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2:28-35
요절: 출애굽기 32:32
주께 범죄 한 백성들을 다루는 모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죄와 죄에 대한 징계와 형벌에 대한 무감각은 영적 생명을 앗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일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혼들이 회개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시고,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지만 죄를
변명하고 시인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한히 엄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인본주의적 사랑과 신본주의적 사랑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첫 아들이요, 특별한 백성이요, 보석이라고 부르시지만 그에 대한 사랑만큼 강한 질투와 분노를 보이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계명이라면 단연 신명기 6:5입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첫째가는 큰 명령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마22:37~38).
이 사랑의 바탕이 없이는 둘째 계명이 아무 소용이 없고, 어떤 다른 많은 계명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의 바탕 위에서만 성립됩니다. 약속 있는 첫 번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 역시 크고 첫째가는 명령 위에서만
성립됩니다. 어떤 계명이라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무너뜨리거나 약화시킬 경우에는 결코 존립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주의 편에 속한 자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허리에 칼을
차고 자기 형제, 자기 친구, 자기 이웃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허리에 칼을 차고 온 진영을 문에서 문으로 두루 들락날락하며 각 사람이 자기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27). 이 부분은 성경은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두통을 안겨 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부분이 모세의 명령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도록 하셨고, 모세는 주의 명령을 받아서 전한 것입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라는 명령은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27a). 주님은 계명의 우선순위와
절대 가치를 확립하셨습니다. “이 법을 지키자니 이 법이 울고, 저 법을 지키자니 이 법에 걸리고” 와 같은 식의 인간적 논리를 통렬히 부수어
버렸습니다. 법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상위법은 하위 법에 우선하며,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고, 특별법은 일반법에 우선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해석을 좋아하며, 적당히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를 통해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후에 한 번 더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자기 사람들 /중에서/ 바알브올에게 연합한 자들을 죽이라, 하니라.](민25:5). 우상 숭배와 음행에
민족적으로 연루된 죄악에 대해 주님은 집단적으로 다루시는데 이 일에 주도적으로 집행자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레위 지파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의 제자도를 몸소 보여 준 사람들이 레위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이 구절을 몸으로 실천해 보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일은 어렵기 그지없습니다. 육신의 정, 혈육의 정이란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렇습니다. 육신의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도
문제지만 능히 미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6). 주님을 따르는 일은 아무런 희생도 대가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못 박고, 세상에 못 박히는 그런 죽고 사는 희생이 따릅니다. 육신의 애정에 따른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따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처럼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는 나라는 전 세계에 불과 몇 개국뿐입니다. 이런 좋은 시대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이곳 미국에서도 몇 개주에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거나
그런 글을 적어서 돌리는 일에 대해서는 감옥에 갑니다. 얼마 전 펜실베니아 주에서는 동성애가 죄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할머니가 최고 46년
형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저희가 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이런 법안이 이미 주지사의 서명을 받아 놓고 발효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죄를 죄라고 말했다가는 현행범이 되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순교는 멀리 다른 나라나 대 환란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10년
이내에 이곳에서 발생할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식이나 친구나 친지가 동성애자이거나 낙태를
하거나 마약을 하거나 이혼을 하는 등의 일들에 대해서 그것이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로 기소되어 감옥에 기꺼이 갈 수
있습니까? 레위 지파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들이나 자녀들보다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언약을 지켰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녀들을 알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언약을 지켰음이니이다.](신33:9). 우리는 레위 지파와 같이 육신의 가족들보다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손에 칼을 잡은 지파입니다. 레위는 야곱의 아들로서
자기 누이 디나의 사건 때 시므이와 힘을 합쳐 칼을 잡고 하몰과 세겜을 비롯하여 그의 족속을 모조리 죽여 버린 사람입니다. [셋째 날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곧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각 칼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도시로 가서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날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더라.] (창34:25~26). 불의를 참지 못하며, 복수를 해야 분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열두 아들로 된 열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잔인한 도구가 그들의 거처에 있도다. 오 내 혼아, 그들의 은밀한 일에 가담하지 말지며, 내 영광아,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음이로다. 그들의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진노가 잔인하니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그들을 야곱 가운데서 나누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흩으리로다.] (창49:5~7). 레위는 처음에 칼을 잡았을
때는 자기 의지대로 육신대로 행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칼을 잡았습니다. 만약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아니었다면 12 지파 중
아무도 그들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전사들이 되었을 지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제사장 지파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흩어져 살도록
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이에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그
날 백성 중에서 삼천 명 가량이 죽었으니](28). 레위 지파는 백성들이 짓는 죄를 처음부터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로서 이 일의
주동자들을 중심으로 죽였을 것은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흔히 아무나 걸리는 대로 죽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레위 지파는 죄악에 가담한 사람들이
누구이며,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선동했는가를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칼날을 휘둘렀을 것입니다. 이날 죽은 사람이 삼천 명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삼천 명이 죽어간 이 날을 보면서 신약 성경 사도행전 2장을 떠올립니다.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魂)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행2:41).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이 임한 바로
그날에 삼천 명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날에 삼천 명을 죽이셨지만 한 날에 삼천 명을 영원한 지옥 사망에서 건져 살리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율법의 돌 판을 받아 오던 날 삼천 명이 죽었고,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날 삼천 명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놀라운
대조점을 접할 때 그 경이로움에 놀라게 됩니다.
