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임한 뒤에 닥치는 시험(VII)
말씀: 열왕기상 17:17-19
요절: 열왕기상 17:17-19
오늘 본문은 “은혜 입은 성도가 그 은혜 입은 뒤에 닥친 삶의 위기와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는 매우 귀한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의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고, 닫힌 마음,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셔 말씀의 은혜를 받아 열매맺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는 “통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는 말씀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과부는 믿음으로 엘리야를 섬기고, 엘리야를 통해 주님의 선하신 공급의 손길을 몸소 체험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주의 성도라면 누구나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주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와 공급하시는 도움의 손길을 통해 이런 은혜를 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문제와 상황이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일생은 어느 시점에서,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끝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 나그네의 길, 순례의 길이라 불리는 이 타향살이는 은퇴도 안식년도 없습니다. 천성에 도달하는 저 마지막 순간까지 꾸준히 믿음에 거해야 하며,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닥치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닥칩니다. 욥은 말하기를, [고난은 티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나니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욥5:6-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살핌과 은혜와 사랑의 대상이지만 일상적으로 부닥치는 삶의 재난들과 고생들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고난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닥치는 고난들을 이길 풍성한 은혜와 믿음을 더 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고난은 우리 자신에게 닥치든, 우리의 가족에게 닥치든, 매우 가까운 사람들에게 닥치든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도들 역시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듭니다. 사르밧 과부 역시 엘리야를 돌봄으로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움과 섭리를 볼 때, 강한 믿음도 생겼을 법합니다. 그녀는 저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몸소 체험한 믿음의 성도였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들 후에 그 집의 여주인이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었더니 그 병이 매우 심해 숨이 끊어졌으므로](17). 본래 과부와 이 아들은 양식이 없어 벌써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사는 인생은 주님의 은혜로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던 인생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여분의 인생이요, 덤이란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죽는다해도 본래 죽기로 되어 있었던 것보다 더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하겠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죽은 아들을 안고 “주님, 벌써 굶어 죽었어야 할 저와 제 아들, 지금까지 살려 주셨다가, 이제 때가 되어 굶어죽지 않고 먹을 것 다 먹다가 병들어 죽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인생은 모순이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양식이 있으면 병으로 죽고, 병이 없으면 굶어 죽고, 그 둘 다 있으면 홍수나 태풍이나 지진이나 전쟁 등 각종 사고로 죽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사고로부터 예외가 되지 못한 채 죽어 가는 현장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9.11 Terror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제 극적으로 주님의 기도 응답을 받아 결혼할 배우자가 생겼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그 동안 오랫동안 기도하여 승진을 약속 받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쁨 가운데 들떠 있는 사람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비행기에 탔던 사람 중에는 오랫동안 취직을 위해 기도하다 응답을 받아 직장으로 가고 있었던 의사나 교수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갑작스런 사고나 재앙, 위험으로부터 다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어디서나 매순간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모스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는 천상의 음식인 만나를 먹었지만, 이 땅에서 나는 빵이나 고기를 먹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며, 권능이 우리를 위하여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사실이 혈과 육으로써 반드시 당할 수밖에 없는 육신적인 고통들을 도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들 후에 그 집의 여주인이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었더니 그 병이 매우 심해 숨이 끊어졌으므로](17). 사르밧 과부가 자신의 외아들이 죽은 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났다거나, 주님의 심판이나 진노가 자신에게 임했다고 판단했다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히12:6)고 말씀하셨습니다. 맑은 날이 지속된다 해도 흐린 날이 있듯이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 가운데서도 섭리적인 훈련과 징계의 손길에 늘 대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주님의 뜻이 계시된 이후에 더 큰 어려움이 닥치는 법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은 반복적으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자신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은혜를 입고 나서 또 한번의 은혜를 얻는데는 고난의 풀무를 통과해야 합니다. 고난은 은혜의 징검다리입니다.
[이 일들 후에 그 집의 여주인이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었더니 그 병이 매우 심해 숨이 끊어졌으므로](1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일들 후에], 즉 하나님의 섭리적 공급하심과 은혜를 여러 날 동안 체험한 후에란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이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한 후에 시련과 연단의 풀무 속으로 넣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을 주시는 일이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크나큰 영적 축복을 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그 이후에 다가올 시련과 괴로움, 시험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삶 가운데서 기도의 응답이 잘 되고,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의 은혜가 넘치고, 유난히 잘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마음 가운데 찾아오는 평안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주의 선하심을 체험적으로 맛보았으므로 더욱 더 시험을 잘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첫째, 믿음의 단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정금이 뜨거운 풀무에서 단련되듯이 믿음은 시련의 풀무에서만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온실 신앙, 인큐베이터 신앙에 불과합니다. 베드로전서 1:7,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함이니라.](벧전1:7).
