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4:28-35
요절: 출애굽기 34: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처음에 산에 올라가 40일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돌 판에 율법을 써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산에 올라갈
때 미리 비상식량을 준비해서 어깨에 짊어지고 갔다거나
따로 음식을 해 먹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40일간 금식했습니다. [그때에 내가 돌판들
곧 [주]께서 너희와 맺으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 밤낮 사십 일을 산에 거하며 빵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신9:9).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혼자 걸을 힘도 없거니와 생사 간의 기로에
왔다 갔다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미음이나
죽을 먹으면서 몸을 회복해야 합니다. 40일 금식을 하고
내려온 후에 모세는 백성들의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 오히려
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 판을
만들어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연이어 40일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몸에 무리를 주어
죽음에 이르기 십상인 그런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광야에서 행하신 40일 금식을 모방해서 40일 금식
기도에 도전하는 경우를 봅니다. 성령의 권능을 얻기 위해서
사역을 앞둔 목회자들이 많이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 분들은
40일 금식 후에 대부분 반 쯤 죽은 상태로 나옵니다. 곧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연이은 사십일
금식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백성들이나 장로들 중에
누가 산에 올라가 탈진해 있는 모세를 업고 왔다든가 들
것에 실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무거운 두 개의 돌 판을
들고 유유히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신의 음식 외에 또 다른 먹는 음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힘을 주는 것은 육신의 음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땅에서 나는 어떤 기름진 음식보다 더
몸을 강건하게 할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마4:8)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그는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년 동안 배운 진리가 이것입니다(신8:3).
욥이 일찍이 고백한 대로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 (욥23:12)란 말씀이 우리의
묵상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되기를 빕니다. 성경은 단지 읽는
책이 아니라 먹는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전도를 잘하기 위해서,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서, 지식을 얻기 위해서 등등의 다양한
목적보다 성경 그 자체가 나의 영적 건강과 성장, 생존을
위한 양식이기에 먹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경을 양식으로,
음료로 먹고 마실 때 그는 놀라운 성장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먹을 양식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여행하는 도중에 주리시고 갈증이 생기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주님은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잡수소서, 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요4:31~34). 이런 양식을 먹어 본
적이 있습니까? 성도들이 영적 양식을 먹는 일을 게을리
함으로써 허약 체질이 되고, 병이 걸리고, 쓰러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날마다 일정량의 말씀을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함으로써 영에 양식을 공급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넘치도록 하는 일은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롭게 합니다. 세상 일, 육신의 일은 몸을 지치게 하지만 주
안에서 행하는 일은 새 힘을 솟아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그 사람에게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두 번에 걸쳐 40일
금식을 했지만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오히려
강건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좋은 음식만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사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콩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뒤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을 관찰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는 대로 당신의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이 일에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여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하더니 열흘이 끝났을 때에 그들의 얼굴이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기름지게 보이니라.] (단1:12~15). 콩과 물을 먹은 아이들이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더욱
기름지게 보였습니다. 탐식은 우상 숭배입니다.
28절입니다. [모세가 [주]와
함께 밤낮 사십 일을 거기 있으면서 빵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그분께서는 언약의 말씀들 곧 열
가지 명령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출34:28). 하나님은
모세에게 들고 오게 하신 돌 판에다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내용은 없습니다. 처음 돌 판은
백성들의 배교로 땅에 떨어지고 깨어졌지만 두 번째 돌 판은
언약궤에 들어갑니다. 전에 모세는 산에서 내려 올 때 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전에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어 춤을
추고 있었지만 이제는 겸손하게 주의 종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일관적인 진리 중의
하나인 첫 번째 것을 폐하시고 두 번째 것을 세우시는 ‘후자
선택의 법칙’을 배웁니다.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 택함을
받고,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택함을 받듯이 언제나 성경은 첫째 것이 아니라 둘째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역시 그러합니다. 이는
육신에서 난 것이 반드시 한 번은 심판을 받아 죽고 새롭게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9절입니다. [모세가 그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그분과 말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의 피부가 빛나던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29). 모세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친구처럼 대화했습니다.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출33:11a)고 말합니다. 모세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대언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주의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대언자는 모세가 유일했습니다. [그 뒤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나니 이
모세는 [주]께서 얼굴을 마주 대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모세는 자신과 같은 대언자 하나가 이스라엘에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얼굴에만 빛이
났습니다. 후에 주님은 변화산에서 얼굴은 물론이려니와
옷까지 모두 다 버리셨습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마17:2). 주님의 얼굴은 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땅에 계셨지만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주님 안에 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모세와 같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고후3:18).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봅니다. 우리는 육신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사람에 날로 새롭게 변화되고, 거기서
빛이 납니다.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이는 없습니다. 물론 인상이 펴지고, 얼굴이 밝아지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예는 많지만 모세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 사람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며, 빛을 발합니다. 성도들은 속에서
타오르는 빛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빛의
자녀들로서 빛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얼굴이 빛날 수 있는가? 이는 좋은 화장품을 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속에 빛을 품고 있어야 하며,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붙어야
합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 꺼져가는 심지처럼 연기만 내는 성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①
주께서 자신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실 때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은 흑암처럼 어둡습니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도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는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니라.](고후4:6). 이 빛을 받은 사람은
얼굴에 빛이 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엡5:14).
