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할지니라
-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할지니라. -

말씀: 학개 1:1-2:23
요절: 학개 1:5,7



학개는 포로기 이후의 대언자입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스룹바벨과 더불어 모두 동시대의 인물들입니다. 학개는 총 2장, 38절, 영어 킹 제임스 성경으로 1,130 단어로 된 짧은 성경입니다. 학개는 포로기 이후의 첫 대언자입니다. 학개의 내용은 "God First"입니다.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을 재건하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정확히 3개월 하루 동안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학개서를 들어가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B.C. 586년에 느부캇네살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은 멸망당합니다. 그 이후 바빌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코레스 왕이 유대인 50,000명을 귀환시킵니다. 70년 간의 긴 포로 생활을 마치고 이들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에스라 2:64-65). 역사학자들은 이 때를 B.C. 536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 사업은 여러 대적들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지지부진했습니다. B.C. 519년 그리이스(메대)의 다리오 왕이 다시 칙령을 내려 성전 건축이 재개됩니다(에스라6:12). 이 때 활약한 대언자들이 바로 학개와 스카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다리오 왕 제 이년 유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때는 성전 건축을 시작한지 15년이 훨씬 넘었지만 전혀 진척이 되고 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학개를 통해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B.C. 515년, 다리오 왕 통치 제육년 아달월에 드디어 성전이 완성됩니다(에스라6:15).

B.C. 490년 그리이스가 페르시아를 마라톤에서 승리하고 10년 뒤 살렘미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그리이스 제국을 개막했습니다. B.C.481년 에스더가 아하수에르 왕의 왕비가 되어 유대 민족을 구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B.C. 458년 에스라를 귀환시켜 성전 건축에 탄력이 붙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서기관 겸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은 에스라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산과 인력을 필요한대로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율법을 잊은 유대 민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에스라7:12-28). 하지만 돌아간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닥사스다 왕의 은혜를 입게 하셔서 본국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도시를 복원하게 됩니다. B.C. 445년 느헤미야에 의해서 성벽이 재건됩니다(느2:1-8).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 그 때 곧 주의 집을 건축할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는도다.](2).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바빌론이 무너지며 고레스가 정권을 잡아서 이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했을 때, 그들은 흥분과 설레임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할린이나 연해주, 만주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먼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 고생하다 그 나라가 망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귀환 명령이 떨어 졌을 때 그들은 얼마나 흥분되고 기뻤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이미 그 지역에 집과 땅을 사서 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겠지만 앞 뒤 돌아 보지 않고 돌아 간 사람들이 무려 50,000명이었습니다(에스라2:64-70). 이들은 서둘러 성전의 기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조상과 자기들의 죄악으로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의 성전을 다시 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전 재건은 마음만으로 되는 간단한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막대한 경비와 엄청난 노역(勞役)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와주어도 이루어내기 힘든 사업인데 이들을 극심하게 반대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B.C722년에 앗시리아에 멸망당했으며 그들의 이주 정책과 혼혈 정책으로 진정한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에 같이 참여하겠다고 하자 그들의 도움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우리도 너희처럼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에스라4:2)고 하자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이스라엘의 우두머리 원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는 일에 너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에스라4:3).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땅의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건축하는 일에서 그들을 괴롭게 하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전 생애 동안과 페르시아 앙 다리오가 통치할 때까지 모사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대적하게 하고 그들의 목적한 것을 방해하려 하였으며](에스라4:4.5) 그래서 힘들게 하던 공사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집에 관한 공사가 페르시아 왕 다리오의 통치 이년까지 중단되니라.](에스라4:24).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 곧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역사하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신 일이라 해도 순탄하게 모든 환경이 따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전 건축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일을 하다가 깊은 좌절에 빠져 본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고 추진하던 일이 전혀 풀리지 않고 오히려 꼬이기만 해서 진퇴양난에 빠진 적은 없습니까?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내가 잘못 안 것은 아닌가? 고뇌하고 고민하며 번민의 나날을 보내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함께 하는 일이라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일수록 대적들이 더 많고 마귀의 속임수와 방해가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사람입니다. 항상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늘 성령 충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 낙심하고 좌절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니”(히10:36).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가 되어 거두리라”(갈6:9). 말씀과 기도로 준비한 일들이 점점 망해가는 것 같을 때, 아무리 전도지를 돌려도 구령은 고사하고 연락 오는 사람 한 명 없을 때, 교회를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가는데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녹아나고 손에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육신의 성품이 그대로 살아 있고, 반복되는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해 헤맬 때 ‘나는 과연 구원받았는가?’ 회의가 들지는 않습니까? 힘써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 제목에 올려 놓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의 바람과 소망과는 반대로 결과가 나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가 더 좋은 것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니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들을 잊지 아니하심이라.](히6:9-10).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사람은 확신 가운데 일을 시작했다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 일은 주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때 곧 주의 집을 건축할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도다. 하는도다.”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때”에 대해서 매우 자주 언급합니다. 그리고 “때”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지혜입니다. 역대기상 12:32에 “잇사갈 자손 중에 때를 깨닫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명이니 그들의 온 형제들이 그들의 명령을 따랐더라” 했습니다. ‘때를 깨닫고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본래 때를 정확히 가르쳐 주는 예언의 책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학문, 즉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예언, 예측의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상반기 경제가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회사가 망하겠느냐? 주가가 오르겠느냐 내리겠느냐? 이 사업이 잘 될 사업인가 사양길에 접어든 사업인가? 지금이 적기인가 한 물 갔는가 아니면 너무 앞서 가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 그렇게 돈을 쏟아 붓고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못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다가 연구소 하나 차립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대로 예측을 못해내다 보니 ‘점장이’에게 찾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문제로 고민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심지어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때를 찾습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에는 “때”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데 때를 찾습니까? 감사하는데 “아직은 감사하기엔 일러!” 하시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지금은 때가 아냐!’ 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데 때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바로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이 바로 믿어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아직 안 믿고 계신 분이 계시면 이 시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 바로 구원받을 때인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주의 집을 지을 때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집은 지을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너희여, 이 집이 피폐하였거늘 지금이 너희가 판자를 붙인 집에 거할 때이냐?] 9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도대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피폐하였으되 너희는 저마다 달음질하여 자기 집으로 갔음이라.](9b).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변명을 아십니다. 그들에게 임한 사정도 다 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이해한다. 조금만 더 기운내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주의 명령을 순종하고 이행하는 일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어떤 일에도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에는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는 바빴습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일보다 자기 일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관심사보다 자기의 관심사가 우선인 사람은 이미 마음이 타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방 바닥에 드러 누워 쉬고 싶은 사람, 주일 예배보다 주말 연속극이 더 재미있고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더 재미있는 사람은 이미 타락한 사람입니다. 일요일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집안 모임에 다 참석하고 이리 저리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타락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대신해 채찍에 맞고, 나의 모욕과 수치를 담당하시고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보다 육신의 조그마한 평안과 안락, 게으름과 나태에서 오는 쉼과 쾌락이 더 마음에 끌리십니까? 저는 전에 교회에서 자기 입으로 회원이라고 말하면서 일 년에 단 두 번 정도 교회에 참석하는 형제들을 보았습니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는 거창한 명분을 들이대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일년 내내 오후 예배 중간에 나타나서 놀다가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모임이 장터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광대 쇼 보다 못한 것입니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빌3:17-18).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지 못하겠습니까? 예배에 대한 감격과 경외심이 전혀 없이 자기의 조그마한 일에 더 신경이 쓰인다면 이미 많이 타락하고 실족한 사람입니다.

