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32:15-27

요절: 출애굽기 32:26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향해 목숨을 걸고 중보하며 범죄한
민족의 안녕과 보호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모세였지만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 앞에선 모세는 무섭기가 그지없습니다.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범죄한 백성들 사이에 있었지만 백성들을 향해 취한 조치는 매우 가혹해 보일 정도로 엄하고 매정하며,
매몰찹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모세는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저는 몇 주전부터 오늘 전할 이 말씀에
대해서 무거운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각별히 주의해서 들으시고, 이 말씀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11:6)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으로 인해 실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은 이외로 많습니다. 또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인해 실족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요6:61). 우리 주변에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신앙을 한번 가져 보려다 교회를 찾았다가 설교를 듣고 실족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편을 읽다가 힘과 위로를 얻은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저주의 기도’를 보고 무슨 이런 기도가 다 있는가?
생각하다 실족하고 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그런 부류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15-16절입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들의 두 면에 곧 이쪽 면과 저쪽 면에 다 글이 쓰여 있으니 이 판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요, 거기 쓰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5-16).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이 친히 적어 주신 두 돌 판이 들려 있습니다.
십계명을 적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돌 판에 율법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는 이 돌 판의 내용들을 정면으로 깨뜨리는 범죄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 온 돌 판을 그들에게 보여 줄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은 조건부 행위
언약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 언약을 깨 버리면 그 언약은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19:5a)이란 조건하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주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언약에 따른 관계는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모세에게 돌 판을
들고 내려가게 하셨습니까? 모세는 주님이 친히 판에 쓰신 돌 판을 들고 내려왔는데 이는 돌 판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돌 판을
깨뜨림으로써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음을 주님 역시 그대로 보여 주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공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깨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들에게 주셨던 돌 판에 기록된 언약을 깨어 버림으로써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어 버리셨습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우리 주님의 초림을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모세는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주님은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
(요1:17). 주님은 은혜만 가직 오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오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연약하여 율법을 성취할 수 없음을 아시고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롬8:3). 모세는 산에서 내려 올 때 이미 백성들의 상태와 죄악을 훤히 알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보고 안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우리 주님과 동일합니다. 주님 역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알고 대속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17절입니다. [백성이 떠들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이르되, 진영(陣營)에서 전쟁하는 소리가 나나이다, 하니]
(17). 모세를 따라갔던 여호수아는 백성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이미 하나님과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들었고, 이들을 멸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터라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소리가 전쟁하는 소리로 알아들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야단스럽게 시끄러웠기에 전쟁이 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명과 가르침이 없을 때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때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어떤 사람이 실족하는 문제를 볼 때 겉모양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면에 있는 영적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나타나는 모든 현상 뒤에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이것은 승리하여 외치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요, 패배하여 부르짖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자들의 소리로다, 하더라.]
(18). 모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승리자의 함성도, 패배자의 울부짖음도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경배와 찬양의 한 마당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CCM, Christian Rock Music 등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다가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듯이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 유대인들은 맘몬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32:15에서 한 번 내려오고 34:29에서 다시 한번 내려오는데 주님 역시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이란 두 번의 오심이 있습니다. 공중 재림
때에 이들은 환란의 심판을 당하고 지상 재림 후에는 천년 왕국이란 복이 임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 가 있는 동안 아론에게 신을 만들게 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이들이 스데반을 죽임으로 더욱 배교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2000년간 유대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물질주의와 배금주의로 덮인 배교였습니다.


19절입니다. [모세가 진영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자기 손에서 그 판들을 던져 산밑에서 깨뜨리니라.]
(19).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온 모세는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보았고 춤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광야 교회에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교회의 목자로서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고 멸하지 못하시도록 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모세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교회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점에 섰습니다. 교회 내에서 배교(背敎)로
범죄한 죄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모세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죄의 현장에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가셨을 때 크게 분노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향해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왕상19:10a).
사도 바울 역시 이런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고후11:2). 죄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은 모든 대언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 받아온 돌 판을 깨뜨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맺었던 언약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이런 계약의 파기는 후에 한 번 더
있습니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 동안 너희가 너희 불법들을 담당할지니
이로써 내가 약속을 깨뜨린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14:34). 약속을 깨뜨린 백성들을 향해 주님은 40년 동안 광야를
돌게 하며 모두 죽여 버리셨습니다. 처음에는 돌 판을 깨심으로 언약의 파기를 알리셨지만 이번에는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약속을 깨어
버리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후로 친히 약속을 깨뜨리시고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리는 대신 벌주시는 것으로 대신하셨습니다.
[만일 그의 자녀들이 내 법을 버리고 내 법도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규들을 깨뜨리고 내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범죄한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
(시89:30~32). 주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하지 아니하겠노라.]

