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2:1-6

요절: 출애굽기 32:1


모세는 주님의 명으로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기간 동안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고, 제작해야 할 성막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산 아래 즉 광야에 있던
백성들에게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군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떼는 수가 아무리
많아도 양떼에 지나지 않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무리들은 기다림에
지쳤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위해 간 것을 알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다리는
것에 지친 사람들은 언제나 시험과 유혹과 올무에 빠지는 법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은 기다림에 지쳐서 죄를 짓습니다. 언제가
오시기는 오시겠지만 내가 살아 있을 때 오시겠는가? 란 생각을 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기도 응답에 지친
성도들은 기도하다가 죄를 범합니다
(눅18:1). 어떤 한정된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다음에 구체적인 응답이 있다면 참고
기다리겠지만 짧은 시간이어도 언제인지 모를 때 사람들은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고후4:16). 날마다 자신의 속사람이 새로워 지지 않는
사람은 지치고 낙심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사람은 결코 지치거나 낙심하거나 죄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
(갈6:9).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지칩니다. 때가 되면 거둔다는 수확의 법칙을 믿을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광야의 여행을 잘해 왔고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산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들은 잘 하다가 결정적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라.](
살후3:13).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읽을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
(출24:7). 모세가 산에 오른 것은 24:12에서 주님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5장-31장까지는 주님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을 행하고 복종하겠다고(출24:7) 하나님과 엄숙히 계약하였지만, 그들이
맺은 신성한 계약은 계약한 바로 그 장소에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맺은 율법은 그들의 죄성을 알게 할 뿐 죄를 막아 주고, 죄성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율법의 한계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1절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매 백성이
이것을 보고 함께 모여 아론에게 가서 이르되,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니]
(1). 백성들은 산에 오르는 모세를 보았고,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잠깐 테잎을 rewind하듯이 앞으로 가 보겠습니다. [모세가 자기를 섬기는 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보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나니
누구든지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덮으며 [주]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더니 일곱째 날에 그분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마치 산꼭대기의
맹렬한 불을 보는 것 같았고]
(출24:13~17). 모세는 산에 올라가면서 명을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였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현재 무엇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그러므로 너희가 어떤 은사(恩賜)에도 부족함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고전1:7). 우리는 주님의
오심이 늦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오는 참된 믿음의 성장을 늘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권(生活圈)이 하늘이기 때문이라. 우리가 또한 거기로부터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0).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약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다림은 약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절제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오래 참음과 인내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3:5),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
(딛2:13). 성격이 급한 사람은 기다리는 것이 딱 질색이며,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나를 모독하는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책을 한권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이집트의 왕궁에서 배운 것보다 광야에서 배운 것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광야에서는 만났습니다.
왕궁에서는 인도함을 받지 못했지만 광야에서 인도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돌보아 주시고 지키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그를
사막에서와 황폐함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자신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신32:10). 여러분 역시 광야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설교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4가지 박사 학위는 첫째, 무명 박사요
둘째, 시간 박사요 셋째, 고독 박사요 넷째, 불편 박사였다고 했습니다. 무명 박사란 이집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일에 익숙했던 모세가
광야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요, 사막의 들짐승과 양떼가 유일한 그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시간 박사라는 말은 광야에서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본래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조급함은 자살 행위입니다. 고독박사라는 것은 광야에서 침묵의 고요와 고독의 깊이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분주함이 아닌 묵상의 능력을
배운 것입니다. 불편박사라는 것은 광야의 거친 환경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 남는 생명력, 생존의 능력을 배운 것을 말합니다. 이런 광야의
배움은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어야 합니다. 광야가 필요 없다고 하지 말하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지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필요한 곳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기다림, 인내, 오래 참음, 절제와 같은 것을 배우며 낙심, 낙담, 지치는 것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이요, 능력입니다. 저는 벌써 6년째 목회를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인내와 기다림을 배웁니다. 이 훈련이 앞으로 몇 년이 더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1절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매
백성이 이것을 보고 함께 모여 아론에게 가서 이르되,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니]
(1). 모세는 산에 올라갈 때 몇 일이라고
확정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기다림에 지쳐 버렸습니다. 그들은 40일이란 기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40은 성경에서 시험의 수입니다.
40일, 40년 등은 인간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간입니다. 백성들은 한 주, 두 주, 한 달을 참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아론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끝날 일이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단지 범죄한 것이 기다림을
참지 못해서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며, 반란과 배교의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한 명의 주석가를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를 밀어내어 자기들을 떠나게 하려 하고 그들의 마음이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 아론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神)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고]
