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오바댜 1:1-21
요절: 오바댜 1:15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성경입니다. 1장 19절로 되어 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으로 어휘는 674 단어입니다. 오바댜란 이름의 뜻은 ‘주님의 종’(a servant of the LORD)란 뜻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자,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오바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에돔에 대한 대언입니다. 오바댜에 나오는 대언 중의 상당 부분은 예레미야에 이미 언급된 것들입니다. 오바댜는 다른 대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과 천년 왕국에 있을 일들에 대한 대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기는 B.C 586년 예루살렘에 바빌론이 쳐들어와 폐허가 된 후입니다.
1절입니다. [오바댜의 환상이라. {주} [하나님]께서 에돔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주]께로부터 한 소문을 들었나니 곧 한 대사(大使)가 이교도들 가운데로 보냄을 받고 /말하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에돔을 대적하여 싸우자, 하는 것이라.](1). 오바댜는 유다나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에돔'에 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소문은 “에돔을 대적하여 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서 이스라엘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빌론이 유다를 치러 왔을 때 구경만 했을 뿐 아니라 전쟁을 기회로 유다를 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바빌론 군대보다 에돔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예레미야 49:7-22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49:7, [에돔에 관하여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분별 있는 자에게서 계략이 없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사라졌느냐?] (렘49:7).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에돔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내용이 지금 오바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는 신약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베드로전후서와 유다서가 거의 같은 내용을 다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오바댜가 예레미야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맹렬히 비난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49:14, [내가 [주]께로부터 오는 소문을 들었노라. /그분께서/ 대사를 이교도들에게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함께 모여 와서 보스라를 치고 싸우러 올라가라.] (렘49:14). 이 부분은 오바댜 1:1과 흡사합니다. 주님이 에돔에 주신 심판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49:17-18, [에돔도 황폐한 곳이 되리니 그곳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그곳의 모든 재앙으로 인하여 비웃으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멸망한 것같이 거기에 머무를 자가 없고 거기 거할 사람의 아들이 없으리라.] (렘49:17~18). 에돔의 완전한 멸망입니다. 예레미야 49장을 유념해서 읽어 보면 지금 오바댜에 나온 구절과 거의 같습니다.
2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는도다.](2). 에돔은 구약 시대에 이교도들 가운데 미약하게 된 적이 없습니다. 크게 멸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장차 임할 미래적 사건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팔아 먹은 사람입니다. 그는 음행을 일삼습니다. 에돔은 히브리어로 로마와 자음이 같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자음 밖에 없다.). 에돔은 로마의 예표가 되는 족속인데 로마 캐톨릭은 기독교란 이름을 팔아먹습니다. 로마는 영적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은 막강한 정치적 종교적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에돔이 형제 유다를 죽이고 끝까지 괴롭히듯이 로마 캐톨릭은 유대교, 개신교, 성경 신자들을 죽이고 끝까지 괴롭힙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날 이들의 힘은 미약하게 되어 크게 멸시를 받게 됩니다.
3-4절입니다.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거주하는 자여,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네 자신을 독수리처럼 높이며 네 보금자리를 별들 가운데 둘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주]가 말하노라.](3-4). 에돔은 지형학적으로 요새와 같았으며, 고산 지대인데다 언덕과 바위가 많았던지라 외부의 침입에는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이길 자가 세상에 없다고 믿었던지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 내리겠느냐?”고 자신만만합니다. 그들의 이런 교만이 스스로를 속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잠언에는 교만에 대해 참으로 많은 말씀을 기록해 두고 있는데 몇 구절만 보면 이렇습니다. 잠16:5, [마음이 교만한 자는 다 [주]께 가증한 자니 그가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16:5), 잠16:18,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교만은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도 넘어지게 하며 낮추어 버립니다. 잠18:12, [멸망에 앞서 사람의 교만한 마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잠18:12), 잠21:4,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과 사악한 자의 쟁기질은 죄니라.](잠21:4). 에돔은 자신을 독수리처럼 높이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별들 가운데 둔다 해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친히 그를 대적하시고 끌어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주님이 그를 대적하신다는 점입니다. 약4: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벧전5:5,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b). 주님은 교만한 마귀를 하늘에서 끌어내려 땅 아래 지하 깊은 구렁 속으로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에돔을 망하게 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그들의 교만이 주님을 대적자로 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사14:12-15참조.