(시89:34~35)하셨습니다. 주님은 벌을 주시고, 징계하시는 것으로 그들을 고치시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내 산의 언약이나 다윗의 언약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새운 새 언약(New Testament)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돌 판에 율법을 새겨 주시던 주님께서 이제 우리에게는 돌판
대신 육체의 마음 판에 글을 써 주셨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3:3). 주님은 이스라엘
집과 새롭게 언약을 맺으실 때는 돌 판이 아니라 마음 속에 법을 기록하십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될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히8:10). 우리는 새 언약 아래에서 상속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구약의 언약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결코 깨어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입니다. 조건부 언약이 아니라 무조건적 언약입니다.


20절입니다. [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에
태우고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라.]
(20). 모세는 죄에 대한 치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갈아 마신다”는 표현은
동양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이요, 용법입니다. 이는 보복이나 적개심을 극적으로 나타내 보일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뼈를 갈아 마신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다” 등의 말은 강한 적개심과 보복을 결의할 때 보이는 행동입니다. 모세가 이들이 만든 송아지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마시게 한
것 역시 동일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한 죄에 대한 심각함과 격노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너희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로
태워 빻고 티끌같이 작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신9:21). 모세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가루를
뿌리고 그것을 마시게 하였는데, 누구든지 뿌린대로 거두는 법칙을 그대로 보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둡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온 /물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셨으며](시78:15).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생수를 마시게 하시며 포도즙을 주어 마시게 하십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을 주어 마시게 하십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넘치도록 만족할 것이요, 주께서 주의 기쁨의 강물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시리이다.]
(시36:8). 반면 불순종하고
범죄할 때 그 죄악을 먹고 마시도록 하십니다. 우상을 갈아 마시게 한 것은 이들의 죄를 이들이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담당해
주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눈물의 빵으로 먹이시며 그들에게 많은 눈물을 주사 마시게 하셨나이다.](시80:5). 주님은 범죄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쓸개 물을 주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주어 마시게 하며]
(렘9:15). 격노의 포도즙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21절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무슨 일을 하였기에 네가 그들에게 이와 같이 큰 죄를 짓게 하였느냐? 하니]
(21). 이제 모세는 아론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배교와 죄를 막아야 할 사람인데 이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백성이 네게 무슨 일을 하였기에”란 말은
이들이 행한 위협을 알고 하는 말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전에 모세와 아론에게 여러 번 불평을 했고, 심지어
모세에게 돌을 집어 던지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곧 내게
돌을 던지려 하나이다, 하매]
(출17:4). 아론이 혼자서 이들을 막아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민란이나 반란의 기운이 일면 정치가는 일단 타협을 하고 보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론은 순교자의 길보다는 정치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요구에 타협을 했습니다. 사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신자가 아니라 정치가였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음성에 순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15:24). 옳고 그름의 성경적 기준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차이는 그것입니다. 사무엘에게는 백성들의 뜻이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욕을 먹고, 돌에 맞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면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이는 빌라도를 통해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면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수제사장들과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수제사장들과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도 없다, 하매]
(눅23:4).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그릇되게 만드는 자라고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그를 조사하였으되 너희가 고소하는 일들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고 내가 너희를 헤롯에게 보내었으나 그 역시 찾지 못하였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없느니라.]
(눅23:14~15).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수사관이 조사해도 결코 죄를 찾을 수 없고, 조사하면 할수록 죄가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빌라도 역시 그 사실을 알았지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이 원한다는 것과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나는 이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그것과 상관하라, 하매]
(마27:24). 빌라도는 사람들을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요, 행정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백성들은 아론, 사울, 빌라도와 같은 유형의 목회자를 원합니다.
요구는 수용하고, 타협하고, 들어 주고, 적당한 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그런 유연한 행정가요 정치가를 원합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와 압력에
굴복한 대제사장입니다.


