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4:18-21

요절: 출애굽기 34:20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셨습니다. 첫째,
무교절을 지키라(18). 둘째, 가축의 첫 새끼는 주님의 것이니
다 주님의 것이다(19-20). 셋째, 안식일을 지키라(21). 넷째,
칠칠절과 수장절을 지키라(22). 다섯째, 한 해에 세 번
하나님이 정한 날에 함께 모여 명절을 지키라(24). 구약의 3대
명절-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수장절(장막절).
여섯째, 희생물을 드리되 누룩과 함께 드리지 말고 유월절
희생물은 그 다음 날까지 두지 말라(25). 일곱째, 마지막으로
그 땅에서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주님께 드리라(26)입니다.
절절히 간략하고도 짧게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두 번째 산에 올라갔을 때 돌 판에 다시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일곱까지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하나님의 특별한 요구를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과 더불어 반드시
지켜야 할 거룩한 율법이었습니다.


이 일곱까지 명령은
자세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온 세상을 구원할 십자가 사역에서부터 천년왕국
때까지의 일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다는 모형입니다. 칠칠절(오순절)은
믿는 이들 위에 성령이 임하는 날입니다. 장막절은 주님의
재림을 예표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와 의식,
종교적 행사 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이들이 율법의 인도를 받아 주님을 믿도록
아주 정밀하게 안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대한 것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입니다.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지니 이는 네가 아빕월에
이집트에서 나왔음이니라.]
(18). 무교절은 유월절을
포함해 일주일입니다. 무교절의 첫날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 그들이 어린 양을 잡아먹고 아침 일찍 이집트를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이 날이 죽은 날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이 날은 명절로 주어졌습니다. 명절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먹고 즐기는 날이며 교제의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절에서 볼 수 있는 술이나 가무는 없지만
이 날은 거룩한 집회로 모이는 날이요, 함께 교제하는
날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명절이 아니라 ‘주의 유월절,
주의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성도들에게는 즐거운 명절이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성도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의 피를 통해
구속받은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
(고전5:7~8).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은 성도들의 일생을 예표합니다. 거룩한 삶의 시작은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비롯됩니다. 성결의 기초는 어린 양의
피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 자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히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롬6:4-8).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이라.]
(롬6:6~7).
이스라엘의 유월절을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 어린
양의 죽음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이지만 죽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죽음이 거룩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죽음을 어린 양의 죽음으로만 두신 것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
그 죽음을 실제화시키심으로 믿는 자들은 다 죽음에
동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렇게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6:11).
이는 믿음의 실제적 적용입니다. 정보나 지식이 실제화가
되려면 거기에는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가상의 정보,
거짓된 정보를 받아 들이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정보와 지식은 정확해야 합니다. 사실(fact)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정확한 영적 지식이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활용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지식은 믿을 때 우리
안에 진리로서 힘이 됩니다. 실제적 능력이 됩니다. 믿음과
거룩한 순종이 있을 때 진리의 지식은 참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고,
내가 죽은 것으로 여겨지면 다음엔 그 죽음이 우리 속에
실제가 됩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11).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굳게 믿지만 자신이 죽은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죽음인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 제자의 삶이며, 영적인
삶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태어난 생명이란 점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에
자신을 넘겨 줄 때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에
드러나게 됩니다.


19절입니다. [태를 여는
것은 다 내 것이니 네 가축 가운데 첫 새끼로 수컷은 소든지
양이든지 다 그러하니라.]
(19). “태를 여는 것은 다 내
것이니” -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생물이 다 주님의 소유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자녀는 결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때로 첫 아들만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을 겉
핥기로 읽은 것입니다. ‘태를 여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
(시127:3).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곧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13:2).
처음 난 것만이 주님의 것이 아니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나 주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주]께 가져오는바 육체의 태를 연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서 처음난 자는 반드시 대속(代贖)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첫 새끼도 대속할지니라.]
(민18:15). 나의 것,
너의 것 이렇게 구분하지만 근본적으로 다 주님의 것이란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탐욕에서 벗어나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은 본래 다 주님의 것인데 내가 잠시
맡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란 점입니다.
자식도 그렇고, 소나 양도 마찬가지요, 들에서 난 모든
소출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물질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자신이 주인인 줄로 아는 것은 이미 그가
도둑이요, 강도임을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이 부자의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이는 강탈이 아닙니다.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전 부분에서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주권
신앙입니다.


참된 헌신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며 내 백성은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자원하여
드릴 힘이 있겠나이까? 이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음이오니 우리가 주의 것에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29:14).
자신의 헌신을 자신의 의로 여기면 그 의는 헛된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드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 그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이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자녀들을 양육할 때도 동일한 진리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는 물질 만능주의요, 물신(맘몬)
숭배로 가득한 시대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제 마인드를 길러
주고, 돈 벌이에 모든 것을 집중하도록 교육하는 시대입니다.
때로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는 아름다운 기부자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학2:8). 이 사실을 잊으면 믿음의
성장이나 진보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일 달러짜리 한
장도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헛되이 낭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고전4:2). 때로 성도들은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비유
중의 상당 부분은 돈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돈을 주제로
자주 설교하셨습니다. 자신의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은 주님께 받은
것으로 장사하는 장사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돈(므나,
달란트)로 이 땅의 창고가 아니라 저 하늘에 많은 보화를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도둑이 들지도 훔치지도 못하나니]
(마6:20).


