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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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울에 달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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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다니엘 5장

요절: 다니엘 5:27


1절을 보십시오. [벨사살 왕이 자기의 영주 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포도주를 마시니라.]
(1).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 약 2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입니다. 느부갓네살은 B.C. 561 년에 죽고 그의 아들 이블-메로닥(Evil-Merodach)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석방해 주고, 자신의 식탁에서 먹여 준 사람입니다(왕하25:27-30, 렘52:31-34). 그러나 그는 재위 2년째, 그의
장인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하였고, 그의 장인1)이 왕위에 올라 4년간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들2)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우둔하고 무식하여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3)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사위였던 나보니두스는 왕위에 오르면서 이블-메로닥을 죽인 네리그리싸르의 부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B.C. 555년에서 바빌론이 멸망하던 해인 B.C. 538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다니엘에 따르면, 바빌론이 멸망하던 해에는 나보니두스가 아닌
벨사살이 바빌론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보다 250년 뒤에 살았던 역사가 베로수스(Berosus)는 바빌론 왕조의 왕들을
기록하면서 왕조의 마지막 왕을 나보나이드로 기록하고 벨사살의 이름을 빼 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비평가들이 다니엘의 진실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이 멸망할 때 얻은 고대 유적들, 진흙 점토판에는 벨사살이 바빌론의 통치자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증거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벨사살은 나보나이드의 양자요, 느부갓네살의 손자로서, 그가 전쟁에 나갔을 때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점토판에 등장하는
벨샤루자르(Belsharuzzar)가 성경에 등장하는 벨사살(Belshazzar)임이며, 다니엘서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7:7, [그러므로 모든 민족들이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아들의 아들을 섬기되 그의 땅의 때가 이르기까지 섬기리라. 그 뒤에
많은 민족들과 위대한 왕들이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섬기게 하리라.]
이를 통해 볼 때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의 아들, 즉 손자임이
분명합니다. 나보니두스는 왕위를 쟁탈한 후에 정통 왕위 계승자였던 벨사살을 아들로 입양하여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하고 권력 강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자기의 영주 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포도주를 마시니라.]
(1). 지금 이 시기는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벨사살에게
바빌론 왕궁을 맡겨 놓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연회는 아주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기록된 연회는 평범한 연회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어떤 연회도 지금 성경에 언급된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와 유사한 연회가 있다면 B.C.521년 에스더서 1장에
기록된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르 왕이 120명의 지방 통치자들을 모아놓고 수산 궁에서 연 잔치가 있습니다. 벨사살의 연회는 바빌론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됩니다. 이는 신상의 머리 부분인 금에서 어깨와 양 팔 부분인 은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죽은 지 23년이
지난 후인 B.C. 538년에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심지어 다니엘도 공직에서 은퇴하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다가올 사건들의 환상들을 그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에게 잊혀진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벨사살이 포도주를 맛보며 명령하여 자기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과 은 그릇들을 가져오라 하였으니 이것은 왕과 그의 통치자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들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2). 술을 마신 벨사살 왕은 금도의 선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알코올의 사용을 저주합니다. 잠언 20:1,
[] 술은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32:33, [그들의 포도즙은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이라.]
술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현실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3:32-33, [그것이 끝내는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나니 네 눈을 낯선 여자들을 바라 볼 것이요, 네 마음은 비뚤어진 말을 하리라.]
벨사살은 이미 붉은 포도주에 쏘였고,
입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명들을 술잔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이나 그것을 명령하는 자체가 이미 독사의 독이 온 몸에
퍼진 증거입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나 술에 취한 통치자 밑에서 사는 백성들의 불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술은 언제나
바빌론과 바빌론화 된 이 세상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51:7, [바빌론은 주의 손에 있어 온 땅을 취하게 한 금잔이라. 민족들이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미쳤도다.]
(렘51:7). 요한계시록 14:8, [또 다른 천사가 뒤따르며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저 큰 도시 바빌론이여, 이는 그녀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즙을 마시게 하였음이라, 하더라.]
계14:8).
요한계시록 17:1-5, 18:3, 13 참조. 벨사살은 자신의 신들에게 드리는 경배와 그들과 더불어 마시는 술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성전에서 가져온 성전 기명들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이는 멸망을 앞둔 인간들의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들을 가져오매 왕과 그의 통치자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들로 마시더라.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는 금과
은과 놋과 쇠와 나무와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하니라.]
(3-4). 벨사살의 연회는 모멸과 모욕과 불경스런 영으로 가득한 잔치였습니다.
바빌론 성읍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메데와 페르시아의 군사들이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지만 벨사살은 안전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성으로 들어오는 도개교는 들려져 있었고, 놋으로 된 문은 빗장으로 채워졌으며, 벨사살이 알기로 바빌론의 성벽은 그 누구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였으며, 성벽 초소에 있는 그의 군사들이 성문을 부수려고 덤벼드는 병사들을 넉넉히 격퇴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안에는 몇 년의
포위에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잡아온 포로를 이용해 성안의 땅을 갈아 농사를 지어도 양식이 넉넉하였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무한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벨사살은 포위하고 있는 적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 연회는 술취함, 신성 모독,
우상 숭배, 음행으로 가득 찬 잔치였습니다.


