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 의의 해가 떠올라 -

말씀: 말라기 1:1-4:6 
요절: 말라기 4:2


말라기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말라기는 신약을 여는 열쇠입니다. 말라기란 이름은 “나의 메신저”(My messvhflenger)란 뜻입니다. 말라기는 4장, 55절, 킹 제임스 성경으로 총 1,781 단어입니다. 말라기는 침례인 요한의 등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00년 뒤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라기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개혁 작업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450-400 B.C). 바빌론 포로를 끝마치고 돌아온 것이 주전 536년경입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주도 아래 그들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520-516 B.C). 약 60년 후에 에스라가 돌아와서 포로기 후의 이스라엘의 기초를 닦았습니다(457 B.C). 그 때부터 약 13년 뒤에 느헤미야가 와서 성벽 재건을 시작했습니다(444 B.C).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지 벌써 100년이 되어 갑니다. 그때 당시의 유대의 영적 실상이 말라기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비록 외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죄는 치유 받았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태했고, 영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레위인들 역시 먹고 살기 바쁜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성전에 희생물이나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바빌론에서 보고 배운 오랜 삶의 풍습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과 자연스럽게 결혼했습니다(에스라9). 예루살렘 멸망, 성전 파괴, 70년의 포로 생활이란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몸으로 체험한 이들의 삶과 정신은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들에게 죄를 지적하고 동시에 곧 오실 메시야를 선포했습니다.

1:1-5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2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주]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2).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신10:15, 33:3, 암3:2). 주님은 이스라엘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내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참으로 내가 영존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하셨도다.](렘31:3).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망하기도 하고, 남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 종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고생 않고 평안히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하고 못 살고 어려우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무엇이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2b). 이들의 눈에는 바빌론이나 주변 민족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듯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주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인물이나 재능이나 여러 면에서 뛰어났습니다. 에서는 육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에서가 잘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 [에돔은 이르기를, 우리가 궁핍하게 되었으나 돌아와서 황폐한 곳들을 세우리라, 하거니와 만군의 [주]는 이같이 이르노라. 그들이 세울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사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주]께서 영원토록 격노하시는 백성이라, 할 것이며](4). 에서의 철학은 혼자 힘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하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합니다. 바벨의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쌓아도 하나님은 무너뜨리십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도시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생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a)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1:6-14절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제사장들의 타락입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유대의 제사장직은 엉망이었습니다. 6절, [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만군의 [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주님을 공경함이나 두려워함이 없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희생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 뿐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이런 영적 상태는 백성들에게 그래도 전달되었습니다. 더러운 빵을 제단 위에 드리고(7), ‘주의 상은 업신여겨도 된다’(7), 눈 먼 것, 다리 저는 것, 병든 것을 희생물로 드리고(8), 그들은 대가를 받지 않고는 제단에 불을 피우지 않았습니다(10). 이런 제사장들의 영적 상태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9절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청하노니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이 일이 너희 수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있어 왔나니 주가 너희를 중히 여기겠느냐?](9). 희생물과 예배를 엉망으로 드리고, 주님을 공경함도 두려워함도 없으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하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중히 여기시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간구를 삶의 수단으로 삼아 왔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 가운데 조금이라도 받지 아니하고 문들을 닫을 자가 누구냐? 또 너희가 조금이라도 받지 아니하면 내 제단에 불을 피우지도 아니하는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에서 헌물도 받지 아니하리니](10). 제사장들은 모두 엘리의 아들들처럼 무엇인가를 받지 않으면 제단에 불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 희생물이라면 차라리 성전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제사장,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라면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성전 문을 닫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 자가 누가 있느냐? 물으십니다. 주님은 억지로 형식만 갖추어 성전에 나오는 그들의 손에서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대신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백성들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11절, [이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인들 가운데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임이라. 모든 곳에서 내 이름을 위해 향을 드리고 정결한 헌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교도들 가운데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11).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성취될 말씀이지만 교회 시대를 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장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언약을 더럽혔습니다. 1-10절은 제사장들을 위한 명령입니다. [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이 명령은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1). 구약의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였습니다. 신약의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주님께서 저주를 보내어 [너희의 복들을 저주하리라.](2)고 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적 제사장의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영광스런 특권과 영적 복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도리어 저주를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주님이 내리시는 저주를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 씨를 썩게 할 것이요, 똥 곧 너희의 엄숙한 명절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르리니 사람이 너희를 그 똥과 함께 취하여 가리라.](3). 성전에서 희생물들의 똥은 진영 밖에서 불로 태우게 되어 있었습니다(출29:14). 주님의 제사장들의 단지 종교인이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의 얼굴에 똥을 바르시며, 사람들이 그를 똥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5-7절은 레위의 언약입니다. [레위와 함께하는 내 언약은 생명과 화평의 언약이라. 내가 그것들을 그에게 준 것은 그가 두려움으로 나를 두려워하며 내 이름 앞에서 무서워하였음이라.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법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공평으로 나와 함께 걸었고 많은 사람을 돌이켜 불법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리니 이는 제사장이 만군의 [주]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니라.](5-7). 레위의 언약은 곧 제사장의 언약입니다. 영적 제사장이 된 저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8-9절은 레위의 제사장들이 언약과 정 반대로 행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썩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내 길들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에서 /한쪽으로/ 치우쳤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8-9). 언약을 더럽히는 일(10)은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1절-12절은 이교도들과의 결혼에 대한 경고입니다. [유다는 속임수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안에서는 가증한 일이 저질러졌나니 이는 유다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것 곧 [주]의 거룩함을 더럽히고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음이라. 이 일을 행하는 자가 선생이나 학자나 혹은 만군의 [주]께 헌물을 드리는 자라도 [주]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내어 그 사람을 끊으시리라.](11-12). 혼합, 분리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교도들과의 결혼이야 말로 완전한 혼합입니다. 이는 율법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고후6:14~16).

