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할 것인가?(XIV)
말씀: 열왕기상 19:41-45
요절: 열왕기상 18:44
신약 성경에서 여러움에 처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성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첫 번째 방법은 ‘기도하라’입니다. 야고보 5:13a, 16b에 이르기를, [너희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효력이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고난을 이기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본으로 제시된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이미 엘리야의 사역을 통해 그가어떻게 기도하는가? 살펴보았지만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들의 지혜를 그치고, 잔머리를 굴리는 대신 기도에 전념한다면 삶은 훨씬 더 풍성해졌을 것입니다. 정말 사정이 절박하다면 주님께 기도하고 그 문제를 전적으로 맡겨 보십시오. 수 차례 기도의 방법과 응답받는 기도에 대해 설교하지만 성도들은 기도에 실패함으로 영적 빈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그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형식은 취하지만 참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필요를 구하지도 않고, 얻고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지 않음으로써 응답 받지 못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모하고 죽여서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둘째, 성도들이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자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차마 들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해(害)가 되는 지도 모르고 구하는 경우에도 허다합니다. 가장 흔히 하는 잘못된 기도는 현재 자신의 상태가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돌려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예레미야 5:25, [너희 불법들이 이런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들이 좋은 것들을 막아 너희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 애가 3:42, 44 [우리가 범죄하고 반역하였더니 주께서 용서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자신을 가리사 우리의 기도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시편 66:18, [내가 마음속으로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무턱대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간다고 다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받아 정결하게 되고, 말씀의 물로 씻은 바 된 후에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히10:22, 시119:9). 셋째는 성도들의 기도가 비성경적이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의 본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했는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 반대로 성도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기도한다면 기도는 100% 응답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주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내 안에 거하는 말씀이 없다면 기도의 응답은 요원한 일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마음속에 주야로 묵상하면 할수록 기도의 응답은 정확하고, 풍성해 집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 응답을 위해서라도 좀더 성경 읽는 시간과 묵상 시간을 늘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잔꾀를 부리지 마시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말씀을 붙들고 꾸준히 기도해 보십시오. 오늘 엘리야의 기도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깊이 주목하시고, 자신의 기도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이는 많은 빗소리가 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 주님은 비를 주관하십니다. 비만 아니라 바람과 우박, 눈과 서리 등 모든 자연 현상을 다 주관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자신이 지으신 자연 세계와 모든 피조물과의 적절한 관계인 것입니다. 하늘의 달과 별, 태양, 땅과 바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계 파괴를 걱정하는 환경 신학자들이나 오존층의 파괴, 온난화 현상, 지표면의 온도 상승, 해수면의 상승 등 별 걱정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의 마음에는 확실히 하나님이 없구나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해성과 지구가 충돌해서 망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지구는 그렇게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 야곱의 대환란을 거쳐, 천년 왕국이 건설된 다음 불로써 해체되고,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된다는 간략하고도 분명한 주님의 말씀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비가 언급된 창세기 7:4을 보십시오. [이는 이제 이레 후에 내가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땅위에 비가 오게 하여 내가 만든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멸할 것임이라.](창7:4). 주님은 단순한 일기 예보를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비를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에, 얼마동안, 얼마의 비를 내리실 것을 정하십니다. 시편 147:8에 이르기를, [그분께서는 하늘을 구름들로 덮으시고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들에 풀이 자라게 하시고](시147:8). 자연 세계는 모두 주님의 철저한 섭리와 돌보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욥기 28:26에 [그분께서 비를 위하여 법령을 정하시고 천둥이 칠 때 번개를 위하여 길들을 정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자연을 통해 성경을 배우십시오. 내리는 비와 이슬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수도의 물을 틀 때마다 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방인들의 헛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비는 이 땅에 사람들이 행하는 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대로 행할 때 비가 제 때에 정확히 내리고, 범죄하면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징계하시고 그들의 죄를 회개토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26:3-4, [너희가 내 법규 안에서 걷고 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적당한 때에 비를 주리니 땅을 그 소출을 내고 밭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을 것이요](레26:4). 이스라엘은 저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신실한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은행의 많은 잔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신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저수지에 물이 가득해도 주님이 마르게 하시면 그 물은 어느덧 바닥이 나 버리고 맙니다. 이사야 5:6b, [또 내가 구름들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이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셨는데 어떤 천문학자나 기상 과학자들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공비를 만들어서 비를 내리게 만든다고 자신하지만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것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구해야 할 때 자신의 수단 방법을 다 써보는 것은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번 해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역이며, 죄입니다. 스가랴10:1, [너희는 늦은 비가 내리는 때에 주께 비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빛나는 구름들을 일으키사 사람들에게 소낙비를 주시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들의 풀을 주시리니](슥10:1). 도시에 살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지 않는 사람들은 비의 소중함보다 돈의 소중함에 더 목말라 있습니다. 도시 문명은 그만큼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접할 기회가 적어집니다. 처음으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카인(가인)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은혜의 비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이라면 주님께 초목에게 비를 주시듯이 자신의 경제 사정을 주장해 주시도록 맡겨 보십시오. 