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나 1:1-4:11
요절: 요나 4:11
요나는 성경에서 가장 특이한 대언자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대언자들은 부름 받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주의 부르심과 사역을 거부하고 자기 길을 떠난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요나란 불순종, 거역, 반역하는 주의 사역자의 상징처럼 사용되곤 했습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요나서의 목적은 이방인들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하셨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주의 명령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두 번이나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대속을 통한 구원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여 주는 표적이 됨으로써 우리 주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란 말씀을 친히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마12:39). 그는 어떤 대언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구원 사역을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예표한 인물입니다(마12:39, 16:4, 눅112:29).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다른 표적은 보여 주지 아니하실지라도 요나의 표적은 보여 주십니다. 요나는 회심자를 원치 않는 유일한 선포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씀 선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원치 않고 제발 열매가 없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죄인들이 심판받아 멸망받기를 바랐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은 긴 설교가 아니라 단지 8 단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Yet forty days, and Nineveh shall be overthrown.](욘3:4).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대언자들 중에 가장 짧은 말씀을 받아 선포한 대언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가 요나서에만 등장하는 대언자는 아닙니다. 그는 *여로보아 2세 때 북왕국에서 대언하던 대언자였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대언자 요나의 손으로 하신 말씀대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지경(地境)을 회복하되 하맛 입구에서부터 평야의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14:25). 요나는 성경 비평가들의 지적과는 달리 역사적 인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확증하신 내용입니다. 요나서는 총 4장, 48절, 킹 제임스 성경으로 1,320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나란 이름은 ‘비둘기(dove)’란 뜻입니다.
1장은 주님이 주신 사역을 거절하는 요나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북왕국이 아닌 앗시리아의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요나는 선교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이는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음이라, 하시니라.](2). 주님은 죄악된 세상, 죄악된 도시, 죄악이 넘치는 그곳에 자신의 대언자를 보내셔서 말씀을 외치게 하십니다. 선교사는 죄악의 고장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너는/ 크게 외치라. 네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사58:1). 하지만 요나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3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주]의 눈앞을 떠나려고 일어나서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그가 [주]의 눈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3). 이는 마치 살인자 가인의 행동을 기억나게 합니다. 창4:16, [가인이 [주]의 눈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하더라.](창4:16). 주께 범죄한 죄인들은 누구나 주의 눈앞을 떠나려고 합니다. 주의 눈을 피하고 숨으려고 합니다.
4-10절입니다. 요나는 계속해서 내려 갔습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배에 타서는 배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닷 속으로 던져져 물 속으로 내려갔고, 고래 뱃 속으로 내려갑니다. 끝없는 추락입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떠난 죄인은 언제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뿐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타고 갈 배가 있었고, 배 삯을 낼 돈이 있었고,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주님은 큰 바람을 바다로 보내셨고, 거대한 폭풍이 일어났습니다(4). 시편48: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들을 부수시는도다.](시48:7). [이는 그분께서 명령하시매 폭풍이 일어나 파도들을 높이 일으키기 때문이로다.](시107:25). 배 사람들에게 바다의 큰 바람과 파도, 폭풍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선원들이 두려워 떨며 한 일은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배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로 던져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5, 행27:18). 그 때 요나는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5). 말씀을 외침으로 세상을 깨워야할 하나님의 대언자가 잠이 들었습니다. 짖지 못하는 개, 잠자는 파수꾼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나가 잠들어 있을 때 선장이 요나를 깨우고 기도하라고 요청했습니다(6).
12-16절은 불순종한 요나가 스스로 죽기를 자청합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폭풍이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거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위험에 처했고,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죽음으로만 이 난국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해 잔잔하리라. 이는 나로 인하여 이 큰 폭풍우가 너희에게 임한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하니라.](욘1:12). 그는 비록 주님께 불순종했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는 침례인 요한이나 스데반이나 다른 대언자들과 같은 부류의 죽음은 아닐지라도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파도는 잔잔해졌습니다.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니 격렬히 뛰놀던 바다가 잔잔해지매](욘1:15). 이 점에서 요나는 세상을 대속하신 주님의 예표가 됩니다. 요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궁극적으로 요나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민족이 앗시리아로부터 완전히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서 요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요나의 죽음을 단지 고기밥으로 던져 주신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약의 대속적 진리의 모델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표적의 주인공으로 삼으셨습니다.