29절입니다. [이는 모세가 이르되, /너희/ 각 사람이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를 쳐서 오늘 너희를 [주]께 거룩히 구분할지니 그리하면 그분께서 이 날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 하였음이라.](29).
죄에 동참하지 않고, 죄인과 동참하지 않는 것이 거룩함의 첫 걸음입니다. 분리야말로 부정함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안전한
방법입니다. 죄를 범한 아들들, 형제들과 연합하는 대신 그들과 분리하여 주께 거룩히 구분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들과 날카로운 분리를 가져옵니다. 친한 형제와 벗들로 갈라놓습니다.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는 강한 연합을 가져오지만
죄와는 선명한 분리를 가져옵니다. 그 죄인들이 자기 가족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 시대의 가장 슬픈
일은 형제들이 분리에 대한 실천이 전무(全無)하다는 사실입니다. 분파와 파당은 많지만 분리는 드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고후6:17).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이란 말이 하나님 사랑보다 우선하는 것이 인본주의적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독하게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가 형제
사랑이 없고, 이웃 사랑의 실천이 없이 오직 하나님 사랑만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보다 거짓된 논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도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단체는 넘쳐납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없애 버린 채 둘째 계명만 실천하자면 종교 통합도 가능하며, 교회는 어떤 단체와도 손잡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를 실천하려 할 때 교회는 매우 배타적이요, 독선적이란 비난을 받게 됩니다.
30절입니다. [다음 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주]께로 올라가리니 아마도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속죄하여야 하리라, 하고](30). 모세는 여기서
“아마도”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불확실한 단정, 완전히 보장할 수 없는 일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혹시”란 표현을 쓰십니다. [이에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혹시 그들이 그를 보면 공경하리라,
하였거늘](눅20:13). 혹시나 하고 아들을 보내었을 때 사람들은 죽여 버렸습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혹시’란 말을 했는데 마술사
시몬의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사악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혹시라도 네 마음의 생각을 용서하실까 하노라.](행8:22).
회개와 관련된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주님의 영역이기에 감히 속단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신중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그리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2:25). ‘혹시나, 아마도’란 말은 약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약5:15). 이 역시
죄의 용서에 관련된 말입니다. 우리는 죄에 연루된 성도들에 대해 권면할 때, “혹시.. 아마”란 말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자백하십시오.’ 이런 권면을 하면서 “혹시 용서하실지 모릅니다”란 말은 무책임한 말 같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회개와 회심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히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언자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그리하면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암5:15).
사람들은 자신의 죄 문제를 깨끗하게 시인하고 인정하고 돌이키지 않는 채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죄 문제로 보지 않고,
환경과 상황 탓으로 돌리거나 교회 탓으로 돌리거나 목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성경적 비성경적 등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로 접근합니다. 죄를 죄로 보지 않은 채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접근 방법은 상담 심리학과의 심리
치료입니다. 이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법이 교회 내에 그대로 유입되어 목사들까지도
죄를 지적하는 대신 원인 분석에 골몰하고 어떻게 감정 안 건드리고, 상처 아내고, 열 안 받게 말할까를 고심합니다.
모세는 할 만큼 했습니다. 하루에 3,000명을 죽이는 일에
순종했고, 레위인들은 주의 편에 섰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회개하는지, 슬픔을
느끼는지 모세 자신도 확신할 수 없기에 “아마도”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원해서 다시 주께로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속죄를 해야만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 일은 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30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주]께로 올라가리니 아마도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속죄하여야 하리라, 하고](30).
