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훔1:1-3:19
요절: 나훔 1:15
나훔은 3장 47절이며 킹 제임스 영어 성경으로 1,284 단어입니다. 나훔의 사역 기간은 히스기야 통치 기간입니다. 앞서 공부한 대언자 요나보다 약 150년 정도 후의 인물이며 요나가 선포한 니느웨의 멸망과 동일한 주제를 다룹니다. 나훔은 오직 ‘니느웨의 멸망’이란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니느웨의 멸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는 나훔을 통해서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나훔은 ‘위로자’(comforter, consoler)란 뜻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몇몇 유명한 영적 의미가 있는 도시들이 존재합니다. 바빌론이 그렇고 니느웨 역시 그러합니다. 바빌론은 정치적, 니느웨는 종교적 배교를 예표합니다. 이들의 종교성은 이미 요나의 설교로 인해 회심하는 사건을 통해서 익히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어느 이방 세계의 도시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향해 회개를 한 적이 있고, 다시 배교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들의 신은 황소(아피스)였는데 사람의 얼굴에 세 개의 날개를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요나와 달리 나훔의 선포는 회개의 촉구가 아니라 구제할 수 없는 심판의 경고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말하기를, “배교에는 구제가 있을 수 없고 완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오직 새로운 시작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대언자 나훔이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 대언했던 시기와 배경을 좀 살펴 보겠습니다. 앗 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멸망시켰습니다(721 B.C). 그들은 곧 바로 유다를 공격해서 예루살렘을 함락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701 B.C). 우리는 이사야 36-37장에서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히스기야 왕의 눈물어린 간구와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하루 저녁에 18만 5천 명을 죽임으로써 전쟁은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사37:36). 하지만 앗시리아는 여전히 모든 나라들에게 위협이 되는 강성 제국이었습니다. 대언자 나훔은 이런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것이란 점을 선포했습니다. 유다에게 이 소식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소식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바빌론에 의해서 612 B.C에 멸망당합니다. 나훔은 지금 100년 뒤에 있을 일들에 대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절정의 국력을 구가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은 국제 정세를 논하지만 한 나라가 언제 어떻게 망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대언자 나훔의 경고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이지만 이 소식은 앗시라아를 두려워하는 유다에 대한 위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 마귀의 결말, 그에 대한 심판을 알려 주심으로써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장입니다. 대언자 나훔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위엄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1:1에 이 책의 성격, 경고의 대상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엄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환상에 관한 책이라.](1). 150년 전에 대언자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후에 이제 다시 주님은 니느웨에 대해 경고를 선포합니다.
2-3절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둘째, 보복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꾸짖으신다. 넷째, 하나님은 격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3). 2절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주]는 원수갚으시는 /주/시니라. [주]는 보복하시며 격노하시는 /주/시니 [주]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진노를 간직하시며](2).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들을 접할 때면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둘이 아니라 동일한 한 분이십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피로인해 오래 참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주의 오래 참으심을 알지 못한 채 죄악을 충만하게 채우다가 주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보복하시고 진노하시는가 보십시오. “주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진노”하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주님 자신의 대적들로 보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주님 자신의 원수들로 보십니다. 이 원칙은 구약과 신약에 일관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자신을 핍박하는 자로 보십니다. 복음의 원수가 곧 주님의 원수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마법사 엘루마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르되, 오 모든 간교와 모든 악독이 가득한 마귀의 자식이여, 모든 의의 원수여, 네가 {주}의 바른 길들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13:10).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이들은 모두 의의 원수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마음 한 편으로는 탐욕을 부리면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야고보서 4:4,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요, 형제들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교만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자로 두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약4:7).
