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자 굴에 던져진
기도의 용사 -
말씀: 다니엘 6장
요절: 다니엘 6:10
바빌론에서 메대와 페르시아의 제국으로 역사의 무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방인의 때에서 첫 번째 제국이었던 바빌론은 67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고, 형상의 가슴과 팔이 은으로 된 부분이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다니엘 6:1-3은 다리오가 바빌론에서 정권을 인수한지 약 2년간의 기간입니다. 그는 B.C.538년에 바빌론의 멸망 후, 곧바로
다리오 왕이 정권을 잡았지만 B.C. 536년에 죽었습니다. 6장은 다리오 제위 2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줍니다. 다리오는 대제국을
120개 구역으로 나누어 통치자들을 세우고, 3명의 총리를 두었는데, 다니엘을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2). 이 때 다니엘의 나이는 90세
가량이었습니다. 5장에서 다니엘은 성령의 예표로 등장했지만 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다니엘이 다른 총리들과 통치자들보다
앞선 것은 뛰어난 영이 그 속에 있었음이라.왕이 그를 세워 온 영토를 다스리게 하려고 생각하니라.](3). 다니엘 안에 뛰어난 영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넘쳐 났습니다. 다리오는 파라오가 요셉을 알아 보았듯이 다니엘을 알아보았고, 그를 높였습니다.
창세기 41:44에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파라오라. 온 이집트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손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하고](창41:4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다니엘 역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은 지혜와 명철의 영이십니다.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아무도 그를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다리오는 다니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데, 첫째 그가 늘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16). 둘째, 다니엘의 하나님은 구원자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습니다(20). 그는 아마 예전부터 바빌론의 다니엘에 대해서 그
명성과 소문을 듣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메데-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론 제국처럼 절대 전제 군주 국가로써의 힘은 많이 떨어진 국가였습니다.
총리와 고관들이 왕과 함께 칙령을 정했으며 한번 정해진 법은 왕이라도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은이 금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왕권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총리들과 통치자들이 왕국에
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기회를 찾고자 하였으되 아무 기회도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신실하므로 그에게서 아무 실수도 허물도 찾아 볼 수
없었음이더라.](4). 여기서도 다니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소받으시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주님 역시 대적자들에게 왕국에 관하여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실수와 허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이었던 빌라도가 3번이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노라”(요18:38,19:4,6)고 공언했을 정도였습니다. 마귀는 고소자입니다. 그는 늘 우리를 고소할 것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가
욥을 고소한 것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이유 없는 고난과 박해를 받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마귀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우리 역시 의로운 자란 증거가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지 않고, 그냥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박해하지 않으며, 모두 칭찬할 것입니다. 슈바이쩌는 그리스도 밖에서 경건하게 살았기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경건하게 살았기에 박해가 아니라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 없이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에게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딤후3:12).
시37:32-33에, [사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지켜보며 그를 죽이고자 하나 주께서 그를 사악한 자의 손에 넘겨 두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받을 때에도 그를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잠언 29:27, [불의한 자는 의로운 자에게 가증한 자요, 길이 곧바른 자는 사악한
자에게 가증한 자니라.] 다니엘은 당연히 다른 총리들과 통치자들에게 가증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 사람들이 이르되, 우리가
다니엘의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그를 고소할 기회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기회를 찾지 못하리라, 하고](5). 이들은 종교 문제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끝에는 종교 문제로 처형당했습니다(요19:7). 바울을 고소한 이들도 잘못을 찾지 못하자
종교 문제를 걸고 넘어졌습니다. 종교 문제의 분쟁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그 순간부터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까지 사람을 죽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 총리들과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왕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같이 아뢰되, 다리오 왕이여,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왕국의 모든 총리들과 총독들과 통치자들과 모사들과 대장들이 함께
의논하여 왕의 법규를 세우고 확고한 칙령을 정하려 하였나이다. 오 왕이여, 그것은 곧 누구든지 삼십일 동안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청원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6-7). 이들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모든 총리들이라고 했는데, 최고 총리인
다니엘은 제외되었고, 그 사실을 왕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본래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을 높여 주는 것 같이
하면서도 다리오가 가장 신임하고 사랑하는 다니엘을 죽이고자 하며, 다리오를 축복하는체 하면서 저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62:4에
[그들은 단지 꾀를 내어 그의 높은 위치에서 그를 떨어뜨리려 하고 거짓을 기뻐하니 곧 자기 입으로는 축복을 하되 속으로는 저주를 하는도다.]