(행7:39~40). 백성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를 밀어내어 자기들을 떠나게 하려 했다”
점을 스데반은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 계시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아론에게 와서 우상을 만든 주된 이유는 모세를 자신들의
목자요, 지도자로 거부하는 마음이 일차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순종하기를 원치 않았고, 모세를 밀어내어 축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스데반을 통해 가르쳐 주신 광야 교회의 최초의 반란 사건입니다. 이들은 괜히 더 기다렸다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면 일이 틀어질
것이 분명하니 모세가 없는 틈에 반란을 계획한 것입니다. 모세가 없는 틈에 모세를 밀어내어 자기들을 떠나게 하려 했습니다. 모세를 지도자
자리에서 밀어내 버리기 위해 한 일이란 것이 성령께서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신 출애굽기 32:1의 해석입니다. 모세는 목자인 동시에 왕이었습니다.
[그가 여수룬 안에서 왕이었으니 곧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모인 때에로다.](신33:5). 신약 교회의
목자는 교사이며, 동시에 감독입니다. 지도자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 반란을 꾀하는 쿠데타는 후진국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안식년에 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담임 목사가 뒤바뀐 교회가 한 둘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없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모세가 있으면
계속해서 광야 생활을 해야 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야 하지만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모세를 밀어내 버리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획책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1).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세를 매우 폄하하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말입니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모세를 우습게보고 있는데, 반역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특징은 은혜와 감사를 모르며 결코 권위에 순종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론은 이들이 모세를 축출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려는 쿠데타가 일어났음을 알고 꼼짝없이 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이 함께 모여-the people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1).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없이 모이는 모임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바벨탑을 쌓았듯이 이후로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주님을 대적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1911년의 국제 동맹(League of Nations), 1945년에 국제 연합(United Nations), 1980년에 들어서 유행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Council) 등은 다 악한 연합입니다. 군대에 지휘부가 모르는 사조직은 무조건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교회 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모르는 사조직이나 모임이 교회 내에 있으면 그 모임은 반역자들의 모임이요, 회합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모였습니다. 왜 모였습니까? 모세가 올 때까지 찬양하고 기도하고 부흥회 하려고 모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모세를 축출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어디로 모여야 합니까? 당연히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공식 집회-기도 모임, 예배 모임, 성경 공부 모임,
수련회 등-로 모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정해 놓은 공식 집회는 매주 지각하고 빠지면서 생일 모임이나 먹자, 놀자는 모임에는 기를 쓰고 오는
사람들이 바로 광야 교회의 특징입니다. 공식 집회로 모이는 대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악할 뿐만 아니라 파당과 분열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될
뿐입니다. 설령 선한 의도로 모였다 해도 결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1).
아론에게 몰려든 백성들의 이 요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들의 요구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경배할 신들이 필요합니다. 자신들을 위한 신들이 필요하며,
자신들 앞에 나갈 신들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들이 아니라 보이는 신들이면 더 좋습니다. 단 사람들이 조정할 수 있는 신들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인간의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주지 않는 신들은 싫습니다. 많은 능력과 힘이 있지만 인간의 통제를 받을 수 있는 종과 같은
신을 원합니다. 너무 똑똑한 신들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소원을 척척 받아 줄 신이면 됩니다. 그런 신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런 신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신들은 인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들을 경배하며, 즐거워하며,
찬양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나무나 돌이나 금과 같은 우상들을 제작해서 경배하는 대신 마음 속에 다양한 신들을 만들어서 섬기고 경배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 속에 생각하고 상상한 이상적인 하나님을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만들어진 우상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상상한대로 만들어졌기에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만들어진 하나님은
은혜, 긍휼, 사랑, 능력 등은 무한하지만 죄를 미워하고, 나를 책망하고 꾸짖고 바로 잡고, 벌을 주고, 심판하고, 진노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와서도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을 앞에 갈 상상 속의 하나님을 만들어
주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로해 주시고, 힘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따스한 눈길만 보내 주실 뿐 결코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으시는 그런 조작된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덧 교회는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나누어 주는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선포하면 도리어 비성경적인 설교가 되고, 이상한 목사님이 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2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아들과
딸들의 귀에 있는 금 귀고리를 빼서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2). 하루 아침에 세상은 뒤바뀌었습니다. 무혈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모세의
형이요,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이 굴복함으로 아무도 반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지도자는 더 이상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즉시 체제를
개편했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만들어 섬기는 일입니다. 아론의 굴복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지도부를 측근 중심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거나, 자신의 경호대나 수비대를 만들어 두지 않았습니다. 정보
부대를 운영하지도 않았으며, 만에 하나 있을 반란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반란자들의 압력에 그대로 순순히 복종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이것입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1). 백성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지휘부를
환영했고 지지했습니다. 이로써 광야의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너무나 간단하고 쉽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모세나 레위 지파가 강력하게
반대했더라면 피라도 흘렸겠지만 레위 지파의 수장격인 아론이 굴복함으로 레위 지파는 모두 굴복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대로
신들을 만들어 주기로 했던지 헌물을 바치게 했습니다.


