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3:4-10

요절: 출애굽기 33:6


사람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고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몸에 장식을 답니다. 어느 나라나 민족이나 금은보석으로 된 다양한 장식품들이 많습니다. 화려한 장신구를 옷과 머리, 손발에 까지
달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이 비면 빌수록 밖에 치장을 하게 마련입니다.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밖에 무엇을 달아서 메우려고 합니다. 마음속에 숨겨진 사람이 없는 여인들은 겉에 화려한 치장을 합니다. 속사람이 없기 때문에 겉 사람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머리 모양이나 옷 맵시나 핸드백이나 구두 하나 하나에까지 명품을 걸친다고 해서 그가 명품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훌륭한 사람, 멋진 사람인 것으로 여기고 동일시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온 몸을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금은보석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나 멋진 사람이 아니란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썩어 없어질 겉 사람에 온통 신경을 쓰는 사람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속사람을
단장하고 치장하고 정결하게 하며 세우는데 온 힘을 쏟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무엇을 자신을 꾸며야 하는가?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되 얌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고 장식한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하지 말며
오직 (경건함을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합당한) 선한 행위로 하기를
원하노라.]
(딤전2:9-10). 이것이 그리스도인 자매들이 맵시를
내는 방법입니다. 겉이 아니라 속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단장(丹粧)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 입는 외적인 단장으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벧전3:4)고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특징은 속사람이 없기 때문에 육신을 꾸미고 장식하는
일만 한다는 점입니다. 육신적인 교회, 육신적인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
가운데서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매 순간에 주님의 인도하심, 주님의 공급하심, 주님의 돌보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40일 동안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찬양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벌주시는 것으로
용서하셨지만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악인, 죄인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나쁜 소식을 듣고 애곡하며
아무도 그 몸에 장식품을 걸치지 아니하니]
(4).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성도들에게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런 좋은 소식은 뼈를 기름지게 합니다. [눈의 밝은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하며 좋은 소식은 뼈를 기름지게 하느니라.](잠15:30).
이런 좋은 소식은 목마른 혼에게 냉수같습니다. [먼 나라에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혼(魂)에게 냉수 같으니라.](잠25:25).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처음이신 이가 시온에게 이르기를,
보라, 그들을 보라, 하리라. 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를 예루살렘에게 주리니]
(사41:27). 하나님은 대언자, 사도들, 복음
전도자들을 시온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좋은 소식의 주인공이십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우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합니다. 전도의 기쁨은 전도자만이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겠다는 소식은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자신 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사울은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되었고(삼상10:16), 삼손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들에게 성령이 떠났을 때 그들의 모습은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고, 강력한 자였던 사울에게
성령이 떠났을 때 그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헌물을 낼 밭도 없을지어다. 이는
거기서 강력한 자의 방패 곧 사울의 방패가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음이니 마치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한 것 같았도다.]
(삼하1:21).
이를 볼 때 성도가 되고,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요(고전15:10), 성령의 역사이지 결코 우리 자신의 무엇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애곡했습니다. 이들은 몸에 장식품을 걸치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이들은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지 않으시며,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소식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은 애곡했습니다. 몸에 장식품을 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겉치레, 위선, 형식, 외식을 모두 제거하고 마음의 진실됨, 속 중심으로 주님을 대하겠다는 의지적 표현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주님의 책망과
