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4:22-27
요절: 출애굽기 34:27
출애굽기 34장의 전체
요절은 27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이는 내가 이 말들이 뜻하는 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음이니라, 하시니라.](27).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두 번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돌 판을 두 번
기록하셨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한 돌 판을 받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로 인해 이들은 모두
멸망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에 따라 광야에서 모두 진멸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들은 용서를 받고
긍휼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다시 한번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세는 다시 한번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주야로 금식하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언약을 우리는 시내산 언약이라고 말합니다.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그런데 죄는 율법이
들어옴으로써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다! 죄형 법정주의란
관점에서 그 말은 옳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죄는 율법이 있기 전부터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을 범한 죄가 없었고, 율법이
정죄하고 저주하는 죄가 없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 없을 때는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고,
안식일이란 법을 어긴 죄를 범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로마서
5:13을 보십시오. [(이는 죄가 율법 이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음이라.](롬5:13). 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믿음의
선조들이 다 죄인이었고 죄를 범했지만 이들은 아무도
율법을 어긴 죄인으로 정죄 받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가 넘치게 하려
함입니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0). 율법이 들어오면 죄는 더욱 죄가 되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으로 인해 죄는 그 정체를 감출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인해 죄는 살아납니다.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죄가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명령을 통해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7:13). 율법을 통해
죄가 심히 죄되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죄를 알게 되고, 율법의 저주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을 때 그들은
드디어 법치 국가의 기초가 형성되었다고 좋아할 만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본 것은 자신들의 죄악과 죄인
됨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없을 때는 죄가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법이
들어오면 죄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죄가 명령을 통하여
기회를 타서 내 안에 온갖 욕정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명령이 오매 죄가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8-9). 그들은 율법을 받았던 기쁨과
즐거움은 잠시였고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와
심판과 마주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성전에 임했던 영광의 구름(세키나)은 떠나
버렸습니다(겔11:23,24). 남은 자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지만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
임했던 영광의 구름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단지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대언자들은 한결 같이
다가올 메시야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후에 헤롯이 다시
성전을 지어 주었지만 그 역시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이나 대언자들을
보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에는 외경, 위경이
난무하게 되고 거짓 대언자들이 속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출현해서 유대교란 종교가 만들어집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의식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옛 영광을
재현하자는 그런 종교였습니다. 이슬람이 종교인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교는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만든 성전을 다시 한번 파괴해
버리셨습니다(A.D 70).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러 가지 다른 말씀들로 증거하고
격려하여 이르되, 이 구부러진 세대로부터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 하니라.] (행2:40). 베드로는 유대교의 종말,
성전의 파괴, 이스라엘의 멸망 등의 일련의 과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구부러진 세대]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접하고도 계속해서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주장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성전 밖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
(히13:13).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에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완전한 분리(18)
둘째, 완전한 성별(19,20) 셋째, 완전한 복종(20)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은 씨를 뿌릴 때이든지 추수할
때이든지 상관없이 지켜야 합니다.
22절입니다. [칠칠절(七七節)
곧 밀 수확의 첫 열매 명절을 지키고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收藏節)을 지킬지니라.](22). 칠칠절은 흔히
오순절로 알려진 명절로서 ‘밀 수확의 첫 열매 명절’입니다.
레위기 23장에 절기들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나오는데
오순절의 의미는 첫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드러냅니다(레23:15-21).
예수 그리스도는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고전15:23a).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 역시 첫 열매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오순절에 주의 성령이
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습니다. 오순절은 이미 2000년 전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환란을 거쳐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들 위에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겔37:16).
수장절이란 명절은
장막절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절기는 천년 왕국을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 모든
남자 자손은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니라.](23). ‘한 해에 세 번’은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을 일컫습니다. 이 세 절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주께 구별된 절기로서 구약입니다. 오순절은
은혜의 택함에 따라 남은 자들이 주님을 믿는 이 시대로서
교회 시대입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모두 다시 모이고
영토를 회복한 천년 왕국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
다윗의 쓰러진 장막을 다시 건축하고 내가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건축하며 내가 그것을 세우리니 이것은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 하셨으니] (행15:16~17). 이 세 절기는 성 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합니다.
