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4:8-17
요절: 출애굽기 34:14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중에 하나는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과 질투는 정확히 비례하며, 일치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하지 않을 때 그 사랑하는 정도만큼
질투하게 됩니다. 시기심과 질투는 매우 다릅니다. 시기는 죄입니다. 한국인들의 성격을 평가할 때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타락한 인간 본성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주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이는 그가 양떼와 소떼를 소유하고 종들이 심히 많았음이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였으니](창26:14).
남이 잘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나와 상관없는 먼 이웃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나 친 형제, 친 자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현상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친 자매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시기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기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하니](창30:1).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형제였지만 요셉을 향해 시기했습니다.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37:11). 이는 성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위해 시기했고(민11:29), 고라를
비롯한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시기했습니다(시106:16). 잠언 14:30에 말하기를, [건전한 마음은 육체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14:30)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심을 단연코 버려야 하지만 주를 향해 질투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만큼 크고 강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주를 위해 질투했던 대언자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주를 위해 질투하는 사도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함이라.](고후11:2). *하나님의 질투.
이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이었습니다.
8-9절입니다.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하여 머리 숙이고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시옵소서. 이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 우리의 불법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주의 상속으로 삼으소서, 하니라.](8-9).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지만 그들의 죄가 결코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벌하시는 날에 3-4대까지 그 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그는 급히 땅을 향하여 머리를 숙였습니다. 모세는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긍휼과 반드시 벌을 주시는 주님의 공의로움을 동시에 접했던 것입니다. 이 둘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결코 충돌하지 않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모세는
주께 경배하면서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1. 우리 가운데 함께
가시옵소서. 2. 우리의 불법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3. 우리를 주의 상속으로 삼으소서입니다. 모세의 이 기도는
그대로 다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지금은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와 계시며, 앞으로는 친히 영적인 몸을 입고 이 땅에 재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속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는 상속을 받게 하셨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해 두신 것이라.]
(벧전1:3~4). 구원의 상속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 영광을 상속받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임을 고백했습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성경적 관용 표현인데 우리 말로는 “반골 기질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거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목이 뻣뻣한 민족입니다. 비록 이집트에서 400년 이상을 노예로 살았지만 조금도
겸손해지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행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그들은 주변 모든 민족들을 개로 볼 만큼 거만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과연 잘 난 민족인가? 선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만한 탁월한 도덕성이나 민족성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는/ 알지니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이 좋은 땅을 소유로 주신 것은 네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니라. 이는 네가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신9:6)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거만함으로 인해 많은
연단과 매질을 당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민족사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라.](신9:13).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 무가치함,
죄성, 더러움 등을 잘 모르는 성도들은 목이 뻣뻣합니다. 이들의 종교 생활은 잘 할지 몰라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줄은 모릅니다. 겉치레로 길게
기도할 줄은 알아도 상한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할 줄은 모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이런 기질,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너의 반역하는 것과 뻣뻣한 목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보라, 이 날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지금까지 [주]께 거역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하랴?](신31:27).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이런 백성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백성은 교만하고
거만하고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기질이 매우 강합니다”란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이 백성은 목이 뻣뻣합니다.”란 말입니다. 불신과 불순종의 영이
지배하는 이 세대에 우리를 대신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신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10절입니다. [이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맺으리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나 혹은 어떤 민족 중에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보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니라.](10). 모세의 간청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언약 외에 다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맺게 될 새 언약입니다. 주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은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온 백성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1~33). 그러나 이들은 주님이 세우신 새 언약을 거부함으로써 온 세상에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이 환란을 통과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맺어질 것입니다.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보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니라.](10b). 이 말씀은 환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날에 있을 엄청난
일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크고 두려운 일들]입니다(히12:26). 그들이 얻을 상속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차지할 가나안
땅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상속(땅)의 예표입니다.
