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2:7-14
요절: 출애굽기 32:14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 불변의 것이요, 우리는
오직 주님의 정하신 뜻에 묵묵히 순종해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뜻에 복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완전하며, 옳고, 순수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주님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시나이까?” 따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가져가 버리시고, 나의 모든 가산(家産)과 건강을 가져 가 버리신다고 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보라, 그분께서 가져가시면
누가 그분을 막을 수 있겠느냐? 누가 그분께 무엇을 하시나이까 말하겠느냐?](욥9:12). 전도서 기자는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누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8:4)고 했습니다. 이 땅에 왕이 그러하다면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주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복종할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주님의 뜻을
돌이키거나 막거나 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예가 성경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누군가의 중보 기도가 있거나 죄인들의 회개가 있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고, 그들을 모두
진멸시켜 버리시려고 하셨다가 그 뜻을 돌이킨 경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중보자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의 기도를 감당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며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얼른 주의 명절로 선포하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게 했지만 배교의 물줄기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놀 때에 하나님과 모세는 이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문제들을 보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은밀히
행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해 판단하시고 처리하시려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7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자기 자신을 부패시켰음이라.](7). 율법을 새겨 주시고, 하늘의 성막의
모형을 보여 주시며 지시하시던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내려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행하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신 것을 모세 앞에서 부인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이라고 하시는데 사실
모세가 인도하여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죄를 범하는 백성들은 더
이상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는
순간 주님은 더 이상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배척당하셨고, 거부되었으며,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언약에 따라 법에 순종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지만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들을 일컬어
“네 백성이 자기 자신을 부패시켰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썩게 만드는가? 음식은 냉장고에 있지 않으면
부패합니다. 제품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부패합니다. 통조림은 뚜껑을 열어 두면 금방 상하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잊고 우상을 숭배할 때 부패합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미 부패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부패시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상하여 악취가 나는 음식처럼 되어 버렸으며, 유효 기간이 지나 상한 물건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섞고 부패하는가?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급격히 부패되어 버립니다. [그 재판관이 죽은 뒤에는 그들이 돌이켜 자기 조상들보다 더욱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절하며 자기 행위와 완고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니라.](삿2:19). 우상 숭배란 마음의 생각이 썩어버린 것이며,
자신들을 썩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이나 유물론, 인본주의 등은 사람을 부패케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불법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53:1).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몰아내는 일은 현대 교육의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마르크스의 유물론 등은 모두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몰아내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단한 과학적 발전이요,
철학이요, 위대한 업적인 것처럼 찬양하지만 실은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을 급격하게 부패시킨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급격히 부패가 진행되어가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은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쉽게 부패되곤
했습니다. [아 /슬프다/, 죄많은 민족이요, 불법을 짊어진 백성이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로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갔도다.](사1:4).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으면 마치
냉장고에서 끄집어내어 놓은 우유나 생선처럼 그렇게 부패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품지 않았을 때 이들이 얼마나 쉽게 부패되었는지
성경은 반복적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부패케 하는 것은 악한 사귐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킵니다. 성도들은 빛 가운데서 교제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있으면 어둠이 물러나고, 썩게 하는 곰팡이들이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씻깁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빛
가운데 없는 옷, 이불을 보십시오. 눅눅해 집니다. 그런 것들은 말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썩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패케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욕심은 사람은 누룩처럼 뜨게 하며, 부패하게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습니다. 이스라엘이 부패한 것 역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들은 경건한 교리를 부패시키며, 말씀을 부패시킵니다. 이들은 무엇이든지 부패케 하는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은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상한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땅을 파서 묻어 버리거나
완전히 불로 소각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8절입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나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것에게 희생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신들이로다, 하였도다.](8).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들이 한 일을
상세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들은 주님이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났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명령한 길은 기본적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미
피를 뿌려 언약을 맺은 율법책의 내용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맹세하고 언약을 맺은 길에서 속히 떠나 버렸는데 주님은 그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길은 의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이며, 진리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길 대신 음행의 길, 발람의 길,
이방 신들의 길로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썩게 하였느니라.](말2:8). 주님이 말씀하신 그 길이란 [주]의 길입니다.
