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3:15-18

요절: 출애굽기 33:18


주님은 모세에게 [동행과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순례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복된 위로요, 소망입니다. 진영 밖 성막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무궁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신학이나 철학의 범주 속에 개념 지어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모세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관념이나 이론이나 교리나 정신이나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영이요, 말씀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교의 유산이나 전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 사도들이 세운 교리나 종교 체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란 종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요, 생명이시요, 말씀이시오,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기독교
정신, 기독교 문화에만 접해 있을 뿐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과 교제가 없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종교심이 있어서 성경 공부도
참여하고, 각종 종교 행사들에 부지런히 참여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가 없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본성과 종교성에서 나온 육신의 열심과
종교적 열정을 믿음과 혼동해서 그것이 참된 믿음인 줄로 압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롬10:2). 이들이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는 종교적
열정이나 아테네에서 그리스인들이 다이애나 신전에서 제우스를 비롯한 수천종의 신들을 섬기는 일이나 그 열정은 비슷합니다(행17:23). 사람들은
꼭 물과 같아서 방향만 잡히면 그리로 쏟아져 흘러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들이 돈 벌이에 온 마음과 힘을 쏟듯이 어떤 이는 철학에, 어떤 이는
예술에, 어떤 이는종교에 그런 열정을 쏟아 붓습니다. 이런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으니까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회를 하고,
신학교를 가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선교사나 목사나 부흥사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경이나
동양 철학을 접했더라도 게을리 책을 읽고 공부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육신의 본성, 종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철학으로 종교로 사상으로
이론으로 삼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책에서 읽고, 사람들에게서 듣고, 신학교에서 배우고, 성경 구절 몇 개를
암송해서 나름대로 자신의 기억 속에 관념화되고 개념화된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그는 여전히 잃어버린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능력과 지혜와 명철은 무한하시며, 은혜와 긍휼은 풍성하시고,
영광은 무궁하시며, 모든 것이 풍성하시고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기 위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께 구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언제든지 나아가서 아뢸 수 있는 성막이 있습니까?
아니면 백성들처럼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먼발치로 쳐다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죄에 연루된 백성들은 주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홀로
모세만이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보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손으로 짓지 않는 참 성막 속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어떻게 죄인들이 성막 안으로 들어갈 이런 담대함을 얻었습니까?


첫째,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2).


둘째, 주님이 주신
소망을 힘입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기 때문이니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히7:19).


셋째,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히10:19).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라.]
(히7:25).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항상 살아서 우리를 중보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7 Days 24 hours! 이것은
광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근거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우시고, 은혜와 긍휼을 허락하십니다.


15절입니다. [모세가 그분께 아뢰되, 주께서 /내/
눈앞에서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여기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5). 모세는 주님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광야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신 땅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리를 여기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동행, 주님의 임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하나님이 주시는 값진 선물보다 하나님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관심은 주님 자신입니다. 일찍이 그는 이런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
(히11:24~26). 주님을 최상, 최고, 최선으로 여기는 사람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없는 가나안보다 주님과
함께 있는 이곳 광야에 거하겠습니다.”란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모세의 이런 기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은사들, 주님이 주시는 복들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못한다면 그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요, 그의
삶은 모두 다 타버리고 재 밖에 남을 것이 없는 그런 삶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은 줄을 여기에서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니이까? 그리하여 나와 주의 백성이 지면(地面) 위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구별되리이다, 하매]
(16). 주님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은 것을 아는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주님의 은혜란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집트 땅에서부터 모든 날들 동안 주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은혜라면,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입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육신을 입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 속에 영접하면 됩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면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감겨 있으면 주님이 곁에 계셔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의논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오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5-16). 주님의 은혜를 입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입니다. 불신은 주님과의 동행을 방해합니다. 바로 곁에 계신 주님을 저 셋째 하늘 머나 먼 곳에만 계신 줄로 압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되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 (요21:4).
베드로는 전직을 살려서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신에 빠진 신자들의 영적 현실입니다. 주님이 그들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동행하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속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걸으십니다.
*엡4:6, 골1:27, 골3:11 참조.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은 줄을 여기에서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니이까? 그리하여 나와 주의 백성이 지면(地面) 위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구별되리이다, 하매]
(16).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점이 무엇입니까? 율법, 성전, 회당, 할례, 안식일 등이 이방인들을
구분해 주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것이 외적인 구분 방법은 됩니다. 유대인들은 독특한 문화, 특이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구분은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세상과 구별 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찬송가 들고 다니는 것이 고작일 겁니다. 일요일에 교회를 간다는 것 정도가 세상과의 구별점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비웃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세상과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 조직,
단체들로부터 구별되게 합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눈여겨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가? 살핍니다.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췰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과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을 때 아무리 구별을 두려고 해도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은
“너희 속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라고 알게 됩니다.


