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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일은

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일은?

말씀: 열왕기상 17:1
요절: 열왕기상 17:1

시대가 암울할수록, 신앙의 열정이 식을수록, 우리는 구약의 믿음이 뜨거웠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교훈을 받고자 노력합니다.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승리를 쟁취했는가? 살펴보고 배움을 얻는다면 그 보다 귀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 엘리야는 극심한 배교와 타락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시대에 성도들에게 힘을 주는 가장 훌륭한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을 보여준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이스라엘은 성군 다윗과 솔로몬의 재위 기간 동안 통일 국가로서 찬란한 문명과 힘을 자랑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엘리야는 솔로몬이 죽은지 불과 반세기인 58년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짧은 역사 동안 무려 일곱명의 왕이 북왕국 이스라엘 10지파를 다스렸는데, 첫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한 일은 백성들의 신앙을 북돋워 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자 마자 한 일은 배교(背敎)였습니다. 열왕기상 12:28-33에 그가 한 행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의논하고 두 금 송아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큰 일이로다. 오 이스라엘아, 보라, 이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 하고](28). 그가 처음 한 행동은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무용하게 만든 것입니다. 배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정한 규칙대로 하는 우상 숭배에서 시작합니다. 29절,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므로 30절,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금송아지 중 하나 앞에 경배하였음이더라. 31절, 그가 또 산당들을 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우리는 여기서 배교가 제사장직을 더럽히는 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세우시지도 않는 사람,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는 사람을 성직에 앉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이 신학교 졸업장으로, 교단의 임명으로 갖가지 다른 이유로 강단에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둘러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란 우상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로보암에 이어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나답 역시 죄인 중의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26, [그가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되 자기 아버지의 길로 걸으며 또 자기 아버지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가운데 걸으니라.] 신앙으로 양육해도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보고 배운 것이 우상 숭배요, 죄악뿐이라면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배교는 대(代)를 거듭할수록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그 다음 왕은 나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바아사였습니다(왕상15:27). 그 다음 왕은 엘라였습니다(왕상16:8,9). 그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취해있다가 부하 장군이었던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성공한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음모를 꾸며 왕을 죽였다는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백성들은 군대대장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시므리의 평생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는 그가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는 가운데 범한 죄들로 인함이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걸으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죄 가운데서 걸었더라.](왕상 16:19). 시므리를 대신해 왕으로 추대된 오므리는 죄를 회개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전 왕들보다 더 악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오므리가 주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걸으며 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가운데 걸어 그들의 헛된 것으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음이더라.](왕상16:25,26). 역사는 계속해서 돌고 돌며 악순환의 연속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깔아놓은 배교의 철로로 그 후대의 사람들은 거침없이 달려갔습니다. 그 절정에 달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 가운데 걷는 것을 오히려 가벼운 일로 여기고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또 가서 바알을 섬겨 그에게 경배하고...](왕상16:30,31).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과 벧엘에는 금송아지가 사마리아에는 바알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졌습니다. 바알의 사당이 건축되고, 도처에 바알 상이 세워지고, 바알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교계를 완전히 주름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전설같은 이야기요, 바알은 살아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영적 암흑과 배도의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말씀이 무시되고, 교회들은 금송아지를 대신해 물질과 돈을 숭배하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된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을 향해 대적하는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온 몸으로 보여준 생생한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1을 보십시오.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이 이방 우상 숭배족의 여인과 결혼하고, 바알을 섬기는 동안 이세벨은 하나님의 종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대거 등용되었고, 이제 북왕국 어디에도 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공개적으로 증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을 듣고도 마음 가운데 의로운 분노가 솟아올라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길르앗이란 산지의 일개 평민인 그가 이 문제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아합에게 달려가 엄중한 경고를 하기에 앞서 하나님께로 달려 갔습니다. 