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아모스1:1-4:13
요절: 아모스 4:12
아모스는 ‘짐을 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본래 드고아 고원에서 목축을 하며 뽕나무를 재배하던 자로 상당히 부유한 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 1:1에 [유다 왕 웃시야 시대,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 곧 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드고아의 가축치는 자들 가운데 거하던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암1:1)라고 그가 살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나옵니다. 그의 직업은 목축과 양잠업이었습니다. [이에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대언자가 아니며 대언자의 아들도 아니라. 다만 나는 가축치는 자요,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자인데](암7:14).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모로 취하심이 없습니다. 목동 다윗을 왕으로 부르신 것이나 가축 치며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아모스를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아모스의 본래 출신은 남 왕국 유다였으나 북 왕국이 망하기 약 25-30년 전 북 왕국의 사마리아와 벧엘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선교사였습니다. 주님은 여로보암이 벧엘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도 유다에서 벧엘로 가서 전하게 하셨는데(왕상13:1), 이는 주님께서 이곳에 주의 말씀을 증거 할 대언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설교는 주로 ‘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오직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물줄기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란 말씀은 불법과 불의로 넘치던 북 왕국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 하나님의 도전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이 말씀을 삶의 철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가 의를 행치 않고 불법을 행한다면 그 자체가 신성 모독입니다. 히브리서 1:9에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히1:9a)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아모스서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고, 가장 부유하고 번성했던 시기였습니다(왕하14:23-29). 영토는 확장되었고, 경제적 부요함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나라 안의 도덕적 영적 상태는 급격히 타락해 갔습니다. 아모스는 대언자 요나보다는 약간 뒤입니다. 요나가 대언자로서 활동할 때 아모스는 어렸습니다. 호세아, 요엘은 그와 동시대의 대언자였습니다. 아모스의 뒤를 이은 대언자는 이사야와 미가입니다. 아모스는 9장 146절이며 킹 제임스 성경으로 4,217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서의 독특한 특징은 성경에서 "chapel"이란 단어가 유일하게 한번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7:13). 이는 북왕국 왕들이 벧엘에 지어 놓은 산당인데 이곳이 이들의 chapel이었던 것입니다. 아모스서는 사도행전에서 총 2번 인용되었습니다(행7:42,43; 15:16,17)
1:1-2:3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주변 여섯 나라들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첫째, 시리아입니다. 3절에 다마스커스는 현재 시리아를 가르킵니다. 이들의 범죄는 ‘쇠 타작 기계로 길르앗을 타작하였다’고 지적되어 있는데 전쟁에서 참혹하고 잔인하게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둘째, 블레셋입니다(6-8). 이들은 이스라엘 주민들을 노예로 판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습니다(6). 셋째, 페니키아(두로)입니다(9-10). 이들의 죄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주님의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 버린 것입니다. 전쟁 포로들의 인신 매매, 종살이, 노예제 등에 대해서 주님은 이들을 벌주십니다. 넷째, 에돔입니다(11-12). 에돔의 죄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칼을 들고 자기 형제를 쫓아가며 불쌍히 여기는 것을 다 버리고 끊임없이 분노하여 찢으며 자기 진노를 영원히 간직하였기 때문이라.](11b). 이들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원수 노릇을 했지만 끝까지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주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다섯째, 암몬입니다(13-15). 암몬의 죄는 이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기 경계를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들의 /배를/ 갈랐기 때문이라.](13b). 이들의 잔인성과 탐욕스런 이기심에 대해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여섯째, 모압입니다(2:1-3). 모압의 죄는 이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태워 석회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라.](1b). 모압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형제 에돔에 대해 잔인하게 굴었던 죄에 대해 심판이 집행됩니다.
