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도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

성도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VI)

말씀: 열왕기상 17:13-16
요절: 열왕기상 17:14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엘리야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100마일의 사막 길을 가로질러, 주께서 명하신 시돈의 사르밧으로 달려 온 것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도착했을 때 만난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남은 조금의 기름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먹은 다음에 죽으려고 한다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12).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님의 역사 방법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떨어질 때, 나의 능력이 소진하고, 나의 지혜가 무용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에게 도움의 손길이 될만한 것이 없을 때, 위로부터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역사하심이 100% 주님의 손길이요, 도우심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이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누구와 나누어 갖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순수한 분이시며, 무엇과 혼합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말씀을 몇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48:11,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이사야 42:8, [나는 주니 이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5: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요5:41). 사르밧 과부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누가 삶의 절망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힘을 내십시오. 그 사람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입니다. 왜 주님께서 엘리야를 보름이나 한 달 정도 먼저 보내셔서 과부의 집에 기름이 한병 가득하고, 밀가루도 많을 때 보내시지 않고 거의 다 떨어졌을 때 보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이 시간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그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사야 30:18,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예화.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어려움과 환란은 언제나 역전과 재기의 발판이요, 시작입니다. 절대로 그런 것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녀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뒤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 엘리야는 과부의 믿음을 도와주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풍랑을 잔잔하게, 평안하게 하십니다. Fear Not. 이 말은 성경에서 365회나 나옵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에게 하루에 한번씩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한 분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 할 줄 모릅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 내 주었습니다. 문제는 다음 말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뒤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것은 너무 이기적인 처사로 생각됩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게 이런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과부는 주님의 명을 받아 엘리야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가 도저히 엘리야를 돌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어떤 어려운 처지에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궁핍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한 주님의 깊은 시험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수중에는 딱 한번 엘리야를 섬길 수 있는 양의 밀가루와 기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이것을 자기를 위해 쓰느냐? 주의 명령에 순종해서 엘리야에게 주느냐?는 전적으로 과부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Faith is not feeling but willing). 믿음은 맑은 정신으로, 건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믿음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능동적입니다(Faith is not passive, but active.).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주가 비를 땅 위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엘리야가 13절처럼 말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언자 엘리야의 말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불확실성도 없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줌으로써, 믿음과 확신 가운데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고, 순종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오늘날 위기에 처한 성도들이 상담을 처해 오면, 목사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혹시 압니까? 하나님이 도울실지...”, “저도 확신할 수 없지만...어쩌고, 저쩌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믿지는 마세요.” 이런 식입니다. 그걸 상담이라고 하고 있으니, 듣는 성도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은 고사하고 불안과 의심,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 놓고 맙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와 교제하던 형제들이 “형제님은 뭐든지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어떤 주님의 종도 “아마, 혹시, 잘 모르겠지만...”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대로라면 Yes, 아니면, No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죄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엘리야의 삶의 비결은 이 한 마디에 다 들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에 따라서만 말하고, 움직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주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지만 엘리야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방 여자라 할지라도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분은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이적적으로 먹이시고,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몰아내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밀가루와 기름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시고,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 지존자이십니다. 사무엘상 15:29,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그렇다면 마음놓고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주가 비를 땅 위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14).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과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첫째, 날짜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가 비를 땅위에 내리는 그 날까지]. 둘째, 무엇을 주실 것인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면 그것으로 살게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통에 가루가 가득히 쌓이거나 창고에 차고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남아 있는 한 움큼, 한끼의 식사량이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들어도 훔쳐 갈 것이 없습니다. 통에는 언제나 한 움큼의 밀가루만 있기 때문입니다. 병의 기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항상 부족한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늘 충분한 것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녀와 엘리야와 그녀의 가족이 여러 날 먹었으나] 놀랍게도 여자는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의 믿음은 오늘날 성경대로 믿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불신, 장애물을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이것은 이상적인 목양의 관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민족 가운데 자신의 말대로 순종하는 양을 두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 사르밧에서 이방 과부는 위기 가운데서 자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주 안에서 복종하는 사르밧 과부의 모습은 ‘권위에 대한 반역을 개성’이라고 주장하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큰 감명을 줍니다. 과부는 순종에 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종의 요청에 따라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단지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양식을 얻는 것이 순종의 결과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순종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양식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단에서 선포되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하십시오. 에베소서 5:21, 베드로전서 5:5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너희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에게(one to another) 복종하라.](엡5:21),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16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6). 과부는 자비를 베풀었으나 전혀 손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은 겨우 한끼니 정도의 분량이었고, 그 이후에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꺼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엘리야를 돌봄으로써 몇 일 동안이 아니라 가뭄이 끝나는 그날까지 모자람이 없이 양식의 공급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41, [대언자의 이름으로 대언자를 영접하는 자는 대언자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의로운 자의 이름으로 의로운 자를 영접하는 자는 의로운 자의 보상을 받으리라.](마10:41). 이 시대의 모든 과부가 다 주의 종을 돌보는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역 교회를 돌보고, 선교사들을 돌보고,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과 이웃을 돌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일은 자신에게 모두 갑절로 돌아오는 귀한 일이요, 주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사르밧의 과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사르밧 과부 정도의 믿음이라도 가지도록 기도합시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께서 고난의 때에 그를 건지시리로다.](시41:1). 하나님은 성도들이 어려운 가운데 주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을 결코 그냥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물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6,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물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6).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마땅히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와 주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노라,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앞날의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늙어 힘이 없어질 때에 먹을 것과 쓸 것이 없을까봐 걱정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의 목자로서 과감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장래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대신 자신의 삶의 맨 앞자리에 주님이 오도록 하는데 신경을 쓰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걱정,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모시는 것이며, 모든 일에 그분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앞으로 먹을 때마다 한끼씩은 보장하십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이방인들이 있습니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3.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편 34:9,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 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시편84:11, [이는 주 하나님께서 해와 방패가 되시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곧바르게 걷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이다.](시84:11).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시편 기자를 통해서, 잠언 기자를 통해서,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 기록된 말씀은 설교자를 통해서 계속해서 또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불신을 회개하고, 돌이켜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공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좌우명은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성경대로...], [기록되었으되....]를 외쳐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6).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성도들은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 잘 됩니까?”하고 묻습니다. 어떤 형제는 말하기를 “성경의 기록을 생각해 내기는 쉬워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문제가 따릅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의 말이 모두 가감없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절박하다 할지라도 사르밧 과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의 교훈에서, 성경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여인의 처지만큼 절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끝까지 자신과 함께 계심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암울하고, 가능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엘리야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르밧 과부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하나님의 종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헌신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과부는 몇 백 배나 갚음을 받았습니다.

