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믿음(VIII)
말씀: 열왕기상 17:19-24
요절: 열왕기상 17:22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처음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기사를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력이 넘쳐 나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리스도의 일상은 십자가와 부활을 양대 축으로 하는 믿음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부활은 단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부활은 평범한 상식이요, 일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을 체험했고, 말씀의 능력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부활의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전에 없던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성경의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비웃고 조롱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과 기사들을 접할 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요, 하나님의 행하신 권능이란 사실을 믿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성과 모순되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아니며, 바보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성은 오히려 깨어있으며, 더욱 민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니, 그분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당연히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1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기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2:17b,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b).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현장에 개입하시면 상황이 아무리 처절하고, 절박하고, 회생 불가능해 보인다 하더라도 일거에 역전되고, 순식간에 이전보다 영광스럽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시편 66:9, [그분은 우리의 혼을 붙드사 생명 속에 있게 하시며 우리의 발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시는 이로다] 우리를 지으시고, 생명을 불어 넣으신 분이 죽은 자도 능히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이시란 사실을 믿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2:27,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32:27).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기도와 과부의 믿음으로 인해 죽은 아이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성경의 첫 번째 기사입니다.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누이고](19).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행간의 의미를 읽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비록 이곳 본문에는 없지만 다른 성경에 있는 구절들을 통해 영적 조명과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히11:35).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달라고 했을 때, 또 자기의 품에서 취하여 안았을 때, 죽은 아이를 들고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갔을 때 무엇을 했습니까? 본문에는 그녀가 기도를 했다든지, 찬양을 했다든지 기타 어떤 일을 했는지 조금의 암시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순간에 믿음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를 처음 만난 날부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는 자연 현상이 주님의 심판의 결과란 사실도 알았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이 없는 분이십니다. 사르밧 과부는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여러 날 동안 몸소 체험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인지도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네 아들을 달라] 하는 한 마디는 그녀의 마음 가운데 잠자던 믿음이 깨어나고, 원망과 불평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위기와 시험에 빠진 성도들은 때로 하나님의 사람이 던지는 한마디의 따스한 말, 한 마디의 사랑과 위로의 말로 힘을 얻고 믿음을 회복합니다. 형제 지체들이, 아니면 목자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던지는 단 한 마디의 말이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었던 원망과 불평을 저 멀리 날려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여인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네 아들을 달라]하며 자신의 아이를 품에서 안고 묵묵히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갈 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은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가 살아난 것 역시 그녀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르밧 과부와 같이 은혜 뒤에 닥친 시험으로 인해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입술과 마음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돕는 손길을 통해 단번에 믿음을 회복하여 놀라운 믿음의 증거와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마음 가운데 힘과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누이고](19). 죽은 시신을 어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한 구절은 엘리야의 인간적인 성품을 매우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긴 사역과 주신 말씀에는 철저한 사람이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한없이 측은해 하며,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로봇이나 불독이 아니라 인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인간이란 점입니다. 자기를 섬기고, 돌보는 과부의 집에 닥친 시험은 단지 과부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과부가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당신이 내게 오셨나이까?](18)란 원망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는 노골적인 감정이 베여 있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대언자이든, 바울과 같은 사도이든, 교회의 목사이든, 선교사나 부흥사이든 우리는 성도들로부터 이런 노골적인 불평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보러 가기 위해 서두르다 사고가 났을 때, 교회의 재정을 돌아보고, 헌금을 많이 하다 자신이 파산 났을 때, 교회의 일에 매달리다 공부를 제대로 못해 대학에 떨어졌을 때,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그의 사역에 전심전력하고,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다해 헌신했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덤벼들 때, 목자는 시험을 받습니다. 저는 많은 경우에 사르밧 과부처럼 원망과 불평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 집에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변할 수 있고, 과부에게 조금도 실례를 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착잡하고, 무거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부에게 닥친 시험일 뿐만 아니라 엘리야에게 임한 시험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엘리야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가 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누이고](19). 엘리야는 문제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들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따라야 할 문제 해결의 열쇠요, 본입니다. 시편 62:5, [내 혼아 , 너는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라. 이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로다.](시62:5). 죽은 아이의 시신을 앞에 두고 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도움이 아무 쓸모없고, 육신적인 온갖 상상과 추측과 계획이 무가치할 때, 우리는 시편 기자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혼아 , 너는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라. 이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로다.](시62:5).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또한 내가 머무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녀의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20). 엘리야는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위기의 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cried unto).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는 응답이 있습니다.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주님 앞에 흘릴 눈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눈에서 솟아오르는 눈물 외에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죄의 불길을 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메마른 눈을 가진 성도의 눈에는 십자가의 피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대적하던 누이 미리암을 위해 주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민12:13). 다윗은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만큼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부르짖음과 눈물의 기도는 성도의 기도하는 자세이며, 전형적인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도 육체로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그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5:7,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히5: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자신도 모르게 말씀에 첨가하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자주 첨가되는 말> 주께서 또한 내가 머무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녀의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20). 기도할 때 너무나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오 주여, 어찌하여...”입니다. 엘리야는 “어찌하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모든 일에 주님의 주권과 섭리와 인도하심을 인장하고, 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할 수 있지만, “어찌하여”를 연발하는 것은 결코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그리하셨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그리하지 아니하셨나이까”하는 것은 죄입니다. 로마서 9:19, 20 [그러면 네가 내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허물을 찾으시느냐?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 하리니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지으신 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겠느냐?](롬9:19-20). “어찌하여”란 질문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또한 내가 머무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녀의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20). 우리는 여기서 신약 성도들에게 기도의 본으로 제시된 엘리야의 기도하는 단면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요, 눈물이 있는 기도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서, 상황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배교의 시대인 현재 교회는 울어야 할 때, 울 줄 모르고, 즐거워해야 할 때 기뻐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둘째,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엘리야의 이 말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맺어진 특별한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보다 더 친밀하고, 강력한 인격적 관계성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위기의 순간에, “오, 아버지 하나님”, “오 주 나의 하나님 아버지”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어떤 대언자도 감히 외치지 못했던 저와 여러분의 특권입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를 찾을 수 있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천군만마를 가진 것보다 더 풍요로운 축복을 소유한 것입니다. 