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아모스 5:1-9:15
요절: 아모스 5:21
아모스 5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애가입니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1).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애가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할 재앙과 심판에 대해 선포하신 것입니다. 2-3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처녀가 쓰러졌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그녀가 자기 땅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일으켜 세울 자가 없도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천 명이 나간 도시가 이스라엘의 집을 위해 백 명만 남기고 백 명이 나간 도시가 열 명만 남기리라, 하시기 때문이니라.](2-3). 얼마나 엄청난 심판입니까? 90%의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나 피할 길이 없습니까? 5:4, 6, 8, 14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무려 이 한 장에서만 4번이나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주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입니다. 재앙과 심판이 선포되었을 때 주를 찾고, 돌이키면 주님 역시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이 내린 심판은 하나님만이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만이 돌이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주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4). 10명 중 9홉 명이 죽어가는 전쟁을 막거나 그 전쟁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주]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6a). [너희는 일곱 별과 오리온을 만드시고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며 낮을 밤으로 어둡게 하시고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그분을 찾을지니 그분의 이름은 [주]시니라.](8). 이들은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바알을 버리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말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악을 구하지 말고 선을 구하고, 불의를 버리고 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너희가 말한 것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14).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애가를 지어 선포하신 대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다 구원하실 수 있고, 용서하실 수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건지실 수는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심판과 재앙을 피하는 방법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옥을 선포할 뿐 아니라 복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선포할 뿐 아니라 의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저주를 선포할 뿐 아니라 복을 선포합니다. 죽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부활과 영생을 선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코 한 가지만을 선포하지 마십시오. 듣기 좋으라고 복음만 선포하는 것은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저주와 재앙과 심판만 선포하지 마십시오. 책망을 선포하면 주의 위로도 함께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언자들을 배척하고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눅19:10),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러 오셨고(눅5:32), 섬기러 오셨습니다(막11:45).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에서 건지시고,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사랑의 친교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모스의 대언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심판과 저주를 비웃고 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지만 영적, 도덕적 상태는 파멸 직전이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의를 땅에 버리는 자들아,](7). 이것이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망하는 국가와 사회의 특징은 [의와 불의]의 개념이 없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영적 기준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나쁜 것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그것이 좋은 것이고, 선입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고 상대적 기준만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저주가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사5:20). 세상은 자기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무엇이나 선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의 가치관은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마저 그러하다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문에서 꾸짖는 자를 미워하며 올바르게 말하는 자를 몹시 싫어하는도다.](10).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고, 올바르게 말하는 자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싫어했고, 올바른 설교자들을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중히 여기는 자는 분별이 있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아버지의 훈계를 멸시하거니와 책망을 중히 여기는 자는 분별 있는 자니라.](잠15:5). 하지만 하나님의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죽습니다. [길을 버리는 자에게는 징계가 괴로우며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죽으리라.](잠15:10).
주님은 이들에게 주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의 날]은 이교도들에게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재앙의 날입니다(18-2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주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요, 어둠의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21-23절은 의가 없는 종교 행위, 믿음이 없는 예배,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의식은 주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내가 너희의 명절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너희의 엄숙한 집회들에서 냄새를 맡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비록 나를 위하여 번제 헌물과 너희의 음식 헌물을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짐승으로 드리는 화평 헌물도 내가 중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너는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없앨지니 이는 네 비올라 곡조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임이라.](21-23). *너희의...란 말에 주목하라. 주의 명절들, 주의 엄숙한 집회...가 아니라 “너희의”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주님이 그들을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이 모이는 명절들, 집회들은 물론이요 헌물들을 일체 받지 않으십니다. 이들이 드리는 찬양도 듣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의식과 종교와 믿음이 없는 행위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24절입니다. [오직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물줄기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종교적인 형식과 의식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헌물을 드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기 전에 바른 마음을 가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형식보다 정신은 더 중요합니다.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누가 말하기를, "God's first concern is not what we do but what we are." 솔로몬은 말하기를,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가증한 것이거늘 하물며 그가 사악한 생각으로 가져오면 얼마나 더 가증하겠느냐?](잠21:27)고 했습니다. 사악한 자는 그가 희생물을 드리든, 찬양을 드리든, 헌물을 바치든 그 무엇을 해도 주께 가증한 것입니다. 이는 가인의 예배입니다.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시므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침통해하니 [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분을 내느냐? 어찌하여 침통해하느냐? 네가 잘 행하면 어찌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네가 잘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4:5~7). 주님은 가인의 헌물이 아니라 가인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잘 행하면 주님은 가인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가 드리는 그의 헌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주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신 후에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영적 희생물들]을 다 받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번제 헌물과 희생물보다 더 원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서 돌이키면 그가 기도를 드린다 해도 주께 가증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 (잠28:9). 그가 드리는 희생물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성전에 희생물을 바치는 것보다 긍휼을 더 원하십니다.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호6:6). 긍휼, 의, 믿음, 사랑 등은 헌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마23:33).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병자들이 고침 받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하고 분노하며 정죄하는 것을 보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에 긍휼을 품는 것, 병자들과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안식일 준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셋째, 의를 행하는 것이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금식이 내가 택한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겠느냐? 너는 /과연/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5-6). 불의, 불법, 죄를 행하면서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웃에게 사랑과 관심이 없고, 형제를 향해서 마음을 닫아 두고 금식을 비롯한 각종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 형제들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3:17).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고 있다는 실제적 증거입니다.
