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때에 성도들이 할 일은?(IV)
말씀: 열왕기상 17:8-9
요절: 열왕기상 17:8,9
이 아침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한 주일간의 바쁜 일상을 마치고 주의 첫날에 모여 함께 주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을 복 주셔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금 배교의 시대에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아무리 생활이 바쁘더라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셔야 합니다. 어른들은 바빠서, 아이들은 노느라 성경 속의 사건들로부터 실제적인 교훈을 얻고, 영적 유익을 찾는 시간을 포기해 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성경은 다독도 중요하지만 깊이 정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몇 줄을 읽더라도 그 사건 속의 내용을 음미하며, 이리 저리 관련 구절들을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말씀의 보화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얼마 뒤에 시내가 마르니라.](7)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주의해 보십시오. 엘리야는 시내가 마른 뒤에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거처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거역해 본 적도 없었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앞서 행동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삶의 위기, 신앙의 위기를 맞은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성격이 급한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참지를 못합니다. 약간만 환경이 변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서둘러 거처를 옮기려고 합니다. 직장을 옮기는 문제이든, 이사를 하는 문제이든, 교회를 옮기는 문제이든 영적, 성경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위기의 때일수록 자신의 부르심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자신이 거해야 할 곳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재의 위치에 놓으신 것이 분명하고,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결과 현재 있는 위치에 있다면 계속 거기에 있는 일에 고통과 위험이 따를지라도 거기서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 그대로 지내라.](고전7:20).
서울의 어느 한국 교회에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선교사가 된 기막힌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6.25를 참전한 용사였는데, 전쟁터에서 적을 마주한 최전방 전선에 보직을 배치 받고 참호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앞에 있던 고참이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말했습니다. 앞은 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고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나? 그 놈을 쏴 죽여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더 안전해 보이는 참호 속에서 나와 죽을지도 모르는 고참의 자리로 근무지를 바꾸었습니다. 전쟁은 늘 위험의 순간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 때 만큼은 죽음의 위기가 고개를 드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심정으로 고참과 자리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바꾸자 마자, 적의 포탄이 그 참호 속으로 떨어져 자기는 살고, 그 고참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삶과 죽음이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옮기시면 가고, 주님이 있으라는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분은 이미 삶과 죽음,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깊이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험의 순간에,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더딜지라도 잠잠히 주의 인도를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박국 2:3, [이는 이 환상이 정한 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 끝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말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것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이것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곧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이 다급하게 돌아가고, 시시때때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이런 시대에 성도들이 배워야 할 한 가지 진리는 “주님보다 앞서 나가지 말라.”입니다. 무슨 일에나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사야 28:16,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 직장에서 약간만 수틀리면 사표를 던져 버리고, 집안에 약간만 불화가 있으면 같이 살아, 말어! 생각이 왔다 갔다 하고,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떠버리고, 다음에는 몸이 떠버립니다.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님은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있기 전에 움직이는 것은 출발 신호가 나기 전에 start를 하는 경주 선수와 같습니다. 나의 발걸음을 지도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언제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 머물러야 하는가? 그 답이 민수기에 있습니다. 민수기 9:18-23을 펴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장막 안에서 안식하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날 동안 오래 머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명령을 지켜 이동하지 아니하였으며 20.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 간 머무를 때에도 그들이 그리하더니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에 거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으며 21.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머물다가 아침에 떠 오를 때에는 그들이 이동하였고 밤이든 낮이든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장막에 거하고 이동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이동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에서 안식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으며 또 모세의 손으로 주신 주의 명령에 따라 주께서 맡기신 책무를 지켰더라.](민19:18-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머물렀는가? 이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충분한 교훈을 주고도 남을 것입니다.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주의 명령에 따라]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양무리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머물러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하루 하루를 인도하셨고, 그들이 나아갈 때에나 머물 때를 조성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구름 기둥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면, 그들은 만나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나 그의 사역을 받는 양들이나 모두 동일한 원칙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릿 시냇가에 얼마나 머물지, 그리고 나서 어디로 가겠다든지 하는 식의 생각이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기 임의대로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주님의 명령과 뜻대로 살아 본, 순종의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이 계획하고, 움직이며 그 위에 주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피눈물을 뿌려 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이 아니라 전능하신 자기의 종이요, 비서 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주님을 움직이는 명령서요, 그들의 간구는 주님을 일하게 하는 주술인 줄로 압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조국의 교회들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요즘 흔히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쉽게 떠나는 것입니다.