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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주님의 명을 받은 두 사람

주님의 명을 받은 두 사람(V)

말씀: 열왕기상 17:10-12
요절: 열왕기상 17:10-12


오늘은 주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도우시며, 먹이시고, 입히시는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란 걸출한 믿음의 사람 한 명만 다루었지만, 오늘은 믿음이 없는 이방 여인이요,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얻어먹으라는 명을 받았고, 한 사람을 돌보라는 주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똑 같이 주님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 베푸심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나 과부나 경제적으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 믿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 주는 것인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릿 시냇가에 있던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옮기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종을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옮기실 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엘리야를 고향 길르앗의 목가적인 평안으로부터 아합 왕과의 쓰라린 대면을 하고, 거기서 그릿 시냇가로 가서 지내게 하셨다가, 시냇물이 마르자, 이번에는 이방 지역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 영적 생명이 강건해지고, 믿음이 연단되기 위해서는 자리바꿈과 흔들림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48:11, [모압은 어린 시절부터 편안히 지냈고 자기의 술 찌꺼기 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람들이 모압을 비우려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도 아니하였고 모압이 포로가 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그 안에 그 맛이 남아 있고 그 냄새도 변하지 아니하였도다.](렘48:11). 모압은 오랫동안 평안했으므로 무기력하고 연약해졌습니다. 마치 한번도 거르지 않는 포도즙처럼 부패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찌꺼기가 표면으로 떠올라서 버릴 수 있게 되도록 엘리야를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비우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거처를 자주 옮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포로가 되지 아니하려면 이것은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침전물이 생기고, 자신은 아주 깨끗한 줄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물통을 흔들어 보면, 다른 그릇으로 옮기기 위해 비워 보면, 그 내용물의 순도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한번 옮길 때마다 주님은 마음 속 깊은 곳, 저 밑에 가라앉아 있던 찌꺼기를 걸러 내십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운 계획을 인식하고 순종함으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된 일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다윗이 평생동안 얼마나 자주 옮겨 다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끊임없이 그를 연단하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착할 즈음이면 옮기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적 생명은 점점 강건해 지고, 성숙해 갔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그가 그녀를 불러 이르되, 원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10). 엘리야는 주저 없이 일어나 명령받은 대로 행했습니다. 100마일이 넘는 사막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왕궁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이방 과부에게 도움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이 한마디는 엘리야가 참으로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해 보인 행동입니다. 종의 길은 바로 순종의 길입니다. 그 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는 종이 아닌 것입니다.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종과 순종의 관계는 일꾼과 일의 관계와 같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의 자세요, 신앙의 지표입니다. 나 자신이 순종의 길을 걷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자신을 부지런히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깊이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설교자나 전도자, 교사나 집사의 직임을 맡은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한 봉사와 일에 앞서, 주님께 복종과 굴복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과부가 누구인지, 생김새가 어떠한지, 이름이 무엇인지, 가족 상황이 어떠한지, 얼마나 부자인지 전혀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주어진 명령, 그가 해야 할 일은 사르밧으로 가서 거하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발을 내딛어 사르밧 성문에 이를 때, 나무 가지를 줍고 있는 과부를 만났습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10).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놀라운 섭리의 손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먼저 가서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환경을 조성하시고, 사람을 예비하십니다. 엘리야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사르밧까지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발을 떼기 전에 미리 앞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싶어합니다. 첫발을 떼기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무슨 일이 있을 것까지 알고, 전망이 밝아야만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예레미야 10:23,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며 걷는 자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그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시편37:23,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믿음으로 순종해서 걷는 걸음은 주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의 길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엘리야가 사막을 통과해 사르밧으로 가는 동안 주님은 엘리야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다 보셨습니다. 그 길을 ‘믿음의 행로’라고 명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이와 유사한 한 가지 예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8:26-29,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하니 그 길은 사막이더라.](26) 빌립은 거기서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주의 천사가 말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까지였습니다. 27절,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보라, 이디오피아 사람 곧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 빌립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어 보거나, 자신이 거기 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종해서 갔을 뿐입니다. 29절, [그 때에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르시되, 가까이 가서 이 병거에 합류하라, 하시거늘](29). 빌립이 순종해서 갔을 때에, 그 때에 다시 해야 할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단 처음 명령인 “가라”에 순종했을 때, 가서 보니 만났고, 거기서 다음 할 일을 받았습니다. 엘리야 역시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갔을 때, 거기서 나무 가지를 줍는 과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이처럼 단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한 걸음씩 인도하십니다. 