넷째,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제단에 헌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드리려고 예물을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할 일이 있음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형제들과 화해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제와 화해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일보다 더 앞서 해야 할 일입니다.
다섯째, 용서해 주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할 것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犯法)을 용서해 주시리라.](막11:25). 대적하는 마음과 쓴 뿌리를 안고 기도하는 것보다 용서해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부 지간이라도 마음에 용서가 없으면 기도가 막힙니다(벧전3:7). 화해와 용서가 없으면 기도 생활이 극히 방해를 받습니다. 희생물을 드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금식도 중요합니다. 안식일 준수와 같은 여러 가지 계명들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들을 행함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외적 행위보다 마음이 중요하고, 순종이 중요하고, 공의가 중요하고, 긍휼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은 “율법의 더 중대한 것”(마23:33)이라고 하셨습니다.
6장입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부요하고 평안했습니다. 1-6절은 이들의 물질적 경제적 풍요로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상아 침상에 눕고 자기 잠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외양간 한가운데서 송아지를 내어 먹고 비올라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다윗같이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고 대접으로 포도즙을 마시며 가장 좋은 기름으로 자기 몸을 바르면서도 요셉의 고통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6). 사람들이 모두 태평성대라고 칭송하는 살기 좋은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들이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7-11절은 이들에게 닥칠 참혹한 전쟁의 심판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집에 남자가 열 명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공의를 쓸개로 바꾸고 의의 열매를 독초로 바꾸었음이니라.](12b).
7장입니다. 7-9장은 주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아모스에게 보여주신 다섯 가지 환상입니다.
첫째, 메뚜기 환상입니다(7:1-3).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내게 보이셨느니라. 보라, 나중에 자라는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에 그분께서 메뚜기들을 지으셨느니라. 보라, 이때는 왕의 풀을 벤 후에 나중에 자라는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니라/. 메뚜기들이 땅의 풀 먹기를 마치매 내가 이르기를, 오 {주}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그가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서리이까? 하니 [주]께서 이에 대하여 마음을 돌이키시고 [주]께서 이르시되, 그 일이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암7:1~3). 풀이 막 자라는 시점에 주님께서 지으신 메뚜기들이 모두 먹어 치워 버리면 이스라엘은 모두 굶어 죽게 됩니다. 아모스는 이 일이 이스라엘에 임하지 않도록 기도했고, 주님이 들으셨습니다.
둘째, 불입니다(4-6). 이는 극심한 가뭄을 말하는데 강과 호수는 물론이고 샘을 모두 다 말려 버립니다. 온 땅에 임할 가뭄의 재앙을 본 아모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셋째, 다림줄입니다(7-9). 주님은 다림줄을 잡고 서 계시는데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그것을 두고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들을 재어보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국이나 사람들을 달아 보시는데 쓰는 측량 기구는 추(저울)와 다림줄(자)입니다. 추는 무게를 달고 자로는 길이를 잽니다.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달던 추를 예루살렘 위에 팽팽히 잡아당기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뒤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리리라.](왕하21:13). 달아보면 부족함이 드러나고, 재어보면 모자랍니다. 주님께서 바빌론 제국을 심판하실 때 벨사살 왕을 저울에 달아 보셨습니다.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있다 함이요,](단5:27). 그래서 그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달아 보면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시62:9)라고 했고,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똑 바르게 행하는지 그 행동들을 재어 보셨을 때 그들은 한 참이나 굽어 있었고, 모자랐던지라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삼상2). 아모스는 이전과 달리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9).
