이 세운 위대한 바빌론의 웅장함에 도취되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열두 달의 끝에 왕이 바빌론
왕국의 궁궐에서 거닐더라.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29-30). 30절 한 절에 “나”라는 말이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지 보십시오. 통치자는 모름지기 자신의 권력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그 점을 알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손으로
이룩하였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교만한 자를 참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아직 이 말이 왕의 입에 있을 대에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내려와 이르시되, 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이 왕국에 네게서 떠났느니라.]
(31). 느부갓네살이 교만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주님은 바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전무후무한 권력자였던 그가 이제 꿈에서 본 그대로 되었습니다. 심판은 이미 선포되었지만
아직 집행되지 않는 상태였다가, 드디어 집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지옥행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70-80년을 살아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형 집행이 유예된 시간에 불과합니다.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잠시
잠깐의 형 집행이 연기된 것일 뿐입니다. 집행은 언제나 가능하며, 언제 임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집행관이 언제 올지 아무도 예고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형벌은 내려졌기 때문에 언제 더 이상 예고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 왕에게 임한 것이 바로 심판의 집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합니다. 심판이 유예되고 있을 때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통해 구원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절박한
이유입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를 사람들에게
몰아내리니 네 거처가 들의 짐승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들이 너로 하여금 소처럼 풀을 먹게 하리니 일곱 때가 네 위로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리라, 하더니 그 즉시로 그 일이
느부갓네살에게 이루어지니라. 그 때에 그가 사람들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의 이슬에 젖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의 깃털같이
자랐고 그 손톱이 새들의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32-33). 이것은 이미 예고된 그대로 집행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험의
기간을 헛되이 버리고, 미리 예고해 주시고, 피할 길을 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을 때 집행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때 걸렸던 병은
의학 용어로 ‘낭광’(lycanthropy)으로써,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동물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소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감금되지 않고, 들판으로 쫓겨나서 울부짖고 소처럼 풀을 뜯어먹었으며, 그의 몸은 하늘의 이슬로 젖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기록된 대로 머리털이 독수리처럼 자랐을 것이며, 손톱은 새들의 발톱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병은 정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육체도
변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정신병은 7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때"(seven times)란 바로 7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간은 반드시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일곱 때’는 ‘이방인의 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때’(time)란 360년의 기간이 아니라 단지 1년을 의미합니다. 9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일곱 때’가 의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다니엘 70째 주의 마지막 주간의 7년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막는 자(성령)가 있어서
막고 있지만, 성령께서 교회를 데리고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마치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살며, 짐승의 형상에
절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짐승(Beast)이라고 했습니다. 7년이 지나고 나서 느부갓네살의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습니다(Larkin).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람은 위대하면 위대해질수록 그 사람을 땅에까지 낮추어 겸손하게 만드는 과정이
극심하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추락 또한 그만큼 크게 마련입니다. 또 한 가지의 교훈은 시험은 반드시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져야만 끝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시험이 닥쳤을 때, 그 시험에 이기지 못하면 계속해서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터지게 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 날들의 끝에 나 느부갓네살이 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매 내 지식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니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송하며 영원토록 사시는 그분을 찬양하고 공경하였나니
그분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34). 칠 년이 지나자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눈을 하늘을 향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짐승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특히 소는 항상 땅을 바라다보지 하늘로 눈을 들지 않는 짐승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깊이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은
돌아왔고 다시 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4절의 고백은 7년이란 겪은 심판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느부갓네살은 드디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공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통치와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영적 진리를 마음 깊이 깨닫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5). *주권자 하나님.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군대란 말 그대로 하늘의 천사들로 구성된 군대이며, 이 군대는 계시록에서 마귀들과 싸우며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이 지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저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이 땅에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나
이 땅에서나 “자신의 뜻대로”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나님께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이 고백은
주님의 주권을 온전히 고백한 것이기도 합니다. 욥기 9:12에서 욥이 한 말과 같습니다. [보라 그분께서 가져가시면 누가 그분을 막을 수
있겠느냐? 누가 그분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말하겠느냐?]
(욥9:12).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주님이 한 일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으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때에 내 이성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내 존귀와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으며 내 모사들과 내 영주들도 내게 찾아 왔으니 내가 내 왕국에서 세움을
받고 뛰어난 위엄이 내게 더하였느니라.]
(36). 주님은 7년이나 왕좌에서 물러나 있던 느부갓네살을 다시 원상 복귀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큰 위엄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왕이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훨씬 더 존귀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본래 왕을 모셨던 그의 신하들이 다시 찾아 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절대 권력을 지녔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며, 동시에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권력이란 것이 하루만 자리를 비워도 다시 회복하기 어려우며, 실각되었다면 다시 회복하는데 얼마나 피를 흘려야 가능한 것인지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지만 느부갓네살은 자연스럽게 다시 왕좌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모든 일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공경하노니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다 진실하고 그분의 길들은 다 공의로우시니 교만한 중에 걷는 자들을 그분께서 능히
낮추시느니라.]
�(37). 느부갓네살의 회복과 왕권의 회복은 26절에서 말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가 미쳐있는 동안 그의 아들 이블메로닥(Evil-Merodac)이
그를 대신해서 섭정을 했습니다. 그가 무사히 왕위를 다시 찾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의 정신병을 단지 일시적인 현상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음을 말해 줍니다. 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왜 그들이 느부갓네살을 왕궁에 감금해서 치료하거나 돌보지 않고 들판으로 나가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마 낭광이란 병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느부갓네살의 일생의 마지막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회복된 후 약 1년간 살았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B.C. 561년에 잠깐 병을 앓은
후에 죽었으며, 그를 이어 아들 ‘이블메로닥’(Evil-Merdach)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교리적으로나 예표론적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지만 역사적인 인물로서, 그 개인을 볼 때 그는 구원받은 사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주님은
그런 그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신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했지만 주님의 권능과 지혜를
경험한 후로 그들을 선대했고, 모두 높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정신병을 앓고, 들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았지만 주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이 다스리는 왕국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특히 그가 깊이 깨달은 바는 [교만한
중에 걷는 자들을 그분께서 능히 낮추시느니라.]
(37).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자신을 가장 높이는 자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낮추시고 가장 낮은 곳인 불 못으로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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