여기서 아론이 말하는 헌물을 바치게 한 대상은 남자들이 아니라
‘너희 아내와 아들과 딸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한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 아래서 순종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들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신들을 만들 금귀고리를 귀에서 빼어서 바치게 한 것은 그들의 주인(남편,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온 가족의
동의를 전제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들이 귀고리를 바쳤다는 것은 그 집의 일치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귀고리란 주인을 영원히 섬기겠다는
표시입니다. [그의 주인이 그를 데리고 재판관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기둥 앞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리니
그가 영원토록 자기 주인을 섬기리라.]
(출21:6). 이제 이들이 귀고리를 빼어 버리면 주인을 섬기지 않아도 됩니다. 아론은 이들에게
신들을 만들어 주며 동시에 그들을 모두 우상에게 바쳐 버리도록 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온 백성이 자기 귀에 있는 금 귀고리를 빼서
아론에게로 가져오니]
(3). 사람들은 기꺼이 헌물을 바쳤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어떤 신자들보다 더 열심히 헌신을 합니다. 종교심이란
참된 신앙심을 능가하는 열정과 노력과 헌신이 동반됩니다. 이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바칠 정도입니다. 귀에 있던
금귀고리를 빼서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4절입니다.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새기는 도구로 모양을 내니 그들이 이르되,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신들이로다, 하므로]
(4).
이들이 우상을 만들도록 바친 금은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신 것들입니다. 이들은 십계명 중에 제일, 제이 계명을 깨뜨리고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보고 탄성을 발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신들이로다,](
4). 이것이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백성들의 신앙이며 믿음입니다. 수차례 기적을 보고,
오늘도 아침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거두어서 먹습니다. 얼마 전에 주님 앞에 자신들이 언약을 지킬 것을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야에서
어떤 믿음의 성장도 성숙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자가 되지 못한 무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장이 없는
성도들은 언제나 목자를 쫓아낼 반란군이 될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언제나 배교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회만 오면 결행합니다.
마치 양떼가 아니라 먹이를 노리는 이리 떼와 같습니다. 양떼는 목자가 없으면 흩어지고, 찢기고, 상하고, 죽습니다. 반면 개과에 속한 이리 떼는
자신들 중에 두목을 정해서 끌어 모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전 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여]
(요12:13)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그 다음 날에는 [그들이 소리를 지르되, 없애 버리소서, 없애 버리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하매 수제사장들이 대답하되, 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요19:15).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가 없는 교회는 항상 고용 목사만이 왔다가 쫓겨나고, 왔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합니다. 이들은 목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고용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 대신 자신들이 금귀고리를 바치고, 헌금을 해서 세운 교회와 그 안에 자신들을 인도해 줄 금 송아지 한
마리에 해당하는 목사 한 명을 세웁니다.