2:4-16절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입니다(4-5). 유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그들이 [주]의 율법을 멸시하며 주의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짓 곧 자기 조상들이 따라가던 그 거짓으로 말미암아 잘못하였기 때문이라.](4b). 유다의 이 죄는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문제였습니다. 출애굽한 이후로 반복적으로 누적된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6-16절은 북 왕국 이스라엘 위에 임한 심판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훨씬 긴 분량으로 상세하게 언급하셨습니다. [그들이 은을 위해 의로운 자를 팔며 신 한 켤레를 위해 가난한 자를 팔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가난한 자의 머리 위에 있는 땅의 티끌을 탐내며 온유한 자의 길을 굽게 하고 한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같은 젊은 여자에게로 들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려 하며 또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스스로 눕고 자기들의 신(神)을 섬기는 집에서 정죄받은 자들의 포도주를 마시느니라.](6b-8). 이들의 타락상은 끝이 없습니다. 뇌물, 탐욕, 인색함, 간음, 성적 문란, 이기심, 술 취함 등 지금 LA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단면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나사르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고 대언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대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12).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제로 술을 먹이고, 대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 단 기독교는 너무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므로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종교법을 제정하는 사회였습니다. 북 왕국에서 대언자들이 활동할 수 없고 당시 대언자들은 남 왕국으로 망명을 가야했습니다. 아모스조차도 [다시는 벧엘에서 대언하지 말라. 이는 이곳이 왕의 예배처요, 왕의 뜰이기 때문이니라, 하니라.](암7:13)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무겁게/ 눌림같이 내가 너희 밑에서 /무겁게/ 눌렸나니](13). 주님은 백성들이 짓는 죄의 짐 아래 무겁게 눌리셨습니다. 이 나라가 짓는 죄, 이 사회가 범하는 죄, 우리 가정, 우리 각 개개인이 짓는 죄는 모두 주님을 무겁게 누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입니다.
3-6장은 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판을 받는지 그 심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3:1, 4:1, 5:1은 모두 “이 말씀을 들으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세 편의 설교를 주셨습니다. 이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평안하고 부유하고 모든 일이 형통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현대 자본주의의 꽃을 피운 서구 유럽이나 미국과 비슷한 그런 사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부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말씀을 믿는 참된 신앙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선택받은 특권을 지닌 민족이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가족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나니](2a). 주님께서 이들을 택하셨기에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이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의 모든 불법으로 인하여 너희를 벌하리라, 하셨느니라.](2b).
3:3절입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3). 주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땅의 모든 가족 중에서 그들만 아셨지만 이제는 함께 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숭배하고, 우상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이들과 함께 걸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지 않는 어떤 자들과도 함께 식탁에 앉으실 수 없고, 함께 교제를 나누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령 크리스찬이라 할지라도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를 때 그와 함께 걸을 수 없습니다(롬8:10-13). 신자는 불신자와 함께 걸을 수 없습니다(고후6:14). 주님은 빛이시기에 빛 가운데서 걸어야만 서로 교제가 있게 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두 사람의 합의 없이 함께 걸을 수 없고(3), 먹이가 없는데 사자가 울부짖을 리가 없고(4), 나팔을 부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백성이 없고(6a), 주께서 행하지 않으셨는데 도시에 재앙이 있을 수 없고(6b),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는데 무슨 일을 행하실 리가 없고(7),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대언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8)고 하십니다. 주님은 결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에는 죄가 있게 마련이란 점을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데는 그에 상응하는 죄가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에는 학대받는 자들이 있고(9), 궁궐에는 폭력과 강탈을 쌓아 올리는 자들이 바르게 행할 줄을 모르는 것(10)입니다. 주님이 징벌하시는 날에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벧엘은 사라집니다. 고관들과 귀족들이 지어 놓고 놀던 상아 집들과 큰 집들이 없어집니다.
