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XIII)

말씀: 열왕기상 18:30-40
요절: 열왕기상 18:39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불신 가운데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대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위로는 아합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결단을 촉구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갈멜산에 모인 백성들은 엘리야의 도전에 모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주인 없는 이름으로 메아리 쳐 올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하니 온 백성이 가까이 오매 그가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하고](30) 엘리야의 사역의 관심은 온통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 있었고,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백성을 가까이 불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에 신앙을 호소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21)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다시 한번 백성들을 불렀습니다.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라.](24)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이성과 냉철한 판단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증거와 표적을 보고 판단하라는 말에는 열렬히 환호하며, [옳은 말씀이니이다.](25)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마음에 호소했습니다. 그가 말없이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무너뜨린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복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관찰하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술수를 부리는 것도 아니며, 신비라는 핑계로 숨어서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본을 몸소 보여 줌으로써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그가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하고](30)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대언자들을 죽이고, 주의 제단을 헐었습니다(왕상19:10). 주님께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표식입니다. 제단이 무너진 것은 예배가 무너진 것이며, 백성들이 더 이상 주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모든 헌신의 기초이며, 영적인 봉사이며, 섬김의 행위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주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무너진 제단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였으며, 엘리야가 그것을 보수하는 것은 백성들의 죄를 질책하는 것이며, 그들을 회개케 하여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복이 교회와 우리에게 임하게 하려면 먼저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이 선행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어떤 것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어 보여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고, 예배의 은혜가 없고, 예배를 드리는 기쁨이 없고, 주님의 임재가 없다면 나머지 모든 사역과 행사는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소홀하다면 그 집은 먹고 자는 편의 시설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필요를 구하는 일은 제쳐두고 세상 이야기와 TV소리와 라디오 소리, 사람들과 전화 주고받는 소리, 컴퓨터 켜고 끄는 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가정의 제단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중단되었다면 번영과 세속적인 욕망과 관심, 쾌락이 그 헌신의 시간을 모두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어려움과 위험,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두운 죄악이 교회와 가정에 드리워져 있다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불로 응답하시기 전에 먼저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하듯이 우리는 무너진 단을 다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던 그 때의 뜨거웠던 흥분과 감격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옛날의 신앙 추억으로 돌리지 말고, 지금의 감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말씀으로 채워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합시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시급한 우리의 할 일이며,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겠습니까?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에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전에 주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리라, 하신 자더라.](31)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에 따라 열두 돌을 취했습니다. 지금 현실은 남북왕국이 분열되어 있고, 이 자리에 남왕국 2개 지파는 없었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체를 바라보며 단을 보수했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갈라지고, 분열되고, 나뉘어져 있다고 해도 영적으로는 결코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파에 따라, 어떤 이견으로 수백개도 넘는 교단과 교파를 지니고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한 형제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멀어지고 배교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택함받은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 보고, 믿음으로 대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에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한가지의 귀한 영적 진리는 주의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그는 매사에 하는 모든 일이 주의 법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열두 돌을 취할 때 자연석 그대로 그 산에 있는 것을 취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으며,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과 형식대로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이란 명목으로 마음대로 하는 신자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실질과 능률, 효율성을 강조하여 성경적인 본을 제쳐두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 방식대로 하는 것은 지혜도 아니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엘리야의 행동 하나 하나,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유념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사건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25,6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이는 네가 돌 위에 네 연장을 들면 그것을 이미 더럽게 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너는 계단으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지니 이것은 네 벌거벗음이 그 위에서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의 판단이나 인간의 지혜나 세상의 관습이나 편의에 따라 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일은 철저히 성경적이어야 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의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멸망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성도들의 영적 능력과 경건이 이다지도 몰락했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자의대로, 임의대로, 사람이 편리한대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본을 떠나는 순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응답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권능이 우리 가운데, 교회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쉽게 