이론 아론을 향해 주님은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주께서 또
아론에게 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신9:20). 모세의 중보 기도가 아니었더라면 아론은
즉사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으로의 직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행정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영적 제사장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22-23절입니다.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크게
분노하지 마소서. 당신이 이 백성을 알거니와 이들은 해악에 빠진 자들이니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기에]
(22-23).
아론과 모세의 차이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광야의 40년이란 훈련 기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차이입니다. 아론은 늘 백성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생리와 그들의 기질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백성을 더 잘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보다 백성들에게 모든 원인과 책임을 돌려 버렸는데 모든 죄인들의 공통적인 심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자신의 죄를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돌려 버렸듯이 죄인은 일단 죄란 죄는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아론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금이
있는 자는 다 빼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 주기에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하니라.]
(24). 아론의 변명은
듣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 죄는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며, 겁쟁이로 만들고,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며, 비굴하게
만듭니다. 의(義)는 사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사악한 자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로운 자는 사자같이 담대하니](잠28:1).
아론은 자신이 직접 금을 가져오게 해서 자신의 손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지만 마치 저절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을 돌렸습니다. 죄에 대한
종교적 변명은 끝이 없습니다.


25,26절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벌거벗었더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하여금 벌거벗게 하여 원수들에게 수치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영의 문에 서서 이르되,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하니 레위의 아들들이 함께 모여 그에게로 오매]
(25-26). 모세는 이제 범죄한 백성들을 상대로 죄를
치리했습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던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있었는데, 이는 우상 숭배가 항상 음행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벌거벗음은 술취함, 음행을 말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것입니다. 카니발을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문화는
벌거벗음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금송아지 앞의 이스라엘처럼 벌거벗고 있습니다.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계3:17-18).
교회를 나오지만 예수 그리스도도 옷 입지 않는 사람들은 다 벌거벗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빛의 갑옷을 입고, 새 사람으로 옷
입지 않았다면 그는 벌거벗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맘몬이란 재물의
신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도 없고, 모세도 없고 오직 아론만 있을
뿐입니다. 아론은 영적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민중들의 요구와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이 아는 영적 원칙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의 표상입니다. 성경을 알지만 성경대로 사역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론과 같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물으시며, 요구하십니다. 우리
말에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주의자들의 처세술을 폄하할 때 우리는 “줄을 잘 섰다. 말을 갈아탔다. 철새처럼 양지만
찾아다니는 사람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자기 유익과 이득을 기준으로 줄을 서고 어느 편에 선다면 당연히 욕을 먹겠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늘
진리의 편에 서는 일은 존경받을 일이며, 성도로서 기본적인 일입니다.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 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의 순간에는 늘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가격, 품질, 디자인, 제조 회사 등을 모두 고려해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구매의 기준이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에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선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34:4)합니다.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물보다는 은총을 택해야 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훌륭한 이름을 택할 것이요, 금이나
은보다 사랑 많은 은총을 택할 것이니라.]
(잠22:1).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진리의 길을 택하고 주의 판단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시119:30), [내가 주의 훈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나를 돕게 하소서.](시119:173)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도 말하기를,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나으며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도다!]
(잠16:16)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내적 기준을 확실히 정립해 두고,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고 고뇌하지 말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명한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선택의 순간에 머뭇거립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버리고, 파라오의 공주라 칭함도 버렸습니다.
이유는 그에게 선택의 기준이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버렸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기 때문이며]
(히11:24~27).
반면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모세의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세는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택했지만, 백성들은 고난보다는 죄의 쾌락들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지만
백성들은 반대였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버렸지만 백성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버렸습니다. 이들 안에는 영적 가치관이나 기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를 나오는 것은 이런 기준을 내적으로 정립하고 기준과 원칙에 맞는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내편으로 만드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내가 주님의 편이 되는 것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편에 서면 주님은 우리 편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모세와 아론 중에, 사무엘과 사울, 엘리야와 오바댜, 바울과 데마 중에 한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전자는 헌신된 신본주의자들이었고,
후자는 인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적 그리스도인이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냐? 의 차이입니다.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는 말씀은 분리를 촉구하는 음성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죄의 무리에
