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X)

말씀: 열왕기상 18:6, 15-18
요절: 열왕기상 18: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엘리야와 전혀 대조적인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아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아합에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빛과 그림자가 분명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에게 환영받고, 누구에게 배척받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숨어서 믿는 오바댜와 같은 사람과 달리 엘리야는 공적인 사역을 한 사람입니다.

공중에 나는 지푸라기가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듯이,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100명이나 동굴에 숨겨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지만 아합 왕을 두려워했고,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아합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말을 듣고도 마음은 더욱 완악 하여져서 엘리야를 찾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안위입니다. 그러나 그는 노새와 말이 먹을 풀과 물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그 지으신 창조주에 대해서 멀어지면 그 마음의 방향은 더욱더 타락할 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자는 이미 저주받은 자입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23: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네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할지니라.](잠23:19).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합은 분명히 엘리야를 통해 가뭄과 이슬이 없는 재앙이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심판이란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원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상들의 죄도 아닙니다. 내가 이전에 지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죄에는 엄중한 심판이 있고,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죄에 대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심판받는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해, 또는 조상들의 죄로 인해 내가 심판을 받는다면 저희들은 아담이나 조상들을 원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18:27-32을 보겠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사악한 자가 돌이켜서 자기가 행한 악에서 떠나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면 자기 혼을 구해 살게 하리라. // 죄인은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돌이키지 않는 것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 그가 깊이 생각하고 돌이켜서 자기가 범한 모든 죄에서 떠났은즉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마음으로 회개한 사람은 심판받지 않습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전의 죄가 아니라 현재까지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완악함이 문제입니다. //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집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내 길들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들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원죄로 인해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 왜 남의 죄로 내가 심판받아야 하는가? 내가 본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죄를 짓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인데 왜 내가 심판받아야 하는가? 고민도 하고, 불평도 하고, 의심도 하고, 조롱도 합니다. 기독교는 이상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나 조상은 남도 아니거니와 우리가 그들의 죄를 물려받았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왜 값없이 준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한 마음,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심판하되 각 사람의 길대로 심판하리라.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서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라. 그리한즉 불법이 너희를 황폐하게 하지 아니하리라. // 아합과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신 것은 바로 회개하고 돌이켜서 모든 범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범죄를 너희에게서 떨쳐 버리고 너희를 위하여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만들지어다. //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목적이요, 심판과 징계는 수단입니다. 핵심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입니다. 잠언 2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뚤어진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자기 혼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것들이 멀리 있느니라.](잠22:5). 아합은 이런 극심한 가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겸손히 돌아오기는 고사하고, 더욱 완악 해졌습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서로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6). 왕궁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둘러 싸여 놀고 있어야 할 아합이 극심한 가뭄으로 직접 풀과 물을 찾아 나선 장면을 보십시오. 이들은 좀 더 빨리, 효과적으로 찾기 위해 서로 다른 길로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 속에 흐르는 행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영해가 되고, 사적인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말씀과 말씀을 비교해서 얻어지는 행간의 의미는 깊은 교훈을 줍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5절에서 아합은 오바댜를 데리고 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갈라져 한 명은 이 길로, 한 명은 저 길로 갔습니다.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우연으로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예가 허다하게 나옵니다. “마침 그 때에”(눅2:27-and when), “마침 이 때에”(눅2:38-in that instant)란 말은 우연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적 인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난 것이나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만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서로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6). 아합과 오바댜가 딴 길로 간 것은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바댜는 주인 아합의 명에 따라 순종해서 홀로 자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이 가뭄 가운데서 풀을 찾는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순종해서 일을 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오바댜가 아합 왕과 함께 있을 때 엘리야를 만나게 하지 않으시고, 홀로 있을 때에 만나게 하셨습니다. 만약 같이 있을 때 만났다면, 오바댜의 숨어서 일하는 그의 사역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약점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바댜에게 백명의 대언자를 숨어서 돕는 일에는 적극적이었지만, 공개적으로 일하는 한 명의 대언자를 위해 심부름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배교의 시대, 박해와 고난의 시기에 숨어서 지하 교인으로서 몸을 숨기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것도 마땅히 칭찬해야 할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주님의 자녀임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는 모두 자신을 숨긴 그런 성도였지만 주님이 죽었을 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바댜는 심성이 연약한 형제였지만 엘리야를 통해 주의 일을 공개적으로 수행하는데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가 두려워하는 문제를 어떻게 도왔습니까? 15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이 날 반드시 아합에게 보이리라, 하니라.](15). 오바댜의 두려움은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데서 나온 것입니다. 아합의 군대보다, 이 세상의 모든 군대보다 훨씬 더 강한 군대가 자신의 종들을 신실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평범한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오바댜가 확신과 용기를 얻은 것은 엘리야를 통해 “살아계신 만군의 주”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역사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오바댜와 같은 연약하고, 뒤로 물러나는 믿음에서 담대히 아합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두려워하는 아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한 가지씩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만은 피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만군의 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에게로 담대히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고 가니라.](16). 오뱌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가서 아합을 만나, 엘리야가 전해 준 말을 고했습니다. 이로써 오바댜의 믿음은 한 단계 성숙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실행할 힘과 담력이 생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도저히 아합을 만날 용기를 못내던 오바댜가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죽음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풀을 찾아 나섰던 아합은 뜻하지 않게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3년만에 다시 만나는 재회의 순간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간 것은 영적 교훈을 받거나, 기도를 부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 엘리야는 더욱더 성숙한 믿음의 종이 되었고, 아합은 더욱더 악해졌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려고 애를 쓰지만,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 가운데 근심하기도 합니다. 