4장입니다. 4장은 요약하지 않고 전체 장을 절별로 다 설교하고자 합니다. 1절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는 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짓밟으며 그들의 주인들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1). 아모스의 대언은 상당히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 같으면서도 격합니다. 오늘날 교양있는 목사들의 입에서는 차마 나오지 못할 그런 말투입니다. 아모스는 청중들을 향하여 그들을 동물들이라고 “바산의 암소들아”라고 했는데, 바산이란 지역은 갈릴리 동북부 길르앗에 위치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바산이란 지명의 뜻이 ‘비옥한’이란 뜻입니다. 바산의 암소들아란 말을 요즘 우리 식 표현으로 하면 “이 배부른 돼지들아”란 말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아주 애용하시는 화법이었습니다(마23:33).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누가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보면서 이 지역에는 뱀들이 많아서 주님이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라고 했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개들이 많아서 “개들아, 개자식, 개새끼”등과 같은 욕이 많은데 이는 양식(良識)있고,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침례인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3:7). [그러나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딛1:12).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그들의 대언자도 이르되, 크레테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게으른 탐식가라, 하였으니](딛1:12). 베드로도 그랬습니다(벧후2:22). [그러나 참된 잠언(箴言)의 /말씀/과 같이,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흔히 성도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늘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절대 욕을 해서는 안 되고 부드러운 말과 멋진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서 16:18을 보십시오.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롬16:18). 좋은 말, 빼어난 말솜씨로 사람을 속입니다. 투박하고, 거칠며, 직설적인 말로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성경의 대화법은 직선적이고, 거칠고, 투박합니다. 특히 죄에 대한 책망은 결코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욕하거나, 험담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친 말투와 감정적 흥분, 성숙되지 못한 인격, 모난 성질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책망은 분명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짓밟으면서 거기에 동조하며 술을 가져다 마시는 자들을 향해 분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짓밟는 자들을 향해 아모스는 격렬하게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보라, 날들이 너희에게 이르리니 그가 갈고리로 너희를 끌고 가며 낚시 바늘로 너희 후손들을 끌고 가리라.](2).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징벌, 심판을 예언한 것인데, 50년 후에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그들의 아랫입술과 코를 갈고리로 꿰었습니다(마5:18). 주님의 말씀은 단 한 자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심판을 증거하는 대언자가 부드럽고, 점잖고, 예의 바르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절입니다. [너희가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가되 모든 암소가 각각 자기 앞의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갈 것이요, 너희가 그들을 궁궐 속으로 던지리라. [주]가 말하노라.](3). 문과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갑니다. 이는 도망가는 것, 남의 눈을 피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앗시리아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무너진 곳을 통해 빠져 나갑니다. 모든 암소란 자신들이 지닌 부와 재물의 축적을 말하는데, 이들을 숨겨 둘 장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숨길 곳이 별로 없습니다. 숨겨 두어도 자신들이 포로로 사로 잡혀 가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궁궐 속으로 던져도 궁궐이 불 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모은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달고 날아 가 버립니다.
4-5절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범죄를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감사의 희생물을 누룩과 함께 드리며 자원하는 헌물을 /드리도록/ 공포하고 널리 알릴지니 이는, 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이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4-5). 이는 하나님을 냉소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 장소를 임의로 변경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벧엘과 단에다 제단을 만들어 두고,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왕상12:30). 둘째, 그들은 제사장직을 더럽혔습니다.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이들은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왕상12:31). [그가 또 산당들을 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왕상12:31). 북 왕국에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신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목사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금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산당들의 제사장들로 삼되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를 거룩히 구분하여 산당들의 제사장들 가운데 하나로 삼았으므로](왕상13:33). 셋째,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아침마다 희생물을 가져오고, 삼 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누룩과 함께 드리는 희생물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내기만 하면 되지 형식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식입니다. 실용주의, 합리성에 물든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과 형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 높습니다. 형식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절차, 형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 예배의 형식은 실용, 합리주의적 사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과 정신이 중요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건전한 말씀의 틀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가장 흔히 범해지는 잘못은 포도주로 포도즙을 대신하고, 떡으로 빵을 대신하는 등의 행위입니다. 귀찮다고 누룩이 들어있는 빵을 주의 만찬에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마리아의 정신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점에서 매우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가졌던지라 마음대로 예배를 보았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어서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십일조는 매 해마다 내는 것이 있고,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삼년이 끝날 때마다 내는 것이 있습니다. 삼 년이 끝날 때마다 내는 것은 마치 군량미를 저축하듯이 성문 안에 저축하여 레위 지파와 성문 안에 거하는 소득이 없는 생활 보호 대상자, 극빈층(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는 구제 헌금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어서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로 하여금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친 뒤에 너는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부분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아모스 4:4이 삼년 뒤가 아니라 사흘 후가 아닐까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많은 현대 역본들은 아예 “사흘 후에”라고 고쳐 버렸습니다. 성경의 오류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잘못을 고치려고 덤비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것을 좋아하느니라](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아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하는 것보다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했고, 죄를 짓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점은 남왕국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도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이 시대에는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현대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사랑합니까? “쾌락, 돈,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는 사마리안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훨씬 더한 것입니다.