동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버리고 나올 것을 명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것을 명하셨으며, 롯에게
소돔에서 나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주의 편에 속하느냐? 죄인들 속에 그냥 남아 있는가? 는 생사를 결정하는 핵심요소입니다. 라합을 보십시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되어 여리고가 멸망할 때 멸망당하지 않고 룻의 남편인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었고, 다윗 왕의 고조모가
되었습니다. 주의 편에 서기 위해 스스로 분리한 사람은 죄로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18:4).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나오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심판을 집행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이 음성이 울렸을 때 배교한 백성들 중에 남은 소수의 무리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평소에 주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막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9:50).
그러나 이런 배교와 환란의 때에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널리 헤치는 자니라.]
(마12:30). 모세는 지금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오라”며 분리를
명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모세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요, 모세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면 널리 헤치는 자가 됩니다. 모세의 부름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여기에 레위의 아들들이 분리했습니다. 이는 아합의 시대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왕상18:21). 이 때 엘리야와 함께 하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엘리야를 반대한 자였으며,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의 편에 선 자들은 늘 소수였고, 다수의 미움을 받았으며,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주의 편에 선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는 음성에 여러분이
대답하시고, 행동하십시오. 합당한 반응을 보이십시오. 주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 여러분은 반대하는 자요, 헤치는 자로 간주될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허리에 칼을 차고 온 진영을 문에서 문으로 두루 들락날락하며 각 사람이 자기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7). 모세에게 스스로 모인 레위 아들들은 주의 편에 선
자들입니다. 주의 편에 선 그들은 즉각 주의 반대편에 선 자들, 주님을 반대하고 헤치는 자들을 향해 칼을 빼어 들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칼을 차고 자기 형제와 자기 친구와 자기 이웃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이면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입니다. 주님이 천사를 보내셔 죽이시거나 역병 등으로 치시지 않고 레위의 자손들을 통해서 범죄한 백성들을 무작위로 베게 하셨습니다. 반역에
대한 형벌은 어느 국가에서나 엄히 멸하며, 왕정 국가에는 9족을 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정도로 엄히 다룹니다. 죄에 연루된 자들은 남김없이
모두 찾아 내어 죽이는 것은 동서 고금의 예외가 없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반역죄요 역모죄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모세를 몰아내고
반역을 했습니다(출7:39,40). 스데반은 이들이 행한 죄가 반역이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를 밀어내어 자기들을 떠나게 하려 하고 그들의 마음이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 아론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神)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고]
(행7:39~40). 반역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반역하였더니 주께서 용서하지 아니하셨나이다.](애3:42).
고라의 아들들이 모세에게 반역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산채로 지옥에 떨어 뜨려 버리셨습니다. 흔히 성경을 알지 못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이
부분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꼴같지 않는 소리를 해 댑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이제 주의 편에 선 레위의 아들들은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칼을 허리에 차고 온 진영을 두루 다니며 칼을 휘둘렀습니다.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렘48:10). 주의 편에 속한 자들은 반역자들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얼마나 엄하게 심판하시는지 성경 곳곳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말렉을 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삼상15:3). 발본색원(拔本塞源)!! 이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레위 자손들은 자기의 형제,
자매, 친구, 친척들을 칼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매정하고 비정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주님의 격노와 심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6)란 문자적인 성취입니다.
부모, 형제, 가까운 친척, 친구들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데서 돌이키게 한다면 우리는 단호히 그 관계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돌로 쳐서 죽이도록 명령했는데 지금은 그런 자가 소수가 아니라 절대 다수였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종교로 인한 분쟁은 어디서나 문제가
되지만 주님으로 인해 부부 지간, 부자지간이 갈라지고 죽이는 일은 쉽게 발견됩니다. [사람이 여전히 대언을 하면 그를 낳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주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그가 대언할 때에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찌르리라.
그 날에는 대언자들이 대언할 때에 저마다 자기 환상을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을 속이려고 거친 옷도 입지 아니하며]
(슥13:3,4). 여러분은
이런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죽이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죽임을 당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신약의 성도들도 종교적인
분쟁이나 불신과 배교를 이유로 형제나 자매, 친척이나 친구를 칼로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교회사를 통틀어 보아도 그런 예가 없거니와 그런 시도를
하지도 않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성경대로 믿는 교인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구절을 써먹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는 일을 했지만 어떤 신약 교회에서도 이런 교리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죽임을 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2000년
교회사를 보십시오. 주님 역시 박해를 받을 것을 약속하셨지 성도들이 세상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을 하도록 명령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을 타고 내려오실 때는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만백성 중에서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노니 이는 내가 친히
분노하여 그들을 밟겠고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짓밟을 것임이라.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히리라.]
(사63:3).
주님은 자신의 편에 선 민족들이 없어서 친히 밟으시는데 이는 사람들이 칼을 들고 내리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도시 밖에서 그
포도즙 틀이 밟히니 포도즙 틀에서 피가 나와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타디온이나 퍼졌더라.]
(계14:20). 주님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는데 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
(계19:13). 주님은 반드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지금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는 일은 오히려 복된
일입니다.


