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XI)
말씀: 열왕기상 18:19-21
요절: 열왕기상 18:19-21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죄인들의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릎꿇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복종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아 버리고 덤벼듭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번째 부류였습니다. 아합과 엘리야는 3년만에 재회하여 처음부터 날카로운 설전을 벌였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일컬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몰아 부쳤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입씨름이나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곧 있게 될 갈멜산의 전투를 알리는 영적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전쟁을 위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엘리야와 아합은 서로를 비가 오지 않는 기근과 심판의 원인 제공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규명되어야 했습니다. 3년간의 가뭄이 왕궁이나 아합이 사는 수도 사마리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 걸친 대규모의 재해였기에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건의 진위가 밝혀져야 했습니다. 3년 6개월의 긴긴 시간동안 대규모의 자연 재해에도 불구하고 왕이나 백성들 누구하나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주의 대언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나마 살아 있는 대언자들은 어딘 가로 꼭꼭 숨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엘리야는 아합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대언자 사백오십 명과 작은 숲을 섬기는 대언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하매] 엘리야는 먼저 아합에게 바알의 대언자들과 작은 숲을 섬기는 아스다롯의 대언자 사백명, 도합 85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서 단판을 내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갈멜산은 주의 제단이 있던 곳입니다(왕상18:30). 본래 이곳에는 이 제단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그나마 이 제단마저 부서지고 바알 산당이 대신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갈멜산은 바알의 성산(聖山)으로 인식되는 곳이었습니다. 아합이나 바알의 대언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이야말로 자신들의 터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본래 이 산은 아셀 지파의 땅에 있는 산으로 사마리아 경계 밖에 있는 산이며, 하이파의 해변의 절경이 눈에 들어오는 그런 명산이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의 압도적인 영적 권위와 능력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찾는 아합 왕의 죄를 질책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왕에게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알과 아스다롯의 대언자들을 소집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다시 보내실 때는 비를 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고, 뭔가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비를 내리기 전, 지금까지 당한 가뭄의 재앙이 분명히 그들의 죄 때문이요, 주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에 땅에서 풀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온 백성은 주 하나님과 바알의 참 모습을 볼 때가 왔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고, 심판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가뭄과 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가뭄과 그로 인한 기근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을 들고 있는 엘리야가 어떻게 주님의 축복을 이 땅에 회복시키는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주의 저주를 촉발했던 그 무엇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의 심판을 불러일으킨 죄악을 벗어버리기를 거부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주의 축복을 구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개인을 심판하시든, 민족을 심판하시든 주님을 불쾌하게 만든 그 무엇이 처리되어야만 비로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많은 축복들을 부여잡고, 말씀하신 약속들을 굳게 믿고 기도해도 도무지 응답이 없다면, 내가 처리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먼저 처리하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 하늘을 열고, 닫는 문제는 바로 내 자신에게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주님 앞에 바르게 서지 않으면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흘리는 성도의 회개하는 눈물은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대언자 사백오십 명과 작은 숲을 섬기는 대언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하매](19) 엘리야는 크나큰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의 우상들에게 훼손당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들에게 이끌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특별한 열정과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질투와 동의어(同義語)입니다. 열왕기상 19:10,14 [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왕상19:10,14).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온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알의 대언자들과 작은 숲을 섬기는 대언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불붙는 질투심을 가슴에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가 무덤같이 잔인하기 때문이니 그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아8:6). 주를 향한 엘리야의 질투심이 바로 이런 질투심이었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이었지만 살아 계신 만군(萬軍)의 주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천만인(千萬人)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갈멜산에는 엘리야 혼자 있는 것 같지만, 만군의 주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반면, 아합은 이번 기회를 통해 엘리야를 제거하고, 가뭄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과 자신에게 쏠린 여러 가지 부담들을 떨쳐 낼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는 곳은 어디나 주의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주를 위한 질투로 불붙는다면, 주의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며, 모욕받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을 것이며, 나를 바라보는 수백, 수천 명의 시선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질투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20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합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어 그 대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함께 모으니라] 엘리야의 요구에 아합이 이렇게 순순히, 즉각적으로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합 왕은 마치 엘리야의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리야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갈멜산 소집령’을 전국에 공포했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 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잠언 21:1, [왕의 마음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이 마치 강물과 같으니 그분께서 친히 원하시는 곳으로 그것을 돌리시느니라.](잠21:1).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악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기도 하시고, 완악 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을 외적인 것에서 찾고 이해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 당시의 국제 정세, 당시의 경제력, 지도자의 성격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데 익숙해 있지만, 더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불신과 회의의 시대에는 매사에 ‘주님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의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쉽게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 때의 해상 기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분석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신 하나님에 대해 주목하지 않습니다. 올해 농사에서 풍성한 작물을 거두면, 기자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농작물 재배법이나 농기계의 보급, 병충해를 막을 수 있었던 농약의 개발, 농부의 수고나 농업 기술 등의 성과라고 보도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돌보심과 선하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 나고, 내전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국제적인 분쟁이 있을 때, 그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매사에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며, 다루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는 신자들조차 이런 영적 시각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채, 부수적인 것들을 가지고 평가하고 분석하는데 골몰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모든 사건과 문제를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영적인 시각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분노하고, 화를 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려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십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너무나 많이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주권 신앙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주권 신앙을 소유한 성도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맡기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권능을 입고 아합 왕을 수종 부리듯이 할 수 있었듯이, 저와 여러분 역시 그런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자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을 온 세상에 보내시기 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19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은 마귀와 전갈을 밟을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의 소유자들입니다.