유월절을 포함한 무교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칠칠절(오순절)은
성도들 위에 성령이 임함으로써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예표합니다(행2:2, 욜2:28). 장막절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는 하늘의 왕국을
예표하는 절기이므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이
순서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잃어 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드라크마를 잃어
버린 여인이 밤에 불을 켜고 찾는 모습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집나간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성부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마련한 주의
명절들에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나와서 그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 명절 잔치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은 혼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공동체였듯이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모여야 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133:1).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약의 교회 역사와 일치합니다. 이들은
처음에 함께 모여 명절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처음에 완전히 하나 되었음을 봅니다.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이스라엘은 명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이라고 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고 이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형제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 틈에 중세 천년의 긴
세월은 암흑 시대라 불릴 만큼 ‘큰 바빌론이란 음녀’에게
완전히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고국으로 돌아왔듯이 교회의 몇몇 남은 자들이 종교 개혁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언약을 부패시켰습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리니 이는 제사장이 만군의 [주]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썩게 하였느니라.] (말2:7~8). 이는
오늘날 교회와 동일한 모습입니다. 마지막 세대의 교회는
성경으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성경으로 사람들을
부패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시중에는 수백 종류의 이상한 성경이 팔리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다른 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만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먹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 행태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빵을 주의 제단 위에
드리고, 주의 상을 업신여겼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빵을
내 제단 위에 드리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나니 이는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상은 업신여겨도 된다, 하기 때문이니라.] (말1:7).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예 주님을 교회 밖에다 밀어내
버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다오”하는 실정입니다. 자신들이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열린 예배, 전통 예배, 찬양 예배 등 다양한 이름을
갖다 붙이며 마음대로 드립니다. 더러운 빵을 제단 위에
드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가?”란
말은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변명입니다. 헌금도 하고 모임도
갖고 할 것 다 하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고 항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않고, 뜻과 정신만 존중하면
된다고 떠듭니다. “주의 상은 업신여겨도 된다.” - “주의
말씀은 업신여겨도 된다.”
24절입니다. [이는 내가
민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경계를 넓힐 것임이니 네가
한 해에 세 번 [주] 네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주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지라도 외적의 침략, 전쟁, 도둑질 등에 대해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를
기쁘시게 하면 그분께서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16:7).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 자신의
땅을 지키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면
빼앗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키시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일주일 씩 명절을 지킨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민족들을 쫓아내고,
경계를 넓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대한 특권이요, 보상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느라고
집에 도둑이 들고 화재가 나고 여러 가지 사건이 터졌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교회를 가고,
교회 수련회를 가고, 해외 단기 선교를 가는데 왜 나의 집을
보호해 주시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기도를 가다가 교통 사고를 당하고, 철야 기도를 갔다
오다 사고를 당했다는 말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
두려워서 예배를 못 나오고, 교회에서 마련하는 행사들을
못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 간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었다면 내가 교회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그
도둑은 강도가 되어 나의 몸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내가 수련회 간
사이에 집에 불이 났으면 내가 집에 없었기 망정이지
있었으면 온 가족이 다 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아시고 컨트롤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중에
공장이나 가게나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까?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구약 성도들에게는 물질적 손해를 전혀 입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신약 성도들에게는
영적 손해를 전혀 입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말씀을
지키려 하는지 시험하십니다. 그런 시험을 통과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시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민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경계를 넓힐 것임이니
네가 한 해에 세 번 [주] 네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24).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 단
한 차례도 외적의 침입이 없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얼마나 적들이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천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적의 침입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말하기를,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단4:35). 수많은
이교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수의 많고 적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등 무슨 힘을
발휘한다 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 앞에는 모든
민족들이 아무것도 아니니 그분께서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헛된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7).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제력,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야
말로 성도들의 영적 평안과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때로 성도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하더라도 결국
기도한 후에 그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내가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라는 그런 정의를
내린 듯 합니다. 기도했다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도 한 후에 자신이 다 해야 아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만군의 [주]께서
계획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펼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하나님은 신자들의 마음만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의 마음도 움직이십니다. 왕들과 권세자들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왕의 마음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이
마치 강물과 같으니 그분께서 친히 원하시는 곳으로 그것을
돌리시느니라.] (잠21:1).
