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배교의 시대에 성도의 생활은

배교의 시대에 성도의 생활은?(III)

말씀: 열왕기상 17:5-7
요절: 열왕기상 17:5-7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주의 성령을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듣는 귀를 허락해 주시고,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시간이 되도록 복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믿음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교훈을 받고, 위로를 받고, 더욱 인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배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 생활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시니라.](3,4). 이 짧은 주님의 명령과 약속에 엘리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5절, [이에 그가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거하여 주의 말씀대로 행하매]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크고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더 크고 중요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듣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아합 왕에게 주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일이나 그릿 시냇가에 숨는 일이나 모두 동일한 주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똑 같은 믿음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불순종하여 도망가 버린 선지자가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앗시리아로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버렸습니다. 그 결과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삼일 밤 삼일 낮을 지내며 죽음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았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는 바로 삶과 죽음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인류를 죄와 사망 가운데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인류를 의와 생명으로 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 이것은 성도들이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가운데 반역과 거스르는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반역을 용기라 부르고, 불순종을 항거라 부르며 찬사를 던지는 대신 순종은 굴종이요, 비겁함이요, 자기 보신이라는 눈총을 받는 그런 근대사를 보내 왔습니다. 일제 36년을 우리는 반항과 저항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제 1공화국부터 군부 독재가 판을 치던 제 6공화국까지 우리는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화를 위해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무엇인가에 반항하고 저항하고 덤벼드는 것이 미덕이 되는 기형적인 가치관이 몸에 깊이 스며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시대 정신은 교회로 여과 없이 흘러 들어와 성도들마저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위에 공공연히 불순종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남자들이 다 군대를 가서 강제로 명령에 복종이 무엇인지 배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반역하고 거스리는 저항 의식을 어느 정도 꺾어 놓기 위해서 남북을 갈라 놓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종은 내 본성을 거슬리는 것이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마저도 순종을 배우셨다면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학교를 통해서, 사회 생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5:8,9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고난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 완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순종하는 자녀라고 말합니다(벧전1:4).

[이에 그가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거하여 주의 말씀대로 행하매] 엘리야는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둠 가운데서도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면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이렇게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단 한번이라도 주님이 약속을 어기신 적이 있습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들을 자신의 몸으로 행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 말씀들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배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전할 줄 알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많은 말을 하지만 정작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활동, 봉사, 교회에서 부지런히 설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의롭게 살지 않습니다. 의를 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속은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며](요일3:7).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만 할 뿐 행하지 않을 때,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1:22).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선함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에서 마셨더니] 엘리야가 말씀대로 행했을 때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언제나 신실합니다. 주님의 약속이 비현실적이고, 나의 지각과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라 해도 성도가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까마귀에게 빵과 고기를 받아먹어 본 성도라면 우리의 불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사악한 것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주님이 피할 길을 내시고, 돕는 손길을 보내 주실 때, 우리의 불신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분명하게 자각해야 할 한 가지는 주님은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더 힘있게 내 안에 자리잡히게 될 것입니다. 욥기22:21,21 [이제 너는 스스로 그분을 제대로 알며 또 그분과 화평하게 지내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

어떤 형제님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가슴에 강한 확신이 서게 되는 믿음!” 그것이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입니다. 등이 뜨거워지고,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오고, 뒤로 자빠지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내 마음 가운데 강한 확신이 임하는 것, 그런 믿음이 솟아나는 것, 그런 것들이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여러분의 가슴 한 복판에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습니까? 미국 남북 전쟁 중에 아브라함 링컨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초반에 북군은 남군에게 연전 연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기자들 앞에서 반드시 승리한다고 공언했습니다. 특별한 전략이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다소 황당한 답을 했습니다. 결국 오랜 전쟁 끝에 북군이 승리를 했습니다. 기자들이 “각하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란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비결이라고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링컨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면 하나님은 항상 나의 편에 서십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섬으로써 하나님을 나의 편에 서게 하는 방법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이런 훈련을 통해 백전불퇴의 주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에서 마셨더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채우실 것인가?