다리오는 아무런 의심없이 이 법률 제정에 동의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국의 왕은 당연히 신과 동일시되었습니다. 30일간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높여 주겠다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직
왕은 다니엘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이 법의 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덫에 걸려
들었습니다. 그는 칙령을 봉한 후 인쳤습니다. 일단 인쳐진 칙령은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령으로 공식 선포되며 그 이후에는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 왕이여, 이제 칙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도장을 찍어 메대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의 바꾸지 못하는 법에
따라 그것을 바꾸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니](8). 다니엘은 왕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하려면 지상의 생명은 끝장 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지금까지의 신앙을 전면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은밀히 비밀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방법은 없었습니까? 방의 거실에 들어가서 아무도 들여 보내지 않고 창문을 다고 기도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게 하면
적들은 아무런 물적 증거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모든 유치한 방법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다리오 왕이 그 조서와
칙령에 도장을 찍으니라. 이 대에 다니엘은 그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들어가 자기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기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더라.](9-10). 다니엘은 왕의 칙령에 대한 내용을
몰랐거나 정보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조서에 도장이 찍히 것을 알고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초래할 결과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법이 자기를 겨냥하여 제정되었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틈을 봐서 자기를 음해하는 자들을 모두 역으로 공격하여 박해를 가할 수도 있고, 회유할 수도 있습니다. 30일만 참고 지내거나 은밀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는 평소대로 자기 집에 들어가 자기 방에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집을 기도의 장소로 잘 활용하고 있습니까? 전에도 몇번 말씀드렸지만 집이 기도와 찬양, 말씀과 예배가 있는 영적인 환경으로
조성하십시오. 가장은 집에서만큼은 영적 권위를 지닌 머리요, 제사장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고, 집 안에 있는 영적 유해 환경을 모두 제거하십시오.
그는 예루살렘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매사에
말씀에 정통하고 철저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역대기하 6:21,34,3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간구할 때에 주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되 주의 거처 곧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실 때에 용서하여 주옵소서...](대하6:21)
란 솔로몬의 봉헌 기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른 기도 생활과 자세는 기록된 주의 말씀에 정통할 때 나옵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단지 넉두리에 불과합니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풍성한 열매와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라도 더 부지런히 주의 말씀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다니엘입니다. 그는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잘 해결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더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고 또 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 사람이 인간적인가 영적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람은 기도하기보다 자기 지혜를 믿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또한
감정적이 되어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를 안고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혈과 육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기도로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싸웁니다. 이를 통해 영적 진리들을 깨닫고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과의 인간적인 싸움을 싸우기보다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는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전에 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오기를 발동하거나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니라 평생동안 하루 세 번의 기도를 생활화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꾸준한 기도 생활을 했습니다. “쉬지말고(without
ceasing)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365일 하루 24시간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단없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장애물이 나타났든지 나타나지 않았든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든지 들지 않든지, 나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그점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일상 생활이었습니다. 시편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기도하고 크게 부르짖으리니 그분께서 내 음성을 들으시리로다.](시55:17). 사람들은 일이 있어야만
기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기도 생활이 아닙니다. 평소의 기도 생활이 위기의 때에 초연한 영적 힘을 발휘하고,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힘을 줍니다.
