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일은?(II)
말씀: 열왕기상 17:2-6
요절: 열왕기상 17:2-6
지난 시간에 이어 배교의 시대에 성도가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의 조명을 받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성도가 배교한 세상을 향해 어떻게 일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오늘은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 왕 앞에서 담대하게 가뭄을 선포했습니다.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1b). 온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쫓을 때, 외로이 홀로 주님을 위해 일어선 엘리야는 의를 선포했습니다. 심판을 앞두고 에녹이 300년 동안 의를 선포했듯이,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120년 동안 의를 선포했듯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했습니다.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할 경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천사를 통해 말씀하실 수도 있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직접 음성을 발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솔로몬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소원을 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입니다.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자신의 사람을 쓰셔서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선포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엘리야가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서 자신이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도록 임명한 사람의 입술에 말씀을 주시고, 전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닙니다. 하지만 엘리야 처럼 받은 말씀이 있다면 그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주님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무도 선포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성경에는 세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이 둘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말이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주님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통해 우리의 심령에 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정상적인 집회에만 꾸준히 참석한다면 매주 2-3번은 주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임하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 주일 예배 시간에 주의 말씀이 임하는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직접 말씀을 받고 싶다, 또는 직통 계시를 받고 싶다”는 분들은 교회에 오는 것보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은 설교자, 교사, 복음 전도자를 통해 말씀하실 수 있는데 직통 계시를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이 직접 하늘에서 천사를 통해 말한다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증언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게 성경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면, 주님께 성경을 가르쳐 줄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설교가 졸음을 주는 수면제 같아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 10:33의 고넬료는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여기 하나님 앞에 다 있나이다, 하니라.](행10:33).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본입니다. 그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말을 결코 사람의 말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처럼 강단의 설교가 무시되고, 업신여겨지고, 경시되는 예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의 파도가 높고, 세상의 물결이 교회로 넘쳐 들어 올 때, 성도들이 더욱 정신을 차려서 해야 할, 간절하고도 시급한 일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친히 주신 말씀에 대해 불신하고 불순종 할 때, 더 이상의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게 임한 주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에 철저히 순종할 때, 그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조명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더 많은 조명과 계시를 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더 많은 것들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주신 말씀에 한 가지씩 순종해 나가십시오. 매주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2). 이것은 주의 뜻이 계시되었다거나 주님의 마음이 전달되었다거나 주님의 사상이 전수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경건한 체 하는 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환상이나 계시를 떠벌리지만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뜻은 말씀, 기록된 말씀으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던 것이지 엘리야가 그것을 찾기 위해 고행의 길이나 수도자의 길로 들어 설 필요가 없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고, 모든 사람이 배교해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손에 잡고 있다면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명기 30:11-14, [이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 네게 숨겨진 것도 아니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 이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나니 그러므로 네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하나님의 말씀은 저 바다 건너, 저 하늘 위, 저 땅 속 깊은 곳이나 산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지나 대영 박물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곳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로 오십시오.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과 입 속에 담아 줄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주님은 자신의 종들의 걸음을 하나 하나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한꺼번에 해야 할 일을 다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한 번에 한가지씩 말씀하시고,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까지 자신이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될 줄은 그 자신도 알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하루, 매일 매일 한 걸음씩 인도하시며, 전적으로 자신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만 할 뿐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겨 버리면 됩니다. 이사야 58:11, [주께서 너를 항상 인도하사 가뭄 속에서 네 혼을 만족시키시며 네뼈를 기름지게 하시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으리라.](사58:11). 