이 장면은 현대를 살아가는 멸망할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예표입니다. 지금 멸망이 문 앞에 와 있는데 먹고 마시고 즐기며, 자기 신들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3, [또
사람들이 안전을 말할 그 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 그들이 피하지
모독하리라.]
벨사살은 절대 망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파멸은 바로 그 다음날 새벽이 오기 전에 오고 말았습니다. 성전 기명들을 가져왔을
때,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모두 나눠 가지고 그 기명들에 술을 부어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에게 바침으로써 거룩한 주의
기명들을 더럽혔습니다. 참으로 치명적인 순간이었으며, 연회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바빌론의 불법의 잔을 가득 채워 그 언저리를 출렁출렁 넘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빌론의 운명은 확정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왕궁의 등잔대 맞은편 회칠한 벽에 글을 쓰는데 왕이 글을 쓰는 손의 일부를 보니라.]
(5). 바로 그 때에...연회객들이 주의 기명으로
신들을 찬양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섬광 같은 빛이나 사람의 귀를 멀게 할 만한 소리도 없이 연회에 참석한
취객들의 술을 확 달아나도록 할만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밤의 장막을 걷어 내듯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조용히 신비한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촛불에 비친 벽면의 글씨는 참석한 모든 하객들에게 보여졌으며, 바빌론의 운명이었습니다. 벽면 위에 쓰여진 글씨는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며, 사람의 상상을 홀리는 마법과 같은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글씨는 왕의 정신을 깨워 놓았으며,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글을 쓴 역사적 예는 모세의 돌판에 십계명을 새긴 것입니다(출31:18). 주님의 손가락으로 새긴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죄와 저주를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처음 고백한 예는 출애굽기 8:19입니다.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하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출8:19). 이 역시 심판을 나타냅니다. 벨사살의 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역시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합니다. 신약의 예는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것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눅11:20). 요한복음 8:8,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
율법을 직접 쓰셨던 주님의 손가락이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여자에게는 죄사함과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왕궁의 등잔대
맞은편 회칠한 벽에 글을 쓰는데 왕이 글을 쓰는 손의 일부를 보니라.]
(5). 등잔대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던 금으로 만든 등잔대였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5: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되 두들겨서 만들고 그 대와 가지들과 잔들과 둥근 꽃받침들과 꽃들을 하나로
만들고]
라고 말씀합니다. 등잔대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령은 등잔대처럼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며,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어둠을 비쳐 주는 등잔대처럼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를 진리의 빛을 환하게 밝히십니다. 등잔대 맞은편 하얀 벽에 쓰여진 글자는
누구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나 성경의 글자는 보지만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의 안색이 변하고 자기
생각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므로 그의 허리뼈 마디가 풀어지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매]
(6). 벨사살 왕은 얼마나 두려웠던지 무릎이 서로
부딪힐 정도였습니다. 왕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 하는 것입니까? 그는 왜 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글을 보고서는 “이것은 길조다.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이긴다는 신의 계시다!”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못했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에 앞서 사람마다 본능적으로 아는 영적 직관이 있습니다. 영적 직관 역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헤롯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사역을 보고, 자기가 죽인 침례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벨사살 왕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지 못했기에 비명을 지를 만큼 놀랐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화벨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전화벨 소리야 평소와 다름없는 같은 음량이요, 같은 음향이지만 내 안에 형성된 양심에 따라 그
소리는 기쁨도 되고 까무러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에도 깜짝 놀랍니다. 이는 사람들의 양심에 있는 대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지 않는 양심, 선하지 못한 양심, 순수하지 못한 양심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듭니다.