5-6절입니다. [혹시 도둑이 네게 이르고 강도가 밤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충분히 얻기까지만 훔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서 모으는 자들이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 포도를 얼마쯤은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그런데/ 네가 어찌 그리 끊어졌는가!) /그들이/ 에서의 물건들을 어찌 그리 찾아내었는가! 그가 숨긴 물건들을 어찌 그리 찾았는가!](5-6).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만 훔치고 얼른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노략하실 때 숨긴 물건들까지 다 찾아내어 빼앗아 버리십니다. 에서의 보물 창고는 여지없이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될 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자녀들까지 모두 약탈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에서를 벌거벗기고 그의 은밀한 곳들을 드러내었으니 그가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없으리라. 그의 씨와 그의 형제들과 그의 이웃들이 노략을 당하매 그가 존재하지 아니하느니라.](렘49:10). 이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철저하게 노략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하시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와 연합한 모든 자들이 너를 데려다가 접경 지역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평하게 지내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너를 쳐서 이기며 네 빵을 먹는 자들이 네 밑에 상처를 깔아 두었으니 이는 그에게 지각이 없기 때문이로다.](7). 에돔이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은 나라들은 모두 에돔을 속이고 배신을 합니다.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을 속이고 배신했기 때문입니다(민20:20-21). 악인들은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인간사는 다 그러합니다. 잠언에 말하기를, [너는 악한 눈을 가진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내지 말지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 사람도 그러하기 때문이라.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하지 아니하느니라. 네가 먹은 한 조각 빵도 토하겠고 네 달콤한 말들도 잃게 되리라.] (잠23:6~8) 했습니다. 에돔은 자신들이 믿었던 자들은 에돔의 등에 칼을 꽂습니다. 이 역시 이들이 이스라엘에 행한대로 주님이 보응하신 결과입니다. 에돔은 유다를 돕는 대신에 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그들을 약탈하며 학대했습니다.
8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들을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들을 멸하지 아니하겠느냐?](8). 에돔에는 더 이상 지혜있는 자, 지각있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에돔에 지혜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욥이 바로 에돔 사람입니다. 엘리후를 비롯한 친구들이 모두 우스 땅에 거하는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출신 지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욥기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니 [주]께서도 욥을 받으셨으며](욥기42:9). 9절에 바로 데만이 나옵니다. [오 데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지니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여 끊어지리라.](9).
10절입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사한 폭력으로 인하여 수치가 너를 덮겠고 네가 영원히 끊어지리라.](10). 주님은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폭력’을 행사했음을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그들은 일찍이 출애굽의 여정에서도 군대를 이끌고 나와서 이스라엘을 막아 섰습니다. [그가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라.](민20:20). 그런데 이번에는 느부갓네살의 편에 서서 약탈자로 변모했습니다. 이들은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의 형제였지만 영적으로는 원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육신은 언제나 성령을 거스르며, 대적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육신의 행위들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주님은 에돔의 이런 죄로 인해 심판하시는데 [내가 너를 영원토록 황폐한 곳으로 만들어 네 도시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5:9)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반 이스라엘 정책을 펴며,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행사한 폭력을 기억하시고 그대로 보응하십니다.