란 질문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루는 방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을 뿐입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까마귀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분 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불안할 수도 있고, 양식이 어디에서 생길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은 반드시 그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믿고 부귀영화를 보장받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나의 원하는 것은 다 채워지지 않겠지만 나의 필요는 반드시 채워 질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필요를 보장받았다면 우리는 아무 것에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의를 알고도 행치 못합니까?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습니까? 혹시 먹고사는데 어려움을 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메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메이는 사람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불신이요, 배교입니다. 시편34:9,10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태복음 6:33,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말씀들은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뜬구름 잡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입니다.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끼만을 공급했습니다. 이로 볼 때 주님은 엘리야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공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채소나 과일 따위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님은 생필품만 공급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경건한 만족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 6:8,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우리의 탐심을 채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견주고, 비교하며 그들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부모님들이 만족하게 생활했던 생활 환경에 대해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은 먼저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고, 탐욕을 없애는 훈련을 받아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와 만족이 있는 생활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 한 분이 어떤 형제로부터 생활비를 보조받았습니다. 매달 정확한 날짜에 생활비를 보내 주는데, 전혀 낭비없이 써야 한 달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느날 다른 형제로부터 그만한 액수의 선교 헌금을 하겠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감사하며, 이제 하고 싶은 것을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자 지금까지 쉼없이 보내 주던 형제가 사정이 생겨서 못 보내주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 때 이 선교사님은 자신의 필요와 탐심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욕구를 채움받지 못할 때 자신이 원망스럽고, 다음에는 그런 사회가 원망스럽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삼가 탐심을 주의하십시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에서 마셨더니]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주님이 엘리야에게 빵과 고기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흐르는 시냇물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빵과 고기보다 물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과 공기, 서있는 땅과 초목들, 작열하는 태양의 햇살, 하늘을 덮는 구름, 바다의 풍부한 어류들과 자원들,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자원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요, 공급함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식사하기 전에 감사 기도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거기에 나는 모든 것들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매우 가난하게 살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소유이며, 우리를 위해 지은 바 된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21-23,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지니 이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런 사실을 알 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주실 은혜를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 가운데 넉넉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뒤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마르는 일이 일어났다(it came to pass).] 이 말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계시의 풍부함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성경에는 it came to pass란 4단어로 된 관용구가 엄청나게 자주 등장합니다. “일어났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인데, 우리말로는 어색해서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시내가 마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저 공중의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시내가 마르는 일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요, 주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 환경이 다 주님의 섭리적인 손길 아래 있음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제 시내가 말랐으면 엘리야는 그곳에 더 이상 거할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또 다른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점진적인 변화나 갑작스런 변화를 대비해서 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마치 그릿 시냇가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시냇물이 마를 때 당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어떤 변화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하수를 솟게 하시든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마시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하시면서도 동일한 결과를 내 보이십니다. 그러나 시내가 마르는 일은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는 자신이 선포했던 재앙의 심각성을 백성들과 함께 느껴야 했습니다. 이는 주님이 인생들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셔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는 심판이 내려지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결과는 자신에게 그대로 미쳤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낮아져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고린도전서 9:19-20,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하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고전9:19,20). 하나님은 엘리야에게도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향한 연민과 목자의 심정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으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죄인들의 불신과 죄악을 다 이해하는 것은 같은 입장에 있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을 전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예수 안 믿고 살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처럼 예수 믿고 살아 본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의 생활은 항상 남을 생각하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지며, 혼을 이겨오는데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 시내가 마르니라] 이는 엘리야에게 또 다른 믿음의 연단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척도가 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믿음 안에 거해야 했습니다. 