왕은 즉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풀기 위해 답을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왕이 크게 소리를 질러 별을 살피는 자들과 갈대아 사람들과 점쟁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바빌론의
지혜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는 자에게는 주홍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거리를 그 목에 걸어 주며 왕국의
셋째 치리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7).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비교되며, 하나님의 조명과 계시로만 풀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도 결코 풀 수 없습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글귀는 세상의 현자들과 전문가들에게 물어봐야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이 호흡을 불어 넣었기 때문에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만 풀 수 있습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했던 벨사살은 왕국의 셋째 치리자라는 현상금을 걸고 이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왕국의 첫째 치리자는 자신의 아버지인 나보나이드입니다.
둘째 치리자는 바로 자기입니다. 셋째 치리자는 이 문제를 푸는 자를 임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둘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삼위일체 중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셋째 치리자가 됩니다. 이는 다니엘이 꿈과 해석을 알려 주는 성령을 예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도움없이 자의적으로 푸는 것은 해석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20,21을 보십시오.


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의 모든 지혜자들이
들어왔으나 그들이 능히 그 글을 읽지 못하며 왕에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도 못하더라.]
(8). 바빌론의 현자들은 느부갓네살의 때처럼 다시
한번 실패하였습니다(단2:1-13). 그들은 그 글귀를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 글귀가 그들이 익숙하지 않는 언어였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 글이 하나님이 쓰신 글이었기에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해석할 하나님의 사람을 뽑아
쓰십니다. 이 세상의 지혜자들은 사실 인간의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타임지나 뉴스위크지에는 알코올의 관련된
광범위한 분석과 인성에 미치는 영향, 사례들을 분석해서 싣지만 그 어느 것도 해결책은 아닙니다. 동성애 문제, 이혼 문제, 마약 문제, 범죄
문제 등 각종 문제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싣지만 단 하나의 해결책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죄입니다. 죄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그런데, 교회 조차도 정답을 말해 주지 않고 세상의 견해를 따라 가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 재앙이라
히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해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서 학문이 높고, 지식층으로 추앙받는 자들이 실제로 인생의
어떤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지식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벗겨놓고 보면 그들의 지식은 아무 쓸모없는 지식이요, 그들의 지혜는 무로 돌아갈 헛 것에
불과합니다. 바빌론의 현자들처럼 그들 역시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는 문제’라거나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답해
버립니다. 그들은 몰라도 절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몇 년 이내에는 풀릴 것이라느니 하며 헛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지혜있는 사람들의 지혜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고 말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벨사살 왕이 크게 근심하여 안색이
변하였으므로 그의 영주들도 놀라니라.]
(9). 현자들이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실패하자 왕은 크게 괴로워하고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모든 환희와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무서움과 공포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왕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까지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벽에 쓰인 글씨는
왕이 귀족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연회에 마련한 프로그램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글씨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예기치 않게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왕은 쓸데없이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끌벅적하던 연회는 한 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였고, 얼마나
소란하였던지 왕비가 들어와 무슨 일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왕비는 벨사살의 부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결혼했다면 그의 왕비는 당연히 연회장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부인, 즉 왕비는 지금 현재도 여전히 바빌론의
첫 번째 치리자인 나보니두스의 부인일 것입니다. 그녀는 느부갓네살의 딸로서 아버지 치리 시대에 느부갓네살이 제국의 공무를 수행했던 분명하고도
생생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왕비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를 통해 볼 때 확인됩니다. 왕비는 느부갓네살을 왕의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대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구약 시대의 용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당시 셈족의 언어에는 할아버지, 손자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었습니다4)