마음이 주를 떠난 사람, 마음에 다양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많은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읽는 것, 성도들을 서로 섬기는 것 등의 기본적인 것조차 내 팽개치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건성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무슨 교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오직 쓰라린 체험과 반복적인 실패, 왕창 망하는 것만이 유일한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은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3년 6개월의 기근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던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을 통해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나이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나이다.]를 고백하고, 엘리야의 말대로 자신들 가운데 있던 바알의 대언자 450명을 한명도 남김없이 다 죽여 악을 제거했을 때 주님은 많은 비를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이는 많은 빗소리가 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41) 은혜의 단비가 필요하십니까? 지금까지 뭔가 계속 뒤틀리기만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회개하고 악을 제거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이 순간에 엘리야의 입에서 떨어지는 한 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왕을 죽여라”고 한 마디 했다면 그 역시 그 자리에서 살아 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왕이라도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기에 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아합은 먹고 마시는 일 외에 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매우 비참한 상황입니다. 옷을 찢고 회개하라거나, 주님을 찬양하라거나, 감사의 제물을 드리라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잔치상으로 가서 먹고 마시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는 그의 영적 상태는 얼마나 참담합니까? 하나님도 엘리야도 아합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아합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상태에서도 먹고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까?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족스런 바보가 되는 것이 불만족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먹고 살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개의치 않고 행동하고 또 그들 자신의 영원한 운명, 저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 돼지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이는 많은 빗소리가 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41) 엘리야는 저 멀리서 소낙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신다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18:1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18:1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땅위에 내리리라, 하시니라.] 믿음은 멀리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만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 지금 갈멜산의 누구도 많은 빗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아합은 물론이거나 백성들 중 단 한명도 많은 빗소리는 고사하고 하늘의 구름 한 점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소음을 듣는 것을 중단하고 주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고, 말씀의 묵상과 기도에 더 전념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예민한 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겉 사람의 귀가 아니라 속 사람의 귀를 통해서 저 하늘에서 발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아합이 먹고 마시러 가는 사이,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참된 하나님의 종들과의 차이입니다. 일하는 시간보다 그 여가 시간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눈여겨 보면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으로 보일 수 있고, 종교인들이 고상해 보일 수 있어도 삶의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것들이 다 드러날 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무늬만 기독교인인 회칠한 무덤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는 잔치상에 있을 동안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주님의 은밀한 날개 아래 거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과 함께 올라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노고와 그동안 겪은 일들을 간증하며, 축하나 받고 있다면 비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자신의 공적인 사역이 끝난 후 오히려 백성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끝내고, 성도들이 모두 떠난 후 홀로 있고 싶어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축복해 주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훌륭한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 행사나 영적인 일에 동참한 후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42). 야고보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18, [그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는 기도함으로 하늘을 닫았던 것처럼, 다시 기도함으로 하늘을 열어 비를 내리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이 신약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엘리야의 기도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미 몇 차례 기도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너무나 실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도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성도 모두는 기도에 전심 전력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엘리야는 무리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이 사역했던 장소에서 더 높은 곳, 아무도 없는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 세상의 소란과 일들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의 꼭대기 대신 골방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문을 닫는데 실패하면 여러분의 기도는 실패합니다. 제발 기도에 전력하십시오. 부부는 함께 기도하기 위해 맺어진 인연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형제, 자매들은 함께 기도하도록 맺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은 함께 기도하는데도 동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거실, 안방, 부엌, 욕실을 기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십시오. 장소가 없으면 차 안에서라도 문을 닫아 걸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침실과 거실이 영적인 유해 환경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엘리야가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42). 둘째, 엘리야의 기도 자세를 보십시오. 얼마전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백향목처럼 우뚝 솟아 있던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풀잎처럼 구부려져 있습니다. 대적들 앞에서 사자처럼 담대했던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우고 겸손히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종들은 모두 이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재같은 자”임을 고백하며 기도했습니다. 창세기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제 티끌과 재 같은 내가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스랍들도 하나님의 존전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사6:2). 