②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말씀의 빛이
우리 속에 비추어질 때 영은 환하게 밝아집니다.
③
지혜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냐? 누가
사물에 대한 해석을 아느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뻔뻔함이 변하리라.](전8:1).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을 구석구석
환하게 비추어 주십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약1:5).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시험을 이기고 악을 피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④
성령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즙과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심장을 강하게
하는 빵이 나게 하셨도다.](시104:15). 기름이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함과 같이 성도의 마음 속에 있는 성령은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하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서신’을 읽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서신이 아닙니다. 성경은 종이에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서신이요, 사람들은
책으로 된 성경을 읽기 전에 영으로 쓰인 그리스도의 서신인
성도들을 먼저 읽게 됩니다. [너희는 우리의 서신이니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고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2-3).
구약의 모세가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신약에는 스데반의 얼굴이 그러했습니다. [공회
안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스데반을 똑바로 바라보니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공회로 잡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두려움이나 피곤한
기색이나 짜증이 아니라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빛이
나는 줄을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남들이 알았습니다.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의 향기, 빛 비추임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려고 하지만 주님과 깊은 친교를 나눈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주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먼저 그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등잔불을 켜서 통 밑에 두지 아니하고 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너희 빛을...
30절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보니, 보라, 그 얼굴의 피부가
빛나매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라.](30).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만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합니다. 모세의 얼굴이 빛났듯이 모든
성도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이제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 (행4:13).
사람들은 베드와 요한의 담대함, 지혜, 증거의 능력이 주와
함께 있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빛 가운데서
걷는 사람은 빛을 숨길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는 모세의 직무가 사망의 직무요,
정죄의 직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이는 정죄의 직무도 영광이 될진대 의의
직무는 영광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라.] (고후3:7~9).
모세는 가슴에 하나님이 새겨준 돌 판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 손에는 율법을 안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비추이는 빛은 우리 속에 죄를 환히 드러내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그 빛 앞에 서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가까이
나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들어오면 모든 숨은 죄가
다 드러납니다. 우리의 양심과 의식 깊은 곳에 있는
더러움이 다 드러납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 그 눈을 마주
대할 때 자연스럽게 그들은 두렵고 위축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 빛은 비록 적기는 하지만 분명히 주의 영광의 빛이요,
거룩함과 공의를 드러내는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빛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움을
보았습니다. 속죄의 피가 없이는 그 앞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접근할 수 없는 빛입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6:16).
오직 십자가의 피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만이 그
빛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혈 없이 주님의 빛을
보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요, 생명이 아니라 사망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투영된 적은 빛에도 나아가기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31-32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치리자가 모세에게
돌아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뒤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므로 그가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으로 주니라.](31-32).
모세는 자신이 산에서 들은 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명령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백성들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이들은 율법 아래서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3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33).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더욱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을 가린 것입니까?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13에 밝혀 두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같이 하지
아니하노라.](고후3:13). *the end of that which is abolished.
여기서 “사라진 것의 마지막”이란 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율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은 연약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해졌습니다.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통해 폐했다는 것입니다(마5:17).
[앞서 나가던 명령은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으니](히7:18). [원수 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엡2:15). 모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없어질 영광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율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들을 죄 아래 가두어 두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완성자시오,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율법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아직도 율법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 있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 (고후3:14~16).
34-35절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주] 앞에 들어가서 그분과 말할 때에는 나올 때까지
베일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렀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모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나는 것을 보므로 모세가 그분께
말씀을 드리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34-35).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베일을 벗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쓴 이 베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덮어져서 아직도 벗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집니다(고후3:16).
성경에서 베일(휘장)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베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히10:20).
둘째, 베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온 우주의 옷입니다(히1).
셋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습니다. 육체를 입으신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드러나셨기 때문입니다(고후3-5). 넷째,
베일이 벗겨지면 영광이 드러납니다(고후3:14-16). 다섯째, 이
우주의 모든 베일이 다 벗겨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모세(II) (0) | 2006.08.22 |
---|---|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모세(I) (0) | 2006.08.21 |
시내산 언약 (0) | 2006.08.20 |
하나님의 요구 (0) | 2006.08.20 |
질투하는 하나님 (0) | 200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