믿는 영혼의 무궁한 원천이신 주님께 이 문제를 의뢰하고 기도하는 것, 엘리야가 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배교한 시대, 사악한 위정자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싸우기에 역부족인 자신을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채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잠언에 말하기를,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잠28:9). 말씀없이 기도에만 심취한 사람들이 가장 문제다!! 마음 가운데 말씀이 없는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분께서 들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들으시는 줄을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을 얻는 줄 아느니라.](요일5:14,15). 엘리야는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구약 성경, 특히 모세 오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 신명기 11:16,17 말씀은 엘리야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두렵건대 너희 마음이 유혹을 받아 너희가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므로 주의 진노가 너희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며 땅이 열매를 내지 아니하게 하시므로 주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할까 염려하노라.](신11:16,17). 엘리야는 이 말씀에 따라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구하였다(약5:17). 우리는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참된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이며, 그 뜻에 따라 믿음으로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시옵소서.](삼하7:25)라고 메달리는 기도, 이것이 참된 기도이다. 길르앗의 디셉 사람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이것을 과감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찾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 타락과 흑암의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죄에 대한 각성이 있는가? 배교에 대한 의로운 분노가 일어나는가?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 기도하고 있는가? 성경을 조롱하고, 교회를 조롱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웃는 세대에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 그는 응답받은 말씀을 가지고, 아합 앞에 서야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심판이 자연 현상이나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알려야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 서서 하나님을 증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헤롯과 빌라도 앞에 섰듯이, 바울이 총독 펠릭스 앞에 서야했던 것처럼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무서운 가뭄과 그들의 죄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그는 아합 앞에 섰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아니었습니다. 아합에게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며,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말씀에 대한 증거는 늘 은혜로운 일만이 아닙니다. 이 증거는 곧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도한 결과가 나에게 죽음이 올 수도 있다면 물러설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사자같이 담대하니](잠28:1)란 말씀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의인은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 당황하거나 꺽이는 법이 없습니다. 밥죤스 시니어 목사님은 One man with God is majority(하나님과 함께 한 그 사람이 다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엘리야가 아합의 왕국에 있는 모든 군대와 백성과 제사장들보다 다수였기에 그는 사자같이 담대하게 그 앞에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한 것입니다. 시편 3:6에 [수만의 백성이 나를 에워싸고 대적한다 하여도 내가 그들을 무서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과 믿지 않는 혼들은 예외없이 지옥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증거하고 경고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이 비록 유쾌하고 즐겁지 않지만, 때로 나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가져 준다 할지라도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사자처럼 담대하게 일어나 전해야 합니다. 상대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받은 말씀이 있다면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죄에 대한 인류의 타락에 대해 어떻게 심판해 오셨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다가올 미래의 심판에 그림자란 사실을 외쳐야 합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가올 심판과 지옥에 대한 경고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외치는 것, 그것이 바로 배교한 시대의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 엘리야는 이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름으로 “나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란 뜻입니다. 그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습니다. 엘리야의 아주짧은 이 한 마디에는 매우 많은 영적 진리들을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 온 이스라엘이 모두 배교해도 엘리야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내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주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선포하지 않고, 숨기고 맙니다. 평소에는 믿음을 발휘하다가도 복음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칠 것 같으면 자신의 믿음을 숨깁니다. 이런 일은 신사 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시대 때에나 전쟁 때의 공산당 앞에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직장 상사 앞에서, 동료들 앞에서 그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외치는 대신 은근히 숨어 버리거나, 타협해 버립니다. 직장을 구하느라 면접을 보러 간 사람이 ‘일요일에 일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 우물쭈물 하다가 “예”라고 해 버립니다. 엘리야는 지금 주님을 버린 사악한 왕 앞에서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분을 잊으면 그는 망령되이 말하고, 망령된 행실을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이란 사실을 당당히 증거할 수 있습니까?

