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 세력을
이기며 -
말씀: 다니엘 3:19-30
요절: 다니엘3:25
다니엘 1장이 음식을 통한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었다면
2장은 모든 은밀한 일을 계시하는 이는 누구신가? 참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두 가지 시험에서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다니엘 3장은 경배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 참된 경배를 드리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등등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생명의 위험에 처하는 그런 문제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참된 경배자로서 기꺼이 육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와같은 일련의 시험이 인생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불같은 시험이 내게 닥쳐오고 결단을
요구합니다.
3:19-30절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이 세운 형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용광로에 던져지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고 나온 극적인 장면입니다. 성경 전체에 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영적 흥분과 감동을 일으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왕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그들을
결박해서 용광로 한 가운데로 던졌습니다. [이에 /그들이/ 이 사람들을 겉옷과 정강이받이와 모자와 다른 옷들을 입힌 채 결박하여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로 던져 넣었더라.](3:21). 이 세상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데는 이런 희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경배자를 찾으십니다. 느부갓네살은 전국에서 모여든 모든 고관 방백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낼 신이 어디 있겠느냐?”
큰 소리쳤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신들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용광로에 던지자마자 왕은 깜짝 놀랄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명의 유대 청년들을 향한 느부갓네살의
분노는 용광로만큼이나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뿐만 기꺼이 불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그들의 말에 그는 용광로의 불을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죽음에 처하게 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전혀 동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고요하고도 절제된 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미 영적 전쟁에서 승리자와 패배자가 분명히 결정난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지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패배자입니다. 성도들은 반드시 자신의 성질을 control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혈질인 사람이든,
우유부단한 사람이든 자신을 control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열매 중 절제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절제는 모두 주님을 통해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에 던져지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던져지기 전에 마음에 일어나는 공포, 두려움, 불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듯이, 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혼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poker face라고 언제나 카드에 그려진 얼굴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 있지만 그런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에 떨며, 오줌을 싸거나 발을 뒤로 제치며 삶을 구걸하는 법입니다. 불을 뜨겁게 하는 것이나 그대로나 같은 결과이지만 그런
말이 살아 있는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파장을 일으킬 수 있고,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를 미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에게 닥쳐올 환란에 대해 늘 대비하고, 기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우리가 주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마귀도 우리 곁에 가까이 온다는 말은 절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독특한 약속 한 가지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터이나] 현대 교회에는 ‘번영 신학’, ‘축복
신학’이라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목사로는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와 장로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는 정반대의 신학입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이나 주님 자신이나 신약의 사도들이나 교회사의 위대한 주의 종들이나 어디에도 ‘번영
신학’이 성경적이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박해는 기분좋은 약속이 아니겠지만, 분명 주님의 약속입니다. 박해가 없고 평탄대로의 신앙만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며,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의 경험, 박해는 성도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기어 들어온 갖가지 죄들을 척결하고, 혼이 정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에 관한 성경의 몇 구절들을 찾아 보겠습니다. 창세기
19: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평야의 온 땅을 향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라, 그 지방의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치솟더라.]
죄에 대한 심판이 집행된 소돔과 고모라는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롯입니다. 용광로는 모든 것을 태우며, 의롭지 못한
성도들이 얻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롯은 평생에 모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혼이 정결케 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는 그대로 넘김으로써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고,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지 않은 일은 다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신명기 4:20,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광로였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말년에
이집트로 내려와서 요셉의 때에 번창하였고, 요셉이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런 고난도 박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들이 주님을
찾았습니까? 그들은 용광로에서 철저히 제련받은 후에야 주님께 부르짖기 시작했고,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잠언 17:3, [도가니는 은을
용광로는 금을 단련하거니와 주는 마음을 단련하시느니라.] 주님은 은과 금을 연단하듯이 마음을 연단 하십니다. 연단 되지 않는 마음은
제련되지 않는 금이나 은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마음도 연단받기 전에는 어리석음에 메여있고, 불신과 자기
의(義)에 갇혀 있습니다. 에스겔 22:20, 22 [사람들이 은과 놋과 쇠와 납과 주석을 모아 용광로 한 가운데 넣고 그위 에 불을
