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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신18:15,18

요절: 신18:15,18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모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표론적으로 성경을 볼 때는 그 예표에 해당하는 진리만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때로 예표를 수학 공식처럼 똑 같은
방정식을 풀듯이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간단한 예로 아담을
봅시다. 그는 인류의 첫 사람이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입니다. 아담이
아내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 역시 교회를 얻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담이 깊은 잠(죽음)을 자고
그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얻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옆구리(갈비뼈)를 찔리시고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신부를 얻습니다. 아담은 속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먹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죽음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아벨 역시 믿음으로 피를
흘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는 바른 예배,
바른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의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는
이런 점에서 성경의 주요 인물들은 최소한 한 두 가지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역사적
사건, 역사적 인물들을 읽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습니다. 아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믿음의 인물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성품, 사역이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약의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나 모세의 생애는 거의 모든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도 모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사역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사랑하는 마음.
모세는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목자였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의 원천, 바탕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주거니와”(요10:11)란
말씀대로 그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우상 숭배로 위험에 놓인
백성들을 향해 보여 준 그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출32:32). 진정한 민족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이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는 육체에 따른 내 형제, 내 친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임이라.]
(롬9:3). 동족을 향한 이런 뜨거운 사랑이 복음
전파의 동기요 힘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은 그들 안에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훈련이나
교육으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 그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부어 주신 사랑이 없는데
사랑하는 것은 위선과 가식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모세나 바울이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
사랑은 모두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동일한 것이요,
동질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부어 주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
(롬5:5).이
사랑을 부음받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는 주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2.
용서하는 마음.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오직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민12:1~2). 모세는 친 형제, 자매에게 비방을
받고 시기와 반역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징계하거나
지위를 박탈하거나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다른 모든 죄는 용서하지만 반역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잠잠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조건없이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원수들을 향해 단 한 마디도 저주나 욕설이나 대적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
(벧전2:22~23). 주님은 도리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눅23:34). 마찬가지로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
(민12:13).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야
말로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犯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교회를 오고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죄 사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나의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고 되뇌이지만 자신 안에 실제적인 죄의
용서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안식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는 주님과 나와의 문제 이전에 내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평생을 함께
삽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친구
지간에도 그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교회 내에도 비슷한
문제가 여전히 상존합니다. 형제들 간에 용서가 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쓴 뿌리가 나오고 많은 사람들을 더럽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참다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아를 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의 본성, 육신이 처리 받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하며 눈물을 흘려도 그 순간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은혜와 긍휼을 깊이 묵상하고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은 그 누구를
향해서도 조건 없이 무제한적으로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犯法)하거든
그를 꾸짖고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가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범법하고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이르기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하시니라.]
(눅17:3-4). 우리는 누구보다 더 잘났기 때문에
아량을 베풀고 동정을 베풀고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탕감 받고
용서받은 자임을 인지하고 깨닫기 때문입니다.


3.
언약의 중재자.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이며 동시에
언약의 중재자였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이는 내가 이 말들이 뜻하는 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출34:27).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또한
그분께서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우신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이라.]
(히8:6). 주님은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주님으로 인해 율법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주님은
언약의 중재자이실 뿐 아니라 "언약의 보증"이
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상속/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7:22).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이 되어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상속의 보상을
주십니다. 언약은 중재와 보증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믿는 바 새 언약은 영원히 변할 수 없고,
확실한 것입니다.


4. 물로
형제들을 씻김.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레8:6). 모세는 제사장이 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어 주었습니다. 주님 앞에선
제사장들은 먼저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율법대로 짐승들의 피를
제단에 드리는 제사장들이었다면 우리는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벧전2:5). *영적 희생물- 감사, 기도, 찬양, 헌물,
우리 자신의 몸. 우리는 왕가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벧전2:9a).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물로 깨끗이 씻겨 주셨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여]
(요13:4~5). 성경에는
성도들을 씻기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성령,
말씀의 물입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을 물로써 씻기시며,
목욕한 자들이 항상 해야 할 일임을 일러 주셨습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쉽게 더러워지는 발을
씻듯이 성도들은 늘 말씀의 물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의 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몸이 먼지를 타고 태를 타듯이 우리의
영혼은 죄로 쉽게 더럽혀집니다. 성도들에게 물은
말씀입니다.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요15:3).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엡5:26).
하루라도 말씀을 접하지 않으면 죄의 더러움이 금방 우리
영혼을 흐릿하게 하며 검게 해 버립니다. 양심은 점점
무디어지고 영적 감각은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히10:22).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씻겨 주십니다.
여러분이 매일 하루 30 페이지씩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물로 씻기는 일은 섬김을
나타냅니다. 누구를 씻기는 일은 낮아져 섬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씻깁니다. 부모이지만 자식 앞에 낮아져
섬기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라.
높아지고자 하는 자, 위대해 지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언제나 형제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섬김의 물을 준비하십시오. 그가 가장 큰 자입니다.