깨닫고, 깊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성경적인 기준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며, 인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제도가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성경의 말씀 선포와 성경적인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의 예배와 행사, 성도들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규정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예배를 드린다고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로 삼아야만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교회, 성령의 임재와 말씀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주의 이름으로 그 돌들로 제단을 쌓고 또 제단으로 돌아가며 이 세상 분량의 씨를 담을 만한 도랑을 만들고](32) 엘리야가 주의 이름으로 그 돌들로 제단을 쌓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매사에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법칙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면 얼마나 상황이 달라지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헷갈릴 때, 이 말씀을 표준으로 삼으면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주님의 축복을 구할 수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주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가? 이 둘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행위는 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많은 비성경적인 일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나 한 것처럼 갖가지 음모와 얄팍한 꾀를 지혜인양 설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 와 보니 하나님이 참 불쌍한 분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토로했습니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성도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터져 나오고, 자신이 헌금이 없으면 교회가 운영되지 않을 것처럼 기세등등합니다. 어쩌다,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믿음없는 사람들의 도움을 구걸해서 교회를 운영하시게 되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그 돌들로 제단을 쌓는 성도”가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면 이미 주의 함께 하심이 떠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또 나무를 정돈하고 소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33) 엘리야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번제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다!란 본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철저히 성경적인 본을 따랐습니다. 레위기 1:6-8, [그는 또 그 번제 헌물의 가축의 가죽을 벗기고 여러 조각으로 자를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은 그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잇는 나무에 가지런히 놓으려니와] 엘리야는 모세의 율법에 정해진 대로 다 행했습니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소 한 마리를 잡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소의 각을 뜨고 나무를 정돈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매우 작은 차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과 거짓된 종의 차이는 이런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확연히 구별됩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과의 차이도 생활 가운데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확연히 차이를 냅니다. 우리는 침례냐 세례냐? 여자 집사를 두느냐 마느냐? 절기를 지키느냐 마느냐? 여자가 머리에 두건을 쓰느냐 마느냐? 성찬식을 포도주로 하느냐? 포도즙(쥬스)로 하느냐? 이런 문제는 매우 작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문제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과 종교적인 크리스천들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런 작고 사소한 것에서 주님의 기록된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려는 자세가 바로 성경적인 믿음이요, 참된 성도의 자세입니다. “나무를 정돈하고 소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나무 위에 놓고...”란 말씀을 볼 때, 그의 침착하고도 정확하게, 서두름 없이 주님의 일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종들이 본받아야 할 성품입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빈틈없이, 정확하게 일하는 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요, 태도여야 합니다. 예레미야 48:10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않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께 하듯 해야 하며,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정확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 차이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큰 일에서 차이를 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많은 것에도 신실하고 지극히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많은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주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영혼의 복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4-3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이르되, 두 번째 그리하라, 하니 그들이 두 번째 그리하고 또 이르되, 세 번째 그리하라, 하니 그들이 세 번째 그리하매 물이 제단 주위에 흐르더라. 그가 도랑에도 물을 가득 채웠더라.](34-35) 돌을 열 두개 취했듯이 물도 열두 동이를 갖다 부었습니다. 전혀 서두름이 없이 조용하고도 침착하게, 아무 혼란 없이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엘리야는 혹시 실패할 것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점점 더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주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려워 보이는 일일수록 주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날 것입니다. 열두 동이나 물을 부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적으로 불을 붙이려고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 앞에 서는 전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려워서 못하실 일이 없고,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에 대언자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소서.]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동일하게 희생제가 행해지는 그 시각입니다. 엘리야는 홀로 이 곳에서 희생물을 드리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드리는 유다의 형제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원리를 통해 주일에, 수요 기도 모임에 기타 공적인 예배시간과 기도 시간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홀로 병원에 있다 하더라도 그 시각에 다른 형제, 자매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을 체결하셨고, 이삭과 야곱을 통해 언약을 더욱 확고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서 축복하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백성들은 지금 한 동안 잊어버린 우리 조상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역사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매 순간 언약의 피를 통해 저희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바로 영원한 언약의 피란 사실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소서.] 