다니엘은 자기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울부짖거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신없이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워 떤 것이 아니라 감사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그만큼 신뢰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한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기도해야 할 때 기도를 하지 못하고,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평소에
꾸준히 기도의 생활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기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런 형편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자기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이 때까지 다니엘의 선한 목자가 되사
섬세하게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고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거센 이방 문화 가운데서도 믿음의 순결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사 그를 능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은밀한 일을 나타내신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며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때 심령에서부터 감사가 솟아났습니다. 그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 자기 백성에게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만 원치 않게
상황이 힘들게 돌아가면 감사하기보다 인상을 쓰고 불평을 늘어놓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때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무엇보다 나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10b,16,20,22,23 26). 그는 전심으로 자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의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성도는 타협과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에
빠릅니다. 그들은 내가 총리직이라도 유지해야 친구들이나 백성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신앙 문제로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퇴출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상관에게 잘못 보이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다고 타협해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들이 신사 참배의 압력에 굴복하고 자기 생명을 구걸한 예를 통해 보더라도, 생명에 대한 애착과 집착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육신적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영적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겐 총리직도
중요하고, 생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겐 직업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과
순결과 애정을 가짐으로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상황에 따라 쉽게 마음이 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는 개만도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손해와 아픔과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지조 만큼은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서의 정당한
자세입니다.
다니엘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요, 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 땅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사랑하고 기도를 생명선과 같이 가장 귀히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생명이 위태롭다고 해서 기도를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시대를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연약한 성도일지라도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귀는 성도가 기도만 하지 않는다면 그가 무엇을 할지라도 그냥 둔다!고 합니다. 이는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은 도무지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모두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결단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비통한 심정이
듭니다. 도무지 기도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기도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에 대한 체험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잠깐 머리 숙이고 마는 것이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는 때로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는 크고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다니엘은 기도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적들은 알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법으로 한달 동안이란 한시적 시간을 정했겠습니까? 이는 어떤 성도라도 한 달간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영적 생활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다니엘이라도 한 달 정도만 기도 생활을 중단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죄와
세상을 이길 힘을 잃을 것이며, 총명하고 영특한 지혜도 둔해질 것입니다. 기도는 다니엘에게 삶에서 해도 되고 말아도 되는 선택적 요소가 아니라
삶의 전부를 차지하였으며, 모든 것이 여기에 걸려 있었습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매는 줄입니다. 영적 요소들은 다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이 사람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11). 다니엘의 적들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그들은 계획이 완전히 성공하자 즉시
왕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이는 마치 마귀가 이 세상의 성도들의 죄를 발견하고는 주님께로 달려가 참소하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에게 가까이 나아가 왕의
칙령에 관하여 왕 앞에서 아뢰되, 오 왕이여, 왕께서 이미 칙령에 도장을 찍으사 삼십일 안에는 왕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청원을 하는 자는
다 사자 굴에 던져 넣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메대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의 바꾸지 못하는 법에 따라 이 일이
사실이라, 하매](12).우리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이용하여 참소하는 마귀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아뢰되,
오 왕이여, 유다의 포로들의 자손에 속한 저 다니엘이 왕과 왕이 도장을 찍은 그 칙령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하루에 세 번씩 청원하나이다,
하니](13). 음모자들이 다니엘에 대해 송사하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총리 다니엘”이란 말대신 “유대에서 사로 잡혀 온
다니엘”이라고 말합니다. 기껏 포로 주제에 자리만 믿고 날뛰는 늙은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왕의 호의를 입어서 출세한 놈이 왕이 정한 칙령을
존중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거부한 배은망덕한 놈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왕이 서명한 칙령을 알고서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고 그들은
고발했습니다. [유다의 포로들의 자손](13)이란 말은 장차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포로로 사로잡힐 이스라엘을 사람들을 잘 예표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믿음을 져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자기 자신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니엘을 건져 내려고 그에게 마음을 쓰며 해가 질 때까지 그를 건져 내려고 애를 썼더라.](14). 왕은 즉시 자신이
도장을 찍은 율법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다니엘을 궁지로 몰아 넣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건져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왕 앞에 나와서 소명을 요구하거나 살려달라고 간청을 한다면 사정은 어떻게 돌아갔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대적자들
앞에서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위해 변호하거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세 친구들이 불 속에서 무사히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령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더