시편 기자는 이들이 한 행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그 부어 만든 형상에게 경배함으로 자기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도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큰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 곧 자기들의 구원자를 잊었나니]
(시106:19-21). 이들이 이런 짓을 한 것을 한 이유는 자기들의 구원자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육신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이 주는 은혜를 맛보았다 해도 깨어있지 않으면 공개적인 배교로 치닫습니다.


5절입니다. [아론이 그것을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선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주]를 위한 명절이라, 하니]
(5). 아론은 우상을 만들어 준 후에 백성들에게 인기 영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절기상 3-4월에는 주를 위한 명절이 전혀 없습니다(레23). 다만 우상을 만들었고, 백성들이 그것을 신들로 선포하고 기뻐했기 때문에
종교적 색채를 입혀 준 것일 뿐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지만 그들이 주의 명절로 지키도록 유도했습니다. 금송아지일지언정 제대로
예배를 보게 하면 되고, 바른 정신만 가지면 상관없지 않겠는가?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더라도 침례와 같은 정신과 사상으로 받고,
크리스마스를 지키더라도 성탄의 정신을 유지하게 하면 그것이 이교도의 관습일지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기독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절기는 다 이런 것들입니다. 우상
숭배, 바빌론 종교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주]를 위한 명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명절처럼 지켜지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크리스마스, 고난절, 부활절과 같은 절기가 없습니다. 그냥 성경에도 없는 말을 아론처럼 선포하면 사람들은 그냥 따르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에게는 놀이 자체가 중요하지, 그런 말이 성경에 있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먹고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인데 왜 성경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추수 감사제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교회 절기나 성경적 전통처럼 말해지고 가르쳐 지는 것은 단연코 반대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기에 추수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지만 마치 교회 행사로 주관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키는 규례는 주의 만찬과 침례 뿐입니다.


6절입니다. [다음 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을 가져오며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6). 백성들은 아론의 말을 들은 후에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헌물을 들고 나왔습니다. 종교적 축제란 이런 것입니다.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6). 이것이 이들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렸다는 것은 종교적 혼합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배운 제사 제도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광야의 교회였고, 이들은 홍해에서 침례를 받았고, 영적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적인 빵을
먹었으며,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과 같은 종교적 형식에도 정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육신적인 성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침례를 받고,
설교를 듣고, 교회 행사에 참여하고, 헌금을 하고, 주기도문, 사도행전을 외우고, 할 것 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죄 헌물을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으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제사의 핵심이 빠져 있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잠4:19).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예배이며, 강단에서
빠져버린 설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죄를 꾸짖고 책망하는 설교가 완전히 사라진 설교가 은혜로운 설교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말씀만
전하면 되지 왜 자꾸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가? 왜 강단에서 사람들을 까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성도들이 수두룩합니다. 대언자나 사도나 설교가
세움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 없는
헌물은 헌물이 아니듯이 죄에 대한 꾸짖음과 책망이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목사님, 제발 말씀만 선포해 주십시오.
자꾸 성도들이 교회를 나갑니다.” 그런 말은 광야의 교회의 회원들이 그들의 목자 모세를 싫어했던 이유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딤후4:2).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디모데의 임무였습니다. 꾸짖는 일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특히 오늘날 교회처럼 성도들의 입김이
세어지고, 교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이곳 이민 교회에서는 더욱 쉽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나가면서라도 비성경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나온 말을 하는 것을 듣거나 행동을 볼 때면 반드시 설교를 통해 꾸짖고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두신
이유입니다. [죄짓는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꾸중을 듣기 싫어하지
마십시오. 꾸짖는 일은 저도 정말 하고 싶지 않는 싫은 일입니다. 오직 교리적인 이야기와 해설자가 경기를 해설하듯이 성경 강론만을 하는 일은
정말 재미있고 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성경 학원입니다. [그를 꾸짖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이
그들 위에 임하리라.]
(잠24:25), [드러내어 꾸짖는 것이 은밀하게 사랑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27:5),
[사람을 꾸짖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 많은 호의를 얻으리라.]
(잠28:23).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꾸짖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흔들리고 난리가 납니다.