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딤후3:3~4). ② 모든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합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③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 ④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킵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 그래서 주님이 이 도시를 향해 취한 조치가 있습니다. 주님은 멸망에 앞서 징계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6절부터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6,8,9,10,11). 회개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이 보낸 경고는 첫째, 기근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의 모든 도시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 모든 처소에서 빵이 부족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6). 둘째, 가뭄입니다. [또한 추수하기까지 아직 세 달이 남았을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도시에는 내리게 하고 다른 도시에는 내리지 아니하게 하였으므로 어떤 부분에는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지 아니한 부분은 마르매 두 세 도시가 떠돌아다니다가 한 도시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 하였으되 만족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7-8). 셋째, 주님은 서리와 곰팡이 모충으로 치셨습니다. [내가 마름병과 곰팡이로 너희를 쳤으며 너희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가 불어날 때에 송충이가 그것들을 삼키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9). 넷째, 주님은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전쟁과 동반되는 것은 항상 전염병입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대로 너희 가운데 역병을 보내었고 칼로 너희의 젊은이들을 죽였으며 너희의 말들을 빼앗아 갔고 너희 진영의 고약한 냄새로 하여금 너희 코를 찌르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0).
11절에서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얼마를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린 것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타는 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1). 하지만 그들은 주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지막 한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영적 부흥의 첫 번째 요건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기근, 가뭄, 서리와 곰팡이, 군대, 전쟁, 도시의 파괴는 모두 주님이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내리신 징계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탕자의 위대한 점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돌이킴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음으로 영적 부흥의 첩경입니다. 어느 시대나 영적 각성과 대 부흥은 회개의 물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멸망은 회개의 기회를 차 버림으로써 찾아 왔습니다.
수많은 경고와 징계를 통해서도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12).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12). 이 때가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 많은 대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직접 만나시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종들을 거부하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남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이 만남은 구원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남을 준비하라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결입니다(13). [이는, 보라,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사람에게 밝히 알리고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곳을 밟는 분 곧 그분의 이름이, [주] 만군의 하나님, 이기 때문이니라.](13). 범죄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심판입니다. 이 만남은 가장 중요한 만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직장에 회사원은 사장님과의 만남이 있다고 하면 긴장합니다. 상을 받기 위한 장소라면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절부절못합니다. 사장들은 국세청 직원과의 만남을 두려워합니다. 모범 납세자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색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런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는 말씀은 만남의 즉각성과 위급성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만나야 합니다. 연기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후에 주님을 만날지 내일 아침일지 오늘 저녁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A. 죽음(히9:27, 왕하20:1).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태어난 날을 알지만 죽을 날은 모릅니다. 여러분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히스기야는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대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집을 정리하라. 이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임이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20:1). 만약 누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 그는 죽음을 사모했습니다. 죽음 후에 있을 주님과의 만남이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그는 한 점 후회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준비가 되었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딤후4:6).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B. 휴거(그리스도인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만 두고 공중으로 들림 받아야 합니다. 그 날에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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