둘째, 사랑하는 자녀들을 단련합니다. 하나님은 일보다 사람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벧전4:12,13a).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단련하기 위해 불같은 시련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 진흙 반죽을 빚어서 그늘에 말리면 모양은 도자기지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900도에서 1500도까지의 뜨거운 풀무에서 구워진 그릇만이 쓸만합니다. 뜨거운 열에 가하면 가할수록 강도는 높아지며, 그릇의 표면이 아름답습니다(토기→석기→도기→자기). 특별한 용도로 사용할 특수 자기는 특수 열처리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한줌의 진흙에 불과한 저희들을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해 고난과 시련의 강도를 더해 나가십니다.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 주님의 특수 임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신 사람들은 그만큼 더 특수 열처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와 체험,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련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 사르밧 과부에게 시련이 없고, 단지 빵과 기름만으로 3년을 채웠다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믿음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 단련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그녀는 인내와 체험과 소망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나무처럼 아무렇게나 언제나 저절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 인내와 온유, 화평과 절제, 충성, 양선,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와 하나님의 은혜들은 불같은 시련을 통과해서만 맺혀지는 것입니다. 환난이 없으면 인내는 없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체험이 없고, 체험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만이 환난을 기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
[이 일들 후에 그 집의 여주인이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었더니 그 병이 매우 심해 숨이 끊어졌으므로](17).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어느 부모에게나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특히 일찍 남편을 잃고 외아들과 사는 과부에게 그 아들이 죽는 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일은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입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모든 애정의 대상이요,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음으로써 모든 소망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시험은 우리의 애정과 소망의 대상을 주님이 치워 버리시는 일입니다. 과부는 인생이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란 사실에 대해 뼈 속 깊이 깨달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신뢰의 대상은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시오. 그분만이 참된 소망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 하니](18). 과부는 엘리야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얼마든지 이 과부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동정심이 절로 가는 상황입니다. 과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란 것과 엘리야가 섬기는 분이 전능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는 재앙이 임한 것도 하나님과 엘리야의 기도 때문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를 주님의 재앙과 심판을 선포하는 대언자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집에도 재앙이 임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채찍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할 때, 겸손히 거기에 굴복하기 보다 거스려 반항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 보거나, 기도해 주기를 구하기는 고사하고, 이 모든 상황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죄악된 인간의 본성은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그를 비난하려 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그 원인을 알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께서 나의 깊은 곳까지 다 보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겸손히 주의 손아래서 회복되기 위함입니다. 욥기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께서 나와 다투시는지 내게 보여 주소서](욥10:2). 이것은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가 아닙니다. 겸손히 주님께 아뢰십시오. 둘째, 우리는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평소에 나 자신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이 고난을 통해 낮아 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첩경이며, 더 많은 은혜를 얻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하신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셋째, 주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고난 뒤에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10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 은혜 입은 성도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도록 해 주시기를 빌고, 이 고통이 그냥 무의미하게 고통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뭔가 깊은 교훈과 배움을 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성도는 있을지언정, 실제로 문제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때마다 한 단계 한 단계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 하니](18). 과부의 이 말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과부는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를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란 말은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라고 따지는 말입니다. 과부는 아들이 죽을 때 맨 먼저 자신의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시돈 지역에 살았고, 그 지역이 바알 숭배지였기 때문에 그녀 역시 바알을 숭배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바알 숭배로 인해 가뭄의 재앙을 내리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자신의 과거 우상 숭배 죄를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고통과 재난이 닥칠 때 맨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고, 죄에 대한 회개와 경각심이 없이 하루하루 지나가 버립니다. 더욱이 양식이 풍성하게 채워지면 죄에 대한 회개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생활에 게으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거나, 아니면 우리의 등에 주님의 채찍이 가해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 하니](18). 과부는 자신의 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의 집에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많이 입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오랫동안 쌓아두고 있으면 반드시 심판이 임합니다. 그것이 자녀의 죽음이든, 배우자와의 사별이든, 질병이든, 경제적 파산이든, 사고이든지 간에,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입은 후에 자신이나 가족에게, 자신과 연관된 주변에 재난이나 큰 시련이 닥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태도는, 그 모든 일이 나를 향해 주님이 안배해 두신 손길로 알고 부지런히 자신을 점검하고, 불법의 행위를 회개하고, 고백하여, 용서하심과 깨끗케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십자가의 피는 언제나 항상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은 나의 죽은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주님의 피는 우리를 새롭고 산 길을 통해 곧바로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여러분에게 이 피가 있는 한 죄(罪)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은혜입은 성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이런 보혈의 특권과 은혜를 사용하는 대신 불평과 원망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 하니](18). 자녀를 잃게 되면 누구나 자신의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죄까지 기억해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의 선배 목자님 중의 한 분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느라, 늦둥이로 아이를 가졌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늦둥이로 태어난 외동 딸을 잃어 버렸습니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고, 온 마을을 다 찾아 수십 바퀴를 돌았지만 아이를 찾지 못하자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는데, 평생 지은 모든 죄가 다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무릎 끓었다가 몇 시간 동안 눈물로 회개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 버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학하며 어렵게 커서 갖은 고생을 다 해 보았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그 사건보다 더 큰 시련과 마음의 각성을 주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과부에게 있던 외동 아들이 죽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영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는 별 차이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시련을 당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며, 자신의 현재의 행실을 주의 깊게 점검하고, 잘못된 점을 찾아내고 즉시 바로 잡는 사람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주 앞에서 잠잠합니다.