13-16절은 이혼에 대한 경고입니다. 결혼은 주님이 짝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로 사람이 마음대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된 까닭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주]께서 증인이 되셨음이라. 그녀는 네 짝이요, 네 언약의 아내로되 네가 그녀를 대적하여 속임수를 행하였느니라. 주께는 영(靈)의 여분이 있었으되 주께서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주께서 경건한 씨를 구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결코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며 속임수를 행하지 말지니라.](14-15). 결혼식을 할 때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주례서는 분이 서 계시지만 사실은 ‘주께서 증인’으로 서 계십니다. 결혼이 무너지면 가정은 무너지고, 지역 교회가 무너집니다. 오늘날 마귀의 전술 전략 중 하나는 가정 파괴입니다. 너무 쉽게 이혼을 합니다. 주님은 이혼을 미워하십니다(16).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마19:9)고 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너희가 너희 말로 [주]를 지치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지치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이르기를, 악을 행하는 자마다 [주]의 눈앞에서 선한 자며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다, 하거나 혹은 이르기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기 때문이니라.](17). 주를 지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악의 가치관이 뒤바뀐 것입니다. 선악의 개념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눈, 세상 가치관입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과 영적인 것의 혼란입니다. 이런 영적 혼란으로 인해 주님이 미워하시고 가증이 여기는 것을 행하고도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다’ 외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비성경적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도 잘했다고 칭찬하고 상을 줄 수 있습니다. 거짓된 고백, 성경적 가치 기준이 없는 판단, 불신 이런 것들이 주님을 지치게 합니다. 이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은 넘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장입니다. 1-6절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1절은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1).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란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약의 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2)와 같습니다. 불과 비누는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더러움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할 때입니다.

3-4절입니다. [그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의 아들들을 깨끗하게 하되 금과 은같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로 [주]께 헌물을 드리게 하리라.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이전 시대에서와 같이 [주]께 기쁨이 되리라.](3-4).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일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말씀의 물로 씻음 받아 깨끗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됩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께 의로 헌물을 드리는데 우리가 드려야 할 헌물은 ‘영적 희생물’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기도, 찬양, 감사, 예배, 구제 등은 모두 주님이 받으시는 영적 희생물들입니다.

6절, [이는 내가 [주]요, 변치 아니하는 자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6).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성품, 권능, 지혜, 생명 그 무엇도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고, 세월이 흘렀다고 퇴색되지 않습니다.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이다.](시103:27). 야고보는 말하기를,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증거합니다. 주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7절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으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7).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계속 “우리가 어떻게” 타령만 합니다. 주님께 돌아가는 방법은 조상들이 버린 주님의 규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8-12절은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레위 제사장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주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내지 않는 것을 ‘강도질’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이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니라.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음이라.](8-9).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다. 고로 신약 성도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씀이다. 이런 주장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성전도 없고, 레위 제사장도 없다. 십일조는 일종의 세금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에 정한대로, 주님께서 풍성하게 해 주신대로, 자원해서, 힘에 겹도록” 구제와 선을 행하는 것으로 헌물을 합니다(고후8:3,12). 헌금은 성전 세금이 아닙니다. 헌금은 율법이 아닙니다.