20절입니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代贖)할 것이요,
대속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들 가운데
처음 난 자들은 다 대속할지니라.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보이지 말지니라.]
(20). 이 말씀은 출애굽기 13:13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하십니다. 대속하지 않으려면 목을 꺾으라고
하십니다. 죽이란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나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되새김질도 하지 않고, 굽이 갈라져 있지도
않는 동물입니다. *굽이 갈라진 발- 성도는 두 가지 성품을
지닌 분리된 자들이다. 겉사람, 속 사람. 되 새김질-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이 두 가지 일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마치 나귀에게 아무 상관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귀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말합니다. 욥기에 [이는 비록
사람이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날지라도 그 허망한 사람이
지혜롭게 되고자 하기 때문이니라.]
(욥11:12)고 말씀한
대로 사람은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섰던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사6:5). 사람이 아무리
깨끗한 채 해도 하나님 앞에서 들나귀나 다름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사64:6).
하나님은 나귀같은 저희들을 위해서 어린 양으로 대신
대속해 주셨습니다. 만약 이 대속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목이 부러저 죽어야 합니다. 나귀의 삶과 죽음이 어린
양에게 달려 있듯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죽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나귀는 어리석은 동물,
고집이 세고 완고한 동물을 예표합니다. 이는 동물에 대해서
조금의 지식만 있어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서
나귀는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4).
나귀의 어리석음과 자연인들의 어리석음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받아 들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 모두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같이 걷지 말라.
그들의 지각(蜘痂)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無蜘)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
(엡4:17-18). 이방인들의 지각은 나귀처럼
어두워져 있고, 그들의 마음이 눈이 멀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귀는 어린 양으로 대속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리석음, 무지, 눈먼 것을 고쳐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신 것과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
(요일5:20). 나귀와
같은 저희들을 목자의 인도를 받은 어린 양으로 삼아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가
나귀와 같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마치 개나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듯이 자연인들에게는 영적
보화들이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얼마나 짐승같은지를 보여 주십니다. 매일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지를
연일 보도 해 주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짐승임을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3:1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상태를 드러내 보이실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더러운 걸레
같은 자임을 알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구속해 주십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을
구속할 것이요”란 말씀이 바로 구약에 드러난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다시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20절입니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代贖)할
것이요, 대속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들 가운데 처음 난 자들은 다 대속할지니라.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보이지 말지니라.]
(20).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보이지 말지니라.”.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게 주리라 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좋은 도시들을 주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집 곧 좋은
물건이 가득한 집을 주시고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주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올리브나무를 주사 ...]
(신6:10~11a).
이들은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들고 나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벧전2:5).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이것이 성도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소나 양을 잡는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 아닙니다. 소나 양과 같은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드릴 영적
희생물이 있어야 합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나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충만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의 희생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이 무엇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들이 주님 앞에 들고
나와야 할 영적인 희생물이란 자신의 몸입니다. 주님은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라]
고 말씀합니다(롬12:1).
몸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우리 몸은 주님께서
사용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내어 드려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희생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3).
내 손과 발, 내 눈과 귀가, 입과 혀가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준다면 구원받은 성도로서 치욕이요, 주님께
반역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아 자유를 누린다 해도 그는
다시 죄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우리 몸은 주님께 드려질 때만 효용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영적인
희생물은 [헌물]입니다(빌4:18).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
형제들을 돕는 헌물은 달콤한 향기며, 받으실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4:1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생물을
드리십시오. 우리가 힘써 일하는 것은 형제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영적 희생물’을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희생물은 찬양과 감사입니다(힙13: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로 그분을 크게 높이리니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시게 하리라.]
(시69:30~31)고
했습니다. 매사에 주를 찬양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입술은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인
희생물은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
(히13:16).
여러분이 선을 행할 때, 무엇을 나누어 줄 때 주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삶의 경험과
지혜 등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어 주십시오.
주님은 넘치게 보상해 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니라.]
(눅6: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게 하여 사람들이 너희 품에 안겨 주리라. 이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라.]
(눅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됩니다(행20:35).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여러분은 혹시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은 아까와 하고, 남이 가진 것을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주려고 하십시오.
주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행3:6)라고 했습니다. 주는 것이 영적
희생물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은 기도입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
(시141:2). 기도는 주님 앞에
드려지는 향기로운 향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향을 쉬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영적 제사장들임을
명심하십시오. 사도 요한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그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향이란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리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
(계5:8),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
(계8:3). 오늘
여러분은 주님께 향을 드렸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향을
올려 드리는 제사장들과 같이 매일 주님께 기도의 향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21절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에는 안식할지니 밭을 갈 때에나
거둘 때에나 안식할지니라.]
(21). 주님은 안식일에
안식하도록 하셨는데 밭을 갈 때에나 거둘 때에나 반드시
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쁘다,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안식일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주실 참된
안식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언제 안식하셨습니까? 천지
창조를 다 완성하신 후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무엇이 주어집니까? 안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성된 속죄 사역 위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안식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통해 안식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소망합니다.
그것이 안식의 본질입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에 안식하는
것 외에 한 안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나니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 믿지 아니하던
그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9-11).
안식일만 지키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내가 살면 안식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참된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육신이 성령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대적할 때 안식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자아를 완전히 처리할 때 그에게는 참된 평강과 안식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교회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안식’을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마11:28-29). 참된 안식을
소유하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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