10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왕비가 왕과 왕의 영주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집으로 들어와 이르되, 오 왕이여,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왕의 생각들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마시오며 왕의 안색을 바꾸지
마소서]
왕궁의 벽에 하나님의 손이 나와서 글을 쓰고, 왕은 혼비백산했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알고 있는 왕비가 왕을 안심시켰습니다. 위기의 때에 조언자를 생각해 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면 인생의 절반은 성공이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곁에 둘 수 있고, 그의 조언을 받아 살 수 있다면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조언을 잘못
받아 망한 사람들의 예를 볼 때 더욱 이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다니엘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바로 느부갓네살의 딸이자 나보니두스의
부인인 왕비가 다니엘을 기억하고 왕을 안심시켰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왕의 왕국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아버지 시대에 있던 자로서 빛과 명철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 곧 왕의
아버지 되시는 그 왕께서 그를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과 갈대아 사람들과 점쟁이들의 우두머리로 삼으셨나이다.]
(11). 왕비는
느부갓네살 시대의 다니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다니엘을 빛과 명철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다니엘이 성령의 예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순수한 지혜와 땅에 속한 세상 지혜, 즉 마귀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 구할 수 있으며, 후히 받을 수 있습니다(약1:5). 빛은
말씀의 빛을 말합니다. 성경은 빛이요, 등이라고 말씀합니다. 명철(understanding)은 성령께서 주시는 이해 능력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깨닫는 영을 주십니다. 에베소서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의 지각의 눈(the eye of understanding)을 밝히사....]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니엘과 같이 빛과 명철과 지혜가 차고 넘쳐 악을 피하고, 조언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은
뛰어난 영과 지식과 명철이 있어 꿈을 해석하며 어려운 글귀를 밝히 보여 주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2).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니엘을 잊고 있었지만 이 왕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시 다니엘을
부르도록 조언했습니다. 다니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으며, 이미 죽어 버린 뒤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그의 잠에서 깨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각은 밤이 많이 지난 새벽녘이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백발이 지긋한 노인이었습니다. 그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준 지 65년의 세월이 흘렀고, 만약 그가 20세에 바빌론으로 끌려왔다면, 왕립학교에서 공부한 3년까지 계산하면, 그의
나이 지금은 88세였습니다. 다니엘은 뛰어난 영의 소유자였는데 이는 성령께서 가장 뛰어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통찰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성도들에게 명철을 주시는데, 명철은 악을 피할 때 옵니다. 욥기 28:28, [또
시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명철이란 지식과 지혜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마귀는 지식과 지혜는 탁월하지만 명철은 0입니다.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꿈을 해석해 주시며, 어려운 글귀를 밝히 보여 주십니다. 소위 성경의 난해 구절들이라 말하는 것들을 기도하면서 깊이
묵상하고 주님께 묻는다면 거의 다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문을 풀어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마음 가운데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면 성령의 증거를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해석을 알려 주심으로 우리가 모두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되어 영적 전투를 수행하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 앞에
이르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내 아버지 왕이 유대인 거주지에서 데려온 유다의 포로들 자손에 속한 그 다니엘이냐?]
(13).
다니엘은 밤이 한참 깊었거나 새벽녘에 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부름받은 것은 뭔가의 묻는 물음에 답변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준비를 늘 해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
(벧전3:15),
답변은 그냥 막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성경을 공부해 두고, 주님과의 친교 가운데 성령으로 늘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잠언15:28,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 연구하거니와(studieth to
answer)...]
어릴 때부터 주님을 두려워하고,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다니엘은 왕이 묻는 모든
것을 언제라도 답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너무 게을리 읽지 않습니까? 성경 공부를 마치 사역자들이나
신학생들의 전담 영역으로 미루어 버린 채 성경 한 페이지 읽지 않고 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회개하십시오. 성경을 공부할 것을
결단하십시오.