[이에 아합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어 그 대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함께 모으니라](20) 주님은 아합의 마음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바알과 아스다롯의 대언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모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 뿐만 아니라 자기 원수들까지도 동일하게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은 3년 전 혜성같이 등장했다 사라진 엘리야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아니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바알의 대언자들은 왕명으로 인해 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종결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3년 6개월이란 기나긴 가뭄도 이들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로 인한 극심한 기근도 이들을 회개케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숨어 버렸습니다. 다시 비를 내리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의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우상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님의 피로 정결케 되어야 하며, 말씀의 물로 깨끗하게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 외의 어떤 다른 것으로도 주님의 진노와 징계와 심판은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한 가지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보혈입니다. 우리의 죄는 심판으로 정결케 되지 않습니다. 지옥에 타는 뜨거운 불도 사람의 죄를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나의 죄를 정결케 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려니와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매](21) 엘리야는 온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백성들을 향한 엘리야의 마음은 목자의 마음이며, 연민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시고,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그리고 나서 그의 귀를 기울여 우리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자신에게로 돌이키신 다음, 자신을 돌이켜 우리를 돌보십니다. 시편 10:17, [주여, 주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예비하시오며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마음이 주께로부터 멀어진 자들은 마음을 돌이켜 헌신을 결심하고, 충성하기 전에는 결코 주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바알의 대언자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회심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교리적 논쟁을 벌이거나 토론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엘리야의 관심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영적인 무지로 인해 우상에게 포로로 사로 잡혀 멸망당한 그들을 보십시오.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그들은 우상의 실체에 대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성경에 바탕을 둔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신앙이 아니라면 아무리 뜨거운 열정이라도 그 불은 몇 날, 몇 달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한 신앙 교육이 필요하고, 영적 지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세아 4:6a,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이사야 5:13,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 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는 배교로 직결되었고, 주님(LORD)과 바알 중 누가 하나님이냐?라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묵묵 부답이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머뭇거리다는 말은 술이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과 같은 단어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이 쪽으로 몸이 쏠렸다가, 저족으로 몸이 쏠렸다가 분간이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빗댄 것입니다. 그들은 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고, 국가 종교이며 다산과 풍요, 농경신인 바알도 숭배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7:33, [이와같이 그들이 주도 두려워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민족들을 사로 잡아 왔든지 그 민족들의 풍속대로 자기 신들을 섬겼더라.](왕하17:33). 야고보 사도는 이런 마음을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고 정죄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뱀의 혀처럼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싸매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나뉘어지고 갈라진 마음을 정죄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10:2, [그들의 마음이 나뉘었으니 이제 그들이 잘못한 자로 드러나리라. 그분께서 그들의 제단들을 파괴하시고 그들의 형상들을 못쓰게 하시리니](호10:2). 하나님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반쪽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며, 혼합시키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부인이 혹은 남편이 ‘일주일에 4일은 당신과 함께 있고, 3일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겠다’고 한다면 O.K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단 하루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속으로 딴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편협된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협상과 타협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주를 믿는 성도라면 반드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일관된 요구이며, 명령입니다. 사람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고, 냉철하고도 날카로운 교리와 지성이 사라지고,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기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것인지, 현대 기독교의 그리스도를 섬길 것이지 결단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네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계3:15-16).
왜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지 아십니까? 우상들은 엄격한 도덕적 신앙 생활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매력은 나에게 거룩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우상을 만족시키는데 있지 않고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갈멜산으로 모인 백성들은 바알 종교의 관습대로 다산(多産) 의식에 관심이 있어서 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스다롯 여선지자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모두 성전 매춘에 경험이 풍부한 자들입니다. 백성들은 엄격한 율법과 도덕성, 영적 순결을 요구하는 주 하나님보다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바알 종교가 좋았을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적 기독교보다 물 탄 기독교를 더 좋아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지금 현재 마음이 갈라져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여호수아와 같은 선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24:15,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지금 거하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니] 우리는 신앙과 생각에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행동, 삶의 실천, 행위에서 있어서도 결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관념과 사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했다면 그분께서 명하시는 대로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보여준 모범을 따라 행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필요한 모든 은혜에 대해서 주님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신한다면 그 이후에는 주저함이 없이 전심전력하여 주님을 섬기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려니와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매](21) ‘따르는 일’은 일시적인 자극이나 감정적 흥분, 가벼운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충동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전인격적인 약속이며, 헌신입니다. 이는 신앙적 투신 행위입니다. 엘리야의 이런 강력하고, 공개적인 도전 앞에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냐?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단선적인 질문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할 만큼 정직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부정할만큼 심령이 완악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변명하는 것보다 좀 나을지 몰라도 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에게 돌을 집어들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거나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단하라!”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주님의 요구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주님이 외치는 이 음성과 부르심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매”(21) -이는 죄악된 침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는 백성들은, 언젠가 그들이 부를 때에 주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 1:24 vs 28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고 내 손을 내밀었으나 중시하는 자가 없었으며] vs [그 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28). -반드시 비교해서 보여 줄 것.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설교자를 통해 주는 주님의 외침과 부르심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배에는 나오지만 자기 마음에 약간만 들지 않는 말이 나올 때면 입을 꽉 닫아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주님께 예배드립시다. 예배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침묵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삶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하는 삶, 예배드리는 인생,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의무요, 본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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