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고 떠나고,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떠나고,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떠나고, 이것저것이 싫어서 떠나고... 결국 가는 곳은 개역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들에 앉아서 혼자 킹제임스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쉬워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왜 떠납니까? 10년 이상 킹제임스 성경을 외치고 수호하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은 왜 그런 지역 교회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바른 진리, 주님의 말씀을 알고, 정든 교회를 과감하게 떠난 간증을 하던 분들이 왜 지금 그리로 되돌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머물러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기 본위의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 주관대로 하는 것입니다. 시냇물이 마르는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엘리야는 주님의 다른 말씀이 없는 한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엘리야처럼 이렇게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람이 없으면 그 땅은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많고, 교인도 많습니다. 스스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알아서 충성(忠誠)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가감(加減)하지 않고 믿고, 순종할 그런 신실한 종을 찾으십니다. 위기의 순간, 고통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욱 바라고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 엘리야 편에서 미리 계획을 세우고,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분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엘리야가 한 일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잠잠히 주(主)를 기다린 것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계획하고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를 주님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있는 체 가장하면서 실은 스스로 어려움을 벗어날 방도를 고안해 놓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이렇게 라도 해야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시편 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내가 이교도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고 땅에서 높임을 받으리로다.] 엘리야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인 줄을 알고, 신뢰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은 성도들은 가만히 주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평소에 기도할 때 외치던 하나님, 내가 찬양을 부를 때 외치던 하나님, 예배 때에 생각하던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어려움에 처한 이 순간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믿음이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 출석만 잘 해도 이미 믿음 좋은 사람으로 좋은 점수를 받습니다. 삶의 위기가 닥쳐 올 때, 상식과 전혀 반대되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은 언제가 본성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성경은 평소에 매우 믿음이 좋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무너진 한 사람의 본으로 사울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13:8-10, [8. 그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따라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을 떠나 흩어지므로, - 사울은 왕이 된지 1년만에 블레셋의 대군을 앞에 두고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주일 내에 온다던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도망치기 시작하고 전열이 와해되는 엄청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때 사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9절, 사울이 이르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이리로 내게로 가져 오라, 하여 그가 번제 헌물을 드렸더니 - 사울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사무엘이 드려야 할 헌물을 자신이 대신 드렸습니다. 사울은 급하면 아무나 제물을 드려도 되는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구했던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울처럼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기다리는데 실패하고 자기 방법대로, 계획대로 일을 저지르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0절, 그가 번제 헌물을 드리기를 끝마치매 사무엘이 오므로 사울이 나아가 그를 맞으며 문안하니라.- 사울의 조급함과 불신은 결국 재앙을 불러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12b,...그런 까닭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번제 헌물을 드렸나이다, 하니] 우리는 얼마든지 사울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어쩔 수 없이...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불신의 죄요, 불순종의 죄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불순종이나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한 불순종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위기의 순간, 고난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지금 급한데 이것저것 따지게 생겼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급할수록,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위기의 순간에 더욱더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울이 되느냐? 엘리야가 되느냐? 그 순간에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종에게 주의 말씀은 옵니다. 주의 말씀을 기대하지 않고, 갈망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데 갑자기 머리 뒤통수를 때리듯이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사모하는 혼들에게 주의 말씀은 묵상을 통해, 기도를 통해, 설교를 통해, 형제들과의 친교를 통해 끊임없이 나에게 공급됩니다. 시편42:1-2,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갈급하게 찾고 또 찾아 그분의 말씀에 청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고, 주님이 머물라고 한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보다 기적같이 환경이 바뀌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시다시피 엘리야에게 주의 말씀이 임했다고 해서 마르던 시냇물이 다시 흐르는 것도 아니요,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난 것도 아닙니다. 환경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주 앞에서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듯 임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주님은 한 마디 말씀을 통해 마음에 담력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믿음과 순종으로 이겨 나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주님의 역사 방법이요,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순종하기를 싫어합니다. 순종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44:16, [네가 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른 그 말에 관하여는 우리가 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주의 말씀이 임했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을 자녀에게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날 성도들이 매주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어떻게 듣는지 상세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에스겔 33:31,32 [그들이 백성이 오는 것같이 네게 오며 내 백성같이 네 앞에 앉아 네 말들을 들으나 그것을 행하려 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 보라, 네가 그들에게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악기를 잘 연주하는 자의 심히 사랑스런 노래같이 되었나니 이는 그들이 네 말을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겔33:31,32).