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3:11-14

요절: 출애굽기 33:14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도가 되면 짐은 주님께 맡겨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은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을 ‘사명을 맡는 것, 사역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질문하기를,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되는 것이고, 짐은 주님께 맡겨야 되는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주님이 저에게 주신 십자가인지
주님께 맡겨야 할 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와 짐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란 의미를 자기가
져야 할 일/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맡기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별개의 것, 분리된 것, 반대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누가 보아도 무거운 짐을 졌습니다. 모세가 기도하기를, [모세가 [주]께 아뢰되,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게 하지 아니하시고 이 온 백성의 짐을 내게 떠맡기시나이까?]
(민11:11)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불평하기를,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민11:14)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목자의 역할을 자신이 진 짐이라고 생각했고, 무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할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께 맡기면 쉼이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맡기는
짐들, 일들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는 것 같고, 우리가 일하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모두 행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15:10)고 했고,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
(골1:29)고 말합니다. * 주님은 베드로 안에서 효력있게 일하셨고, 바울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사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사 이방인들을 향하게 하셨음이라.)]
(갈2:8). 주님은 모세 안에서 일하시고, 여호수아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저와
여러분 안에서도 주님은 일하십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대로 일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홀로 일하는
자들은 실상은 불법자들이요, 불신자들이요, 이교도들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
(고전3:9). 주님은 우리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무슨 큰 일을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짐을 지고 주님을 힘겹게 따르거나 자신의
일을 하는 가운데 신앙을 Part time으로 부지런히 하는 것을 신실하다, 충성스럽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 길, 염려, 일들을
모두 맡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시55:22a),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
(잠16:3),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
(벧전 5:7).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라고
합니다. 우리는 맡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네 짐, 네 일들, 네 길,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면 전부다 맡긴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심지어 원수 갚는 것도 주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a)고
하십니다. 주님께 다 맡기면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그냥 놉니까? 주님께서 성도들은 마냥 놀고먹는 게으른 종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며, 놈팡이로
전락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대신 친히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며, 맡긴 일들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기면 주님이 그 짐을 져 주시고, 우리에게 안식(쉼)을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던져 맡긴 모든
일들이 주님이 시행하시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눈앞에서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네게 안식을 주리라, 하시니](14). 주님은 모세의
기도 응답으로 ‘동행과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맡기고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안식을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 맡기지 않고 무조건 “무엇을 주십시오. 무엇을 해결해 주십시오.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기도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또 구합니다. 아침 새벽 기도에 나와서 구하고, 철야 기도에서 또
구하고, 금식을 하며 구하고 따로 모여서 또 기도하며 구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이 기도요, 급행으로 주님의 응답을 받고 얻는 기도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를 의뢰하지도 않고 빨리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변호사를 주야로 볶아
보십시오. 사건을 맡은 변호사, 돈을 맡은 은행, 자식을 맡은 학교, 환자를 맡은 병원, 죽은 사람을 맡은 장의사 등 우리는 무엇인가를 맡길 때
맡은 당사자는 책임과 의무가 생깁니다. 맡긴 사람은 맡은 쪽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무엇을 맡긴 후에 주님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께
맡겨야 할 것들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기도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주님께 아무 것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주님께 맡겨야 할 것들은 전혀 맡기지 않고 해결해 달라고 구합니다. 맡기지 않는 것을 주님께 구하면 주님은 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오라,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사업이든 가족 문제이든 학교 문제이든 인간관계의 문제이든 돈
문제이든 간에 모든 문제는 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져 주십니다. 나의 짐, 나의 길, 나의 염려, 나의 원수 갚는 것까지
모두 주님께 맡기시면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욥기 5:8에 [나는 하나님께 구하겠고 내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리라.](욥5:8)고
했는데 이는 자신이 당한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 점에서 바른 기도의 방법과 능력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성막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로 인해 동행을 거부하셨을 때 모세는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백성들을 모아놓고,
장로들을 소집해서 ‘민족의 진로’에 대해 토론을 벌이거나 함께 지혜를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다 주님께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겠다고 계획한 일들을 이루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람에게 뜻을 계시해 주시고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주의 종에게 계시하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주께 이 기도를 드려야 함을 마음 속으로 알게 되었나이다.]
(삼하7:27).
다윗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지만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계시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알았는데
“주의 종이 주께 이 기도를 드려야 함을 마음 속으로 알게 되었나이다”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는 어떤 일도 이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문제를 맡겼고, 일을 맡겼고, 염려를 맡겼고, 무엇을 맡겼으면 주님의 뜻대로 해 주시기를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시면 그대로 이루어 주시도록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배우고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기도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도 공부하지 않고 읽지도 않고 무조건 기도만 많이 하는 사람들은 사실 종교심과 열정이지 믿음의 기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돈이나 학력과 같은 외모를 원치 않으시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느
시간에든지 주님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모세는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그를 섬기는 자 곧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 밖으로
떠나지 아니하니라.]
(11). 주님은 모세와 친구와 이야기하듯 말씀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일생에 가장 복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모습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 합니다. 모세는 일반 대언자들과는 격이 달랐던 그런 대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역한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내 말들을 들으라. 너희 가운데 대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 그와는 내가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또 그는 [주]의 모습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민12:6~8).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갔고 주님은
모세를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얼굴을 마주 대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면 여호수아는 성령을 예표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섬기는 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늘 동행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역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성령을 예표하는 모델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기도할 때 여호수아는 칼을 잡고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모세는 마치 승천하신 주님의
모습이고, 여호수아는 성령의 검을 잡고 육신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로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수아가 ‘성막 밖으로 떠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을 잘 예표해 줍니다. 성령은 성도들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모세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듯이 우리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친구로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십자가의 진리를 잘 몰랐을 때 저는 이런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모세처럼 주님과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엘리야처럼
세미한 음성"을 들어 보았으면, 한 마디로 직통 계시를 받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안후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매
순간이 주님과 깊은 대화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홀로 방안을 떠도는 메아리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
하늘의 지성소,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만야 주님과 이런 교제가 없다면 이는 심각한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사귐을 갖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1:3~4).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 기억하십시오. 성막 앞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이런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대면은 없다하더라도 우리는 깊은 교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고전1:9).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시고, 들으시고,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구하는 것을 주시며,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며, 책망하시고 바로 잡아주시며, 때로는 보상을 주시고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처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을 수 있는가? 다 초월하신 분이시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죄를 지을 때 슬퍼하시고, 회개할 때 기뻐하시며,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볼 때 즐거워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주]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자신의 긍휼에 소망을 두는 자들을
즐거워하시는도다.]
(시147:11). [네 한가운데 계시는 [주] 네 하나님은 능하신 이시니 그분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너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고 친히 사랑하시는 중에 안식하시며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리로다.]
(시149:4). 때로 신자들이 믿음을 매우
강조하면서 ‘감정, 감성, 느낌’은 완전히 죄악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감정은 믿음의 근거는 아니지만 믿음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믿을 때 마음에 불안과 근심과 염려가 사리지고 대신 기쁨과 즐거움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모세가 [주]께 아뢰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이름으로
알고 너도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도다, 하셨나이다.]
(12). 모세는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기도 외에 모세가 어떤
지혜나 방법을 강구한 일이 없습니다. 그가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은혜”입니다. 모세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경에 맨 처음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기록된 사람은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은혜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 근거가 없고,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근거로 주님
앞에 나아가 필요를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노아나 모세처럼 어떻게 은혜를 입습니까? 우리가 그들처럼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의롭게 됨의 근거요, 거룩의 근거이며, 죄 사함의 근거요, 은혜를 얻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긍휼을 얻고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려면 ‘예수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히10:19).
노아와 모세가 은혜를 입었던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퍼지는 거짓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피’를 제거한 “빈혈 복음” 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NIV 는 킹 제임스 성경과 비교할 때, 피(blood)
라는 단어를 42번 삭제했습니다. 대신에 죽음(death) 이란 단어는 킹 제임스 성경 보다 78번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빼고서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 끌고 가는 “복음”은 거짓 복음입니다. 주님의 육체적 죽음은 피를 흘리신 죽음입니다. 피없이 죽은 죽음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피”입니다. 에베소서 1:7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엡1:7). 은혜와 피의
연관 관계를 보십시오. 은혜와 평강은 누구에게 많이 임하는가 보십시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택하심을 받고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이른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을지어다.]
(벧전1:2).