14-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에 대하여 들은즉 네
속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며 빛과 명철과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하는도다. 지금 지혜자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을 내 앞에 데려다가 그들에게 이 글을
읽고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그것에 대한 해석을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너에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할 줄
알며 의문을 푼다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하면 네게 주홍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거리를 내 목에 걸어 주며
왕국의 셋째 치리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14-16). 다니엘은 이 약속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벽에 씌여진 글을 보았을 때, 그것은 바빌론 왕국의 운명에 관한 글이었으며, 벨사살이 자신에게 한 약속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17-21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선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보상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왕을 위하여 그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이 말은 왕에 대해서는 상당한 모독처럼 들립니다. 왕의 호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만 글과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전에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준 대가로 위대한 치리자요, 총독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세월이 흐른 지금 다니엘은 훨씬 더
성숙해졌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권력에 대한 미련도, 재물에 대한 미련도, 영예에 대한 집착도 없습니다. 또 곧 망해가는 왕국에 치리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왕이 주의 성전 기명을 가지고 술을 부어 마시고 우상을 찬양하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에게 왕국과 위엄과 영광과 존귀를 주셨나이다.]
(18) 다니엘은 벽의 글을 읽고 해석하기에 앞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절제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왕의
죄를 뉘우치게 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빌론의 운명은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끝날 것입니다. 30절에 따르면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최후의 순간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긍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주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스스로 심판함으로 주님의 피를 내 안에 적용해야 합니다. 또 다니엘처럼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들을 뉘우치게 해야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그에게 주신 위엄으로 인하여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가 자기가 죽이고자 하는 자를 죽이고 살리고자 하는 자를 살리며 세우고자 하는
자를 세우고 낮추고자 하는 자를 낮추었으니]
(19).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교훈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조차도
마음대로 낮추셨는데, 왕이 왜 이리 교만하냐?는 강한 책망과 훈계의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생명을 내 놓고 하는 설교입니다. 왕궁에
글을 해석하러 불렀으면 하라는 것만 해야지 왜 주제넘게 왕을 훈계하고, 책망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다니엘을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이 높아지며 그의 생각이
교만한 중에 완악하게 되므로 그가 자기 왕좌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빼앗으매]
(20). 느부갓네살 왕같이 위대한 왕, 절대
권력의 왕이라도 마음이 교만했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함으로 벨사살의 죄를 상기시켜 줍니다. 또 교만으로 인해 닥칠 심판에 대해
경고하고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가 사람들의 아들들로부터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짐승들의 마음과 같이 되고 또 그의 거처가 들나귀와 함께하며 또 사람들이 소처럼 그에게 풀을 먹이매 그의 몸이 하늘의 이슬에
젖었으며 마침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대로 누구든지 세우사 그 왕국을 다스리게 하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21).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멸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교만할 때 그와 대적하시며, 낮추어 버리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멸하는 것은 마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의 교훈을 통해서 벨사살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더욱
교만해 졌으니 그에 대한 심판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칙령으로 전국에 선포했고, 그 기록들을 다 읽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제국에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동일한 죄를 지을 때 그 죄에 대한 심판은 더욱 준엄할 수 밖에 없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로서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지금까지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2). 다니엘의 설교를 들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알면서
한 죄악을 범한 인간은 항상 몰랐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고의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아담과 여자는 알면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들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하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후에 신앙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면, “이럴 줄은 몰랐다”며 상대를 헐뜯습니다. 그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는 처음부터 알았느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로서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지금까지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2). 알면서도 마음을 낮추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낮추실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면 생명을 취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8).