헤롯은 침례인 요한을 죽였지만 그를 두려워 하고, 그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그를 주시하며 또 그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일이 많으며 그의 말을 달갑게 들었음이더라.](막6:20). 총독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두려워 했습니다. 사도행전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니 벨릭스가 떨며 대답하되, 이번에는 그만 가라. 적당한 때에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는 전파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악한 왕들을 두려워 떨게 하는 힘이 바로 살아있는 말씀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들고 있다면 실제로 무엇을 들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아십니까? 고린도후서 10:4,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고후10:4).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볼 때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냐? 하니](17).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마자 첫 일성(一聲)이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냐?”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의미의 유래가 있습니다. 마치 한자의 고사성어 속에는 담긴 뜻이 있듯이 “이스라엘의 괴롭게 하는 자”란 말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통하는 그런 성경적 어원이 있는 말입니다. 여호수아 7:25,26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주께서 이 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들을 돌로 친뒤에 불로 태우고 아간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이 날까지 있더라. 이에 주께서 자신의 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의 이름을 이 날까지 아골 골자기라 부르더라.](수7:25-26).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끔찍한 욕입니다. 너 아간 같은 놈아! 이런 욕이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아간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항상 남에게 덮어 씌우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과 신약의 모든 순교자들은 악인들로부터 그런 죄명을 쓰고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한치의 오차없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면,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패배하게 한 아간에 비유하며, 죽여 마땅한 자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합니다. 특히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메시지는 결코 인기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죄와 심판을 설교할 때 모여드는 성도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런 설교를 통해서 부흥하는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종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를 모반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암7:10). 우리 주님도 백성을 소동케 한다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눅23:5). 바울과 실라는 세상을 소란케 한다는 정죄를 받았습니다(행16:20). 데살로니가에서는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행17:6).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으로부터 악인으로부터 적대심의 대상이 되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당신들이 주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니이다.](18). 엘리야는 사악한 아합 왕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그의 죄를 지적했으며, 심판의 원인이 무엇인지 선포했습니다. 자신에게 퍼부어진 비방과 그의 분노에 전혀 요동되지 않고, 일축해 버립니다. 사실 사람은 근거없는 비난을 받을 때 가장 황당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18). 이는 순수하고 선한 양심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시련과 고난, 주님의 심판은 나와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성에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왕의 비방을 왕과 그의 아버지(조상)에게로 돌렸습니다. 아합은 물론이려니와 아버지 오므리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단도직입적으로 죄와 죄인들을 지적했습니다. 마치 나단 대언자가 다윗 앞에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 것처럼, 엘리야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임한 무서운 심판과 재앙이 바로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목이 열 개라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만군의 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죄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자신보다 권세가 강하고, 높은 지위에 있거나, 더 많이 배운 사람이거나, 더 나이가 많은 선배일 때는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유교 문화권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이런 일은 더 어렵습니다. 저는 저보다 나이 많은 목사님들의 잘못을 보거나, 잘못된 교리로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지적하기가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유익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는 대신 알량한 교회 프로그램이나 명사 초청, 유명 강사를 통한 부흥회 등으로 떼우려는 행태들을 볼 때 속이 끓어오릅니다. 그 때마다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교훈을 얻을 뿐 막상 지적해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라면 과감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자신의 질책에 대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는 당신들이 주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니이다.](18). 가뭄의 심판이 왜,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 명백해 졌습니다. 참으로 괴롭게 하는 자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자들이지, 그들의 죄악에 대해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의 해결책을 수용하지 않는 죄인들의 완악함이 모든 재앙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는 당신들이 주의 명령을 버렸고,...](18). 죄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명령을 버리는 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멍에를 벗어 던져 버리고,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고, 왕이신 그분께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법을 주신 분의 법을 버리고, 그 권위에 대해 반항하고, 무시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은 십계명의 첫 계명부터 여지없이 부숴뜨렸습니다. 마음 가운데 참되신 하나님이 떠나면 그 빈 자리에는 어김없이 거짓되고 악한 것이 자리 잡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지적한 이 죄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들이 주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니이다.](18).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은 강단에서 배척받고, 버려지고, 대신 사람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만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따르는 자체가 바로 가장 극심한 죄인 것입니다. 보존된 순수한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이이야 말로 바로 세상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요, 심판과 재앙을 촉발하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2:19,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타락함이 너를 꾸짖으리라.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린 것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일인 줄 알고 주의하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렘2:19).

우리는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가뭄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덕담인가? 악담인가? 그 내용에 관심을 갖습니다. 내용이 듣기가 좋으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백성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구하는 대신 풍작을 선포했더라면 설령 풍작이 없었더라도 백성들은 좋아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강단은 끊임없이 축복을 선포하는 설교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복을 설교하는 목자를 야유하고, 욕하는 성도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설교의 진위, 진실성, source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둘째, 교회의 죄와 잘못을 지적하는 신앙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신실한 설교는 진리에 충실한 설교입니다. 진리는 듣는 대상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 다산과 풍작을 선포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회당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할 때까지 고통과 징계를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릅니다.

셋째,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맛 보았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섬김을 받았으며, 죽은 아이를 살리는 능력을 얻었고, 아합 궁에 있는 오바댜를 통해 100명의 주의 대언자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곳곳에 세상과 종교가 주는 달콤한 제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서서 외롭게 투쟁하는 지역교회와 형제들을 두심으로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