내뿜어 녹이는 것 같이 친히 분노하고 격노하는 중에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참으로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 속에서 너희 위에
불을 내뿜으리니 너희가 그 한 가운데서 녹되 은이 용광로 한 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주가 내 격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주님은 용광로를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고, 연단하는데 사용하시지만, 마귀는 죽이는데 씁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정작 용광로 속에 던져질 자들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13:41,2,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사야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되 은을 연단하듯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택하였노라.] 주님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용광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용광로 앞에서 두려움과 불신에 휩싸입니까? 일상의 작은 것들 앞에서 한
가지 한 가지 믿음의 승리를 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자신들 앞에 해결해야 할 것들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성장과 성숙의 밑거름이 되는지 주님께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드디어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20-23절입니다. 셋은 용광로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이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불타는 용광로에 온도를 높이는 방법을 풀무로 바람을
더 많이 불어 넣으면 됩니다. 녹여야 할 금속에 따라 온도를 다르게 해야하는데,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보다도 잘 녹지 않을 줄로 알았는지 열을 더 가했던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이들이 결박당한 채 용광로에 던져졌는데, 행여나
용광로 앞에서 발악을 하거나, 완강하게 저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순교자 폴리캅은 장작 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병사들이 그를 묶으려고 하자, “나의 주님께서 불꽃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이요”라며 그냥 맨 몸으로 죽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중세의 많은
순교자들이 이보다 더한 끔찍한 죽음을 죽었지만 그들 중 누구하나 발버둥을 치면서 죽거나 완강하게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자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했지만 죽을 때는 파리처럼 보잘것없이 죽어갔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자기 모사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세 사람을 결박하여 불 한가운데로 던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왕이여 옳소이다, 하매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24-25). 불을 창조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불의
속성과 완벽한 방화벽을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이 셋은 결박당한채 던져졌지만 결박은 풀리고 따스한 봄날에
산책하듯이 용광로 안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박해의 불꽃은 그들을 묶고 있던 결박을 풀어 오히려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강들을 건널 때에도 강들이 네 위로 넘쳐흐르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에도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용광로를 통해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시고, 참 자유를 주십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들은 용광로 속에서 주님을 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가장 깊이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길은 평안의 때, 승리의 때가 아니라 바로 고난의 때란 사실입니다. 주님의 강한 권능과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고 싶습니까? 고난을 사모하고, 고난을 기꺼이 맞아 드려 보십시오. 고난을 많이 겪은 성도일수록 주님을 아는 교제와 인식과
친함이 깊어만 갑니다.
25절은 많은 불신자들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해 딴지를 거는 구절입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느부갓네살 왕의 증언보다 자신의 추측을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우기는
몰지각한 인간들입니다. [그 넷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과 같도다.]5). 많은 사람들은 이방
제국의 왕인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아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반문하며, 정중하게 ‘신들의 아들’(a son of gods)이라고 고쳐
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눈으로 용광로 안에 있는 사람에 셋이 아니라 넷이란 것을 보았고, 그 넷째의 모습은 세 명의
히브리 청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과 같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분명히 세 명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4명이 있었습니다. 왕이 용광로에서
그들을 불러냈을 때는 4명이 아니라 3명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는 이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용광로에서
기다리고 계셨으며, 그들이 나간 후에도 여전히 용광로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종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불의 세력을
소멸시키기도 하며”라고 말한 대목은 바로 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히11:34). 들이 불꽃 가운데서 무사히 구출됨으로써 “내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낼 하나님이 누구겠느냐?”고 거만하게 묻던 느부갓네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킨 이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인쳐
주었습니다. 불꽃 가운데서 이들을 구출해 낼 어떤 다른 신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자인한 셈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제 자신이
섬기던 신보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훨씬 더 강하고 능력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용광로에서 나왔을 때는 불에 들어갔다 나온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왕이 그들을 거기에 쳐 넣었지만, 결국 그들을 불러 낸 것도 왕이었습니다. 용광로에 던져진 이들은 용광로를 떠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왕궁에서 왕과 함께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6-27절을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맹렬이 불타는
용광로 아귀에 가까이 가서 말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는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오매 통치자들과 총독들과 대장들과 왕의 모사들이 함께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그들의 몸에 힘을 쓰지
못하였고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못하였으며 겉옷도 변하게 하지 못하였고 불 냄새도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였더라.](26-27).