여러분은 피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6)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식인종입니까? 우리가 피를
먹는 드라큘라입니까?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씀인가? 성찬식을 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을 먹으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죽음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영적 양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몸은
영이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신 거룩한 몸입니다. 그 몸은 주님께 드려진 희생물입니다. 주님의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거룩한 하나님의 피요, 새로운 상속 언약의 피요,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그런 피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피를 통해 우리는 구속을 받습니다.


- 이 피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이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엡1:7). [이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이 피를 통해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이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
(골1:20). 이 피를 통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수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3-14).
하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b). 이
피로 승리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이 피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히10:19). 이 피를 통해 완전해집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히13:20~21).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께 아뢰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이름으로 알고 너도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도다, 하셨나이다.]
(12). 모세는 주께서 하신 말씀인 출애굽기 32:24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 (출32:24a).
주님은 “내 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고 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모세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가 미가엘인지 가브리엘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계시 받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한 부분은 출애굽기 3:4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 나무 속에서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너를 이름으로 알고 너도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도다]
란 말씀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때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모세가 그런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분명합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1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원하오니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이제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 또 나로 하여금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또한 이 민족이 주의
백성임을 깊이 생각하소서, 하매]
(13). 주의 은혜를 입은 모세의 소원은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음은 “주의 눈앞에 은혜를 입게 하소서”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죄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주의 길을 알 수 없고,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입음으로 얻는 최상의 복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8)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내를 아는 지식"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단지 배설물로 여길 만큼 뛰어난 것입니다. 이 지식은 단숨에 얻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에 어떤 깨우침을 통해 주님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엡4:13).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게 하시고]
(골1:10).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한즉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8).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벧후3:18). 주님을 아는 것은 신학이나 철학처럼 어떤 원리를 배워서 이론이나 사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를 가짐으로 알고, 자라게 됩니다.


14절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눈앞에서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네게 안식을 주리라, 하시니]
(14). 주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돌이켜
“내가 네 눈앞에서 너와 함께 가리라.”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하루의 삶이 주님 없이 천년을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마28:20b).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시고 “내가 네게 안식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참된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이제 놀게 생겼다거나
은퇴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일거리는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대신 모세는 영혼의 쉼을 얻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마11:28-29).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이런 안식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종교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주시지 않고, 이론이나 사상을 주시지 않고, 개념이나 원리를
주시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실 때 우리는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평강을 얻게 됩니다.
기쁨을 얻고,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현대화 될 필요가 없고,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새롭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새롭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옛 길을
찾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며]
(렘6:16).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