모세는 왜 형제들을 죽이게 했습니까?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은
신정일치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시기 때문에 우상 숭배는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오늘날 살인이나
내란, 외환의 죄를 사형에 규정하듯이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를 살인이나 음행보다 더 큰 죄로 다루었고, 형을 집행했습니다. 이것은 잔인한 일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형법의 집행입니다. 이런 법 집행이 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은 모두 공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네 형제나 네 어머니의 아들이나 네 아들딸이나 네 품의 아내나 네 자신의 혼같이 여기는 친구가 은밀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에게 동의하지 말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를 불쌍히 보지 말며 용서하지도 말고 그를 숨겨 주지
말며 오직 너는 반드시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그 뒤에 온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그는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주] 네 하나님으로부터 너를 밀어내려 한 자니 너는 그를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이 같은 악을 너희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신13:6~11). 법이 집행되지 않으면 법은 무너지고 그 결과 모두
망합니다. 모세는 최초의 반역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통해 엄정한 법 집행에 예외가 없음을 실증해 보였고, 악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이 모두 죽는
재앙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신약 교회의 분리란 측면에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죽이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분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저주하거나 욕하며 싸우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하나요, 형제간에 연합을 해야 하지만 몇 가지 경우에는 반드시 분리가 필요합니다.


첫째,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는 자, 실족하게 하는 자.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롬16:17).
우리는 교리적 분쟁이 있을 때 분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전천년 재림, 천년 왕국, 환란 전 휴거, 삼분법, 문자적 하늘과 지옥,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및 보존에 관한 진리 등에서 우리는 선(線)을 그어야 하며, 일치하지 않을 때 분리해야 합니다. 그런 교인들을 한 패니 한 편이니
한 가족이니 하면서 감싸는 것은 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패거리 문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교리가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이단인 자. [이단(異端)인 자는 한두 번 훈계한
뒤에 거절하라.]
(딛3:10). 이단의 정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도, 크리스찬싸이언스 같은 것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교회 내에 있는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들이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派黨)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고전11:19). 여기서 이단이란 의미는 “heretic”으로 특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특정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진리를 무너뜨리는 죄를 범해서는 안되며, 그런 주장으로 건전한 교리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 자들을 거절해야 하며, 분리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 내에서 음행하는 자- [그런데도 너희가
우쭐대며 오히려 슬퍼하지도 아니하고 이런 일 행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전5:2).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죽여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5:5).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제 너희에게 쓰는 것은 만일 형제라 일컬음 받는
자가 음행하는 자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이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이거나 욕설하는 자이거나 술 취하는 자이거나 강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하는 것이라.]
(고전5:11). 이런 자들은 그 죄가 드러날 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형제들에게는 용서를
구하거나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넷째, 성경적 원리에 따르지 않는 자 -[이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하노니 너희는 질서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
(살후3:6). 성경적 교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연약한 형제들이 힘이 없어 하지 못하는
것과 악한 형제들이 주의 말씀을 거슬리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형제들의 짐을 나누어지고, 격려하고, 함께 해야 하지만 사악한
형제들과는 분리해야 합니다.


다섯째, 설교에 순종하지 않는 자 - [만일 누가 이
서신으로 전하는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살후3:14).
목자의 설교에 대적하는 자들과는 스스로 분리하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후메내오란 사람은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교회 내에서 설파했던 사람입니다(딤후2:17-18). 반면 알렉산더는 바울 일행의 말을 몹시 대적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이들을 사랑으로 감싼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고, 저주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모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1:2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연약하고 어린 형제가 아니라
악한 형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악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너도 그를 조심하라. 이는 그가 우리의 말을 몹시 대적하였음이라.]
(딤후4:14~15).


여섯째, 교회의 말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 - [만일
그들의 말도 무시하여 듣지 않거든 교회에게 말하되 교회의 말도 무시하여 듣지 않거든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
(마18:17). 교회는
형제의 잘못이나 죄를 지적하고 고칠 것을 요구하며, 징계와 책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거부할 때 그는 교회에서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편에 서야지 결코 반역자들의 편에 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불신자와 결혼하는 자 -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후6:17a). 이 말씀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과 분리하라고 합니다. 저는 성경을 믿는다는 목사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한 명 더 전도하는 것이라며 자기
교회 형제에게 권면하는 것을 듣고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현재 교회마다 가장 지켜지지 않는 진리입니다. 현재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며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혼과 재혼 역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자는 아내에게 대하여 간음하는 것이요, 또 여자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니라.]
(막10:11~12).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이 거의 사라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무분별한 결혼, 이혼, 재혼을 하는 일은 주의 편에선 자들이 아닙니다.


여덟째,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딤전6:5).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시대, 세상의 영이 교회 내에 들어온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참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교회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무리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면 당장 분리하여 자신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처럼 칼을 들고 죽이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조용히
분리하기를 원합니다. 분리는 의와 경건, 거룩함을 위한 첫 걸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삐딱하게 받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이 나의 의견이나 생각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말씀을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들은 말씀을 경계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