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3:19-23
요절: 출애굽기 33:21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발견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신랑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신부의
심정이나 같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아내 될 사람은 독일에 간호사로 이민을 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서로
편지만 주고받다 몇 달이 지나서 사진 한 장씩 주고받았습니다. 독일로 선교를 떠난 선배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을까 싶지만 보통 매일 만나는 연인들보다 더 깊은 애정과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은 사랑과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갖고 있어야 할 당연한 열망이며 감정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그의 구원은 새롭게 점검해 보아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강한 열망은 주님을 남편으로, 아버지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오니 주의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가르치소서.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25:5)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내 혼이 하나님을 바라나니](시62:1a), [보소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 눈이 [주] 우리 하나님을 바라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까지
기다리나이다.](시123:2)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림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으른 종은 결코 주인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숙제 덜
한 아이는 선생님이 오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경찰이 반갑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주 하나님의 오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남편이 열사의 땅 중동에 건축 현장으로 떠났습니다. 몇 년 고생을 하고 돌아오면 부자가 될
생각에 가족을 한국에 두고 떠났습니다. 매월 월급을 한국으로 송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저축하지 않고 모두 다 탕진해 버린 아내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하고 천천히 오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자처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지 않고,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지 않고, 아내가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것을 정상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면서도
“주님 정말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속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이 가짜가 아닌가?
거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찾고 부르는 그런 열망으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정말 학수고대(鶴首苦待)란 표현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로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5초 내로 주님이 오시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늘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다 보니 삶이 경건하고 이 땅과 육신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습니다.
전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이 땅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열망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표적이나 환상이나 꿈에서나 주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은 “아버지는 오실 필요 없고 사진이나 한 장
보내 주시거나 테이프나 한 개 있으면 됩니다.”란 것과 동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낙원에 다녀온 체험도
있습니다. 그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 *몸을 떠나...란 말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지 언제가 미래에 있을 무엇이
아니라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신에 차서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주님을 찾고 바란다는 것은 주님이 속히 오시는 재림을 바라거나 내가 속히 죽어서 주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암이 찾아오거나 불치병이 왔을 때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란 표적으로 여기는 신자들이 있는 반면
주님!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왜 저를 고쳐 주옵소서!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식은 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내가 [주]를 기다리고 내 혼이
기다리며 나는 그분의 말씀에 소망을 두는도다.](시130:5).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것,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주]와 그분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분의 얼굴을 구할지어다.](시105:4).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을 때에 내 마음이 주께 아뢰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27:8).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얼굴을 찾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19절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또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하시고](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간청을 했을 때 주님은 모세에게 4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둘째,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셋째,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넷째,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주의 선하심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사람들의 설명이나 정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의 선하심]은 주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이십니다. 주님 안에는 조금도 악함이 없으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출34:6). 주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십니다. 그리고 주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십니다.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쌓아 두신 주의 선하심 곧 사람들의 아들들 앞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베푸신
그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시31:19).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선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모든 선하심이 우리 앞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은 선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관대하심, 오래
참으심, 풍성함을 모두 멸시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맨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불꽃 가운데서 주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이름이 [I AM]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백성들 앞에 말씀해 주셨고, 백성들은 이 이름이 하나님의 칭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복적으로 구약에 계시된 I AM이 바로 자신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주님이 특별히 택하시고
예정한 사람들에게만 은혜를 제한적으로 베푸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간혹 구원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 자, 긍휼을 베풀 자에게만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은혜를 베풀자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아들일 때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크고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실 수 없지만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참으로 그분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비웃으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잠3:34).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자들을 향해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값없는 호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것도 얻을 근거가 없고, 자격이 없고, 권리가 없고, 무엇
하나 내 세울 수 없는 상태란 것을 알 때 그 자체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 됨, 사악함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더욱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0).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죄로 보지 못하는 것, 자신의 죄악됨과 불법과 사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은혜를 얻지 못하게 하는 걸림입니다. *은혜와 긍휼. 긍휼이란 주님께 범범하여 마땅히 벌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형벌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의를 집행하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는 사랑이 긍휼입니다. 이유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죄인들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를 유예받고, 갈보리에서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을 부주의하게 읽음으로써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전쟁, 질병, 기아, 외적 등으로부터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로부터 혼의
구원, 영의 거듭남을 결코 다루지 않습니다. 신약의 구원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이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을 다룹니다. 환란 때의
구원은 환란 기간을 끝까지 견뎌서 천년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니면 목 베임을 당해서 그들의 혼이 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없이 읽다가 보니까 구원이라고 하면 모두 ‘지옥가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읽어 버립니다. 제가 이곳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분은 이 구절을 질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 그녀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딤전2:15). 그러면 애 못 낳는 여자는 구원 못 받습니까? 혹시 성경 잘 못 번역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구원이란 단어를 모두 ‘지옥으로부터 혼의 구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과 비슷한 말씀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가 없고, 보면 죽는다고 되어 있지만 또 어떤 곳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래서 헷갈려 합니다.