순종의 첫걸음을 떼어놓지 않으면 다음 걸음에 대한 인도를 받을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가끔 내가 믿음으로 순종해서 행하는 일이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동료들에게 앞, 뒤 생각 없이 행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 봐야 알지...”란 말은 함께 따라 나서는 동료나 배우자에게는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은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그가 그녀를 불러 이르되, 원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10). 우리는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깊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에 한 가지 일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양편에서 동시에 일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엘리야에게 명하시는 동시에 과부를 준비하셨습니다. 야곱에게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에 앉혀 두셨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위협받는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아헤수에르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왕궁의 문서 기록실을 찾아보았고, 모르드개는 높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순간에 또 다른 곳에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에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그가 그녀를 불러 이르되, 원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10). 엘리야가 처음 본 과부는 너무 가난해서 땔감조차 없었고, 땔감을 구해 줄 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곳까지 와서 보니 환경은 암담했습니다. 믿음으로 떠났다가 도착해 보니 더 암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을 잡으려고 아무리 이력서를 내어도 마땅한 직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하나님께 “아무 직장이라도 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직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곧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응답에 대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회사라고 하는 것이 말이 회사이지 헌 창고 같은 곳이었습니다. 첫 달 급여는 30만원이었습니다. 그는 도착해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주님, 이것이 주님이 제게 주신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까? 아닙니까? 하고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엘리야가 그 답을 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라,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주우므로 그가 그녀를 불러 이르되, 원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10). 과부에게 말을 걸어 확인 작업을 해 보았습니다. 그녀가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를 먹이도록 명하신 그 과부인지를 알기 위해 확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맹목적인 확신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자신을 위해서라도, 차분하고 냉철하게 확인하면서 따라야 합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원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는 것은 단지 갈증이나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려는 조심스런 신앙 자세였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먹이도록 명한 과부라면 틀림없이 물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타박만 맞을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 여러분이 이런 자세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교회를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 학교를 선택할 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먼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몇 가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주일은 쉽니까?, 급여는 제 날짜에 정확히 줍니까? 자신이 평소에 기도할 때, 생각해 두었던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엘리야가 나뭇가지들을 줍는 과부에게 물을 조금 가져오라고 요청하는데, 들은 척도 않는다면 그 과부에게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녀를 불러 이르되, 원하건대 네 손의 빵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하매](11). 나뭇가지를 줍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지체없이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과부라는 인상과 확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좀 더 어려운 요청을 한 가지 더 했습니다. [원하건대 네 손의 빵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하매](11). 빵이 그 집에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보다 빵을 가지고 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의 마음 자세와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섬기고 싶어도 돈이 없는 사람이 있고, 있어도 섬길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섬길 마음이 있지만 돈이 없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빵이 있지만 섬길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엘리야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과부의 편에서 볼 때, 자신의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요구하는 엘리야는 참으로 야비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과부인 것을 뻔히 알면서 빵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시각 그녀가 만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 주시는 방법은 자신의 종을 보내셔서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없을 때, 천사를 보내시기도 하시고, 꿈을 통해 보여 주시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방법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은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의 말을 듣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사야 30:18,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사30:18). 주님은 이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하십니다. 긍휼을 베풀려 하십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신 다른 이방 여인들처럼 이 과부 역시 엘리야를 통해 시험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그의 마음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 일이 더 악화되고, 나빠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가진 것을 다 소진하고, 없어질 때까지 몰고 가셔서 100% 주님의 은혜만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이 사람의 일과 뒤섞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은 왜 사람을 맨 마지막에 지으셨는가?”란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다른 것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지음 받았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지었다고 하거나, 자신이 다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가 답입니다. 