시편 48:14, [이는 이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우리가 죽기까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리로다.](시48:14).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심판의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불러 가신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 중의 가장 귀한 것은 성경이요, 보이지 않는 것 중의 가장 소중한 것은 성령입니다. 이외에 하나님께서 가장 가치있게 보시는 것은 주님이 친히 세우신 종들입니다. 기근이나 가뭄보다 더 큰 심판과 저주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설교자를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뭄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더불어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선포할 대언자 엘리야에게 “여기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갖가지 재앙이 있다해도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설교자가 없고, 진리의 말씀을 수호할 지역 교회가 사라져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저는 LA 땅에 사는 한국인들은 매우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돈 벌어 먹고살기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이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설교자가 극히 적고, 그런 교회가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라의 치안을 바로 잡고, 기강을 세우기 위해 20개의 경찰서를 세우는 것보다 반듯한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사설 학원과 학교를 수십개 세우는 것보다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 하나가 들어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선포된 3년 6개월 동안의 이슬과 비도 없는 재앙이 물리적인 자연 재해의 심판이라면 엘리야를 철수시켜 버리는 것은 영적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2:2,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엘리야를 공적 무대에서 철수시켜 버리심으로써 이스라엘은 물리적인 자연 재해에다 영적인 재해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이 배교의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단비요, 맺히는 이슬이요, 가는 비요, 소나기란 사실에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30:20-21,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사30:21,22). 말씀을 가르칠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겨버리는 일이야말로 백성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마시는 재앙 가운데서도 말씀을 가르쳐 줄 선생만 데려가지 않는다면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설교자가 된 것이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들의 목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깊은 감동이 솟아 오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교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목회를 하고 있다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들을 현장에 두시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저는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출석하는 여러분들로 인해 늘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이 바로 마른 뼈들의 골짜기 같은 이 LA 지역에 말씀을 선포하고, 영적 가뭄을 해소할 비와 이슬과 소나기를 내리는 종들이란 사실을 자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뱃속에 모든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에게 올 때 영혼의 메마름, 영적 기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명의 빵과 생수를 가지고 있음을 기뻐 찬양하십시오. 선인장 몇 그루 밖에 없는 사막에 푸른 초원을 만들고 꽃이 피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꾸준히 그 땅에 비를 내리는 것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믿는 여러분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아모스 8:11-13, [11.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주의 말씀을 왜 못 듣습니까? 선포하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12.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암8:11-13). 지금 이 시대는 급격히 배교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보존된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강단은 십자가의 복음대신 사회 복음을 외치고, 성도들은 증거의 능력을 상실함으로 영적 기갈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교회에서도 들을 수 없고, 믿는 성도들의 입에서도 들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197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 하나님은 몇몇 탁월하고 복음적인 설교가들을 불러 가셨고, 지금도 계속 불러 가심으로 이 세상은 점점 더 복음적인 설교를 듣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수하게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를 찾아 볼 수 없게 될 그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외치는 복음이 아마 우리 시대의 마지막 외침인지도 모른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품고 열심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이 시대의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2,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2,3). 주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를 떠나 ...]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장소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롯이 불과 유황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서는 안되듯이, 엘리야는 심판의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숨겨 버리셨습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에게도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대중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영적 교만과 타락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주의 말씀을 선포한 이후 사역을 확장하고, 민족적 부흥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도 세우고, 문서 사역도 감당하고, 지역마다 회당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경건한 열망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계획하고, 확장하는 것을 절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흥분과 기쁨으로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주님께 고했습니다. 마가복음 6:30, [사도들이 예수님께 함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고하매] 이때 주님의 반응은 매우 조용하고도 의외 적이었습니다. 31.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잠시 쉬어라, 하시니...32. 이에 그들이 배를 타고 은밀히 외딴 곳으로 떠나더니](막6:31,32). 한적한 곳은 주님과 나만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다. 