좋은 부활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 36,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다니엘 역시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에서 면제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14절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해 줍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 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명절에 죄수를 풀어 줄 수 있는 사면령을 이용해서까지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의 기도 생활에 대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과는 달리 기도는 마음의 감화와 교훈으로 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는 실제로 무릎을 꿇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 마음
속에 새기고 담아 두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루 세 번 평생을 하루같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 다니엘과 같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하루같이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니엘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자 굴에 던져져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90세가 넘은 노구에 찾아온 대가로 보기에는 너무 심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법은 공포되었고 그 법은 누구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위력입니다. 정해진 율법은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은 하나님도 변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다 지옥의 형벌에 처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다리오는 사랑하는 다니엘을 구하고자
애를 썼지만 어떻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니엘을 아꼈지만 다니엘을 대신해서 아들을 내 주지는 않았습니다. 신하를 위해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내 준 예는 동서고금에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 죄인을 위해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의
기사만이 유일무이합니다. 왕은 다니엘을 구할 방도를 애쓰며 하루를 보내고 이제 저녁이 다가왔습니다. 신하들이 몰려 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이 사람들이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 왕에게 아뢰되, 오 왕이여, 메대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의 법이 이러함을 아시거니와 곧 왕께서 세우시는 어떤 칙령이나 법규도 바꿀 수
없나이다, 하니](15). 이들은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정의의 화신들이 아니라 율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제정한 율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율법이 어디까지나 왕이 세우고 제정한 법규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적들은 다니엘의 범법 행위에 대한 충분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왕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원수들은 교활합니다. 기독교 국가인 이곳 미국에서는 공립
학교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나 전도를 하는 것, 성경을 보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른 종교와의 형평성, 소수의 권리
보호, 약자의 권익 등입니다. 그러나 회교국가나 불교 국가, 캐톨릭 국가 중 어느 나라에서도 학교에서 회교 경전이나 불교 서적, 머리와 양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행위들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점점 쇠퇴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이용하여 개개인이 성경을 소유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법이 만약 우리의 생전에 제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은 다니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이 명령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니라. 그 때에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계속해서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건지시리라, 하니라.]
다리오는 법대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다리오가 다니엘에게 한 말은 매우 의미 깊은 말입니다. [네가 계속해서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건지시리라] 다리오는 다니엘이 충직하게,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인 다리오에게도 선한 간증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신실하게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헌신이 지속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 다니엘과 같은 간증을 지녀야 합니다. 다리오는 자신이 다니엘을 건질 수 없지만 다니엘의 하나님은 건지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건져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실하고 흠없이 주님을 섬기고, 왕들을 섬겼던 다니엘은 사악한 범죄자들이나 받는 그런 무시무시한 형벌을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신실한 세명의 히브리 청년들을 용광로 속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주님께서는 똑같은 이유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왕은 최선을 다했으나 다니엘을 구원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그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사자 굴에 던진 것으로도 부족하여
돌을 가져다 굴을 막고 인을 쳤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시체를 동굴에 가져다 두면서도 동굴 입구를 돌로 막고 인을 치고, 병사를
세우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실 동굴문은 주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왕이 자기 궁궐에 가서
금식하며 밤을 지내고 자기 앞에 악기도 들여오지 못하게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더라.](18). 다니엘에 대한 왕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자신이 서명한 법령을 어기고 기도한 다니엘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깊은 신앙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과연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기의 종을 구출해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타는 가슴을 가지고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만약 여기서 다니엘이 그냥
죽는다면 다리오는 다니엘이 섬기던 하나님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왕이 아침에 매우 일찍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니라.](19). 왕은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새벽에 사자굴에 달려가서 다니엘의 하나님이 다니엘을 능히 구출하셨는지 달려 가
보았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다니엘의 신앙에 대한 보상이 어떠한지에 대해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관심이 새벽 일찍
사자굴로 달려가게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제 2의 성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지 못했지만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생사 여부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주님이 보낸 천사와 입이 막힌 사자들과 함께 아주 특별한 밤을 보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하나님께 영광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의 간증을 갖게 합니다. 이는 동이 트기 전에 요셉의 동굴로 달려갔던 마리아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비록 살았다는 믿음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고난을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느끼고 나누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왕이 굴에 이르러서는 슬픈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소리를 지르며 다니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계속해서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건져내셨느냐? 하니](20).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은 이미 치워졌는지 아니면 아직도 그대로 있는 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사자들과 함께 있는 것만 생각했지만 다니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굴속으로 빨려 들어간 왕의 목소리는 산울림처럼 자기
목소리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1절, [이 때에 다니엘이 왕에게 이르되, 오 왕이여, 영원토록 사시옵소서](21).