성경에는 아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는데 실패한 몇몇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자신들은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주님 앞에서 범죄하여 속절없이 죽어갔습니다. 모세와 더불어 출애굽을 이끌었던 아론은, 자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주께서 명령하시지 않는 다른 이상한 불을 가져다가 주님 앞에 놓았다가 즉사했습니다. 이때 아론은 잠잠했습니다(레10:3). 그가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사무엘의 스승인 늙은 엘리 제사장 역시 자식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멸절당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엘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주시니 그분께서 선하기 여기시는 것을 행하실 것이니라,](삼상3:18). 다윗은 자신의 악행으로 아이가 죽었을 때 처절하게 회개했습니다(삼하12). 그의 회개의 눈물과 통곡은 시편 51편에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손해가 얼마나 크든지, 슬픔이 얼마나 깊든지 올바른 성도의 고백은 언제나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시편 119:75,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들은 바르오며 또 주께서 신실하신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시119:7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때만 신실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극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 두실 때에도 주님은 더욱 신실하신 것입니다. “또 주께서 신실하신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지금 사르밧 과부가 당하는 괴로움은 주님의 신실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 하니](18). 과부는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원인이 엘리야가 왔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이 과부처럼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에 그릇된 해결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 문제를 인식했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 모든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려 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자신의 집에 벌을 주러 온 하나님의 사자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여인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회개하라!” 그런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가혹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누이고](19). 엘리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지만 부드럽고도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는 잠언 15:1에 있는 대로입니다.[부드러운 대답은 진노를 돌이키게 하거니와 가혹한 말들은 분노를 일으키느니라.](잠15:1).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3). 주님의 종은 반드시(must) 다투지 말아야 하며, 온유하며 겸손하신 주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네 아들을 달라]는 엘리야의 말은 그녀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죽은 아이도 아이지만 문제는 살아있는 과부의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과부가 믿음의 여인이란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5,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히11:35).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하고, 불평한 것만 같은데, 신약 성경은 그녀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르밧 과부가 자기 자식의 부활을 믿었다는 그런 기사를 읽어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신의 기사만 잔뜩 보입니다. 이 여인은 언제 이런 믿음이 생겼단 말입니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와 함께 있는 동안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시는 분이시며, 비를 내리시기도 하시고, 기근을 보내시기도 하시며, 지금 통에 있는 밀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는 기사를 통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전에 이미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살리신 주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뜨겁고도 효과적인 기도를 통해 아이가 살아났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오히려, [믿음으로...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히11:35)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살아난 것은 과부의 믿음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구약 성경에는 그녀의 죄와 허물, 불신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신약 성경은 그런 것들은 일언반구도 없고, 대신 그녀의 믿음과 믿음에 따른 보상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에는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암시조차 없지만, 신약에서는 그녀가 믿음으로 낳았다고 말합니다. 삼손은 불량배 중의 불량배였지만 신약은 그의 믿음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과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구약 성도들의 허물과 약점, 불신의 죄가 십자가의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은혜” 뒤에 임한 외동아들의 질병과 잇따른 죽음이란 불같은 시련을 받았지만, 자신의 죄를 기억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백하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기억해 냄으로써 믿음을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은혜 뒤에 임한 시련은 목적이 있다. -믿음의 연단, 하나님의 사람을 만듬, 인내와 체험, 소망을 이룸. 2. 은혜 뒤에 임한 시련은 전에 받은 은혜로 시련을 이기고, 시련을 이김으로 성숙하며, 단련되는 선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3. 순례의 길에서 짓는 모든 허물과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제거된다. 4. 사르밧 과부는 시련을 통해 부활의 믿음을 소유한 성도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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