5.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할지니라.](5,7). 주님은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할지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강력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바로 마음의 생각이 바로 잡히는데서 출발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생각이 어떠한대로 그 사람도 그러한즉...”(잠23:7) 생각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명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생각의 변화없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설교 언제 끝나나?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는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저와 여러분은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너희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엡4:23). 우리가 구원받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자기의 죄들을 생각하고 회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를 video 문화 시대라고 합니다.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 시대! 읽는 사전이 아니라 보는 사전! 그림이 문자를 대신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점점 얕아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의 길들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는 길이 주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가? 좁고 협착한 길인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지금 가는 길이 고난의 길, 순례자요 나그네의 길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인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죽음의 길인가? 자기 영광의 길인가? 넓고 광대한 길인가? 방랑자의 길인가? 불순종과 죄악의 길인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길은 옳게 보이는데 가보면 아닌 길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됩니다. 잠언 14:12과 잠언 16:25에 이르기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하였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16)라고 말씀하신 주님 외에 모든 길은 아무리 곧고 바르게 보여도 그 끝은 사망의 길들입니다. 지금 자신이 사망의 길에 들어 서 있는지 생명의 길에 서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분들은 이 시간 주님의 말씀대로 “너희는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성경이란 투명하고 맑은 거울 앞에서 냉철하게 자신의 길들을 돌아보고 판단하고 입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주의 작품을 깊이 생각합니다.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규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 오시나이까?”(시8:3-4) 여러분이 만약 이 창조 세계의 모든 주의 작품들을 깊이 생각하신다면 주의 은혜를 충분히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해, 달, 별들... 이 모든 것이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별이나 태양이 지구보다 먼저 만들어지거나 더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구가 만들어지고 지구를 위해 모든 것들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자연을 깊이 관찰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② 동, 식물 세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 공급하심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 옷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깊이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6:28). 들의 백합이 자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입는 문제에 대한 염려는 내려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 문명에서 매일 매연을 뿜는 자동차와 공장,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를 생각하면 절대 염려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자라납니다. 자동차, 아파트 생각하지 마시고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까마귀를 깊이 생각해 보라”(눅12:24) 왜 까마귀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을까요? 백로나 독수리나 아름다운 새들이 많이 있는데 왜 까마귀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까마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흉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까마귀조차 주님은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까마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씨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창고도 없고 곳간도 없으되 하나님께서 먹이시나니 너희는 날 짐승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눅12:24). 까마귀를 깊이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먹는 문제에 대한 염려를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③ 성경을 통해 주께서 행하신 역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알고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깊이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고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전7:13-14).