3절입니다. [[주]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사악한 자를 결코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도다. [주]는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자신의 길을 두시며 구름들은 그분 발의 티끌이로다.](3). 이 말씀은 주님의 영적 도덕적 성품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말씀을 보내시고, 주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를 결코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선과 악의 판단이 선명합니다. 의와 불의에 대한 기준이 분명합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깨끗케 할 수 있고, 불의한 자를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기준이 바뀝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만 하면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사5:20).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죄의 해결책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씻음 받은 이들,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된 자들만을 무죄한 자로 여기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피로 씻음 받았습니까?(계1:5). 주님께서 회오리 바람, 폭풍우 속에 자신의 길을 두시는데 이는 모두 주의 재림에 관련된 어휘들입니다.
4-6절은 주님의 권능입니다. 바다와 모든 강의 물이 주의 꾸짖음에 말라 버립니다. 들의 꼴이 시듭니다. 산들이 흔들리고 녹습니다. 땅이 불탑니다. 바위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 말씀들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주님의 권능을 그대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훔은 말하기를, [누가 능히 그분의 격노 앞에 서리요? 누가 능히 그분의 맹렬한 분노 가운데 거하리요?](6a)라고 합니다. 죄인들은 주님의 격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없이는 아무도 주님의 맹렬한 분노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백성들,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님은 선하시고 강한 요새가 됩니다.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면 주님은 그의 방패가 되시고,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두려워하면 주님은 그의 방패가 되십니다(잠30:5).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셨을 때 주변 부족들과 왕들은 아브라함을 노략하거나 괴롭히거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셨을 때 누구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교회들의 반석이요 방패가 되심으로 지옥의 문들도 이길 수 없습니다(마16:18). 주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실 때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죄인들 위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진노와 격노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그 누구라 할지라도 주님의 격노와 맹렬한 분노를 온 몸으로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7절입니다. [[주]는 선하시고 고난의 날에 강한 요새가 되시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7).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며, 나의 속 중심부에 생각을 다 아시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27, [그가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눅13:27).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주님은 주를 부인하는 자들을 부인하십니다. 마태복음 10:32-33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10:32~33) 했습니다. 주님은 특별히 ‘내가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모세를 향해,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며 또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알기 때문이니라.](출33:17)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향해서 [내가 너를 뱃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너를 여러 민족을 향한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에](렘1:5)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알았고”란 말씀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은 인격적인 앎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씀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 나훔1:7,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7b). 사람을 신뢰하는 자나 육신을 신뢰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렘17:5),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은 우상과 같고(시135:8), 자기 재물을 신뢰하는 자(잠11:28)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주를 신뢰하는 자들은 주님이 아십니다.
2. 의로운 자들, [이는 의로운 자들의 길은 주께서 아시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길은 망할 것임이로다.](시1:6). 주님은 의로운 자들을 아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모두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들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3. 자신의 양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주님은 내 양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양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고전8:3).
5. 자신의 백성인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으며 /거기에/ 이같이 새겨진 /말씀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신다,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딤후2:19).
8-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니느웨를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는 수단으로 쓰셨으나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13절,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비록 평안하고 /그 수가/ 많을지라도 그가 지나갈 때에 이같이 베임을 당하리라. 내가 비록 지금까지 너를 괴롭혔을지라도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제 내가 네게서 그의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부술 것임이라.](12-13). 이것은 유다에게 엄청난 좋은 소식입니다. 유다의 민족적 원수가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힐 일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땅의 음녀들이 심판받을 때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이 일들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주}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는 그분의 심판들이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요, 또 그분께서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킨 저 큰 음녀를 심판하시고 또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기 때문이라, 하고 그들이 다시 이르되, 할렐루야, 하니 그녀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더라.] (계19:1~3). 구원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원수들이 멸망당하는 것, 주의 심판이 임하는 것, 주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에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치게 됩니다. 심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은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원수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소식입니다. 15, [보라,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화평을 널리 알리는 자의 발이 산들 위에 있도다. 오 유다야, /너는/ 네 엄숙한 명절을 지키고 네 서원을 이행할지니 이는 저 사악한 자가 완전히 끊어져 다시는 너를 지나가지 아니할 것임이라.] (나1:15). 앗시리아의 멸망은 유다의 화평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다는 앗시리아의 멸망으로 인해 완전한 화평을 얻지 못합니다. 바빌론, 메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계속해서 이방 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주의 재림에 성취될 말씀입니다. ‘저 사악한 자’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좋은 소식을 가져 오는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 52:17,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17).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5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영적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마귀들을 멸하고 사망을 멸한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이 소식을 듣고 믿을 때 그는 승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지니고 있습니다.