명령을 받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용광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고관들과 총독들과 군대 대장들과 왕의 모사들이 모두 다 모여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 이 기적 앞에서 망연자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들로 하여금
‘금 신상’에 절하도록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데 목숨을 걸었던 세 청년의 믿음은 그에 합당한 보상과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자신들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높였으며, 그분을 찬양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셨으며, 불의 냄새조차 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부분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맹인의 눈을 띄워 주실 때, 두 눈을 다 뜨게 하시지 한 쪽 눈만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실
때, 한 쪽 귀만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키실 때 한 쪽 다리만 고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완전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오늘날 신유 은사를 자랑하는 자들이 병을 완전히 고치지 못하고, 호전되었다느니, 회복중이라느니
하는 말이 주님의 역사가 아니란 것을 입증합니다. 주님은 모두 고치셨으며, 실패해 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없는 사람의 병도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8:16, [날이 저물매 사람들이 마귀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오거늘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그 영들을
내쫓으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시니](마8:16).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사 자신을 신뢰하며 왕의 말을 바꾸고 자기 몸을 바친 자신의
종들을 건지셨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그 신에게 경배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8)
느부갓네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목격한 후에 거기에 압도되어 한편의 위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외친 그의 설교는 현대의 어떤 설교자들의 설교보다 더 위대한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불 속에서도
자신들을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했고, 왕 앞에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왕이 세운 금 형상에게는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검증하고 싶다면, 자신이 악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살펴보면 됩니다. 잠언 8:13,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 셋째, 그들은 하나님께 몸을 내어 드렸습니다. 헌신(獻身)이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에 대한 합당한 섬김이 무엇인지 분명히 정의했습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바울 사도 역시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음만 드리고 몸을 드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마음만 있고 몸이 따르지 않는 사람을
몽상가라고 부릅니다. 몸만 있고 마음이 없는 사람을 가식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마음과 몸이 둘 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2:17,
디모데후서 4:6 [참으로 너희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나를 헌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의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이는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딤후4:16).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죽음을 맞이하며, 기꺼이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리기를 결단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동일한 믿음이요, 순교자의 영이
충만한 까닭입니다.
29-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 중에서 무슨 일이든 잘못 말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는 그 몸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고 그들의 집을 거름더미로 삼을지니 이는 이런 식으로 능히 사람을 건져낼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고 왕이 바빌론 지방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높이니라.](29-30).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했다기 보다는 가장 능력이 많으신 최고의
신으로 인정했습니다. 그의 칙령은 이런 최고의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국가적 재앙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만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출의 능력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가늠자였습니다. 다니엘
6:27, [그분은 건져 내기도 하시며 구출하기도 하시며 하늘에서와 땅에서 표적들과 이적들을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사자들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도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울고, 불고 매달린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의뢰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출했습니다.
주님을 의뢰하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 생생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50:15,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구출할 수 없는 신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떤 고난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왕은 주님을 찬양했고, 다음으로 주님의 종들을 높였습니다.
월급을 더 주었는지, 직위를 높여 주었는지 간에 그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용광로를 통과하기 전까지
충분히 높이시거나,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영광에 이르는 길은 항상 고난의 길을 통과해서 도달하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고난의 길에
들어 서 있다면 곧 그 길이 영광의 길목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하십시오. 말라기 3:3, [그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의 아들들을 깨끗하게 하되 금과 은같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로 주께 헌물을 드리게 하리라.] 주님은 금, 은
세공장이십니다. 은 세공장이들의 말에 따르면 은을 도가니에 넣어 액체가 될 때까지 완전히 녹여 버린다고 합니다. 은이 녹으면 거기서 불순물을 다
걸러내고, 조심스럽게 불을 조절합니다. 그는 은을 없애거나 망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은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순은이 될 때까지 반복됩니다. 은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은은 제련 과정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언제 순은이
된 줄로 알고 그 과정을 끝마칩니까? 은을 쳐다보았을 때 제련사의 얼굴이 은에 거울처럼 비칠 때까지입니다. 불에서 나온 은은 이제 순수한 은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런 고난의 용광로를 통해 주님의 성품, 주님의 인격, 주님의 신성이 우리를 통해 비칠 때까지 반복적으로 연단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환히 비취고, 주님은 우리를 끄집어내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만약 이 세 사람이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바빌론에서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높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은 이제 “종교에 관한 칙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단지 이 세 청년의 목숨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바빌론에 잡혀 온 모든
유대인들에게 주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도록 했으며, 왕과 고관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루실 때, 항상
이렇게 다루십니다. 모든 이방인들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유대인들을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때에
유대인들을 함부로 대한 민족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마25:31-46)
용광로의 기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리적 가르침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구절을 모두 찾아서 읽을 것).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느부갓네살의 꿈속에 나타난 “금 신상”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세워질 “짐승의 형상”의 모형입니다(계13:13-15).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은 이 세 청년은 대환란을 통과할 144,000명의
“남은 유대인들”을 예표합니다(계7:3-8). 그들은 “불같은 시험을 거친 후”(벧전1:7) 불로 썩인 유리 바다 위에 서게
됩니다(계15:1-3). 그들은 “짐승”과 “그 형상”과 그의 “표”를 받지 않고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속받은 이스라엘만이 부를 수
있는 “모세와 어린 양의 새 노래”를 부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구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환란을 통과한 이스라엘도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때 열방 가운데서 이와 같이 높아 질 것입니다(Lar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