꾸짖음과 징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몸에 붙은 모든 장식을 떼어내고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려는 것, 자신을 낮추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며 주님의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주님과의 임재가 멀어지고, 교제가 단절된 듯 할 때 우리는 이들이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외식과 위선과 형식의 모든 장식품을 떼어내고 속 중심부에서 주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들 가운데 거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자신들의 불법과 죄가 깨끗해지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용서를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주님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벌하실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지만 결코 그들의 죄가
깨끗해지거나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는 벌을 받는다고 제거되지 않습니다. 죄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고, 제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한 가지는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血] 뿐입니다. 이들의 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제거해 주셔야만 완전히 제거되고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4:7에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출34:7a).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민14:18a)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죄를 범하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고, 회개를 한 후에 용서를 받았습니다. 양이나 염소나 황소를 성전에
가져가서 피를 흘리고 대제사장을 통해 헌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짐승의 피로는 결코 죄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고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신약 성도들은 이미 주님의 완성된 속죄 사역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믿기만 하면 짐승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죄가 남김없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제거됩니다. 죄를 범했을지라도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요일1:7). 아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전에 지은 죄가 아무리 크고, 현재 내가 불법과 죄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다.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선행이나 고행이나 기도나 금식이나 교회 출석이 아닙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요일1:7). 피는 죄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가 있는 곳에서 정결케 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4). 그리스도의 피에 흠뻑 젖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비랍니다. 이는 자신이 죄인이란 기본적인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단지 벌을 받는 것이 두렵고, 주님의 심판이 두려운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5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에 너희 한가운데 임하여 너희를 진멸하리니 그러므로 이제 네게서 장식품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무슨 일을 할지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5).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인즉...”이라고 그들의 본성, 그들의 본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이 완악한 백성이란 말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만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다 그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들 가운데서 아무리 착하고
겸손하게 보여도 그는 목이 뻣뻣하고 완악합니다. 자신의 이런 죄성, 옛 사람의 본성, 육신적 기질을 보지 못하면 그는 아직 복음의 진리에서 한
참 멀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사악하고, 더럽고, 부정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렘17:9). 죄인들은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죄악된 본성과 사악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렁주렁 장식품을 달고 자신을 꾸미고 숨기고 자랑하고 뽐냅니다. 자신의 본질적
모습이 아닌 것으로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주님은 단숨에 임하여 이런 우리를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장식품을 다 제거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본래의 모습이 나옵니다. 화장하지 않는 얼굴, 조명이 없는 얼굴, 장식도 없고, 치장한 옷도 없다면 사람의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십니다.