* George Whitefield가 고아원에 기부하기 위해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듣던 회중 가운데 한 명이, “목사님, 아무리 그렇게 설교해도 제 주머니에서는 돈이 안 나갑니다.”라며 듣고 있었습니다. 한 참을 듣다 보니 그래도 조금은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가 반쯤 지나자, 이왕 낼 것 좀 더 내자. 저렇게 열심히 설교하는데..., 설교가 끝날 즈음이 되자, 까짓 거 오늘 가진 돈은 차비만 빼고 다 내자, 다음부터는 안내면 되지 뭐....설교가 끝나자 조금의 여비만 남기고 다 헌금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와서 “자네 남은 돈 있으면 좀 빌려 주게, 헌금할 돈을 안 갖고 왔다네.” 결국 몽땅 다 내고 말았습니다. 말씀의 은혜가 인색한 마음을 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아멘!을 연발하다가 갑자기 뚝 끊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만 불리하다, 손해다란 판단이 드는 말이 나올 때면 어김없이 입을 다뭅니다. 입이 닫히는 순간 마음도 닫아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6:10,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 이제 말씀의 영적 의미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통의 가루는 “한 알의 밀”(요12:24)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온 몸이 찢기시고 갈라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맷돌에 갈려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의 기름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령은 지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믿는 성도들 안에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16:14).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을 믿는 종들이 빵과 기름으로 연명했듯이, 교회라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성도들 역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름되신 성령을 통해 살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 하나님의 권능은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빵과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아니라 광주리 속에서 계속해서 나왔듯이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창고에 가득히 쌓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품이요, 역사 방법입니다. 사람들 같으면 한꺼번에 일주일 분량이든, 한달 분량을 만들어 버리고, 또 떨어질 때 쯤이면 다시 만들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매일 하는 일은 얼마나 귀챦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한꺼번에 왕창 일하시고 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런 지속적인 성품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통의 가루가 쌓여나갔고, 병의 기름이 넘쳐나더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도 그날 그날 하루분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거르거나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저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매순간 주님을 의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는 성도들이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필요를 아뢰고, 구한 것을 또 구한다 해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주님의 충만하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는 성령께서 우리의 순례길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끼니때마다 밥 차리기 싫어서 한꺼번에 밥통에 해 다가 식은 밥 먹이는 자매들은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르밧의 과부의 집에 비행기로 군수품을 보급하듯이 천사들을 시켜 하늘에서 50 파운드짜리 중력분 밀가루를 떨어뜨리시거나, 100파운드 짜리 기름을 날라다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원래의 통과 병을 가득 채워 주신 것도 아닙니다. 이는 그들의 필요를 그들이 필요한 그 순간에 채워 주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보여 줍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몇 년치 설교를 미리 준비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절대 그렇게 미리 준비되지 않습니다. 설교를 해야 할 시간 전에 다 준비됩니다. 어떤 분은 오늘 마음속에 있는 것 다 쏟아 내면 다음 시간에 할 말이 없을까봐 아껴 두지만, 그것은 다음 시간에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체험을 하셨을 겁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깨우침을 얻고, 조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 되면 어제 받은 조명이 마음 가운데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새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련회에서 일주일 내내 설교를 들어도 그 다음 주에 또 새로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장래의 필요를 위해 지금 쌓아두는 일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특히, 은혜를 모아 두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신선하게 공급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매순간, 필요한 때에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단번에 거듭나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지만 매일 새롭게 되는 과정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내가 가장 어려운 때, 마지막 순간에 주님의 손길이 임한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갖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과 환란은 주의 도우심을 통해 재기와 역전의 발판이 됩니다. 둘째,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이는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보상이 주어집니다. 셋째, 주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이것이 성도들의 생활 자세여야 합니다. 넷째, 주님은 매 순간, 매 순간 지속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