군중들의 시선도, 칭찬도, 모욕도 없는 오직 주님과 나만의 공간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이 영적인 힘을 유지하고 비축하는 곳이 바로 한적한 곳이요, 기도의 골방인 것입니다. 공중 앞에 나가기 전에 기도의 골방에 있어야 하고, 공중 앞에 나선 후에 역시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자주 한적한 곳으로 나아 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한 가지 원칙은 갈멜산의 승리를 쟁취하기 전에 그릿 시냇가에서 쓰라림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 전에 구덩이와 감옥의 쓰라린 고초를 겪었습니다. 모세는 지도자가 되기 전에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되기 전에 3년간 아라비아에서 홀로 지내야 했습니다. 엘리야 같은 불같은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질투로 가득한 사람에게 아합 앞에 가라는 것보다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는 말은 더 힘들고 어려운 말일 것입니다. 목사들에겐 매일 밤 회중 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적한 곳에 숨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쓰라린 일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영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온 몸을 불살라 일하다가도 잠시 한적한 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을 하는 것보다 순종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영적 야망이나 계획을 다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 자리를 떠나 그릿 시내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라는 곳에 거해야 합니다. 사역에 뛰어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사역에서 철수하는 것 또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이 가야할 곳과 있어야 할 곳도 찾지 못해 주일 아침이면 핸들이 엉뚱한 곳으로 꺾이는 것을 봅니다. 영적인 암흑과 혼돈이 깊어질수록 성도들은 오직 한 분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왜(why)?라는 이유를 달지 마십시오. 어떻게(how)?라고 따지지 마십시오. 언제나 그대로 즉각 순종하십시오. 그릿 시냇가에 연고도 없고, 집도 없고, 나를 support해 줄 지역 교회도 없다 해도 주님이 명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시니라.](왕상17:4). 주님은 식수 문제는 일단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라.] 먹는 문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거기서]란 한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릿 시내가로 가라고 하셨고, 거기서 너를 먹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다른 곳에 숨어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이 주는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곳에 거하는 한 먹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지정해 주신 그 자리에 있습니까? 이 문제야 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리에 없다면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탕자가 궁핍을 겪은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를 순례하며 자기들이 보기 좋은 곳에 정착한다면 영적인 복을 공급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자가 한 곳에서 일하다가 더 좋은 조건으로 초청하면 얼른 자리를 털고 그리로 옮기는 것 역시 정상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거기서]가 아니면 아무리 좋아 보이는 곳이라도 쓸모없는 자리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명하신 까마귀는 주님이 명하지 않는 곳에 있는 성도들의 주소를 찾아내어 배달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는 우편 배달부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주소에 적힌 그 장소에 있어야만 배달이 됩니다. 저는 많은 형제들이 단지 돈을 좀 더 벌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역교회도 없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고, 이사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교회가 너무 멀어서 다니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서 급격히 영적으로 타락하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오늘 이 말씀은 얼마나 깊은 교훈을 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가 있는 곳에서 적은 월급으로 일하는 것이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없는 곳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부요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성경적인 지역 교회 곁에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는가?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주권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기뻐하시는대로 행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딸에게 양육받게 하신 것이나, 이방인이 선지자인 발라암을 통해 성경의 위대한 예언을 하도록 하신 것이나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된 까마귀를 통해 자신의 종을 먹이신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시대에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이집트가 지배하는 시절에 모세가 가장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은 파라오의 왕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릿 시냇가에서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조용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개나 가축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지역에 서식하는 까마귀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사막으로 날아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주도 면밀하고 세심하게 역사하십니다. 엘리야는 피해있으라는 명령과 먹이시겠다는 약속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명령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약속은 절대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날마다 주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극도의 믿음을 요하는 일입니다. 쌓아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엘리야에게 이런 훈련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키워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시련을 통해 주님에 대한 믿음을 단련하고 키워 나가야 합니다. 믿음은 어느날 갑자기 쑥쑥 자라나는 것입니다.
3,4을 다시 보십시오. [너는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시니라.](왕상17:3,4). 이 말씀은 약속이 있는 명령입니다. 대부분의 약속은 앞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잘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조건을 잘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신과 불순종에 대해 보상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첫째. 주님은 성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신다. 셋째, 세상에 대한 가장 큰 심판은 주의 종을 철수시키는 것이다. 넷째, 약속은 순종을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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