5.
완벽한 순종.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종들이 또한 순종의 종들이었음을 압니다.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었던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 지폐의 양면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면만 있고 다른 면이 없는 동전을 주화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손바닥과 손 등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손바닥은 있지만 손 등이
없는 그런 경우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과
행함에서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그와 같이
행하되 곧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출40:16). *다 행하였더라.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믿었을
뿐 아니라 모두 행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명령들을 모두 지켜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노라, 하시느니라.]
(히10:7).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거나 이해해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행하러” 왔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지혜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행할 의지, 동기, 목적만 있으면 있습니다.
순종은 감정이 아니고, 이해가 아닙니다. 순종이란
의지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행할 의지가 있다면 그 힘과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주님이 함께 해 주시고, 우리
안에서 일해 주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행할 의지가 전혀 없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주의 뜻을 제대로 알면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주님의 뜻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주님의 순종은
완벽한 순종이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빌2:8). 때로 어떤 성도들은 무작정 행함,
순종을 외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도 없이
육신의 힘과 지혜로 종교 생활을 합니다. 순종이란 믿음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말씀에서 나듯이(롬10:17),
순종은 말씀을 믿을 때 그 믿는바 대상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믿음이 없으면 당연히
순종이 있을 수 없고, 행함이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행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믿는 바 그것이 바로
나의 행함의 대상입니다.


6. 일을
마치심.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마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완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가
또 성막과 제단 주위에 돌아가며 뜰을 세우고 뜰 문의
현수막을 다니라. 모세가 이와 같이 일을 끝마치니라.]
(출40:33).
*모세가 이와같이 일을 끝 마치니라.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사역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끝마쳐서 아버지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끝마쳐서. 주님은 다 마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다 이루었다.](요19:30).
주님은 일을 마쳤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점에서
동일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딤후4:7).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마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에게 달려야 할 길을 주셨고, 하라고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큰 것일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주신 일을 현재 신실하게 감당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숨이 거두어지는 순간 “나는
일을 마쳤노라” 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십시오.


7.
백성을 축복하다.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축복했습니다. [모세가 그 모든 것을 본즉, 보라, 그들이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되 참으로 그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출39:43).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축복하시고
누구를 저주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원리는 이삭,
야곱,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하니라.]
(민24:9b). 모세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그들의 반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주님을 버릴 것이란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올림을 받아 하늘로 들어가시니라.]
(눅24:50~51).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승천하셨습니다. 이
땅을 떠나 승천하신 마지막 사역은 축복입니다.


8.
죽음이 백성들의 유익이 되다.
모세는 마지막에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해 분노하며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물을 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모세로
인하여”라고 말하지 않고 “백성들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모세에게 미친 화는 백성들로
인한 것이라고 거듭 말합니다. [그들이 또 다툼의 물에서
그분의 노를 일으켰으므로 그들로 인하여(위하여) 모세에게
화가 미쳤나니]
(시106:32). *for their sakes. [[주]께서 너희로
인하여(위하여)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것으로 충분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3:26) *for your sake. 하나님은 백성들로
인하여 모세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하게 예표하는 예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이 모든 백성들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더라.]
(요11:49~50).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고,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수여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약속의 땅까지만 인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죽음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유익한 것이고,
우리 주님의 죽음 역시 그러합니다.


9. 또
다른 목자를 세우다.
모세는 자신의 사역이 끝난
후에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또 다른 목자를 세웠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들 앞에 나가고 들어오게 하시며 또 그들을
인도하여 내고 들어오게 하사 [주]의 회중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니라.]
(민27:17). 그는
자신의 사역을 완수한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떠난 후에도 백성들을 양떼처럼 이끌어줄 목자를
세워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여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그분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책무를 주시며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니라.]
(신31:23).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광야가 아니라 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일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이 땅에 다른 위로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요14:16). 성령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이미 주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을 정복하고 쟁취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육신과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많이 다루었습니다. 문제는 성령과 인격적 교제
가운데 인도함을 받고, 순종하는가? 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가? 성령을 억누르지는 않는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은 아닌가? 성령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은 주님 자신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장차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그분의 발 자취를 따라가는 어린 양들입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벧전2:21). 구약 성도들의 삶은 예표요
그림자였다면 우리는 그 실체요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거니시고 일하십니다.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지체로 삼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이요,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이 되는
것이며,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사용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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