주님이 주신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눈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토록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우리는 다윗처럼 이 길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이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는 그 명령이 등불이요, 그 법이 빛이요, 훈계하는 책망들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니라.](잠6:23). 훈계하는 책망들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여기서 속히 떠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나 언제나 훈계하는 책망의 음성이
마음을 울려야 합니다. 이 훈계의 책망을 듣고 훈계를 지킬 때 여러분은 생명의 길에 있게 됩니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의 길에 있거니와
책망을 거절하는 자는 잘못 행하느니라.](잠10:17). 주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시고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렘21:8).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책임 역시 여러분의 몫입니다. 광야의 교회는 모세가 없는 동안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온유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을 말씀으로 바로 잡히는 사람입니다. 책망과 징계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징계를 통해 바로 잡힌 사람입니다. 아무리 얼굴에 웃음을 띠고, 상냥하게 말해도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 나오면 불쾌해하고, 짜증을
내고, 불만을 품는 사람은 완악한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거칠고, 예의가 없어 보여도 설교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고칠 줄 아는 사람,
찔림을 받는 사람, 자신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의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점에서 완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십니다.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죄인은 다 악한 사람이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선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치리자가 주님께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행11:24). 선한 사람이란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낸 사람입니다. 회개함으로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이
창조되고 내 속에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한 사람을 주님은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시51:10). 다윗은 그런 점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범죄한 백성들이 회개할 때 선한 길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또 주의 백성에게 상속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왕상8:36,
대하6:27). 주님은 언제나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해 주시고, 선한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렘6:16). 선한 길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었던 옛 길이며, 혼들이 안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교회 백성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멸하십니다. [이는, 보소서, 주를 멀리하는 자들이 망할 것임이니 주를 떠나 음행의 길을 가는
자들을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73:27). 결국 이들은 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 죄를 슬퍼하며 주께
부르짖는 사람은 진정으로 선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명령한 길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이 명령한 길은 진리의 길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교회 성도들은 음행의 길로 갔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자기 행위들로 더러워지고 자기들이 창안(創案)한 것들과 더불어 음행의 길을 갔느니라](시106:39).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이
주의 길을 버리고 음행의 길을 갔다고 말합니다. 우상 숭배는 영적 음행입니다. 영적 음행이 자행되면 육체적 음행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옵니다. 주의
길을 떠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빠지는 죄는 술, 벌거벗음, 음행의 순서입니다. 우상에게는 죄의 책망이 없고, 의가 없습니다. 주를 두려워함도
없습니다. 육신의 평안과 즐거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어 보이지만 이런 죄의 쾌락은 잠시 뿐입니다.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가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그들이 스스로 굽은 길을 만들었으니 누구든지 거기로 가는 자는 화평을 알지 못하리로다.](사59:8). 사악한 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화평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화평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지금 이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안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 요가, 명상, 단전호흡, 약물 요법, 신경 안정제 등은 모두 마음의 평안을 찾는
이들에게 주는 일시적 치료법입니다. 모든 종교가 거의 그렇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으려고 교회를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은 그런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님을 믿고, 죄를 사함 받아야 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나님의 평안이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파괴하고 평안을 찾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여러분들은 주의 길을 떠나서 의를 구하고 평안을 구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정하신 그 길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하나님이 주신 교회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성령과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경도 있고, 성령도 있지만 교회를 멸시하는 것은 참으로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고,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라 불리듯이 교회는 하나님님의 교회라 불립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듯이 교회를 무시하는 일은 주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양 무리들이 양육을 받도록 정하셨습니다(행20:38).
[오 [주]여, 주의 법규들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그 길을 지키리이다.](시119:33). 누가 가르칩니까? 마땅히 교회가 주의 법규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학교가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오 [주]여, 내게 주의 길을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 안에서 걸으리니 내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사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시86:11). 이 역시 교회가 가르칩니다. 때로 나는 주님 앞에서 직접 배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주님은 교회에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혼자 성경을 100독을 하고, 신학 서적을 탐독하고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정상적으로 다닌 사람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저는 주님께 성경을 배우고 싶었고,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조명이 있기를 간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선교회 사람을 보내 주셔서 선교회에서 3년 반동안 배우게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어느 정도 배우고 난 후에 한계를 느껴 성경을 좀 더 배우고 싶다고 기도했을 때 이번에는 신학원을 운영하는 침례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몇 년이 지난 후에 좀 더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주님은 교회를 개척해서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셨습니다. 저는 주의
길을 교회를 통해서 배웠지 혼자 배운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수많은 성경 본문의 교훈들을 이 ‘말씀 침례 교회’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말씀 침례 교회를 통해서 저는 주의 길을 계속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성전으로 올라가서 배워야 했듯이, 신약 성도들은 교회로 달려 와야 합니다. [많은 민족들이 오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길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요, 우리는 그분의 길에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 나갈 것이요,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임이라.](미4:2). 하나님의 집은 성전, 교회,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령은 성경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래서 지역 교회의 타락은 성도의 타락으로 이어지며, 지역 교회의
약화는 성도 개개인인의 영적 약화를 불러 옵니다. 교회와 여러분의 개인 신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로 가는 길은
주님은 성도들에게 정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속히 떠나는 사람들은 주님이 정하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보라,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9). 목이 뻣뻣한 나귀나 소에게는
멍에를 지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이 뻣뻣한 백성은 주님이 주신 멍에가 그들의 목에서 자꾸 벗겨지고, 이탈합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총 일곱 번 나오는데 구약에 여섯 번 신약에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런즉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10). 주님께서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은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어떤 일을 할 때 성도들의 기도를 염두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의 기도와 간구를 무시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미리 기도로 매달리거나 떼를 쓰지 못하도록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을 집행하시기 전에 기도를 금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하여 소리 높여 부르짖거나 간구하지도 말며 내게 중재하지도 말지니 이는 내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할 것임이라.](렘7:16). 예루살렘을
멸하실 때에 예레미야에게 부르짖거나 간구하지 말고 중재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기도를 올리지도 말지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임이라.](렘11:14).