④ 무엇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주로 누가 생각나십니까?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길은 바른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번에 돈을 많이 벌었는데...누가 이번에 승진을 하는데...누구를 손 좀 봐 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회개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인격, 그분의 생애, 그분의 약속, 그분의 명령, 섬김, 고난의 본, 사랑, 겸손, 눈물, 사랑...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찬송가 85:1)

⑤ 특히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해서 울분이 쌓인 분들은 더욱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너희는 죄인들이 자기에게 이같이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니라.](히12:3). 사람이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일 것입니다. 피해자가 졸지에 가해자로 몰려 손해 배상 물고, 길 가다가 용의자로 몰려 경찰서에 잡혀가고(삼청 교육대만 그런게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있다 사기꾼으로 몰려 재판정에 서고, 내 배에서 난 자식이 덤벼들 때, 남과 싸잡아 욕얻어 먹을 때, 주님 일을 하는데 근거없이 비방받을 때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가장 큰 모순덩어리를 견디어 내었습니다. 죄인들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을 때리고 침뱉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모순입니다. 종이 주인을 때린다? 자식이 부모를 때린다? 학생이 선생을 때린다? 그것보다 몇 천배 더 모순된 행동을 견디어 내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⑥ 이제 우리는 서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에 대한 배려, 자매에 대한 배려가 없이 형제애는 싹틀 수 없습니다. [서로를 깊이 생각하여(consider-살펴보고/개역,한킹, 흠정역)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되](히10:24) 그 다음 구절에 유념하십시오.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서로를 생각하면 연락도 하게 되고 자주 만나게 됩니다. 생각이 없으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모이는 곳입니다. 모여서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고 덕을 세워주는 곳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의 백성이 주님과 바른 관계성이 정립되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렸을지라도 적게 거두고...” 성경의 보편적인 원리는 “뿌린대로 거두리라”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대적하시는 일은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많이 벌어 놓았다 해도 쓰지 못하게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평생 번 돈을 병원에 다 갖다 주고 죽습니다. 어떤 이는 써 보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어서 남 좋은 일만 시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악이 있음을 보았나니 이것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과 명예를 주셨으므로 자기 혼을 위하여 자기가 바라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을 권능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셨으므로 낯선 자가 그것을 먹나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병이로다.”(전6:2-3). 아무리 일을 해도 재물이 모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발버둥을 치고 애를 써 보아도 안 되는 일이 여러분 가운데는 없었습니까? 그 때 여러분은 자신의 길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주의 명령에 따라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인내로 견디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시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 길들을 깊이 생각할지니라.](7) 가정이 깨어지고, 삶이 파산지경이 되고, 자녀가 흔들리고, 나의 신앙이 점점 약해질 때 자신을 살펴보고 자신의 길들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고전11:28, 렘3:40을 볼 것 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그 집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주가 말하노라.](8). 주님은 단순한 순종에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통해 기쁨을 얻으시고 영광을 얻으십니다. 자식을 키워 본 부모에게 애 키우면서 가장 힘든 일과 가장 기쁜 일이 무엇이었냐고 물어 보십시오. 정답은 거의 같습니다. [자식이 말 안들을 때, 자식이 말 잘 들을 때]입니다. 말 잘 들을 때가 가장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도 저희들에게 그런 단순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되, 보라, 그것이 적게 되었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갔으되 내가 그 위에 바람을 불었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도대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피폐하였으되 너희는 저마다 달음질하여 자기 집으로 갔음이라.](9).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제한 채 무엇을 이루려고 한다면 자갈 밭에 씨 뿌리는 격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 거한다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작정 여러분을 망하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른 영적 가치관, 우선 순위를 정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이고 다음이 사람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거꾸로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내렸습니다. 농부에게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고 가뭄만 계속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비를 주지 않으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욥기 37:12-14절에 말씀하시기를, [구름이 그 분의 계획대로 두루 돌아다님은 그분께서 땅에서 세상 표면 위에 떠있는 구름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다 행하고자 함이라. 혹은 바로잡는 일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베풀기 위하여 그분께서 그것을 오게 하시느니라. 오 욥이여, 이것에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깊이 생각하라.](욥37:12-14). 일기 예보에서 무엇이라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비는 없습니다. 주님은 비를 통해 사람들을 바로 잡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일이 사람의 생각대로 될 것 같지만 실상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자신의 삶에 메여 이 세상 일만 신경쓰고 자기만 돌본다면 생활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도 가뭄이 있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아모스8:11-13). 하지만 절망하지 마십시오. 징계의 목적은 돌이킴에 있지 괴롭힘에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요, 여러분들의 유익을 위함인 것입니다. 모든 고난은 받아들여 고침을 받는다면 엄청난 유익인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였고 순종하였습니다. 영적 부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하나님을 뒷전에 미루는데 익숙하지만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할 때 영적 힘을 회복하게 됩니다.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목소리와 대언자 학개의 말에 순종하되 주 자기들의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대로 하니라. 백성이 주 앞에서 두려워 하였더라.”(12) 징계를 통해 순종을 배운 사람들은 누구나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압니다. 주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많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질투의 하나님이시며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사실을 알 때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엄격하게 심판하시는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화> 자식 눈을 빼버린 국왕- 실화임 (페르시아 국왕) 세자의 눈을 빼버리자 백성들은 아무도 법을 어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죄를 미워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즉시 그들의 회개와 순종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때에 주의 사자 학개가 주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백성에 말하여 이르되, 주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13). 이로써 그동안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영적 상태는 부흥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영적 부흥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의 길들을 깊이 생각해 보고 주님의 징계를 그대로 받아 들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순종하십시오.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주 곧 자기들의 하나님의 집에서 일을 하였으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유월 이십사일이었더라.](B.C.519년) B.C. 519년에 다시 시작하여 B.C 515년 다리오 왕 제 육년 아달월 3일에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에스라6:15).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100%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믿고 순종했다.- 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고전3:7)이라고 합니다.