11절입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것을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리니](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이날-this day)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가나안 땅에 있던
여러 부족들을 모두 쫓아 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물리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임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성도들의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받을 때 우리 자신이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 앞에
주님이 먼저 행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취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거든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승리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모리, 가나안,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 등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을
압도하는 강한 민족들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정복해야 할 여러 가지 습관들, 정욕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갖가지 몸의 정욕들을 처리해 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여러 족속들을 보십시오. 음행, 부정함,
무절제한 애정, 악한 욕정, 탐욕 등이 그런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 말씀의 칼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모조리 처리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죽이려 해도 끄덕도 하지 않던 이런 것들을 주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그런데
앞서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었느니라.” 말씀하실 때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죽은 것으로 여기며,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영적 전투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싸우셨어도 이스라엘은 무혈입성(無血入城)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정복 전쟁을 벌여 나갔습니다. 그들이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이겨 놓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주님이 이겨 놓으신 승리를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12절입니다. [너는 스스로 조심하여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 그것이 네 한가운데서 올무가 될까 염려하노라.](12). 이는 분리를 명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웃 부족들과 사이좋게 살아라”는 것이 세상의 철학이요, 미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는 언약을 맺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한 분리, 비일치, 비동조, 비타협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유익을 바라고 타협을 해 보아야 유익은 고사하고 ‘올무’가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이교도들과 결혼을 금하셨던 것처럼 교회 역시 불신자들과의 금지되어 있습니다. [너는 그 땅의 거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자기 신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가고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며 또 한 사람이 너를 청하면 네가 그의 희생물을 먹을까
염려함이며 또 네가 네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므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가고 또 네 아들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가게 할까 염려함이니라.](15-16).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이런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이것이 신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회요 성도들로 비난을 받더라도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고후6:14).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13). 수동적으로 거리를 두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숲을 베어내어야’합니다.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좋은 방법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노략당하는 믿음을 지키는 방법은 불신자들을 향해 전도든, 거리 설교든, 대화를 통해서든지 간에 복음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주 증거하고 선포함으로 불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제단들과 형상들과 작은 숲을 멸하고 깨뜨리고 베어내 버리십시오. 성도들은 전투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당연한 일입니다만 오늘날 현대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도무지 싸울 줄을 모릅니다. 워낙
싸우지 않다 보니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무장해제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을 잡은 채
마귀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어디가 전선인지도 모른 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싸움이라고 해서 성질 버럭 내면서 말 싸움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교도들처럼 테러를 하고, 종교 전쟁을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엡6:12).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 영적 전쟁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고후10:3~5).
영적 전쟁은 영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13)고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그들의 종교, 그들의 관습,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주어라. 다양성을
인정해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멸하고, 깨드리고, 베어 낼지니라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전쟁입니다.
남과의 전쟁도 중요하지만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 역시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는 육신에 져서 죄의 포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노라.](히12:4). 아무리 믿음이 탁월하고 오랜 세월을 교회에 다녔다 하더라도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2:11)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안에서 참된 자유, 참된 안식, 참된 평강과 기쁨이란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맛보지 못한 성도는 외부의 적들을 상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냉철하게 점검하고 성령으로 가득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 드리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과 싸움으로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14). 이는 성경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질투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나훔서 1:2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주]는 원수 갚으시는 /주/시니라.](나1:2a)고 선포합니다.
주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주가 아닌 다른 것에게 경배할 때 질투하시며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마음에 품을 때 주님은 크게 질투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크고 첫째되는 계명입니다. 주님은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시73:25)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누구와 공유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누구에게 영광을 돌릴 때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구의 도움이니 덕분이니 할 때 주님은 질투하십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더욱 가증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지 마십시오. 이는 무서운 일입니다. [나는 [주]니 이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들어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 사람이 자신의 지혜, 자신의 힘, 자신의 강함을 자랑할 때 주님은 그를 사용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꺾어
놓으신 후에 사용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누구와 공유하거나 훼손당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 자신의 신부, 자신의 백성을 누가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영광이 있은
뒤에 그분께서 너희를 노략한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나니 이는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라.] (슥2:8).
자신의 것에 누가 손을 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질투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대화하던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하여 큰 질투로 질투하며](슥1:14).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큰 질투로 질투하며 그녀를 위하여 큰 격노로 질투하였노라.](슥8:2).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고, 모욕하고, 죽이려는 모든 민족들은 주님의 큰 질투로 인해 멸망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조국, 자신의
민족처럼 사랑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복을 주시고, 형통함을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귀한 피로 사신 교회를 건드릴 때 질투하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해 [내 누이, 내 정혼자는 둘러싸인 동산이요, 닫힌 옹달샘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질투의 대상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분께서 교회를 향해 질투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땅을 위하여 질투하십니다. 일찍이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황무지와 같은 그 땅이 ‘거룩한 땅’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현재도 서로 차지하려고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둘러싼 분쟁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에 [주]께서 자신의 땅을 위하여 질투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리라.](욜2: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땅을 탐내고 약탈하려는 모든 무리들을 향해 주님은 질투하실 것입니다.
질투의 결과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요, 심지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신4:24). 이 불은 모든 것을 다 소멸시킬 수 있는 강렬한
불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라.](히12:29). 주의 질투를 일으키면 그는 불타는 불에 타 죽게
됩니다. 주님의 불은 심판의 불입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주] 네 하나님의
분노가 너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염려하노라.](신6:15).
17절입니다. [너는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말지니라.](17).
모세가 없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부어 만들어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있는 것도 깨뜨리고 부수어야 하는데 만든다는 것은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술자의 손으로 만든 것 곧 새기거나 부어 만든 형상은 [주]께 가증한 것이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한 곳에
두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27:1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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