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앉아서 찬양도 하고, 예배도 보고,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를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탐욕은 십자가에 못박아 처리되어야 하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아무 말 하지 않으시고,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과 정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100마일(160Km) 떨어진 시돈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비도 이슬도 없는 가뭄의 재앙 가운데 100마일이 넘는 사막을 여행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 주어졌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때로 내게 너무나 가혹하게 보이거나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큼 우리 영혼의 건강과 기쁨에 도움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일반 신자는 물론이고 사역에 뛰어든 목사들은 그들이 믿는 바를 설교해야 하고, 설교하는 것을 자신들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임한 이상,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그것만이 남을 뿐입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설교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님께 던지는 그런 문제입니다. 설교는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방법이며, 주의 말씀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며...이런 목회학 교과서의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에 회의를 갖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설교를 통해 삶이 변화되고, 열매맺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 들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한 가지는 “너의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인 너에게 문제가 있다!”였습니다. 강단의 위기, 교회의 위기는 바로 설교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처한 위기에서 찾아옵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존귀한 분들인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배교의 시대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들고, 그대로 믿고 순종하려는 보석 같은 존재들입니다. 제가 주님의 양무리들인 여러분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는 목자’가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량 청소년들에게 선생님의 말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부모의 말은 농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강도(强度)와 권위는 조폭들의 세계에서 선배의 말 한마디만도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경우에 주님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기적적으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주님은 자기의 종들이 처한 환경을 그냥 두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은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가 됩니다. 그릿 시내가의 물이 마르면 사르밧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의 순간을 한 순간에 역전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 주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라 시돈 땅의 사르밧에 가서 거기 거하라 명하셨습니다. 시돈 땅은 거리가 멀기도 하려니와 왕비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 엘리야를 왕비 이세벨의 고향에 가서 거하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원수의 나라에 가서 거기 있으란 것입니다. 이는 엘리야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과부는 이스라엘에도 많이 있었습니다(눅4:25,26). 시돈은 팔레스타인 땅 바깥의 이방인 지역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연단시키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게 역사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돌볼 사람으로 정하신 사람은 부자나 권력가나 신앙심이 독실한 교계의 지도자가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과부는 율법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며,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반대로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사용하시고, 그들을 존귀하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가난한 과부! 이방인!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이 모든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결코 돈 많은 갑부들의 헌금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정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쪼개내는 헌금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고 생소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와 남김 없는 복종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다양한 시험을 통해 전적으로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사르밧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엘리야의 믿음과 순종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즉 겸손도 배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까마귀에게 고기를 먹는 일과 과부에게 밥을 얻어먹는 일은 전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가난하고 가난한 과부의 손에 도움을 받는다면 그는 그 가난한 과부보다 더 형편없는 지경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자기보다 힘없고 약한 사람의 동정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이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도움을 통해 살도록 겸손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에 가서 교회를 세우라든지, 부흥을 일으키라든지, 바알의 숭배의 본산을 폭파하라든지 뭔가 영적인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명령이라면 달려가는 길이 쉬울텐데, 그가 가는 이유는 단지 과부에게서 얻어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웅 활극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되는 것은 더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영웅 활극의 주인공은 고사하고 철저하게 숨겨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가뭄으로 심판하는 동안 자신의 종을 믿음과 순종의 학교에 넣으셔서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관심은 아합도 아니고, 가뭄에 고생하는 백성도 아닙니다. 오직 한 명, 자신의 종 엘리야를 훈련시키시는데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그릿 시냇가에서 시돈의 사르밧으로 옮기는 주님의 손길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르밧은 ‘제련사의 용광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한 단계 더 깊은 믿음과 순종의 훈련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이기는 믿음,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순종을 가르치신 후에 역사의 전면에 내 세우십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많은 곳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훈련시키시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위기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둘째,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의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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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him, saying...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표현에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직역을 해보자. [그리고 주의 말씀이 그에게 왔고,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완전히 의인화, 인격화되어 있음에 유의하라.. 주의 말씀은 오고 간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말한다(saying)는 점에 주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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