25절입니다. [너는 내
희생물의 피를 누룩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희생물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25). 누룩은 언제나 '악함'의
상징입니다. 성경을 잘 못 이해해서 ‘누룩 선교회’, ‘누룩이
되자’ 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누룩의
성경적 의미는 ‘악함’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네
희생물”이 아니라 “내 희생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은 사람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의 것이란 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하고](창22:8). 주님은 자신이 친히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시고, 유월절 희생물로 드려지셨습니다.
“유월절 희생물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가 주님의 몸을
먹습니다.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 일을 다음 날로 미룰 수 없습니다. 주님과
친교는 피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영적 양식은 다음
날까지 연기되거나 단절될 수 없습니다.
26절입니다. [너는 네 땅
열매의 처음 것을 가져다가 [주] 네 하나님의 집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26). 헌물에 대한 규정입니다. 이 부분은
신명기 26:1-11절에 매우 자세하게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헌물을 드리도록 명한 주님의 뜻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땅에서 처음 난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땅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
농사를 짓습니다. 땅의 열매의 첫 소산물을 드림으로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도 같은 원칙입니다. 둘째, 땅의 첫 열매를
드림으로써 이들은 하나님이 첫 열매를 주신 것처럼 수확을
주실 것이란 사실을 믿습니다. 첫 열매는 수확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다 본 후에 거기서 얼마를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닐 첫 열매를 보고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 때 수확은
보장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첫날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대로 헌금을 드립니다. 왜 첫날 드립니까? 이번 주에는
돈을 못 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헌금을 드리는 대신
저축을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소출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을 때 이 부분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처음 난 것을
드리면 사실 전부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셋째, 첫 열매를
드릴 때 제사장 앞에서 왜 이것을 드리는지 고백하고
드리도록 했습니다. 첫 열매를 드릴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특권입니다. 우리는 헌금이나 헌물을 드릴
때 왜 드리는지 알고 확신과 기쁨으로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그들은 이집트에서 땅이 없었으며, 열매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고백했습니다.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모든 드림의 기초가 됩니다. 땅에서 난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다양한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된 경배입니다. 처음 난 것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께 모두 바칠 수 있는 헌신의 고백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첫 열매는 반드시 무조건 주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를 주께
드림으로써 성도들이 주님께 드려진 희생물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6절 후반부입니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26b). 이
말씀은 성경에 세 번 반복되는 금지 명령입니다(출23:19, 34:26,
신14:21). 저는 이 구절이 모든 가축 농가에 크게 붙여 놓아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 돼지, 닭, 오리와 같은
가금류나 다양한 육축들을 생산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몰 인간화, 비인간화 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교도들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차마
끔찍한 일이라도 미식가들은 그런 일을 잘 합니다. 인간의
양심과 본성에 거스르는 음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미의
젖은 새끼가 먹고 살아야 할 생명의 양식입니다. 새끼에게
물려야 할 젖을 짜서 새끼를 삶아서 먹는데 쓰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광우병- 소의
태반을 사료로 갈아 먹인다. 초식 동물에게 고기를 갈아서
사료에 섞어 먹임으로 생기는 병. *조류 독감.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사료를 먹임으로써 생기는 병이다. 빠른
성장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꾀하다 공멸한다.
27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이는 내가 이
말들이 뜻하는 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음이니라,
하시니라.](27).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신 말씀들을 모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이 언약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언약을
받을 때까지 이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언약이 아니라 모두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새 상속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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