기도하기에 앞서 자신을 낮추는 일이야말로 기도의 응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셋째, 엘리야의 기도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기도를 중단해도 되는 줄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는 그 뜻을 계시받아 기도함으로써 실현됩니다. 성경에는 무려 800 여 가지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약속들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목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너무 오용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보면 천박스러움을 지나 신성 모독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그럴 때는 더욱 황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방해받기 일쑤였고, 성전 재건은 몇 년씩이나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란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의 뜻이기에 만사 형통이 아니라, 더욱 방해를 받고,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지체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안되는 경우에 우리는 더욱 힘을 내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37a,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의 집이 이것을 위해 내게 구하여 나로 하여금 자기들을 위해 이 일들을 행하게 하여야 하리라. ...]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들을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배우고, 체험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조차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2:8,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로 주리라.] 엘리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엘리야의 기도는 구체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두루뭉실하고, 추상적이고, 지나치게 영적입니다.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기도가 아니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주시고...”식입니다. 물론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보다는 “수요 기도 모임에 나와서 기도하게 하옵시고, 주일 성경 공부와 예배, 오후까지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졸지 않게 하시고, 제대로 듣게 하시고, 잊어 먹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비를 구하라”(슥10:1)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기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지 놀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살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5,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친구가 있는데 한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여 내게 빵 세 개를 빌려다오.] 그냥 먹을 것을 달라가 아니라 빵 세 덩어리(서너개가 아님)라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다섯째, 엘리야의 기도는 열렬하고 뜨거웠습니다. 성경은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칠 때 crying and pra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필요를 구할 때, 얻어 맞어 가면서 떼를 쓰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식만 취한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야곱이 밤새 주의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구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열렬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7,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
43절을 보십시오.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응답 여부를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마치 문을 두드리는 아이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아무도 없군! 하고 가 버리는 경우처럼 기도만 하고는 자신이 무엇을 기도했는지 조차 잊어 버리지는 않습니까? 기도한 다음에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4:2, [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watch)](골4:2). 무엇을 구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 주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주려고 하겠습니까?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43) 엘리야의 기도는 인내의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면서 인내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말씀도 있고, 기도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도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환은 [아무 것도 없나이다.]를 여섯 번이나 반복했고, 엘리야는 일곱 번이나 [다시 가라] 말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세 번 한 후에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창세기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를 가게 하라, 하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야곱은 구한 것을 얻기까지 매달렸던 것입니다. 시편 40:1 [내가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 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사 땅에서 찬양이 되게 하시기까지 안식하시지 못하게 할지니라.](사62:7). 이사야 30:18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44절을 보십시오.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44). 3년 반동안 청명하던 하늘에 작은 구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즉시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즉시 왕에게 가서 빨리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마차가 돌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는 작은 구름 하나에 벌써 미리 일어날 일들을 대비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전교인이 모여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철야 기도회를 하면서도 우산을 가지고 온 사람은 어린 소년 한 명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서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그 동안에 구름과 바람으로 인해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리므로 아합이 수레를 타고 예스르엘로 가니](45). 왕은 엘리야의 전갈을 듣고 즉시 움직였습니다. 좀처럼 하나님의 종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아합이 이 일에만큼은 즉시 순종했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주는 영적인 충고나 주의 말씀보다 세속적인 충고를 훨씬 잘 받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설교와 성경공부보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정비사들이 있어서 business에 도움을 줄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설교보다 설교가 끝난 후에 나누는 잡담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어떻게 돈을 버는가?에 대한 이야기에 훨씬 더 귀가 쏠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아합 왕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불만이 생겨 떠날 때면, 무슨 교회가 말씀은 없고 꼭 사교 클럽 같애! 욕을 합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체험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온 것에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거나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머리로는 믿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마음으로는 거부하는 자들, 신앙 생활을 잘 해야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인정은 하면서도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적인 교훈과 충고, 진리의 말씀보다 세상적인 것들에 더 민감하지 않습니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너무 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 시간 저희들에게 회개의 영을 뷰어 주셔서 마음을 돌이키고, 죄를 씻어내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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