엘리야가 자신의 사욕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요한복음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은 지상 생애 동안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참된 종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님들만 있고, 주님의 종들은 없는 시대같아 보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종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는 매우 간략하였지만 강력했고,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했습니다. 이는 복음 사역자들의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주의 종들은 자신이 주의 종이란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주의 종인 것을 알게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나 권사라고 떠들고 다님으로써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주께 헌신되고, 영혼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으로써, 지칠 줄 모르는 불타는 열심과 자기 부인, 자기 희생, 다른 이들의 믿음과 덕을 세워주고, 사역에 대해 주님의 인치심으로써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었어~... 놀랍네, 오늘 처음 알았어.”란 말을 듣는다면 곤란할 것입니다. “내가 주의 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란 것은 주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자요, 복종의 위치를 지키는 자요, 주인의 명령을 받는 자요, 자기의 뜻을 꺾는 자요,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 주인의 유익과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자란 신앙의 고백입니다. 자신이 주의 종이란 사실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구하는 것은 당연히 주님의 뜻에 합치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더불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주의 말씀대로 행한 결과임을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아합과 백성들은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바로 주님의 심판이요, 재앙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옵소서”할 정도로 신실하다면 강력한 기도의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말을 들으소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과 또 주께서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신 것을 알게 하소서, 하매](37) 이는 엘리야의 최고 소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마음속의 모든 소원을 다 쏟아내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이 백성이 주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아합 왕과 바알의 대언자들 모두 긴장 가운데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과연 불이 내려오는가? 모두 침묵의 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불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란 증거를 얻을 수 없으며, 엘리야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38). 엘리야의 짧은 기도가 끝나자 바로 하나님의 불이 내려왔습니다. 이는 엄청난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불입니다. 먼저 번제물을 태웠고,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이는 일상적인 불의 성격과는 정반대로 되는 것이며, 그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열두 개의 돌이 타고, 흙이 탔습니다.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여전히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불은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라.”(히12:29)는 말씀대로 죄악된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 희생물에 불이 임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이 희생물 위에서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불을 내리시지 않고, 제단 위의 희생물 위에 내리심으로 이들을 향한 진노를 대신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임한 결과입니다. 주의 불이 내려 온 것은 바로 희생물을 열납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온전히 대속했다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39)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 엎드려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앞에서 하늘의 불이 떨어지는 일생일대의 체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를 연발했습니다. 참된 신앙 고백은 외적인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 내적인 체험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 신앙 고백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후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듭니다. 하늘의 불이 죄인들에게 경이로움과 공포를 줄 수 있고, 죄를 자백하고 떨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혼을 회심시키는 거듭남은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믿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주요, 그분이 하나님이시로다! 고백하는 성도만이 참된 신앙 고백을 한 것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불을 10번이나 100번을 내렸다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시 배교해 버립니다. 그러나 불은 고사하고 어떤 표적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불 속에 던져지는 것도 기꺼이 감당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을 보지 않고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를 늘 외칩니다. 이 시간 다 같이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를 외쳐 보겠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대언자들을 붙잡되 한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백성들이 그들을 붙잡으니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내려가 거기서 죽이니라.](40) 엘리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의 대언자들을 모두 잡아죽이도록 했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죽이도록 한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신13:1-5, 18:20-22). 악에 대한 철저한 발본색원이 없으면 일은 재발됩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 엘리야가 너무 지나치고 잔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다고 자부하는 인본주의자들과 박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엘리야보다 사랑이 많은 성도들이 가끔 불평을 토로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과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배교를 선동하고,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우상 숭배자들은 철저히 처단해야 합니다. 지금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신정 국가가 아니며, 이런 자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에 스며든 악을 남김없이 처단하고 우리 마음 가운데 주님 외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모든 죄를 남김없이 한 가지도 남기지 말고 회개하고,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거룩하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먼저 주의 제단을 보수하라.
2. 성경의 본을 따라, 말씀이 정한대로 주님께 예배하라.
3. 주의 종과 죄의 종은 작은 것에서 차이를 냅니다.
4. 언약에 기초해서 기도하라.
5. 주의 불을 보는 것보다 주의 말씀이 불같이 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6. 주의 종인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라.
7.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엘리야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십육계  (0) 2006.11.28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0) 2006.11.27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2)  (0) 2006.11.23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0) 2006.11.20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0) 2006.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