11절입니다. [네가 저편에 서 있던 날 곧 타국인들이 그의 군대를 포로로 사로잡아 가며 외국인들이 그의 성문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놓고 제비를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의 한 사람 같았느니라.](11). “저편에 서 있던 날”이란 말은 적의 편에 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영적 전투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원수의 편입니다. 마태복음 12:30,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널리 헤치는 자니라.](마12:30). 에돔은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라 ‘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놓고 제비를 뽑던 날에도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울이 스데반의 옷을 지키며 서 있었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스데반을 살해하는데 동조했고 동의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눅10:30) 누가 그 사람이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형제의 아픔을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도로서 때리고 죽였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나 너는 네 형제의 날 곧 그가 낯선 자가 되던 날에 바라만 보지 말았어야 하고 유다 자손이 멸망하던 날에 그들을 두고 기뻐하지 말았어야만 하며 /그들이/ 곤경에 처하던 날에 교만히 말하지 말았어야만 하고](12). 주님은 이들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바라만 보지 말았어야 하고: 방관자는 소용이 없습니다. 말만 있고 행함이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기뻐하지 말았어야 하고: 형제의 어려움을 보고 울어야 할 때 그들은 즐겁게 웃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로마서12:15,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롬12:15), 히브리서13:3, [결박 중에 있는 자들을 기억하되 그들과 함께 결박당한 것같이 기억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역경 당하는 자들을 기억하라](히13:3). 이것이 형제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함께 아픔과 영광을 공유해야 합니다. 잠언24:17-18,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며 그가 걸려 넘어질 때에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염려함이니라.](잠24:17~18). [누구든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이를 모욕하는 자요, 재앙들을 즐거워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13절입니다. [또 내 백성이 재난을 당하던 날에 그들의 성문에 들어가지 말았어야만 하며 참으로 그들이 재난을 당하던 날에 그들의 고통을 바라만 보지 말았어야 하고 그들이 재난을 당하던 날에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만 하며](13). 에돔이 행하지 말아야 했던 죄는 ‘약탈’입니다. 이들은 마치 전쟁의 승리자처럼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다의 재물에 손을 댔습니다. 이들은 도둑이요, 강도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엄중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형제의 재앙이나 어려움을 보기만 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오. 형제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기회로 삼지 않았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역사적으로 기독교란 종교를 믿는 거짓 형제들이 유대인들의 재산을 약탈한 것을 많이 봅니다.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근대에도 이런 일은 많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캐톨릭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재산을 노렸습니다. 이는 앞으로도 역사에 다시 한 번 일어날 일입니다. 거기에 동참할 많은 이교도들은 에돔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입니다. [또 네거리에 서서 그에게 속한바 그 도망하는 자들을 끊지 말았어야만 하고 /그들이/ 곤경에 처하던 날에 그 남은 자들을 넘겨주지 말았어야만 했느니라.](14). 에돔은 예루살렘에서 탈출하는 유대인들을 방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포로로 넘겨주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 군대보다 더 악독하고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유대의 지리나 그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에돔은 바빌론 군대보다 더 능숙하게 유대인들을 잡아 들이고, 도망자들을 막았습니다.
15절입니다. [이는 [주]의 날이 모든 이교도들 위에 가까이 이르렀음이라. 네가 행한 대로 네가 받으리니 너에 대한 보응(報應)이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15). 주의 날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주님은 이 날 이들이 행한대로 보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행한대로 그 머리에 돌리십니다. [이스라엘의 집의 상속이 황폐하므로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한 것같이 내가 네게 행하리라. 오 세일 산과 온 에돔과 그 모든 곳아,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5:15). 세일 산은 에돔의 지명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기뻐한 것같이 내가 네게 행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망, 회복의 역사이지만 이교도들의 역사는 패망, 멸절의 역사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군의 주 하나님임을 온 민족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십시오. [오 멸망 받을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에게 베푼 대로 네게 갚는 자가 행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들어다가 돌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하리로다.] (시137:8~9).
16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내 거룩한 산에서 마신 것같이 모든 이교도들도 계속해서 마실 것임이니 참으로 그들이 마시고 삼켜서 마치 이전에 없었던 것같이 되리라.](16). 에돔은 주님의 거룩한 산에서 마셨습니다. 그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잔을 들고 마신 것처럼 주님 역시 이들을 마시고 삼켜 버리십니다. 에돔은 자신들이 뿌린대로 거둡니다. 아모스 역시 에돔의 죄에 대해서 대언했는데 내용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세 가지 범죄 곧 네 가지 /범죄/로 인하여 내가 그 형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그가 칼을 들고 자기 형제를 쫓아가며 불쌍히 여기는 것을 다 버리고 끊임없이 분노하여 찢으며 자기 진노를 영원히 간직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이제 내가 데만에게 불을 보내어 보스라의 궁궐들을 삼키게 하리라.] (암1:11~12). 이스라엘에 악행을 행한 에돔에 대한 대언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몇 곳의 참조 구절을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34:5-15, 에스겔25:12-14, 35:1-15, 아모스1:11-12.