“내가 이제 [주]께로 올라가리니”란 말은 죄의 유일한 해결자는 주님이시란 고백이며 증거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주님의
보좌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상담 치료를 받고, 누구와 의논을 하고,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죄로 인해
자신이 직접 올라가 속죄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세 자신은 이 죄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로 나아가 속죄를 드리는
것은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죄와 상관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속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모든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위대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큰 죄를 범하였고, 모든 사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케
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이 모든
사악한 일을 행하였으나 [주]를 따르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섬기라.](삼상12:20).
사악한 일을 행하였으나 주를 따르는데서 돌이키지 말라. 이것이 대언자의
권면입니다. 기분 상하는 일 좀 있다고 교회를 떠나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경우가 오늘날 대부분 개신 교회의 실정입니다. 성질난다고 교회를 떠나
버리고 신나게 교회 욕하고 돌아다니고, 목사 욕하고 돌아다니며, 자기 기분 상하게 했다고 더러운 교회니 곧 망할 교회니 하는 자들은 도대체
뭡니까? 교회를 떠났으면 마음에 드는 교회 찾아서 오직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면 될 일입니다. 교회 떠난 것이 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면 됩니다.
이곳 교회는 사병의 집단이 아닙니다. 주님이 대장이신
정규군입니다. 정규군과 사병의 차이를 압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주의 군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역시 주의 군대였습니다.
여기에는 면제가 없습니다. 무슨 직업을 갖고 있던, 집안에 어떤 어려운 환경이든, 그 사람의 몸이 얼마나 아프든 주님은 군사로 부르시며, 직무를
면제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사정에 따라서 전역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이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라는 부대를 통해 전우들이 뭉쳐 함께 생활하며,
주의 명령을 하달 받아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역 교회의 목회자는 모든 형제들을 동료 전우라고 생각합니다.
전우들은 동료 전우가 나의 밑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나의 명령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의 대장께서 부르시면 보내 주어야 하며, 보직을 이동시키면
명령서 한 장에 그대로 해야 합니다. 때로는 평생을 짝궁으로 같은 전장에서 전우애(戰友愛)를 다졌다 하더라도,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서 하나에
두말없이 보직은 변경되고, 전장은 옮겨집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이 주님께 속한 정규군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병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병(司兵)은 전우가 모두 자기 군인입니다. 그는 더 높은 권위가 없습니다. 자기가 대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대, 자신을 떠나는 것은 곧바로 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군대, 내가
지휘관이 되어 주님께 목숨을 다한다고 믿지만, 주님은 결코 사병을 용병으로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군대만을 사용하십니다. 지역
교회 목회자들은 지금 자신이 정규군에 편성되어 주님께로 직임을 받은 사람인지 스스로 주님을 위해 일어선 학도병이나, 의병인지, 아니면 돈이나
이권을 기대하고 일어선 용병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말씀 침례교회를 사병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구원이 대장이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 주시면 받고, 누구를 내 보내시면 미련 없이 나가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용병들이거나 사병들이거나
자원병들이라면 떠날 때 떠나고, 전역하고 싶을 때 전역하십시오. 그러나 주의 정규군이라면 주님이 주신 명령서에 따라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떠나라고 싸인을 보내시거나 말씀하시면 떠나십시오. 이곳에서 섬기라고 하면 이곳에서 섬기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육신에서 우러나온
충성심이나 신실함을 믿거나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신실함, 입에 발린 충성심에는 이미 여러 차례 질렸습니다.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시되
주님을 따르는데서 돌이키지만 말아 주십시오. 양들의 잘못은 목자의 책임이며, 군대는 지휘자가 책임지듯이 지역 교회는 목자와 교사로 세움 받은
감독이 책임집니다.