이 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대적하며 그를 벧엘에서 추방하고자 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이들은 아모스의 대언을 정확히 듣고 이해했습니다. 몰라서 못믿은 것이 아닙니다. 듣지 못해서 못 믿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을 싫어했고 믿기 싫어서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을 대적했으며(10),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다고 했다(10)는 사실을 들어 유언비어 유포,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비애국적인 일들을 행한다고 비난하며 그에게 벧엘을 떠나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아마샤가 또한 아모스에게 이르되, 오 너 선견자야, 너는 가서 유다 땅으로 도망하고 거기서 빵을 먹으며 거기서 대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대언하지 말라. 이는 이곳이 왕의 예배처요, 왕의 뜰이기 때문이니라, 하니라.](12-13). 아마샤는 벧엘의 대언자로서 아모스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가 계속해서 대언하지 못하도록 했다가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17). 아마샤의 아내는 도시에서 창녀가 되고, 아마샤의 아들딸들은 칼에 쓰러져 죽고, 그의 땅은 줄로 나누어지고, 그는 더러운 땅에서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를 대적한 거짓 대언자의 말로(末路)를 주님은 생생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14-15절은 아모스가 받은 소명입니다. [이에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대언자가 아니며 대언자의 아들도 아니라. 다만 나는 가축치는 자요,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자인데 내가 양떼를 따라갈 때에 [주]께서 나를 데려가시고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대언하라, 하셨느니라.](14-15).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에서 북왕국 벧엘로 선교사로 부름 받을 때 가축을 치고,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양떼를 따라가다 주께서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대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복음 전파와 선교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8장입니다. 8장은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보인 네 번째 환상으로 “여름 과일 한 바구니”입니다. 히브리어로 여름 과일은 'Hayitz'인데 끝(end)이란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동음이의어). 그렇다면 2절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바구니이니이다, 하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니](2). 과일이 익어 가면 그 끝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름 과일을 수확할 때가 된 것처럼 이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의 때가 다가왔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4-10절은 이들이 행한 죄와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한 행위 중 단 하나도 잊지 아니하시고 모두 심판하십니다(7).
11-13절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氣盡)하리라.](11-13). 하나님은 처음에 아모스에게 보여 주신 환상 가운데 메뚜기 재앙(식량)과 불(가뭄)의 재앙을 보내지 않으시는 대신 ‘말씀’에 대한 기근과 갈증을 이들에게 보내 주십니다. 마지막 날들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달음질하며 지식이 증가합니다. [오 다니엘아, 오직 너는 끝이 임하는 때까지 이 말씀들을 닫아 두고 이 책을 봉인(封印)하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겠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단12:4).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의 지식이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하기를,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7)고 말합니다. 인문 과학, 자연 과학 등의 발전이 있고, 놀라운 지식의 증가로 인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제어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고, 불가능이 없는 시대가 올 것처럼 생각합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늘고, 유전 공학의 발전으로 식량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다. 인공 강우를 함으로써 가뭄을 해결하고 사막을 옥토로 바꿀 것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주림과 기근을 보내 주십니다. 말씀이 없으면 백성들은 망합니다.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 법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니라.](잠29:18).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사람들은 영적 기근과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부터 진리를 찾기 위해 방황을 합니다. 철학에도 심취해보고, 히피가 되어 방황을 하기도 하고, 동양 종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인도의 요가나 티벳의 고승들, 불교의 가르침, 노장 사상 등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합니다. 기 수련이나 단전호흡, 마인드 콘트롤 등을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빠져 들면 들수록 정신적 공허함과 갈증은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사교들과 무속이 횡횡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그런 날이 오면 영적 주림과 갈증으로 기진하는 이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9장입니다. 9장은 앞의 4가지 환상과는 달리 아모스가 제단 위에 계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단 위에 서서 말씀하신 것은 심판이 주의 집에서부터 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반드시 심판을 시작해야 할 때가 이르렀음이니 만일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의 마지막은 어떠하리요?] (벧전4:17). 8,9절은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압축적으로 요약해 둔 말씀입니다. [보라, {주} [하나님]의 눈은 범죄하는 왕국 위에 있나니 내가 그 왕국을 지면에서 멸하려니와 야곱의 집은 철저히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이는, 보라, 내가 명령하고 체로 곡식을 체질 하는 것같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집을 체질 할 것임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은 알갱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8-9). 실로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민족들로부터 체질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까닭 없이 이스라엘을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각 나라마다 넘치도록 많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미래가 이 상태로 끝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들이 세상에서 키질 당한 후 주님께서 친히 일으켜 세우심으로 다시 회복될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11-14).
11-12절입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쓰러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그 무너진 곳을 막으며 내가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내가 그것을 옛날과 같이 건축하리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교도들의 남은 자들을 소유하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11-12). 이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구원에 대한 교리를 결정할 때 인용된 말씀입니다(행15:14-18). 이제 더 이상 이들은 주님이 주신 땅에서 뽑히지 않습니다(15). 주님께서 친히 이 일을 행하십니다. 모든 대언서의 마지막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행28:20).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들의 바랄 것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에 의해 성취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를 살아 있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해 나가고 계십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벧전2:5a). 주님을 기쁨이요 소망을 삼으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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