17절입니다. [이때에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여기서 주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고래’(마12:40)입니다. 요나는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40, [이는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에 있을 것임이라.](마12:40). 이로써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에게 그러할 것임이라.](눅11:30).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바다에서 거대한 고래가 입에서 사람을 토해내는 장면은 Top News에 해당하는 그런 소식이 되고도 남습니다. 니느웨 도시가 발칵 뒤집힐 뉴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땅의 중심부로 내려가셨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둘 다 지옥으로 갔습니다(욘2:2). 둘 다 살아났습니다. 둘 다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2장입니다. 요나는 고래 뱃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육체는 죽었습니다. [그때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주] 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지옥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욘2:1~2). 우리는 지옥에 간 부자(눅16)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지만 요나의 기도는 주께 받아들여진 사실을 봅니다(7). 요나는 지옥을 여행한 후(6)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9). 요나는 죽을 때 하나님께 서원을 했는데, 주님이 다시 살려 주시면 니느웨로 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났고 자신의 서원을 이행했습니다(9). 10절입니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욘2:10). 요나는 큰 물고기 배에서 토해졌고, 살아났습니다. 큰 물고기는 요나를 데리고 삼일 밤 삼일 낮을 여행했고 니느웨 앞에다 그를 내려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회개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죽은 영이 살아납니다. 회개할 때 믿음이 살아납니다.
3장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사명을 주셨습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 그 선포할 것을 선포하라, 하시매](1-2). 주님은 결코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요나는 처음에 이 명령을 받았으나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어설픈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일보다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애국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방식대신 자기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요나와 같은 성도들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대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습니다(욘1:2). 명령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요나에게 주어진 동일한 명령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19-20). 마가복음 16:5,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너는 일어나...가서...명한 것을 선포하라.”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요, 사명입니다.
3절입니다.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그때에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3). 요나는 드디어 일어나 자신의 사역지인 니느웨로 갔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제국의 수도로써 심히 큰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죽음에서 부활이란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서 “주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3a)는 말씀을 통해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순종은 자발적이고 마음에 우러난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순종이었습니다. 요나는 비로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4절, [비로소 요나가 그 도시로 들어가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4). 그의 사역은 단 하루였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는 8단어로, 우리 말로는 6단어에 지나지 않는 짧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 짧고도 간결한 선포에 니느웨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5-9절은 요나의 선포로 인해 일어난 니느웨의 회개와 대 부흥 운동입니다. 역사상 하루 동안 말씀을 선포하고 이렇게 많은 회심의 열매를 맺은 복음 전도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5).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고 위로는 왕으로부터 고관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짐승에게까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8). 역사상 이런 부흥의 역사는 유다에서도 없었고, 2000년 교회사에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부흥입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자기를 부인한 한 대언자의 선포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였습니다. 요나는 어떤 능력 있는 일이나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요나 그 자신이 이미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굴복당한 사람, 하나님의 손 길에 잡힌 사람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은 요나를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사람이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심판에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도 회개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대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사악한 자의 멸망이 아니라 그가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에스겔 18:23,32입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어찌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그가 돌이켜서 자기 길들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그런즉 /너희는/ 너희 자신을 돌이켜서 살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8:32). *겔33:11 참조. 이교도들인 니느웨가 돌이킴으로 그들은 살았습니다. 주님은 어느 민족이라도 돌이키면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십니다. 두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8:8, [만일 내가 /멸하리라/ 선포한 그 민족이 자기들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생각했던 그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18:8). [그런즉 이제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주] 너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치려고 선언하신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리라.](렘26:13). 하나님은 요나가 걱정한 대로 니느웨에 내리려 했던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꼭 심판받기를 바랐지만 이런 회개와 대 부흥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4장입니다. 4장은 요나의 불만과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1장은 요나가 부름받았으나 반역한 이야기이고 2장은 요나가 징계를 받고 회개하는 이야기이며, 3장은 요나가 다시 사명을 받아 순종했으며 4장에는 다시 반역하다가 책망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한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 주시지 않고 긍휼을 베풀고 용서하신 것에 대해서도 분노했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1). 요나가 무엇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까? 니느웨의 영적 각성과 부흥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린 아이같은 어른을 봅니다. 불신자처럼 행동하는 신자들을 봅니다. 마귀처럼 구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요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회개와 구원, 긍휼과 용서를 기뻐하지 않고 정죄와 저주와 심판을 기뻐하는 그런 대언자를 보고 있습니다. 사랑과 연민 없이 전한 정죄와 심판의 말씀을 전한 한 대언자는 이 일이 심히 못마땅하고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는 졸지에 거짓 대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40일 후에 일어난다고 대언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하나님, 그리고 이런 일을 행한 자신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주님께 구하기를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2-3).