셋째, 엘리야는 모든 일의 원인,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주께서 또한 내가 머무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녀의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20). 이는 엘리야가 그 아이의 죽음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며, 주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아모스 3:6, [도시에서 나팔을 부는데 어찌 백성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행하지 아니하셨는데 어찌 도시에 재앙이 있겠느냐?](암3:6). 주님은 빛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둠을 창조하셨으며,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이것을 주권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는 어떠한 재앙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할 수 없고, 임한 재앙은 모두 주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시편 119:75,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들은 바르오며 또 주께서 신실하신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시119:75). 성도들에게 임한 재앙은 주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넷째,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과부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단지 과부나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께서 또한 내가 머무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20)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머무는 집 과부는 어떤 과부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과부이며, 엘리야를 섬기도록 명한 과부입니다. 이는 기도의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누구인지,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십시오. 예를 들어, “주의 피로 사신 *** 형제, 주의 은혜를 입은 *** 자매, 주께서 사랑하시는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그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이 아이에게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21). 엘리야는 마치 죽은 아이의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죽은 시체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이나 펴서 엎드려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마치 죽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죽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생명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전에 결코 어떤 사람이라도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전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은 없고,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주실 수 없을 만큼 큰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는 듯이, 기도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이 사건은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가 얼마나 크고 많은 효력이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란 암시도 없고, 살아나야만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엘리야가 이 아이를 살려 줘야 만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과부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 질 것이며, 오히려 어린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이 더욱 경건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종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란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요, 우리의 배움을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생활을 가장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주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따지다가 정작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능성을 따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엘리야가 아이의 시체를 앞에 두고 “주여 죽는 것이 주의 뜻이나이까? 제가 다시 살도록 기도하는 것이 주의 뜻이나이까?”라고 고민만 하고 앉았다면 그는 뜨겁고도 열렬한 기도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주님의 뜻을 무시하는 기도를 해서도 안되지만, 불필요한 것을 따지느라 기도를 게을리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특히 형제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요청하는 제목 그대로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남의 기도 제목을 자신이 판단하고, 검열하고, 생각나는 대로, 임의대로 기도하는 것은 주의 종이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위대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필요를 아뢰고, 큰 것을 주시도록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공급하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더욱 존귀와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이의 혼이 아이에게 돌아오고 그가 살아났으므로](22). 기도의 힘이란 과연 얼마나 큰 것인가? 놀랄 뿐입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3:12a, [이는 주의 눈은 의로운 자들 위에 거하며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열려 있으되...]란 말 그대로입니다. 주님의 귀는 우리의 기도에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어려움에 있든지 주님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는 어려운 것이 없고,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행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하는 자의 목소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까지 direct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늘 기도를 배워, 바른 기도를 통해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엘리야의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의 골방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둘째, 그는 열정적이었다. 그는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셋째,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통해, 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심에 호소했습니다.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넷째, 엘리야는 하나님의 속성,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했습니다. “주께서 ...하셨나이까?” 다섯째, 엘리야는 진지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아이 위에 세 번이나 엎드려서 부르짖었습니다. 여섯째,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긍휼에 호소했습니다. “내가 거하는 집 과부” 일곱째, 엘리야의 간구는 명확했습니다. 중언부언하지 않았으며, 헛된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이 아이에게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께서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이의 혼이 아이에게 돌아오고 그가 살아났으므로](22).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혼이 떠나는 것이 죽음이요, 몸이 죽은 이후에도 혼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재 엘리야처럼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잠든 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분명한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이 땅을 먼저 떠난 형제, 자매들은 더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1:23,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몸을 떠난 혼들은 현재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8,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리고 주의 임재 가운데 기쁨이 충만합니다. 시편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눈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토록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처럼 소망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 혼들을 찾아 그들을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열정으로 구령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풍성한 수확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방에서 집으로 내려가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하니라.](23). 죽은 아이를 안고 올라온 엘리야는 이제 산 자를 안고 내려갑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 하나님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의 종이 있었음을 주목하십시오. 죽음을 생명으로 옮기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광스런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죽은 자를 안고 올라와 산 자를 안고 내려가는 기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도로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일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골방에서 몸은 살았으나 영이 죽은 자들을 위해 쉼없이 부르짖고, 기도함으로 풍성한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이로써 내가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주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아나이다, 하니라.](24). 엘리야는 처음 과부를 만났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실을 이야기했고, 여러 가지 말로 가르쳤겠지만 여인의 마음 가운데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확증된 것은 아이를 살려 내어 돌려주었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공언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란 것을 얼마나 입증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위의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받고 있습니까? 꼭 인정받기 위해 안달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요, 믿음의 사람이란 인정”은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우리의 입에 있는 주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 내에서는 믿음을 인정받는데, 집에서 함께 기거하는 배우자나 자녀, 자신을 잘 아는 친구나 부모에게는 전혀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는 집에서, 사적인 교제에서 경건의 생활이 전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생활의 실재가 없고, 그 권능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럴듯한 핑계와 변명으로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삶에서 베어 나오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도록 변화된 삶을 삽시다. 우리의 삶의 경건이 우리 입술의 증거와 증언을 뒷받침해 주는 능력이란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은 그의 말에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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