2장입니다. 2장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절입니다. [산산조각 부수는 자(He)가 네 얼굴 앞에 올라왔나니 /너는/ 요새를 지키고 길을 감시하며 네 허리를 강하게 하고 네 힘을 심히 강하게 할지어다.](1). 산산조각 부수는 자는 이사야 10:15에서는 도끼입니다. 주님은 느부갓네살의 바빌론 왕을 민족들을 산산조각 부수는 ‘나의 싸우는 도끼’(렘51:20)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3:29에는 주의 말씀이 산산조각 내는 쇠망치라고 합니다. 이사야 10장에는 앗시리아 왕이 부수는 자로 나오고 예레미야 50:17-18에는 느부갓네살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나 바빌론을 들어 민족들을 부수셨던 것처럼 적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많은 민족들을 부수실 것입니다. 대 환란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철장을 들고 민족들을 산산조각 부수실 것입니다.
2절, [이는 [주]께서 이스라엘의 뛰어남을 외면하신 것같이 야곱의 뛰어남을 외면하셨음이니 비우는 자들이 그들을 비우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못쓰게 하였느니라.](2). 야곱의 대환란 때 이스라엘은 외면을 받습니다. 이전에 이미 그러했듯이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떠나 도망할 것이고, 그곳은 텅 비게 됩니다.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맹위를 떨칠 때 이스라엘은 텅 비게 됩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재림에 적용하지 않고 앗 시리아의 멸망에만 적용합니다.
3-7절은 초자연적인 군대의 모습입니다. 현대의 첨단 무기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병거들은 불 뿜는 횃불을 갖추리니’란 말씀은 전투기의 비행 모습, 함포를 발사하고, 미사일이나 대포를 쏘는 병기들을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탱크나 전차들이 굉음을 내며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4절을 보면 “병거들이...그 모습이 횃불 같을 것이요, 그 달려 나가는 것이 번개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차 세계 대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기들입니다. 앞으로 미래 전에 등장할 무기들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훗삽은 포로로 끌려가고 이끌림을 받으리니 그녀의 시녀들이 가슴을 치면서 비둘기의 /우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인도하리라.] (나2:7). “훗삽”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훗삽은 여성 대명사로 받는 것으로 여자입니다. 사무엘 데이빗슨이 쓴 ‘히브리어 어휘집’에 보면 훗삽이란 이름은 합창단을 이끄는 지휘자(겔28:13, 욥38:7)요, 처음 상태가 완벽했던 어떤 것(겔28:15),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 정복할 수 있는 어떤 인물(눅4:6)을 묘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인물이 사탄이요, 마귀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자로 묘사된 것은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바빌론의 음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림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마귀의 정체를 보고 있습니다. 8-12절은 니느웨의 멸망입니다. 니느웨는 바빌론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곳의 재산은 모두 약탈당합니다. 11절에 보면 사자들이 나오는데 구약 성경에는 ‘파라오, 산헤립, 느부갓네살이 약탈하는 사자들로 언급되어 있습니다(겔32:2, 렘50:17). 이들은 모두 마귀를 예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입니다(벧전5:8).