이를 통해 볼 때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 중재는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세 앞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격노를 보이셨습니다. 모두 죽여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멸하겠다는 것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보았습니다. 지금 이들을 멸하시고 300년 전 야곱 한 명을 통해 지금의 이스라엘을 만들었듯이
모세 한 명을 통해 다시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시겠다고 합니다. 200만이 몰살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모세와 모세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 새로 민족을 만들겠다는 주님의 선포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말씀이
나오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민23:19). 주님은 말씀을 물리거나
변개하지 않으시며, 실수라고 말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확고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그렇다면 모세가 취할
행동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모세에게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주님을 홀로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끈질기게 중보 기도를 했던 것처럼 기도했고, 야곱이 얍복 여울 가에서 주의 천사를 만나 매달린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야곱이 홀로 남았는데 어떤 남자가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치매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씨름할 때에 위골(違骨)되었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하라, 하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야곱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니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음이니라.] (창32:24~28). 야곱은 기도로 씨름했습니다. 천사가 야곱보다 힘이 약해서 씨름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씨름했다는 말은 주님께 기도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이 Wrestle with God입니다. 하박국은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응답을 기다리며 씨름을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주의 천사에게 얼마나 매달렸던지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 만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조르고 또 조르며 주의 천사를 놓아주지 않자 야곱의 넓적다리 우묵한 곳을 쳐 버렸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며 매달렸습니다. 모세가 바로 처지에 놓였습니다. 모세는 야곱처럼
주님과 씨름하여 이겨야 할 판국입니다. 우리는 야곱이나 모세와 같은 처지에 놓여 매달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기도로 한 판 승부를 겨루었습니다. 11절부터 모세는 주님의 명을 어겨가면서 목숨을 건 중보 기도를 시작합니다. 만약 모세의
중보 기도가 없었다면 이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택한 자 모세가 그 불화(不和) 속에서 내 앞에 서서 내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멸하지 않게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그들을 멸하였으리라 하셨도다.](시106:23). 한 사람의 중보 기도가 모두를
살렸습니다.
11절입니다. [모세가 [주] 자신의 하나님께 간청하여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맹렬히 진노하시나이까?](11). 모세는 하나님께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은 언제나 기도의 첫 머리에 와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신실함을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이런 중보 기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수시로 이런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홍해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출15:15),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출15:25). 신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부르짖었습니다(출17:4). 아말렉과 전쟁이 났을 때도 모세는 산 정상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손을 들고 주께
기도했습니다(출17:11).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언제나 중보 기도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 심각한 예는 없었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이집트를 버리고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보통 상황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는 일임을 고했습니다.
12절입니다.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그가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인도하여 내어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였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에서 돌이키사 마음을 바꾸시고 주의 백성에게 이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12).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있는 그대로 벌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모독을 받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것이란
점을 주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이 일은 충분히 그러할 만한 일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기도는 합당한 기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이방인들 사이에서 주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돌이키사 마음을 바꾸어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그런 기도입니다. 이는 주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에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다니엘 역시 동일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 {주}여, 간청하옵나니 /주는/ 주의 모든 의를 따라 주의 분노와 주의 격노를 돌이키사 주의 도시 예루살렘 곧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들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우리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었음이니이다.](단9:16).
우리는 징계와 진노와 심판의 순간에 주님의 은헤와 긍휼에 호소하면 돌이켜 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나는 황폐하며 괴로움을 당하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시25:16). 주님은 얼마든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주의 종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 자신을 두고 그들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하게 하고 내가 말한바 이 모든 땅을 너희 씨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그것을 상속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3).
모세는 언약에 기초해서 기도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기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이미 창세기에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의 예를 느헤미야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1:4-11절은 느헤미야의 간절한 금식
기도입니다. 그의 이 기도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 역사의 기초를 형성한 기도입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 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너희 중에서 하늘 맨 끝 지역에까지 쫓겨난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데려오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간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1:9). 느헤미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말씀 없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능력 있는 기도는 모세 오경에 기록된 주의 약속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기억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기록하게 하시고, 성도들에게 읽으라고 명령하신 그 말씀을 누구보다도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언약 곧 천대에 이르기까지 친히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시105:8).