23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자기를 높여 하늘의 주를
대적하며 그분의 집 그릇들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왕의 영주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들로 포도주를 마시고 금과 은과 놋과 쇠와 나무와 돌로
된 신들 곧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며 그 손에 왕의 호흡을 쥐고 계시며 길로 왕의 모든 길을 삼으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나이다.]
(23). 왕의 죄들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높여 하늘의 주를 대적하며”
느부갓네살의 칙령 마지막 구절이 [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공경하노니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다 진실하고
그분의 길들은 다 공의로우시니 교만한 중에 걷는 자들을 그분께서 능히 낮추시느니라.]
(4:23)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할아버지도 감히 지으려고 생각하지 못한 주의 전의 기명들을 들고 와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더럽히는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성경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역사를 통해서라도 배워야 할 터인데 그는 너무나 교만하여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 [그 손에 왕의 호흡을 쥐고 계시며 자신의 길로](23b).
저와 여러분의 호흡은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외로 많지 않습니다.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
(욥12:10). 여러분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운(運)을 논하지 마십시오. 욥기 34:14, [그분께서 만일 자신의
마음을 사람 위에 두시고 그의 영과 그의 숨을 자신에게로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같이 멸망하며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욥34:14-15).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신즉 그것들이 떨고 주께서 그것들의 호흡을 거두어가신즉 그것들이 죽어 자기들의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 [왕의 모든 길을 (그분의 것으로) 삼으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나이다]
벨사살의 또 다른 죄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입니다. 헤롯 왕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가
즉사했듯이, 벨사살 왕 역시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닐 때, 이미 그 사람의 인생은 타락과
배교의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분께서 손의 일부를 보내사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4). 벨사살의 운명은 유대인인 다니엘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벽에 글씨가 나타난 것은 주의 기명들을 더럽힌
신성모독과 벨사살의 운명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벨사살이 계속해서 왕위에 있게 되면 유대인들의 귀환 소망은 거의 없으며, 거룩한 주의
전의 기명들이 대언자들이 미리 말한 대로 2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소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25-28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글은 이것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이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께서 이미 왕의 왕국을 세시사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져 메대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하니]
(25-28).
다니엘은 벽의 글을 해석하면서 ‘우바르신’이란 단어를 ‘베레스’로 바꾸었는데, ‘베레스’는 우바르신의 단수형입니다. 단어의 변화는 해석의 의미를
쉽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벽에 씌여진 자음 P-R-S는 페르시아(Persian)의 철자에 사용되는 단어와 같으며, 다니엘이 말한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메대와 페르시아는 양두 국가(dual Kingdom)였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Numbered, Numbered, Weighed, Divisions입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이와 같이 해석했습니다.

메네 -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데겔 -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베레스 -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글은 아람어였으며, 글자들은 각기 두문자를 수수께끼 형식으로
배열하여, 바빌론의 현자들이 알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래 설명은 탈무드에서 발췌한 것으로 글을 어떻게 읽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P    T   
M    M