13절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내가 니느웨의 병거들을 연기 속에서 불태우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삼킬 것이며 또 내가 네 먹이를 땅에서 끊으리니 네 사자(使者)들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13). 주님께서 친히 니느웨를 대적하십니다. 150년 전에 회개함으로 멸망에서 구원받았던 니느웨가 이번에는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니느웨는 더 이상 어떤 나라에 사신이나 공무원을 파견하지 못합니다. 식민지로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존립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3장입니다. 3장은 공의로운 주님의 심판입니다. 니느웨는 어떤 도시입니까? 문화 예술의 도시가 아닙니다. 물론 아시리아의 수도로써 정치, 경제, 행정 중심 도시였고 산업의 중심 도시였지만 주님은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 흘리는 도시여! 거기에는 거짓과 강탈이 심히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1). 주님은 니느웨를 “피 흘리는 도시”라고 말씀합니다. 거짓과 강탈이 심히 가득한 도시, 탈취가 떠나지 않는 야만적인 범죄도시입니다. 2-3절을 보면 이 도시의 특징이 잘 나옵니다. [채찍질하는 소리와 바퀴들의 덜컥거리는 소리와 말들의 달려가는 소리와 병거들의 뛰는 소리로다. 기병(奇兵)이 빛나는 칼과 번쩍이는 창을 들어올린즉 거기에 살육 당한 무리가 있으며 수많은 사체(死體)가 있고 그들의 송장들이 끝이 없어 사람들이 그 송장들에 걸려 넘어지나니](2-3). 앗시리아는 철기 무기로 무장한 후 주변 민족들을 정복해 나갔는데 그 잔인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역사적, 정치적,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 까닭은 마술의 여주인 곧 잘생긴 창녀가 많은 행음(行淫)을 벌였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의 행음으로 여러 민족을 팔며 자기의 마술로 여러 가족을 파느니라.](4). 이 여자가 누구인가? ‘마술의 여주인 곧 잘생긴 창녀’란 땅의 음녀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17:4-7에 나오는 신비의 바빌론이 바로 이 여자입니다.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하였고 땅의 거주하는 자들도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되었도다, 하고](계17:4). 니느웨는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음녀로 인해 온갖 죄악을 일삼은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민족들이 마귀의 속임수에 속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국이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5-7절은 주님께서 니느웨를 수치스럽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하십니다. 8-9절은 니느웨를 돕는 동맹국들입니다. 이들의 도움은 아무 쓸모없었습니다. 11-13절은 니느웨의 요새가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4-17절은 재앙을 피하려는 국가적인 노력과 모든 수고가 아무 쓸모없게 됨을 말합니다. 니느웨는 동맹국들을 통한 외교적 도움, 자국의 군사력이나 힘, 정치적 사회적 모든 역량 등을 집결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적하시기 때문에 결국 완전히 멸망당하고 맙니다.
18-19절은 앗시리아에 대한 애가입니다. [오 아시리아 왕이여, 네 목자들은 잠자고 네 귀족들은 티끌 가운데 거하며 네 백성은 산들 위에서 흩어지나 그들을 모으는 자가 없도다. 네 상처는 치유할 수 없고 네 부상은 심하도다. 네 소문을 듣는 모든 자가 너로 말미암아 손뼉을 치리니 이는 네 사악함이 항상 그들 위로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더냐? 하시니라.](나3:18-19). 앗시리아의 목자들이 잔다는 것은 죽음의 잠입니다. 귀족들이 티끌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배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일입니다. 패망한 나라의 귀족은 평민보다 못합니다. 백성들은 뿔뿔히 흩어지거나 포로가 되고 노예로 팔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모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중심 세력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상처는 치유 불가능한 치명적인 것입니다. 다시 나라를 추스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재기의 길을 모색하지 못하며, 재건할 꿈을 꾸지 못한 채 역사에서 완전히 퇴출 당하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앗시리아가 그동안 행한 사악함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들의 멸망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나훔서의 핵심은 주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 유다를 심판하실 뿐 아니라 이교도들, 이방 민족들을 모두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개개인 별로 다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모든 성도들을 다 심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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