예) 우리는 신문이나 T.V에서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음주 운전을 하다가 걸렸다든가, 마약을 하다 걸렸다든가, 어떤 비리나 범죄에 연루되면 “공인으로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 그 사람을 공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어떤 정치인이나 연예인보다 훨씬 더 공인(公人)들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과 말씀, 교회와 다른 지체들에게 금방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목사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물론 목사인줄 모르고 권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술을 못합니다. 아니 젊은 양반이 술도 한잔 못해?라고 하자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술을 입에 갖다 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한 가지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과 영적 가치에 대해 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에 걸맞는 말과 행동만 해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다음으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했습니다. 엘리야는 전설속의, 역사 속의 아득한 옛날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증거했습니다. 죄악이 판을 치고, 불법이 들끓을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600만의 유대인들이 죽을 때,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란 의문을 가졌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이 분명하고도 평범한 진리는 너무나 자주 의심되고, 오해받아온 진리입니다. 여러 왕이 차례대로 다스려 오는 동안 민족의 종교였던 유대교가 바알교로 바뀌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분이란 생각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합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은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중병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였습니다. 육신의 고통 가운데 마귀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네가 그토록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실 벽에 “GOD IS”(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마귀가 마음 가운데 의심을 던질 때 마다 그는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영원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모든 실존의 근원이 그분에게 있고, 만물이 그분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살아 계심은 우리의 의식 가운데 가장 깊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실존, 실재하심 앞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신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이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존재보다 덜 뚜렷하다면 명백한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섬기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아합이 섬기는 호흡이 없는 우상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말씀을 들고 백성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먼저 왕에게 간 것은 그가 행한 죄악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아합은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통치 지역 내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없애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죄인들에게 죄를 책망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죄인들 앞에서 침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마십시오. 대상이 상사가 되었든, 남편이 되었든, 자녀가 되었든, 친한 친구이든 그들의 죄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십시오. 침묵은 불신입니다. 배교자들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십시오. 그것이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할 일입니다.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것은 무서운 심판입니다. 홍수나 태풍의 재해보다 한해(旱害)는 훨씬 더 피해가 큽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려 풍성한 곡물을 수확했습니다. 건기 때에도 밤에 이슬이 많이 내려 식물을 신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기근과 황폐, 기아와 온역과 죽음이 가득한 땅으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저주의 땅으로 변해 버리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배교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철저했습니다. 절박한 질병에는 절박한 치료약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세대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이슬과 비를 내리지 않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농경 사회에서 매일 내리던 이슬이 몇 일, 몇 달, 몇 년이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비를 내리고, 안 내리고는 전적으로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든, 인공비를 만들든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비는 고사하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습니다. 욥기 28:26에 [그분께서 비를 위하여 법령을 정하시고 천둥이 칠 때 번개를 위하여 길들을 정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헛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이 우주를 창조하신 이는 자연 만물을 마음대로 control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환경을 마음대로 주장하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그분에게 밀착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와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몇 년 동안 수입이 없으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해도 돈을 못 받고, 받으면 사고로 날아가 버리고, 모아두면 목돈 쓸 일이 생기고...그렇게 해도 깨닫지 못하면 병으로 다스려도 좋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Payment를 내는 일에 계속 허덕이게 하시든가, bankruptcy를 부르게 만들어서 주님을 다시 찾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어떤 분은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가 사기를 당해 감옥에 들어 간 후에야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어떤 이는 벌어 놓은 돈 병원에 다 날린 후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몇 번의 악을 행하고,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때,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 잘 하는 사람이나 대충 하는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두번 예배에 빠지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공부는 무시해도 될 것 같고, 기도 모임은 아예 안중에도 없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고 쌓이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 8:11, [악한 일에 대한 판결이 속히 집행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아들들이 마음 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작정하였도다.] 시편50:21, [네가 이 일들을 행하였을지라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고 그것들을 네 눈 앞에 차례대로 놓으리라, 하시느도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절대 우연이 없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하나님께 완악한 마음을 품고, 고집을 부리는 분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슬픔을 기쁨으로, 재앙을 축복으로, 재대신 찬양을 드리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일기 예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니 물을 비축하라던가, 자연 재해를 슬기롭게 이기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아합이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회개하고, 긍휼과 은혜를 얻도록 전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1에는 [여러 날이 지난 후 셋째 해에...] 라고 말합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삼년 육개월이라고 말합니다. 주님도 삼년 육개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4:25). 그렇다면 엘리야가 지금 본문에서 아합에게 이야기할 때는 이미 이슬과 비가 오지 않은지 6개월이 지난 후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개월이면 벌써 국가적 재해요, 비상 사태를 선포할만한 일인데, 이런 재해가 3년 동안 더 지속될 것이란 말에 아합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할 일은 주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재앙과 저주를 피하기 위해 늘 십자가의 피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경고를 따라 주의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씻음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얻은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에 근거한 기도 생활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난 후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육개월 전부터 기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중심없는 기도가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뜨겁고도 열렬하게 한 기도였습니다. 그가 아합 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도 홀로 하는 기도 생활 덕이었습니다. 은밀한 기도 생활은 공중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합니다. 은밀한 기도 생활은 말씀을 증거할 힘을 갖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라 갔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섬겼습니다. 욥이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었듯이, --욥기 19:25, [이는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니...]--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내 안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불신과 시대의 조류가 내 안에 밀려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강합니다. 다니엘11:32,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공적을 세우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앞에 서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어느 왕보다 무한히 크시며, 전능하신 주님의 임재 앞에서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 우리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주님의 살아 계심과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능력의 비결이요,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숨을 쉬는 매 순간 우리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 그것이 경건과 능력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이상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지 엘리야를 통해 그 예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