사람들은 0.0001%의 가능성만 있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 거기에 영광을 돌려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일에 철저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서 조차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수고와 공로도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될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겸손이야말로 주님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인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녀가 이르되,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게는 빵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니이다. 보소서, 내가 나뭇가지 두 개를 줍고 들어가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그것을 준비하여 우리가 먹고 그 뒤에 죽으려 하였나이다, 하니](12). 이스라엘에 불어닥친 가뭄의 재해는 이곳에도 그대로 몰아 닥쳤습니다. 시돈이란 지역은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아셀에게 주었던 곳입니다. 모세는 아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축복했습니다. 신명기 33:24, [아셀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아셀은 자녀들로 복을 받으며 자기 형제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물보다 기름이 많은 지역! 이런 가뭄 가운데서도 과부에게는 병에 기름이 있었습니다. 시돈 지방의 주산물이 기름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살다 보면, “이러다 죽나보다!, 이제 끝장났다! 이게 마지막인가?”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과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가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점입니다. 믿음이 없던 히브리 사람들은 광야에서 굶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한때, [이제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니...](삼상27:1)라며 도망을 쳤지만 그는 사울의 손에 죽지 않았습니다.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빠져 죽는 줄 알았던 사도들은 고함을 질렀지만 빠져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의 길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68:19,20 [날마다 우리에게 은택을 더하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셀라.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로다. 사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주 하나님께 속한 것이로되](시68:19,20). 이 과부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만 통과 병만 바라보았기에 죽음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과부가 누구를 먹여 살린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보소서, 내가 나뭇가지 두 개를 줍고 들어가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그것을 준비하여 우리가 먹고 그 뒤에 죽으려 하였나이다, 하니](12). 과부에게 한 가지 훌륭한 점을 배울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의 책임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팽개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했습니다. 나뭇가지를 줍고, 부지런히 마지막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이는 그냥 넘어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나태함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조금도 나태해서는 안됩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정을 돌보는 자신의 의무를 충직하게 수행했습니다. 낙심해 버리면 결코 선한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마지막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다할 때 주님은 그의 종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종말의 순간이 다가오면 올수록, 그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평상시의 삶, 일상의 삶에서 이탈하지 않고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서 사르밧 과부의 발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과부가 엘리야를 일컬어,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부는 어떻게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인 줄 알고 있었습니까? [내가 그곳의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8). 주님의 명령은 엘리야에게 뿐만 아니라 과부에게도 떨어졌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과부에게 말을 걸었고, 주의 인도하심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과부 역시 이런 대화를 통해 엘리야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엘리야를 먹이고자 해도 먹일 능력이 없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먹일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정이 안 된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과부는 양식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과부는 자신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자신에게 엘리야를 먹여 살리라는 명령은 언감생심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가난한 형제를 돌보라”, “지역 교회를 돌보라”,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을 돌보라.”, “선교사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고 힘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내게 주신 주님의 명령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능력과 힘으로 주의 명령을 수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공급하심으로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에게 엘리야를 돌보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시점에서 과부가 굶어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엘리야를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현재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놓인 가루는 양이 아무리 적을지라도 수천, 수만 명을 먹이고도 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믿음이란 어려움에 사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하신 주님께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2). 엘리야는 과부의 암울한 반응과 현재 처한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부의 믿음을 도우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과부를 통해 나를 돌보게 하셨다면, 지금 남아 있는 한 움큼의 빵과 약간의 기름이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 그분의 능력과 사랑, 신실하심에 대해 작은 체험이라도 있고, 믿음이 있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순종의 첫발을 떼지 않으면 다음 조명을 받을 수 없다”입니다. 주님은 한 걸음씩 인도하시고, 한 걸음 앞만 보여 주십니다. 가면 보여 주십니다. 보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주님은 앞서 일하시는 분이시다.”-엘리야가 갔을 때, 이미 과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

셋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주의 깊게 확인하라.”- 엘리야는 자신의 인도함을 확신하기 전에 주의깊게 확인했습니다.

넷째,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하신다.”- 과부는 은혜를 받기 전에 두 번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물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가난한 과부가 엘리야를 섬기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요, 마음의 문제란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여섯째,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자.- 과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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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