2장입니다. 2:1-19절은 천년 왕국에 세워질 에스겔 성전의 모습입니다. 포로기 이후에 세워진 스룹바벨의 성전에는 영광의 구름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로서 이 집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그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3). 솔로몬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스룹바벨의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크게 기뻐하여 소리쳤지만 전에 솔로몬의 성전을 본 노인들은 슬퍼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우두머리 원로들 가운데 여러 노인들은 첫번째 집을 보았으므로 자기 눈앞에 이 집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기뻐서 크게 소리를 내니](에스라3:12).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천년 왕국 때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4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오 스룹바벨아, 그러할지라도 /너는/ 이제 마음을 강하게 할지어다. 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할지어다. [주]가 말하노라. 이 땅의 모든 백성들아,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일할지어다. 이는 내가 너희와 함께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4). 바빌론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온 유대의 거민들이 지은 성전이 형편없다 할지라도 절망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스룹바벨, 여호수아, 백성들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일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5절,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의 말에 따라 내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5). 주님의 영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 한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6-10절은 천년 왕국의 성전에 있을 영광입니다. 9절, [나중에 지은 이 집의 영광이 이전에 있던 집의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9). 주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나 이전의 어떤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큽니다. 주님은 여기서 이스라엘에 화평을 주십니다.

10-19절은 학개가 세 번째 받은 말씀입니다. B.C 520년 9월 24일(11-12월 경)일에 말씀을 받았습니다(2:10).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따라 유다 민족과 그들이 하는 일이 다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14절,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민족이 그러하며 그들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14). 제사장들이 성전을 재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희생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성전 기초 공사를 한다고 시작은 했지만 일을 팽개쳐 두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들의 땅에는 경제적 재앙이 닥쳤습니다. 주님은 언제부터 어려움이 있었는가?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15, 18). 주님께서 우박으로 곰팡이로 쳐서 수확이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복을 주십니다(19).

20-23절은 이방 세계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대환란에 성취될 말씀들입니다. 23절,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를 인장(印章)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23). 스룹바벨은 유다 지파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서 다윗이 통치자가 되고, 주님께서 친히 왕좌에 앉으시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이란 역사적 인물은 메시야 왕국에서 한 명의 통치자로 택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단12:2, 마19:28).

이로써 학개를 마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