17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며 또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알기 때문이니라.]
(17). 주님은 모세의
기도에 100% 응답해 주셨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란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하루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응답의 비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한 것들에 대해서 방법을 가르쳐 주시거나 도와주시거나 지시 사항을 일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기도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기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내가 구한 것들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4:13-14)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내용에 대해서 “내가 행하리니...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란 주님이 행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눈에 은혜를 입었고, 주님은 모세를 이름으로 알기
때문에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알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3).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들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모든
필요를 책임져 줍니다.


18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하니]
(18). 모세는 이제 자신의 소원 한 가지를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읽어 보면 이 간청은 “주님의 얼굴”을 보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주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약속을 받은 후에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잠재적으로 갖는 가장 큰 소원 중의 하나는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성도로서 당연한 소망입니다.
주님을 보고 싶고, 주님을 만나고 싶은 소원은 거룩한 소원이며 복된 소망입니다. 죄인들은 결코 주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보면 믿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라도 실상 그 마음 속에는 “만약에 주님이 계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생각이 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복된 소식이 아니라 두려움과 재앙의 소식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들은 ‘망한다, 죽는다,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공포입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고, 죄에 대한 심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고, 죄 문제가 해결되면 하늘로 눈을 들고, 주님의 오심을 바라봅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고
자칭 교인, 성도라 불리지만 마음 속에 주님의 오심이 두렵고, 주님과의 만남이 껄끄럽다면 이 시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한 일이 너무 없다!”며 주님의 재림을
껄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의를 자랑하고 내 세우려는 사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오직 주님의 죽으심과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순순한
신앙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은 사람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불꽃같은 눈동자를 지니신 주님을 마주 대하려면 우리 속에 죄가
없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죄와 불법을 가진 채 감히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얼굴을 들라. 눈을 들라”고 말해도 감히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정결하게 씻음 받음으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습니다. 주님을 보려면 ‘마음이 순수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했습니다. “화평”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됩니다. *롬5:1,10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화해의 관계를 맺게 된다. 엡2:16-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멸하심으로 화해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고,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린 후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은 상태가
거룩함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가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화평과 거룩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주님과 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
(요일3:2).
모세는 이미 40일간 호렙 산에 올라가 주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성막의 모형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서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도 주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나 사람의 모습을 하시거나 환상이나 영안에서 계시하지 않는 이상 육안으로 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전파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영은 존재하지만 전자 현미경으로 수 억 배 확대를 해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요1:18),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요일4:12a).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47b)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증거 하기를,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
(딤전6:16a). 모세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지 주님을 보여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의 간청은 제자들 중에 빌립과 같이 불신이나 의심에 찬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이 간청에 주님은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
(20)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은 작열하는 태양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쳐다보면 직사광선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됩니다. 핵무기가 터질 때 번쩍이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보는 순간 눈이 멀고 죽습니다. 이런 것은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의 광채는 똑바로 보는 순간 죽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 안에서 주님을 뵈었지만 그가 보았을 때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그분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자같이 되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주님을 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이사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
(사6:5). * 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처럼 주님을 보고 싶습니까? 이사야처럼 환상 가운데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고, 에스겔이나 다니엘, 사도 요한이나 바울처럼 영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
(고전13:12). 그 때에는-주님의 재림,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입니다. 모세처럼 따로 “보여 주소서”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봅니까? 우리는 육안으로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 주의 영광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들, 하나님이
보라는 것들을 보기를 소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눈의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단일한가? 눈이
악한가? 는 무엇을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런즉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6:22-23).
빛이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몸은 환하게 밝아집니다. 무엇을 보기 전에 먼저 예수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신학이 아니라 예수를, 목사가 아니라 예수를, 교회가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빛이요 생명이신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의 온 몸이 빛을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몸의 등불인 눈을 통해 ‘네
안에 있는 등불’(영)도 밝아집니다. *욥21:17, 잠13:9, 잠20:20참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다윗은 기도하기를, [내 눈을 돌이켜 허탄(虛誕)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 주의 길에서 나를 살리소서.]
(시119:37)라고 했습니다. 대신 그는 무엇을 보기를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여사 나로 하여금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오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123:1). 우리는
빛을 똑바로 보는 대신 빛이 비추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일 자 누구리요? 하오니, [주]여, 주의 얼굴빛을 드사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긍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31:6).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복을 주시고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셀라.]
(시67:1). [오 하나님이여, 우리를 다시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3,7,9).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법규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119:135). 주의 얼굴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비추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이 하나님의 얼굴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히1:3a). 마귀는 이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베일을
가립니다(고후4:4).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神)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
(고후4:4). 주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니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하시매]
(요9:39).
예수님을 보십시오.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오, 생명의 빛이시며, 주의 빛이십니다. 이 빛은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밝혀 주는
빛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는 눈을 멀게 해 버리는 빛입니다. 주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으냐?](요11:40)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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