다니엘은 살아 있었습니다. 전에 세 친구들을 용광로에서 건진 것처럼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건져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있는 그곳에 와 계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께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사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해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내 무죄가 그분 앞에서 드러났음이며 또 왕이여, 왕 앞에서도 내가 아무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니라.](22). 하나님은 천사 하나를 보내셨습니다. 만약 삼손이 이렇게 사자 굴에 던져졌더라면 사자들을 다
때려잡았겠지만 다니엘은 그런 힘을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대신 다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할 때
천사들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고 기술하지 않고, [믿음으로...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으며](히11:3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의 믿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확실히 보상하시는 분이시며,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모두 성도의 믿음의
결과로 돌리심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얻을 보상들을 쌓아 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의(義)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만 있으면 주님의 의(義)를 계속해서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의 완전함이 입증되었습니다.
평생을 계속해서 섬기는 하나님,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그 기도의 대상은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이 메데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이
구절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디모데후서 4:17-18로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잡아 삼키려는 마귀를 울부짖는 사자(벧전5:8)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사 나를 강건하게 하심은 그 선포한 말씀이 나로 말미암아 온전히 알려져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자신의 하늘 왕국에 이르기까지
보존하시리니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후4:17-18).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기 전에 왕에게 아무 탄원도 간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리오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믿었고, 그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할 말을 다하고
있습니다. 범죄자로 몰려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그는 사자들에게 아무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는 내 무죄가 그분 앞에서 드러났음이며 또 왕이여, 왕 앞에서도 내가 아무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는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모두 죄가 없는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 점에서 다니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한 예표가
됩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그로 인하여 대단히
즐거워하며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리라 하매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린즉 그에게 아무 상처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믿었음이더라.](23). 왕은 자신의 희망대로 다니엘이 무사한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사자 굴에서 나온 다니엘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며, 머리 털 하나도 흐트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고 울부짖는 사자의 입을 틀어막는 출발이 믿음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귀는 세상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믿음이 견고한 성도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자 굴은 지옥의 모형이기도 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의 고난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시는
성도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비성경적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고난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은
죄를 지어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요, 고난에 처해져도 기도할 수 있고, 나와 함께 하시며, 주님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 사자 굴에 안 더져진 것이 아니라, 사자굴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사자의 입을 틀어 막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기꺼이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때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죽었지만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동일한 설교로 베드로는 3000명을 회심시켰지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요, 방법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의 구출 장면이 주는 영적 교훈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고 그 입구를 봉인한 후 왕의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사건을 잘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돌이 굴려지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바위도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사자 굴의 사자들이 다니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죽음의 권세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죽음의 권세를 깨고 무덤을 당당히 나오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풀려 나왔을 때, 다시 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율법이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 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어떤 율법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라킨의 다니엘 주석에서 번역
발췌>
24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니엘을
고소한 자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바닥에도 이르기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잡아채어 그들의 뼈를 다 산산조각 내었더라.](24). 다니엘의 구출로써 모든 일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을 음해하기 위해 모의를 했던 신하들을 모두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과연 그들의 신이 다니엘의 하나님처럼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가를 본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린 대로 사자 굴은 고난받는 성도들의 역경의 예표인 동시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받을 심판의 장소인
지옥의 모형입니다. 이들이 모두 사자굴에 던져 진 것은 이 세상 죄인들이 받을 형벌들을 보여 준 것이빈다. 하나님은 고난에 처한 자녀들을 무사히