요나는 이런 일을 일찍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2). 3절입니다.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 게 더 낫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3). *민수기 11:15- 모세, 열왕기상 19:4- 엘리야, 빌립보서 1:23- 바울. 이들은 모두 죽고자 하는 동기는 달랐지만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들은 맡겨진 사역을 포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맡겨진 짐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두고자 했고, 엘리야는 도망자로서 자신이 수치스러워서, 바울은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요나는 자신이 비천해지는 것으로 인해서 죽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낙담하면 죽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제 목회 경력 6년이지만 몇 번이나 그만 두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기를 자원했을 만큼 자아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1장에서 바다에 바람과 폭풍을 일으키셨고, 2장에서 큰 고래를 명하여 요나를 삼키고 토해내게 하셨으며 4장에서는 박 넝쿨을 자라게 하시고 벌레가 먹게 하시며,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시는 등 전능한 하나님이시지만 불순종하는 요나는 마음대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원해서 복종하고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꺾고 복종하지 않는 한 징계하시거나 포기하시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하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분노하는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4). 요나는 아무 대답 없이 니느웨에서 나가서 도시의 동쪽에 앉았습니다. 5절에 보면 거기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하나 지었습니다. 자신이 말씀을 전한 도시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초막의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5).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기 위해 주님은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요나가 지은 초막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려 주었습니다. 6절,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로 하여금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시고자 함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6). 요나는 박 넝쿨로 인해 그늘이 지자 매우 기뻐했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이 하루 새에 그렇게 자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요나가 어디에 있든지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요나를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요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를 때에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쳐서 시들게 하시니라.](7). 요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 것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박 넝쿨이나 벌레 한 마리까지 모두 주님이 요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입니다.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오, 그늘을 걷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모든 사건에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비하사 - 큰 물고기(1:17), 박넝쿨(4:6), 벌레(4:7), 동풍(4:8).
요나의 반응을 보십시오. 8절입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또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매 그가 기진(氣盡)하여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나으니이다, 하니라](8). 그늘은 사리자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 대고,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 쬐었습니다. 얼마나 더웠던지 요나는 기진했습니다. 그런 중에 요나는 다시 한번 죽기를 바랐습니다.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자살을 원하다. 참 놀랍게도 그는 두 번째 죽기를 바라고 있는데 정말 죽기를 바랐다면 그대로 기진해서 죽으면 됩니다. 죽기를 바랄 것도 없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하고 쓰러져 있으면 됩니다. 죽여 달라고 기도했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분노하여 죽기까지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하니라.](9). 주님은 요나의 분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질문하셨습니다. 이전에 요나는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분노했고, 이번에는 죽어 버린 박 넝쿨로 인해 분노했습니다. 이전에 요나는 주님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당하게 답변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기까지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9b). 요나는 해를 가려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던 박 넝쿨이 죽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나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없어질 때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에 쉴만한 그늘 하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요나가 박 넝쿨의 사라짐으로 인해 분노하는 것에 대해 당당히 ‘잘 하는 것’임을 밝혔을 때 주님은 그에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10, 11절입니다. [이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도 하지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하물며 저 큰 도시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 넘고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네가 박 넝쿨을 불쌍히 여기듯이 내가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고 아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많은 참새보다, 들의 핀 백합화보다 귀합니다. 사람의 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박 넝쿨을 귀히 여겼다면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나보다 큰 이(마12:41).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요나보다 크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나는 니느웨란 한 도시에서 말씀을 전했지만 주님은 온 세상에 전하십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을 위해 죽었지만 주님은 온 세상을 위해 죽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에는 불순종했지만 주님은 모든 일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요나는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지만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요나는 회개한 니느웨를 향해 몹시 못마땅해 했지만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슬피 우셨습니다. 한편으로 요나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예표 합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요나가 리비야단을 예표하는 고래에 삼킴을 당하듯이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삼킴을 당합니다. 요나는 다시 내 뱉음을 당하듯이 온 세상은 이스라엘을 다시 토해냅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 사명이 맡겨지고 기회가 주어졌듯이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회복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셨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십니다.
요나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싫어하는 선민의식으로 뭉쳐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구원을 기뻐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결코 분노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유대 민족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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