주님은 자신이 친히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언제나 귀 기울이시고 들으십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말씀을 기억해 주시라고 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위에 소망을
두게 하셨나이다.](시119:49).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모세의 기도는 바로 그런 기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면 누구나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음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풍성한 긍휼에 따라 뜻을
돌이키시며](시106:45). 중보 기도는 한 사람, 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14절입니다. [이에 [주]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했던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4). 모세는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뜻을 돌이켰습니다. 백성들은 먹고 마실 때 산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같이 현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우리가 죄를 범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종들에 대하여 친히
뜻을 돌이키시기 때문이니이다.] (시135:14)라고 했는데 이 상황에 정확히 그대로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이 드리는 중보
기도로 인하여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 뜻을 돌이키시는가?
첫째, 모세와 같이 기도하는 중보자들이 있을 때입니다. 주님은 이 땅을 위해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중보자가 있을 때 뜻을 돌이키시고
멸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멸망하는 이유는 기도하는 중보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시켜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22:30~31). 주님은 이 땅에
기도하는 의인이 없음을 한탄스럽게 여기십니다. [너희는 이리저리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다니며 이제 보고 알며 그 넓은 곳에서 찾아보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집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거나 혹은 거기에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렘5:1). 예루살렘에
망한 것은 그들 안에 의인이 없고, 주님 앞에 서서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지 못한 까닭입니다. 아모스를 보십시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메뚜기들이 땅의 풀 먹기를 마치매 내가 이르기를, 오 {주}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그가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서리이까? 하니 [주]께서 이에 대하여 마음을 돌이키시고 [주]께서 이르시되, 그 일이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내게 보이셨느니라. 보라, {주} [하나님]께서 불로 싸우려고 외치시니 그 불이 큰 깊음을
삼키고 일부분을 먹어 치우니라. 이에 내가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그가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서리이까? 하니 [주]께서 이에 대하여 마음을 돌이키시고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 일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암7:2~6). 그 때마다 아모스는 [오 {주}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그가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서리이까?]하며
기도했고 주님은 이에 대하여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를 통한 심판의 유예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향해 중보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a). 주님의 이런 중보가 없었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중보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롬8:34). 이 땅에 있는 우리를 위해 저 하늘에 계신 주님은 중보하십니다. 주님의 중보 사역은 우리가 저 하늘에
올라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라.](히7:25). 모세의 중보 사역은 주님의 중보 사역의 예표입니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이십니다(롬8:26,27).
둘째, 회개할 때 주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내가 어떤 민족과 어떤 왕국을 뽑고 무너뜨리며 멸하리라 말할 때에 만일 내가 /멸하리라/ 선포한
그 민족이 자기들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생각했던 그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렘18:7~8). 주님은 우리가
범죄에서 회개할 때 내리려던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며, 우리가 잘 행하다가 범죄할 때 내려 주시려던 복에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또 내가 어떤 민족과 어떤 왕국을 세우고 심으리라 말할 때에 만일 그 /민족/이 내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들을 유익하게 하리라 한 그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렘18:9~10). 주님은 재앙에 대해서도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시며, 복에 대해서도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신데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셋째, 주의 음성에 순종할 때 뜻을 돌이키십니다.
[만일 그들이 귀를 기울이고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위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리려고 작정한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리라, 하라.](렘26:3).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 돌아서는 자는 온유한
자입니다. 바로 잡힌 자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듯이, 사도 바울이 음성을 들었듯이 그렇게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평생에 한 번도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한 때 너무 답답해서 주님 저에게 우림이나 둠밈이라도 주셨으면 문제가 있을 때 즉시 그것을 보여 주면 될텐데 속을
뒤집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말을 하면 구차해지고, 설교를 하면 변명처럼 들리고, 가만히 있으면 매정하게 보이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아니더라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라도 하나 주셨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은데 제게는 그런 지팡이 하나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대언자를 통해 들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는 사도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두
지역 교회에 세우신 설교자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길과 행위를 고쳐야만
합니다. 그 때 주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주] 너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치려고 선언하신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리라.](렘26:13).
넷째, 마음을 찢고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이는 그분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혹시 돌아오사 뜻을 돌이키시고 복 곧 [주] 너희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 헌물과 음료 헌물을 자신의 뒤에 남겨 두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2:13-14). 주님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하고, 통회하는 자들을 향해 얼마든지 뜻을 돌이키실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돌아서시고 뜻을 돌이키사 자신의 맹렬한 분노에서 떠나심으로 우리가 멸망하지
아니할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9-10). 심판의 말씀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 회개할 때
주님은 확정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선포하는 심판과 멸망의 선포가 무효가 되어 버린 것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유대를 못살게 구는 나라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요나는 치를 떨었던지라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늘에서 불이
임해 무너지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기대했던 심판이 임하지 않자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리라 말씀드리지 아니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그렇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으며, 예측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분노하시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면 하나님 역시 우리를 향해 회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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