저는 요즘 거의 매일 밤 꿈을 꿉니다.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듣는 이 말이 어찌된 일이냐? 네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라. 네가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못하리라, 하니](눅16:2).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가 끝난 후에 지금처럼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눈치를 본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여러분의 혼을 위해서 얼마나 깨어 있으며, 마치 제가
회계 보고할 자인 것처럼 했는가? 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거의 매일 수 십 차례 하고 있습니다(히13:17). 이 작은 교회의 작은
무리들도 먹이고 감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앞으로 계속해서 목회를 할 것인가 생각하면 아득하기조차 합니다. 주님이 이곳에 저를 세워주시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님이 그만 두게 하시면 그만 두고, 옮기게 하시면 옮기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서 한 장에 저의 거취는
바로 결정 날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 사람 앞에 거리낌 없는 양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주]께로 돌아가 아뢰되, 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1). 모세는 죄를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 고백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 앞에서는 무서운 사자 같았던 모세가 주님 앞에서는 연약한 갈대와 같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기록된 이 장면이 사실은 40일간
주님 앞에 금식하며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과 같이 밤낮 사십 일을 [주] 앞에 엎드려 빵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은 모든 죄 곧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킨 모든 죄로 인함이라.](신9:18).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32). 모세는 생명을 걸고
기도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와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는 기도입니다. 형제들을 향해 칼을 들어 죽이게 했던 모세였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대신해서 기꺼이 죽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죽음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은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고후4:10~12). 저는 여기서 주의 책, 생명의 책, 어린 양의 책 등 책에 대한 주석을 생략하고
죽음과 생명에 대해서 논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진 삶이 아니라면 우리를 통한 생명의 역사는 단연코 없습니다. 모세가 죽어야 백성들이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죄인들이 삽니다. 제가 죽어야 교인들이 삽니다. 여러분이 죽어야 누군가가 삽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누가 저에게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물으면
“모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요10:11).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주는 목자가 아니면 그 사람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죽기를 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양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었을 뿐 아니라 육체의 생명을 내어 놓기를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너희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나를 헌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이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육신의 생명도
헌물로 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형제들을 위해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였던 사람들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까? 마누라 앞에서
죽어 있는 남편, 자식 앞에 죽어지내는 부모는 보았어도 교회에서는 조금도 죽어있지 않는 형제들이 수두룩합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형제들의 영적
생명이 삽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저 역시 죽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 십자가의 죽음이
제 안에서 역사하기를 빕니다. 충만한 생명을 구하는 대신 충만한 죽음을 구합니다.
33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33). 주님 앞에서 인간의 deal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기도와 간구를 할 때
간혹 이런 거래를 시도하거나 협상을 시도하는 형제들이 있지만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33b). 이것이 모세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를 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소서.”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주님이 거기에 굴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래 죽여주마!”가 응답입니다. 엘리야는 대언자를 못해 먹겠다고 자꾸 간구했을 때
주님은 그러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대언자로 삼아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교회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그래? 그럼 옮겨라” 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요구에 굴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형제는 자기가 원하는 자매와 결혼하게 해 주시면 몽고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서원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몽고에 선교사로 안 가도 좋으니 차라리 네 뜻을 꺾으라고 응답해 주셨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과의 거래를 원치 않습니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갈6:7~8).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은 변치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로 바꿀 수 없습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벌하는 날에는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벌하리라, 하시니라.](34).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속해서 백성을 인도할 목자의 직분을 유임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고 “내 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천사는 주의 천사인데 주님 자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은 성육신 이전에 주의 천사의 모습으로 이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63:9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고난 속에서 친히 고난 당하시고 자기 눈앞에 있는 천사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며 친히 사랑하고 동정하사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의 모든 날에 그들을 품으시며 이끄셨음이라.] (사63:9). 주의 천사는
주의 군대 대장으로서 계속해서 이들을 인도하셨으며, 정복 전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는 벌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34절에 그 벌이 무엇인지를 곧 바로 나오는데 역병이었습니다. 모세가 올라가면서 “아마도”라고 한 말 그대로 주님은 벌을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합당한 자세는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징계는 사랑하는 자녀, 받아들이시는 자녀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를 하시면서 합당한 벌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이후에 진정한 회심과 회개가 없었습니다. 금식과 통회를 하며 죄를 회개할 때 주님은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3000명이 죽은 일로 슬픔에 빠지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이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면
충분한 줄로 압니다. 철저한 회개와 자기를 판단하고 심판함이 없이 그냥 넘어 가 버립니다. “이번 일로 피해가 컸다. 힘들었다. 혼났다. 정말
위기였다.” 등의 진단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주]께서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이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그 송아지를 가지고 행한 일 때문이더라.](35). 역병, 기근, 전쟁은 하나님이 범죄한 백성들을 다루시는 주요
수단이었습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이런 징계가 전혀 없는 줄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혼들은 병들게도 하시고,
잠들게도 하십니다. 주님은 범죄한 혼들을 죽여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만 즉사(卽死)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주의 만찬을 분별없이 행했다가 죽어 나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육신이 죽는 징계를 말합니다.
주님은 자녀들에 대한 징계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이는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으니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들로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진실로 그들은 잠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5-11).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징계는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징계를 겸손히 받아들임으로 단련을 받아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면 징계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겸손히 받아 들일 때 열매를 맺게 되고, 성숙하게 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 책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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