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3:1-3
요절: 출애굽기 33:3
범죄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온 몸으로 막아낸 것은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라는 그의 기도를 통해 주님은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멸망할 뻔 했다가 벌을
받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벌하는 날에는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벌하리라, 하시니라. [주]께서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이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그
송아지를 가지고 행한 일 때문이더라.] (출32:34~35). 모세의 중보 기도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켜 지고, 백성들의 멸망은
면했지만 그들의 죄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들의 죄가 멸망에 이를 만한 죄였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완전히 깨끗해진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에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들을
깨끗하게(clearing) 하는 것은 아니며... ] (민14:18a)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가 여전히 남아 있고, 그에 따른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제거는 언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갈보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양과 염소와 황소를 갖다 바친다 해도 죄의 용서에 그칠 뿐 그들의 죄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4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체계 아래서 제사장들이 날마다 같은 희생물들을 드려도 죄를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이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히10:11). 짐승의 피는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의 용서와 죄의 제거는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죄의 용서는 있었으나 죄의 제거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죄들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니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원자가 나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시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 이것이기 때문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11:26~27). ‘시온에서 구원자가 나오사’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심으로 죄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제거하셨습니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갈보리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죄를 제거한 것은 어떤 교리나 사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원리가 아닙니다. 죄를 제거한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피를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요, 영적 실체입니다. 대속의 개념이나 구원의 교리를 믿어서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으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단번에 영원히 제거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제거하신 분이십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통해 우리의
죄들을 모두 제거하신 사실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흘리신 피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의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몸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 주님을 믿을 때 우리의 죄는 남김없이
깨끗하게 제거되고, 영혼은 정결하게 되며, 양심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믿는 교리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실제여야 합니다. 죄의
용서와 죄들의 제거는 내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매우 중대한 사건입니다. 인생의 극적 전환을 이루는 그런 사건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영접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죄는 단번에 영원히 제거된 것입니다. 교회 출석이나 어떤 종교 생활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 날에 있을 한 가지 놀라운 사건을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의 이름으로 소위 영적인 놀라운 일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대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고,
언젠가부터 방언을 하고, 병도 고쳐 주고, 각종 종교 사업을 벌였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7:22~23). 이들은 지금 주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대언을 했고,
마귀를 쫓아냈고,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이용해 먹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이 갈 곳은
지옥입니다. 주님을 인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에 모시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믿고 있다면 그는 이 땅에서 무슨 놀라운 일들을 행했던지 갈
곳은 지옥일 뿐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이르되, 우리는 주의
눈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는 우리의 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할 것이나 그가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눅13:26~27). 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주의
눈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는 우리의 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할 것이나](눅13:36)란 말은 주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깊은 친교를
누린다고 자부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고, 기도와 금식과 전도를 능하게 행하고, 찬송과 성경 읽기에 능통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 상담을 해 줄 정도의 능력도 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능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철학, 신학, 교육학 등 인문학에 정통하고 목사가 되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인권과 빈부 격차, 소외 받는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교 간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며 정작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듯이 섬기는 예를 저는 참으로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신의 죄 문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이웃의 가난과 교육의 부재와 정치적 자유, 언론과 종교의 자유 등에만 온통 관심을 가지고 온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대표해서
활동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기독교 정신, 예수님의 정신과 희생을 본받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의 생명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인류의 근본 문제, 국가의 근본 문제, 사회의 근본 문제,
가정의 근본 문제, 내 자신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경제의 문제입니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칼 막스입니다. 그는 빈부 격차야 말로 인류의
재앙이락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공산주의입니다. 정치 제도나 지도자의 문제입니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공자를 비롯한
유교입니다. 그들은 군자가 된 사람이 왕도 정치를 펼치면 이상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환경의 문제입니까? 합리적인 제도를 개선하고
갖추고 환경을 정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풍요로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교육의 문제입니까? 계몽주의자들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인류, 국가, 사회 등 거창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 가정, 우리 부부, 나 자신의 문제의 핵심은 ‘죄’라고 말합니다. 죄가 모든 것의 근본 문제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고, 죄 때문에 우리는 복을
얻을 수 없고, 죄 때문에 죄들을 짓습니다. 이 말은 좀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거짓말을 하고, 불법을 행하고, 불의를 행하고, 경건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며,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대로 천한 쌍놈
집안의 혈통을 받아서가 아니고, 교육을 못 받아서도 아니고 그 안에 거하는 죄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 내 자신의 문제는 모두 죄에서
비롯됩니다.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정욕(情欲)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 (약4:1). 저는
이혼하는 부부들이 이혼 사유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시부모로 인해서, 돈 때문에...’ 등등의 사유를 대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상담이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문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해 보아도 듣는 답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죄에 순종하는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아가
문제입니다. 내가 죄성을 지니고 있는 한 나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죄의 삯인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가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며, 직장의 문제, 학교의 문제, 가정의 문제이며,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 해결책을 알고 싶다면 먼저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롬7:23). 자신의 문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죄]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다른 데서 해결책을 강구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부 간의 문제나 교회 형제들 간의 문제나 친구 간의 문제나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문제나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오직 한
가지, ‘죄’입니다. 나는 죄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그 신분이 ‘죄의 종’입니다. 나의 몸은 죄를 현실 세계에서 드러내는 충실한
도구이기에 ‘육신의 종’입니다. 죄는 우리 몸을 통해 온갖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들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일들의 끝이 사망이기 때문이라.](롬6:21).