R    K    N    N

S    L    A    A


갈대아의 현자들은 이 글자들을 히브리어나 아람어처럼 우에서 좌로
읽거나 일반 나머지 나라들의 말처럼 좌에서 우로 읽음으로써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읽었기
때문에 쉽게 알았습니다. 벨사살은 대언자 다니엘을 믿지 않았거나, 혹 믿었다면 그 예언이 자신의 시대에 일어날 일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한 대로 다니엘에게 포상을 주었고 벼슬을 높였습니다.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있다 함이요,]
주님은 공평한 저울 추를 사용하셔서 각 사람을 달아 보십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 나의 순전함을 아시기를
원하노라.]
(욥31:6)고 고백했지만 실제로 누구도 주님의 저울에 달아서 부족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편 62:9,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
(시62:9). 우리의 무게가
가볍지 않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면 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면 아무리 저울에 달아도
무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죄의 무게를 측정합니다. 여러분이 몸으로 한 행동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상과 생각 속으로 행한 모든
죄까지 일일이 다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 죄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지 저 하늘의 마귀를 저 땅속 깊은 구렁으로까지 끌어내리며, 한 줌의 죄는
저울을 완전히 기울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무겁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bear) 저 지옥으로 제거(take away)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도 저 하늘로 올라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짐을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교회들을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교회들이 행한 선행과 악행을 모두 기록해 두시고, 다 달아 보십니다. 여기에는 성경이 저울로 등장할 것입니다. 성경대로 했는가? 성경대로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많은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이름을 날렸다 해도 그것이 성경대로가 아니라면 모두 무(無)로 돌아 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왕국들을 달아보십니다. 왕국들 안에 의인들이 없을 때 그 왕국의 무게는 급격히 가벼워지고, 기울어집니다. 결국 의인 다섯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듯이 의인이 없는 왕국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에스겔22:30,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네
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시켜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22:30). 의인 한 명은 악인
만 명가 비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튼튼한 국방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의인들의 수(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가정을 달아보십니다.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으로서만 아니라 영적인 가장(家長)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존경하는 가정이 바로 영적인 명문 가정이요, 제대로 된 집안입니다. 영적으로
무게 나가는 여인은 어떤 여자인가?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이는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였음이니]
(벧전 3:4-5). 잠언 31장에 나오는 덕스런 여자 하나가 집안의 무게를 나가게 합니다. 남편들은 [남편들아
이와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벧전3:7).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달아보실 때 너무나 가벼워 부족함이 드러나지 않게
하십시오.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벨사살이 명령하여 다니엘에게
주홍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그 목에 걸어 주고 그에 관하여 공포하여 그를 왕국의 셋째 치리자로 삼으니라.]
(29). 벨사살은
다니엘을 셋째 치리자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둘째 치리자였고, 자기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첫째 치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준 영예는 정말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바빌론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이었으며, 주홍색 옷과 금 목걸이를 걸어 주고
있을 때, 그 왕국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에게로 넘어 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그의 죄에 대해 책망하고, 주님의 심판이 임할 것에
대해 설교했으며, 궁중의 벽에 씌여진 글을 읽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5:30-31을 보십시오. [그날 밤에 갈대아 사람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였더니 그 때에 그가 육십이 세 가량이었더라.]
(단5:30,31). 바빌론
제국은 느부갓네살 때에 가장 번성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그의 손자 벨사살 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학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견해와는 달리 배후에 철저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빌론이 멸망하기
175년 전에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멸망당할 것인지 자세하게 말씀해 두셨습니다. 그는 바로 고레스였습니다. 지금 본문에는 다리오가 왕국을
취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 바빌론을 정복한 사람은 고레스였습니다. 하지만 메대와 페르시아의 호의 조약에 따라 두 왕국의 왕 중 연장자인
메대의 다리오가 바빌론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아직 끝내야 할 군대의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삼촌인 다리오에게 바빌론을 통치하도록
위임하였으며, 다리오는 2년간 바빌론을 통치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죽은 지 2년 후에 바로 바빌론을 침공하여 무려 20년간 전쟁을 했는데,
바빌론의 성이 워낙 견고하여 함락을 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다리오는 자신이 도저히 바빌론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페르시아의 진영에
있는 그의 조카 고레스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나보니두스 재위 17년, 벨사살이 통치한지 3년 째, 고레스는 바빌론 도성을 포위했습니다.
바빌론 주민들은 난공불락의 성벽 뒤에다 참호를 파고 수년간 먹을 양식을 비축했으며, 군량미를 공급할 만한 충분히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레스를 비웃었고, 하챦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음놓고 호흡하고, 깊은 잠을 잤으며, 맹수가 자신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기다린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된 안정이었습니다. 바빌론의 왕과 귀족들, 주민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다고
믿었지만 자신들을 쉽게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20년간 적들이 밖에서 진을 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바빌론 사람들은 지금
적이 밖에 있는지 조차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명 다니엘은 이 왕국이 이미 끝났으며 메대와 페르시아에게 넘어 갈 것을 왕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는 성경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예언자요, 역사를 미리 읽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성경을 통해 앞으로 지구의 운명, 인간의 운명, 자연계의 변화, 나 자신의 운명을 미리 손금보듯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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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인의 이름은 네리그리싸르(Nerigrissar)이다.

2) 장인의 이름은 네리그리싸르(Nerigrissar)이다.

3) 느부갓네살 의 사위의 이름은 나보니두스(Nabonidus) 또는 나보나이드(Nabonnaid)라고 불린다.

4) <라킨의 다니엘서에서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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