왜 그런가? 성도들이 모두 지혜로운 자가 아니며, 영적인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중에는 목사를 비웃는 자들도 있고, 사악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이와 같은 설교는 거의 자살 행위입니다.
[비웃는 자를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자기가 수치를 당하고 사악한 자를 꾸짖는 자는 /도리어/ 자기가 흠을 잡히느니라.](잠9:7).
말씀을 설교했던 목자가 도리어 수치를 당하고, 흠을 잡히는 일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모르겠지만 뒤에서는 욕을 하며 흠을 잡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죄를 범하거든 결코 동조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거기서 분리하십시오. [비웃는 자를 책망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미워할까
함이라. 지혜로운 자를 꾸짖으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잠9:8).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여러분을 입증해 줍니다. 비웃는 자인가?
사악한 자인가? 지혜로운 자인가? 는 책망과 꾸짖는 설교를 들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자신의 숨겨진 가면과 위선이 다 드러납니다. 이것은 제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람 판단법입니다.


저는 말씀을 선포하며 꾸짖는 일에 조금도 위축되거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설교로 인해 교회의 성도가 나가는 일이 저를 위축시키지 못하며, 헌금이 줄어드는 일이 저를 물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꾸짖고 아무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딛2:15). 나이 어린 디모데가 감독이 되어 나이
많은 교인들 사이에서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어른들을 꾸짖는 일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아닌 어떤 곳에서도 꾸중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분을 꾸짖고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집니다. 여러분을 징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집니다. 나이 30만 넘어도 나를 꾸짖어 줄 사람이 오히려 그립고 절실한 법입니다. 교회에 오면
여러분은 위로와 힘도 얻지만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책망과 바로 잡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슬픔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웃음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죄 헌물이 가장 먼저 드려지지만 거짓 교회는 죄 헌물은 빠지고 화평
헌물만 드리며,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법입니다.


모세가 없는 광야의 교회는 즐겁고도 기뻤습니다. 광야 교회의
성도들 안에는 진리는 없었지만 화평이 있었습니다. 불만 대신 즐거움이 있었고, C.C.M이 있고, 춤이 있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누가 죄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꾸짖는 사람도 없습니다. 헌물을 바친 후에 성도들 간의 교제가 있고 생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진리도 없었습니다. 죄 사함도 없었습니다. 저는 진리로 인해 화평이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택하겠습니다. 진리로 인해 사랑과 일치가 없고 분열과
다툼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택하겠습니다. 여러분 역시 그러하길 빕니다.


다시 6절입니다. [다음 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을 가져오며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6). 우리는 광야 교회가 왜 이토록 쉽게
배교했는가?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광야 교회는 순수한 양 무리들이 아닌 섞인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출12:38). 우리는
교회 내에 기어 들어온 자들, 거짓 양들을 잘 구분해서 모두 분리해 내야 합니다. 둘째, 이들의 예배에는 영적인 것 대신 육신의 몸에 즐거운
음악과 춤이 있습니다. 이들은 헌물을 드린 후에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오늘날 ‘경배와 찬양’이란 이름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은 다윗이나 미리암이 드렸던 노래와 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영적인 희생물이 배제된 육신적인 희생물이 있었습니다. 넷째,
이들의 예배에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임명한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육신적인 교회의 육신적인 성도들을 인도하는 예배는 사회자가 필요할 뿐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필요한 교회인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필요한 교회인가? 다섯째, 이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예배의 최고 가치는 부(副)/돈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이득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이득은 장사꾼들의 목표이지
성도의 목표가 아닙니다. 여섯째, 무지한 백성들을 회유시키는 배교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했던 아론은 진리를 지키는 대신 쉽게
배교에 동참하여 백성들을 죄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오늘날 육신적인 성도들을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등 공신 역시 세상과 타협한 안수받은
목사들입니다. 일곱째, 이들의 예배에는 눈에 보이는 예배의 보조 도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보조 도구가 없이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운이라도 입어야 설교자다와 보이고, 성가대가 있고, 악기들이 있고, 여러 가지 예배의 보조 도구가 필요한
예배라면 잘못된 것들입니다. 기도하데 묵주가 필요하고, 십자가 목걸이라도 하나 있고, 마리아 동상이라도 하나 세워두고, 교회 벽에는 커다란
십자가를 둬야 교회 분위기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광야 교회의 성도들과 동일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마음에 받고 영적인 성도들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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