죄가 육신을 통해서 하는 일들, 드러내는 열매들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는 무려 22가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미리 말하노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갈5:19~21). 사람의 인성은 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육신이 맺는 모든 열매는 모두 다 죄들일 뿐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부 환경이나 밖에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니라 모두 안에/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오직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 (마15:18~19). 우리가 지닌 이런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님이 오셨고, 그 해결책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그리고 주님이 육체로 죽으신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의 육신이 죄의 도구요,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죽음에 처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교회, 나의 무엇을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나란 자신, 자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죄들이 씻음 받고 죄의 도구요, 종이었던 내
몸의 지체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지고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의의 도구요, 주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면 그때부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이라.](롬6:7), [죄로부터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롬6:18),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 끝은 영존하는 생명이니라.](롬6:22).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입니다. 믿을 때 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이 되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날마다의 경험이
됩니다. 승리가 됩니다.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재앙은 주님이 더 이상 그들 한 가운데 거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33:1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네 씨에게 주리라,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1). 일시적으로 주님의 용서를 받은 이스라엘은 예정대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를
떠나...그 땅으로 올라가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약속한 그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범죄로 인해 중단되었던 일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다시 시작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사역은 우리의 불신과 죄로 인해 오랫동안 중단되고 지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주님의 용서를 받을 때 멈추었던 일은 다시 시작됩니다.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전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학개와 스룹바벨 등의 책망과 대언으로 다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완성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현재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처음 가졌던 열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하십시오. 주님은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천사를 네 앞서 보내며 또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고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네 한가운데서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목이 뻣뻣한 백성이므로 내가 길에서 너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 하시니라.](2-3). 하나님은 이스라엘
한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셨으나 이제는 천사를 앞서 보내 인도하시는 것으로 대신하시고 자신은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모세의 간청이나 간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중보자 모세의 기도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건
모세의 중보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애통함과 회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것은 이들을 길에서 진멸해 버리실까 염려해서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범죄한 백성들 속에는 주님이 거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거하시면 그 사람들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거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와 동행하십니까?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계3:4).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 주의 피로 자신을 씻고 주님이 주신 흰 옷(의)을 입은 자들이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들이
주님과 동행합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암3:3).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걷은 것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요구 사항입니다.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6:8).
그런데 이스라엘은 죄를 범함으로 인해 주님이 그들 속에 더 이상
거하지 않으시며,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과 함께 한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인정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일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순례의 길을 가다가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또 아내 사라의 음성에 순종해서 이집트 여인 하갈을 맞아
‘이스마엘’이란 육신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일을 했고, 열매를 얻었지만 그런 것은 주님이 받으시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일들을 한 후에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화를 하거나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변명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떠나 버리시는 것은 아니지만 소멸(억눌림-살전5:19)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천사를 앞서 보내 주겠지만 자신은 그들 안에
거하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그들이 지금까지 만든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건물에 지나지 않을 그런 위기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하면 그들은 민족의 머리가 되고, 강성하지만 주님이 그들을 떠나 버리시면 그들은 다른 민족을 섬기는 종이 되고 맙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성도들과 함께 할 때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며 육신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하는 회중의 한 중앙에 성막을 세우시고 거기에 거하셨습니다. 후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졌을 때 주님은 거기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성막, 성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는 더 이상 손으로 만든 성막이나 성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는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니 /이것은/ 곧 대언자가 말하는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 혹은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8-49). 또
이르기를,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행17:2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 어떤 건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을 결코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전 건축 모금을 하지만 편의상 붙인 이름일 수는 있어도 성경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임 장소로서, 이런 특별한 목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막, 성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건물 속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19~21).
우리가 주님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처소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代贖)을 얻으셨느니라.](히9:11-12). 주님은 이 땅의 성막이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b). 우리 몸이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걸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심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이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입니다(마1:23). 주님이 임마누엘이라 불리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b).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죽고(롬6:8, 갈2:20, 골2:20),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엡2:5),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2:5),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3:3).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함게 하늘에 앉힌바 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를 떠나실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는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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