10-12절은 십일조를 제대로 할 때 주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할 때 주님은 병충해, 도둑, 가뭄, 각종 벌레들을 막아 주십니다(11). 땅이 소출을 많이 냅니다(12). 주님은 아무 것으로도 시험하지 말아야 하지만 십일조에 관한 한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성도가 경제적으로 영적 의무를 수행하고, 시간을 내고, 이것저것 하는 것이 결코 그 자신에게 손해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매주 헌금을 하고 교회에 오는 시간을 자신에게 돌려서 여행을 하고, 외식을 하고, 여가 시간에 투자하고, 자기 개발에 쓰면 더 나을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원하면 한 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초신자 때 이미 여러 번 체험을 했던 지라 주님께 드려야 할 물질이나 시간을 결코 아깝게 여기지 않습니다.

13-15절은 ‘완악한 말로 대적한 죄’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들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여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13). 그러나 이들은 완악한 말들로 대적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한 번이라도 수긍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 가치관이 전도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헛된 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14-15절, [이는 너희가 이르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우리가 만군의 [주] 앞에서 그분의 규례를 지키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를 행복하다 하고 참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세움을 받으며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마저 건짐을 받는다, 하노라, 하기 때문이라.](14-15). 예수 믿어 봐야 득(得) 되는 것 없었다. 교회 다니고 나아진 것 하나도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살 때가 행복했다. 성경대로 살아 봐야 몸만 피곤하다. 이런 말들이 모두 완악한 말들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생활에 불만족스런 것들, 자신의 일이 형통하지 못한 것을 다 주님의 탓으로 돌리고, 신앙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무용론을 외치고, 목사 무용론을 외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과 주님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는 이들의 대화는 주님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들의 이름을 주 앞에서 기념 책에 기록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들을 보석으로 삼으시고 친아들을 아낌같이 아끼십니다. 16-17절, [그때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서로 자주 말하매 [주]께서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들으시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그분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 앞에서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만드는 그 날에 그들을 나의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자기의 친아들을 아끼는 것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16-17). 주님은 결코 같지 않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완악한 말을 하는 자들과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서로 하는 말을 같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구별하시고 나누십니다. 18절,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를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3:18). 주님은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를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는데 이 둘은 차이점은 4:1과 2절의 각기 다른 보상을 받습니다.

주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들은 화덕같이 불태워집니다. [이는, 보라, 화덕같이 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4:1). 반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의의 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치유를 얻고 외양간의 송아지같이 자랍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義)의 해가 떠올라 자기 날개들에서 병 고치는 /능력을 내리니/ 너희가 나아가서 외양간의 송아지같이 자랄 것이요,](2).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는 날에 주를 두려워하고 섬기던 자들은 사악한 자들을 밟고 승리자가 됩니다(3). 악한 현 세상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해서 돈이 생기거나 권세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런 것을 얻고자 기대했다가 실망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꿈과 야망과 성취를 이루려고 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믿어도 아무 소용 없었다’고 주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던 이들은 장차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이 땅에서 주님을 알지 못한 채 권세를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모든 이들을 밟을 것입니다.

제사장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율법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바 모세의 율법을 법규와 법도와 함께 기억하라.](4). 주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언제나 한 가지 일은 주님이 명령하신 바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잊으면 역사도 미래도 없습니다. 말씀을 잊으면 어떤 영적인 복도 임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동일합니다. 유다서 17절에,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을 기억하라.](유1:17)고 합니다. 구약 성도들이 모세의 율법을 법규와 법도와 함께 기억하듯이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에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5-6절입니다.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말4:1~6). 이 기사는 초림에 적용하면 침례 요한에 대한 기사입니다.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왔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묻고 답하기를,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여쭈어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려니와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는 기록하기를 그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니라.] (막9:11~12)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기록은 초림은 영적으로, 재림은 문자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11:14). 유대인들이 주님을 영접했다면 엘리야의 영으로 온 침례 요한이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성경 기록은 문자 그대로 성취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계시록11:3-6에 나오는 두 증인 중의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말라기는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출현과 그의 사역을 알렸습니다. 요한은 물로 회개의 침례를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이들은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아 2000년 이상을 온 세계의 조롱과 멸시거리로 전락하여 지푸라기처럼 밟혔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단어는 [저주/curse]란 말로 끝이 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새 사람이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저주 아래 있었던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