20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20).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아무도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지난 시간에도 다루었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a).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딤전6:16a).
성경은 분명히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본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라고 지칭되었지만 그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했는데 알고 보니 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후에 깨닫고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았음을 말합니다.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하나님을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하였음이라.](창32:30). 기드온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주의 천사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단순히 천사가 아니라 ‘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이르되,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이는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음이니이다, 하매](삿6:22).
마노아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이에 마노아가 그가 [주]의 천사인
줄 알고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삿13:21~22). 이들은 주의 천사를 보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주의 천사로 지칭된 천사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사야, 바울, 요한은 주의 얼굴을 직접 보았지만 모두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를
통해서 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는 [주의 천사]로 보이셨고, 복음서에서는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영광의 구름을 타고 오실 때는 모든 사람이 눈으로 주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현재
성도들은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 성도들은 주님을 보지 못하였고, 지금도 보지 못합니다. 보는 방법은 주님께서 휴거가
되거나 죽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고자 했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21). 하나님은 모세의 소원을 알고 자신의 일부라도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모세가 죽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보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모세 옆이 아니라 주 하나님 자신 곁에 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한 곳을 자신 안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피할 피난처요, 은신처요, 쉼을 얻는 한 곳이 있습니다. “보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이는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저는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내 옆에”라는 말을 “네 옆에”(모세 옆에)라고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And the LORD said, Behold, there is a place by me, and
thou shalt stand upon a rock :(KJV). 모세는 지금 성막 문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 곁에 반석이
있는데 그 사이에 숨으라는 말로 알았는데 어느 날 눈에 비늘이 벗겨져 “하나님 자신 옆에”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라고 하심으로 지금
현재 기도하는 곳보다 더 가까운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모세가 설 반석이 있습니다. 반석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발을 딛고 서야할 곳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전 과정에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물을 내셨던 반석입니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4). 이 반석은 이스라엘을 낳은 반석입니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너를 지으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신32:18). 여기서 반석이 계속해서 물질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묘사된 것을
보십시오. 여기서 반석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이는 그분의 길이 다 공의롭기 때문이라. 그분은
진실하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도다.](신32:4).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할 때,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네 능력의 반석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음이라.](사17:10a)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마7:24)라고
말씀하실 때 반석은 주님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반석이신데 이 반석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물질로서의 반석이라면 그 위에 지었다고 해서 비바람이나 풍랑에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반석은 물질로서의 반석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권능의 반석이십니다.
모세에게 서라고 한 곳은 ‘반석’입니다. 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위라면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반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진노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22절입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에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22). 빛 자체이신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모세 위를 지나갑니다. 태양보다 몇
십 배, 몇 백배 빛나는 불멸의 빛입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해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육신의 눈으로 직접 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눈이 멀어 버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지나가는 동안
손으로 모세를 덮으십니다. 모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반석 틈에서 주님의 손으로 덮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손으로 덮으셨습니다.
율법은 그들의 눈을 덮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똑바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영접할 때 그들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 있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고후3:13-16).
율법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약 150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잠깐 덮으셨습니다.
이들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려면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죄를 사함 받고, 해결되어야 합니다. 반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자신들을 덮어 주셨음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그 뒤에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내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뒷부분을 볼
것이나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 모세는 하나님의 뒷부분을 보았고,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시대,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몸이 죽고 그는 엘리야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와 변화 산에서
우리 주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모세는 살아생전에 그토록 하나님을 보기를 소원했던 일이
죽음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죽음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똑 바로 보게 됩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고전13:12). “그때에는”이란 말은 재림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저 하늘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하며 언제나 우리의 반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신의 집을 세우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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