이들이 행한 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첫째, 교만입니다(3-4). 둘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연합, 동맹입니다(7). 셋째,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입니다(10). 넷째, 이스라엘의 고통과 재앙에 대해 즐거워 한 일입니다(12). 다섯째, 약탈입니다. 이들은 유다의 재물에 손을 대었습니다(13). 여섯째, 유다가 탈출하고 도망하는 것을 막았습니다(14). 일곱째, 주의 산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습니다(16). 이들은 주의 산에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유다와 그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는 로마 캐톨릭이 한 일을 보는 듯합니다.
17-21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행하실 일들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은 민족들의 머리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됩니다. 17절입니다. [그러나 시온 산 위에는 구원이 있으며 거룩함이 있으리니 야곱의 집은 자기 소유를 소유할 것이요,] (17). “그러나”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전에 모든 일을 한꺼번에 바꾸어 놓습니다. 시온 산 위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산에 오십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산에 오시고, 야곱의 집은 자기 소유를 소유할 것입니다. 약속의 땅, 성전, 보좌, 예루살렘, 구원자를 모두 소유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전에 잃어 버렸던 모든 것을 다 회복합니다.
18절입니다. [야곱의 집은 불이 되고 요셉의 집은 불꽃이 되며 에서의 집은 지푸라기가 되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불사르고 삼킬 것인즉 에서의 집에 남은 자가 하나도 없으리니 이는 [주]께서 이 일을 말씀하셨음이니라.] (18). 야곱의 집은 유다이고, 요셉의 집은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라고 말한 것은 에돔이 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에돔의 땅을 모두 태우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이 자기 땅을 내 놓으라고 시위를 벌이고, 무장 투쟁을 하지만 그 때는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 그대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모두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예언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지극히 싫어하는 말씀이요, 결코 성취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않습니다. 에돔은 완전히 멸망당하여 남은 자가 없습니다.
19-20절은 영토 분할입니다. [남쪽에 거하는 자들이 에서의 산을 소유하고 평야에 있는 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소유할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소유하고 베냐민은 길르앗을 소유할 것이며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을 사르밧까지 소유하고 예루살렘의 포로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남쪽의 도시들을 소유할 것이니라.](19-20). 이 부분은 에스겔에서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는 장면을 참고하면 됩니다. 현재 지도는 천년 왕국이 되면 크게 바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주변국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21절입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 위로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그 왕국이 [주]의 것이 되리로다.] (21). 구원자들이란 우리 주님의 왕과 제사장들이 된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구원자(The Savour)이시고, 성도들(saviours) 구원자가 됩니다. 천년 왕국에서 성도들의 칭호는 왕, 제사장이며 동시에 구원자입니다. 사사기에서는 기름부음 받은 재판관들(사사들)을 구원자, 구출자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구원자라 불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주님과 같은 호칭으로 불리며, 같은 것을 공유합니다. *요일3:1-4, 롬8:29, 빌3:21을 참조하라. 우리는 주님과 정확히 일치하는 형상의 소유자들이다. “그 왕국이 주의 것이로다”란 말씀은 이미 모든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 땅의 모든 왕국은 모두 주의 것입니다. 시편22:28, [이는 왕국이 [주]의 것이요, 그분께서 민족들 가운데서 다스리는 자이시기 때문이로다](시22:28). 요한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계11:15).
오늘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육신과 성령, 세상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에서(에돔) vs 야곱(이스라엘). 육신을 따라 사는가? 성령을 따라 사는가? 에돔(에서)과 야곱이 한 형제이면서도 원수로 지내고 대적하는 관계였듯이 육신은 성령을 대적합니다. 갈라디아서 5:17,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육신과 타협은 없습니다. 육신과 화해는 없습니다. 육신과 성령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하는 것에 종이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2-13). 에서와 야곱 즉 에돔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탄생할 때 유대의 왕은 에돔 사람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베들레헴과 그 부근의 2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마2:16-18). 또 다른 헤롯은 침례인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또 다른 헤롯은 야고보의 목을 베었습니다(행12). 에돔이 이스라엘을 죽이고 괴롭히는 역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민족의 반목과 전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창세기 25:21-26에서부터 이미 다툼이 시작되었던 역사의 연장선상인 것입니다. 육신과 성령, 교만과 복종,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육신의 모든 지체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遲體)들을 죽이라](골3:5). 죽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세상, 마귀, 육신 이 셋은 언제나 우리의 대적임을 기억하고 성령으로 이길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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