6절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 옆에서
자기들의 장식품을 제거하니라.]
(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들의 장식품을 제거했습니다. 이 장식품들은 언제든지
우상을 만드는데 드려질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장식을 제거해 보십시오. 본 모습이 나옵니다. 갖가지 종교 행위들의 장식품을 모두 제거해
보십시오. 직장에서는 신우회를 만들고, 어디 가서는 기도회를 인도하고, 어디서는 선교회를 조직해서 단기 선교를 다녀오고, 어느 선교지에 헌금을
보내고, 새벽에는 새벽 기도를 나오고, 저녁에는 철야 기도회를 나오고, 또 무슨 행사를 할 때면 열심히 봉사하고 그런 모든 행위들의 장식품을
제거해 보십시오. 그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장식으로 달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해 보십시오. 집사, 교사, 권사, 장로, 무슨 위원이란 교회 내의 직함도 다 떼어 내 버리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장식품을 제거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 옆에서 자기들의
장식품을 제거하니라.]
(6).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히브리서 4:13에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3)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장식도 걸칠 수 없습니다.


장식으로 자신을 가리고 치장한 교회가 현대 교회입니다.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계3:17~18). 그들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세워두고
안에서 굳게 잠그고 자기들끼리 흥겹게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외칩니다.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교회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
화려하게 장식을 합니다. 꽃과 조명과 여러 가지 눈부신 장식으로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20세기 이후에 나타난 라오디케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은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3:20).
교회는 주님을 문 밖에 둔 채 예배를 드립니다. 교인들은 주님을 저 하늘에만 모셔 둘 뿐 결코 자기 마음속에 모셔 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주님이 없으면 외양을 꾸미고, 가꾸고, 포장하게 됩니다. 육신을 신뢰하게 되고,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 우리가 단장해야 할 장식은 주님이 친히
주십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무화과 잎으로 두른 옷 대신에 가죽 옷을 지어 주셨듯이 주님은 우리 속에 단장할 것들을 주십니다. 속이 단장되면 겉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 명철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금이나 진주, 사파이어가 아니라 주님의 지혜와 명철로 자신을 단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찾는가? 명철(明哲)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사람이 그 값을 알지 못하며 산 자들의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음이 이르되, 그것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도
이르되, 그것이 내게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그것은 금으로도 얻지 못하며 은을 달아서도 그 값을 치르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진귀한
줄마노나 사파이어로도 그 값을 매기지 못하겠고 황금과 수정이라도 그것과 견주지 못하며 정금 장식으로도 바꾸지 못하고 산호나 진주는 말할 필요도
없나니 이는 지혜가 루비보다 더 값지기 때문이라. 이디오피아의 황옥이라도 그것과 견주지 못하며 순금으로도 그 값을 매기지 못하느니라. 이러하거늘
지혜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욥28:12~20).


- 주를 두려워함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머니의 법을 버리지 말지니 이는 그것들이 네 머리에 은혜의 장식이 되고 네 목에 사슬이 될 것임이로다.]
(잠1:7~9).


- 지혜를 얻음으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으뜸이니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것을 높이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를 높이리라. 네가 그것을 품으면
그것이 너를 존귀로 인도하리라. 그것이 네 머리에 은혜의 장식을 주겠으며 영광의 왕관을 네게 건네주리라, 하셨느니라.]
(잠4:7~9)


-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되 얌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고 장식한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하지 말며]
(딤전2:9).


- 온유하고 조용한 영으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벧전3:4).


7절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취하여 진영 밖에 쳐서 진영과
멀리 떨어지게 하고 회중의 성막이라 부르니 [주]를 찾는 자는 다 진영 밖에 있는 그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갔으며]
(7).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회중 한 가운데 거하지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는 성막을 취하여 진영 밖에 쳤습니다. 진영과 멀리 떨어지게 성막을
침으로써 백성들이 성막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들 속에 들어와 거하실 수 없습니다. 민족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와 부정함이 깨끗하게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모두 진멸되고 맙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죄인들의 몸 속으로 들어오실 수 없는 것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취해 진영 밖에 친 것은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들어오시지 않겠다는 말씀에 따라 진영 밖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도록 한 것입니다. 진영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와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주님은 그들 속에 거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신약의 십자가의 진리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는 짐승들의 피는
죄로 인하여 대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고 그것들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

(히13:11~13). 주님은 진영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진영 밖으로 가야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로
나아가 죄인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진영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그의 죄를 깨끗하게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모세가 성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온 백성이
일어나 저마다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더라.]
(8). 백성들은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 있었을
뿐 진영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모세를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알았지만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 앞에
끌리는 그런 경험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까지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피흘려 죽으신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9절입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와 성막 문에 서며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9). 출애굽기에서 세 번째 등장하는 구름 기둥입니다. 첫 번째 구름 기둥은
출애굽기 13:21,22절입니다.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을 백성 앞에서 옮기지 아니하셨더라.]
(출13:21-22). 이 때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구름 기둥입니다. 두 번째는 출애굽기 14:19,2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영(陣營) 앞에 가던 하나님의
천사가 이동하여 그들 뒤로 가매 그들 앞에 있던 구름 기둥도 그들의 뒤로 옮겨가서 이집트 사람들의 진영과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에 이르러 서니라.
이 구름 기둥이 저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되었고 이들에게는 밤에 빛을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오지 못하니라.]
(출14:19,20).
이번에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구름 기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름 기둥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교제의 구름 기둥입니다.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talk with Moses)란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to) 말씀하시니”가 아닙니다. 주님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 자신의 종들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절입니다. [온 백성이 성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음을 보고 다 일어나 저마다 자기 장막 문에서 경배하더라.]
(10). 백성들은 우상을 경배했던 것을 돌이키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자기
장막 문에서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육신의 장막을 입고 있습니다. 모두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