매일 두 번씩 먹는 고기와 빵으로 타성에 젖어 버리고, 하루 하루 살아간다면 그도 여느 성도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데 실패했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날마다의 공급과 인도하심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고, 믿음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끊어진 강을 쳐다보면, 주님이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하더니 이게 무슨 변고냐? 이런 날벼락이 있나? 이런 원망과 불평이 나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떨어질 때마다 그렇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참된 믿음은 이런 시련의 순간에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도들은 시련의 순간에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신앙이 참인지, 거품이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더운 여름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먹여 주시고, 마시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것처럼, 계속해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도들이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는 고백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은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화) 전에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하필이면 수련회장 맞은 편에 돼지 축사가 있어서 파리가 얼마나 들끓었는지 차마 집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앉아서 말씀을 듣는데, 몇 백명의 학생이 모두 파리를 쫓느라 정신이 없으니 집회가 될 리 없었습니다. 벌써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데 수련회 오려고 몇 만원씩 냈느냐? 어떤 놈이 미리 답사도 안 해보고 이런 곳에 수련회장을 얻었느냐? 나는 저녁에 집에 갈련다...’ 별별 소리가 다 나왔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그러면 기도합시다. 파리를 몰아 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과연 그 많은 파리가 기도한다고 다 없어질까요? 그런데 파리는 다 없어졌습니다. 4박 5일동안 수련회를 하는 동안 수련회 집회장과 식당, 풀밭에 파리가 날아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생태계를 비롯한 자연 세계를 마음대로 주관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신과 불평의 원망을 쏟아내었던 형제, 자매들은 수련회가 끝나자 신기한 체험을 한 듯이, 훌륭한 간증거리인 양 입을 벌렸지만 결코 자신들이 쏟아내었던 악한 말들에 대해 회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거기에 머물면서도 믿음의 연단을 위한 깊은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하신 곳,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곳,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모든 일이 실타래 풀리듯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시련과 어려움은 더 많은 법입니다. 한 가지 시험을 이기고 나면 좀 더 어려운 시험이 닥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인 그리스도에게로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장로교를 하다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사역하면 복을 절로 받는 줄 알았더니 갑절로 고생이다’. ‘개역 성경으로는 눈 감고도 설교하는데, 이제는 구절이 틀려서 원고를 써서 보고 설교해야 하고, 설교 거리도 적고 더 힘들다.’ ‘은혜가 오히려 떨어진다.’ 별 희한한 고충도 많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뭔가 다른 줄로 알았는데 와보니 별 것 아니더라. 더 개판이더라.’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 교회를 하기에 더 큰 시련과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정해 주신 곳에서 받는 시험은 목적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라고 해서 간 그곳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나를 위한 것이며,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다. 고통에는 고통 그 자체의 문제보다, 항상 고통의 의미를 모를 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시내가 마르는 것은 그 시내 물로 사는 사람에게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주님 그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것들의 공급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시냇물을 마르게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다루실 때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안락한 환경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아무 의심없이, 불편없이 살던 환경이 극도로 나빠진다면 과연 여러분은 믿음을 지켜 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그 동안 아무 문제없이 고정적인 수입이나 거래처와 손님이 있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수입이 마르니라. 거래처가 마르니라...손님이 마르니라...” 이와 같은 시험이 닥칠 때, 여러분은 그 시험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 가운데 사역에 뛰어들었다가 성도가 모이기는 고사하고 점점 흩어지고, 양들은 떠나갈 때, 마음 가운데는 온갖 상념이 다 생기는 법입니다. 성도가 오면 목사로 부름받은 것같고, 성도가 떠나면 덩달아 소명이 사라져, 사역을 포기하는 형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시냇물이 마르는 시험은 성도라면 예외 없이 반드시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나의 목을 축여주던 시냇물이 마르는 것은 고통입니다.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이런 시험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우리의 본으로 제신된 바울 사도 역시 이런 시험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10,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힘에 겹도록 너무 눌림을 당하여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시냇물이 마르는 고통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걸립니다. 어떤 분은 불면증에 걸리고, 주여 이대로 죽여 주소서! 기도하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9.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심이라.==>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그 고통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냇물이 마르는 이유와 뜻을 알 때,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냇물이 마르는 시험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민 온 한국인들을 보십시오. “미국에 잘 왔어!, 탁월한 선택이었어!” 하다가 몇 날이 못되어 쪽박을 차고 새로 시작합니다. 10.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과거에서 지금까지), 건지고 계시며(현재), 또 건지실 줄을 우리가 신뢰하노라(미래).==>온전한 믿음](고후1:8-10).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의 생활은 바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기며, 주님을 신뢰하는 생활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밝듯이, 골짜기가 깊을수록 산이 높은 것같이 우리의 시련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믿음은 더욱 정금같이 빛나면 더욱 완전한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들이 배교의 시대에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배우라, 입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 내가 주님 편에 설 때, 주님은 나의 편에 서신다. 셋째, 단순한 생활, 삶에 탐욕이 없게 하고, 만족할 줄 아는 경건 생활을 하자. 넷째, 모든 환경의 주관자는 주님이시다. 환경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자. 다섯째, 마르는 시냇물의 고통의 시험을 이기자. 이런 것은 단숨에 내 안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