구출하시고 그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반드시 보복하십니다. 주님은 원수 갚으시는 하나님이시오,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원수를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악인들은 자신들의 악으로 인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생명까지도 죽게하며, 사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게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잠언 26:27, [누구든지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에 도로 치이리라.]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죽이려했다가 이집트의 장자들이
몰살당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메달려고 세웠던 장대에 자신이 메달려 죽었습니다. 이들처럼 이 땅에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 세상에서 그 값을 충분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이 굴에 던져졌을 때는 사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아서 다니엘을 그냥 둔 것이기에 전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구절을 통해 사자들이 배가 부르냐, 고프냐의 문제로
논쟁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자들은 그들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움켜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왕은 이 사건을 통해 다니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회심하였습니다. 왕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25-27절입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되, 너희에게 평강이 많이 있을지어다. 내가 한 칙령을 내리노니 내 왕국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두려워할지니라.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실 분이시며 그분의 왕국은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여,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르리로다. 그분은 건져내시기도 하시며 구출하기도 하시며 하늘에서와 땅에서 표적들과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사자들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도다, 하였더라.](25-27). 다니엘의 지조있는 믿음은 결국 온 제국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드높이게 했습니다. 다리오의 처음 칙령은 자신이 신이 되어 경배를 받는 칙령이었으나 두 번째 칙령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며, 두려워 떨어야 할 분이며, 그분의 왕국과 통치가 영원무궁하다는 가장 성경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칙령이었습니다. 처음 칙령을
아무도 바꾸지 못하듯이 이 칙령 또한 아무도 변개할 수 없습니다. 이 칙령은 충분하지는 않을지언정 제국 내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칙령이었습니다. 최소한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자유로이 경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앙으로 인한 박해나 어려움은 해소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신실한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코레스 왕 때까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포로로 잡혀 온 70년간의 포로
기간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전 제국 즉 당시의 모든 제국들에 하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이 이런
칙령을 전 제국에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메대-페르시아 제국에서 이 일이 재현되었습니다. 더 이상 구약은 유대인의 한정된 땅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아라비아, 중국, 인도까지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퍼져나갔습니다. 이때 잠언은 중국으로 전도서는 인도로 퍼져 나갔고
메시야에 관련된 예언이 어느 나라에나 다 알려 졌습니다. 후에 별을 보고 찾아오는 동방의 현자들은 포로 기간에 전파된 구약 성경을 통해 알려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포로 기간을 통해 세계 천한 각 민족의
다양한 종교와 우상들을 직접 접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주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참 하나님이 없다는 진리를 뼈속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제국의 왕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칙서가 내려오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라는 황명이 떨어지는 판국에 우상들의
허무함은 극단적으로 대조되었을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범하던 우상 숭배란 유대민족의 죄악은 결국 바빌론의 포로 기간을 통해 완전히 제거되었고,
이후로는 역사상 유대인들의 우상 숭배란 죄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징계를 주시는 그 기간에도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심을 인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극한 슬픔과 치욕을 당할 수 있고, 오랫동안 침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시간들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선한 일들을 다 이루어 나가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이 다니엘이 다리오의
통치와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의 통치 때에 형통하였더라.](28). 다니엘은 고레스의 통치 때에까지 형통함으로써 고레스가 유대인들의 귀환을
명하는 칙령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하고 충고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고레스에 관련된 성경의 예언들을 알았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70년이
다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다른 모든 유대인들에게 기도의 본을 보였을 것이고, 그의 충직한 신앙은 모든 동족들에게 부흥의
불씨를 집혔을 것입니다. 드디어 귀환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전반기를 마치면서 인간의 신격화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두라 평원”에 “금 형상”을 세웠을 때, 우리는 첫번 째 제국인 바빌론을 통해 “인간의 신격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두번째 제국인 메데와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30일 동안 다리오 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경배하거나 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이 만들어지는
것을 통해 여전히 “인간의 신격화”가 일어났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 제국이나 로마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습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은 이방인들의 때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일어날 일입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이방인들의 가장 큰 통치자인 “짐승”
즉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까닭입니다(계13:4,14-15). 누구를 경배하는가?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이 문제가 바로 핵심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환란 때에 남아 있을
유대인들의 모형이며, 유대인들은 “대환란” 때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와 이방 땅에 우거하는 자기 동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한 본을 남겼습니다. 또한 오늘날 순례자를 자처하는 성도들에게도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철저히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삶이었습니다. 그는 레위기에 정한 음식 문제와 같은 작은 말씀하나에까지 철저하게 순종할
것을 결단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철저히 이행하였으며, 원수들의 공격에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경적 원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모두 다니엘의 이런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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