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먹으라(XVI)
말씀: 열왕기상 19:5-6
요절: 열왕기상 19:5,6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낀 주의 군사가 주의 사역을 하다 주님의 명령 없이 전선을 이탈한 탈영병, 영적 도망병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패배를 모르는 위대한 주의 종이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450명의 바알의 대언자들을 죽였고, 3년 반의 기근을 종결시켰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위협에 정신없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남 왕국 유다의 브엘세바에 도착한 후에 다시 하룻길을 더 들어가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서 쓰러졌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취해 가 달라는 탄원을 한 후에 지쳐 잠을 잤습니다. 에서를 두려워해 도망을 가던 야곱은 어떤 곳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이 바로 벧엘입니다. 창세기 28:10-1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더니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매 거기서 온 밤을 보내려고 그곳의 돌들을 취하여 베개로 삼고 그곳에서 누워 자니라.](창28:10-11). 도망하며, 야숙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야곱을 만나 주셨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도망하는 자신들의 종들의 발걸음을 다 살피시고, 함께 동행하십니다. 도망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분명히 그들의 안위를 보살피시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는 주님의 명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어디에 가시든지 거기에 동행하셨습니다. 그는 뱃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고,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누워 잠을 잤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이 아닌 자기 길을 간다해도 주님은 그 발 걸음을 재시고, 때로는 차꼬에 채우시고, 때로는 돌이키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임마누엘(Immanuel)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고향 갈릴리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거기에 가 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불신과 절망 가운데 낙향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 곁에 오셔서 그들과 말씀하셨으며,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낙담하고 도망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은 찾아오시고, 보살피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엘리야를 어떻게 대하실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자더니, 보라, 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하므로](5). 이는 마치 병든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그의 종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시편 103:13,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엘리야가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잘 때, 주님은 천사를 통해 친히 그를 보살피시고, 육신의 힘을 북돋워 주셨습니다. 날카로운 책망과 꾸중대신 주님은 위로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 저희 성도들이 성경을 볼 때, 모든 단어 하나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교훈을 받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휘는 한 단어도 깊은 의미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단어 하나 하나가 다 우리의 영적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잤나보다”, “곤해서 잤겠지”라는 사실에서 그치지 말고,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잠을 주시는 분이란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과 공기, 태양과 비와 같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 잠을 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잠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못지 않게 주님의 귀한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시편 127:2,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생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매일 밤, 잠을 자면서도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잠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매일 밤, 아니면 일상 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너무 피곤하여 잠을 잘 수 없는 경험이 없습니까? 너무 걱정이 많아서 잠을 잘 수 없는 경험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잠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매일 밤 규칙적으로 자던 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며, 주님의 은혜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면제 없이 잠 못드는 사람들, 술이라도 한 잔 마셔야 잠드는 사람들, 불면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시편 77:4, [주께서 내 눈을 붙드사 깨어 있게 하시니 내가 심히 괴로워 말도 할 수 없나이다.] 주님은 지금 엘리야가 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예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거기서 하룻 길을 더 행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장 90마일이 넘는 길을 달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에 우리의 신체 구조, 리듬,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시편 103:14,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 성도들이 매일 자기 전, 자고 나서 주님이 주신 잠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 자는 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합리화하지 않기 바랍니다. 때로 성도들은 잠을 너무 사랑하여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을 자는 중에 도둑이 들고, 잠을 자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잠으로 인해 공부를 못하고, 잠으로 인해 약속 시간을 놓치고, 잠든 병사들로 인해 나라가 위태롭게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기도해야 할 때 잠을 자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자야 할 때 자는 것이 은혜이지 아무 때나 많이 자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잠언 19:15, [게으름은 깊은 잠에 빠지게 하나니 빈둥 거리는 혼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20:13, [잠을 사랑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가난하게 될까 함이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네가 빵으로 만족하리라.] 잠언 23:21, [이는 술주정뱅이나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며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누더기를 입을 것임이니라.]
잠자는 엘리야를 만지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71:9, [내가 늙을 때에 나를 내던지지 마시오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버리지 마소서]란 기도에 그대로 응답하시는 주님의 자애가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의 성령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자더니, 보라, [그때-then]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하므로](5).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주고, 때리고, 엄한 목소리로 책망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너무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 이는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은 주님의 존귀하고 높은 지혜에 대한 강조만이 아니라 지극한 은혜와 긍휼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입니다. 우리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뭔가를 받을 줄로 생각하며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할 때 낮추어 버리시는 주님의 역사와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진 것은 엘리야가 영적 전투를 수행할 때나 믿음과 순종으로 일을 잘 할 때가 아니라 도망쳐서 잠을 잘 때란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장면입니다. 엘리야가 먹을 것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먹을 것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 달라는 비성경적이고, 육신적이며, 악한 기도를 드렸을 때였습니다. 이는 마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이미 조반을 준비해 두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불신과 두려움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추상같은 엄한 목소리, 불꽃같은 눈동자로 째려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십시오. 9절,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니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 12절, [와서 먹으라.](12). 이것이 바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엘리야나 제자들은 심판을 기다렸지만 주님은 은혜를 주셨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이제 끝났다, 주님의 진노와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편 103:10,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십니까?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자더니, 보라, [그때-then]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하므로](5). 주님은 엘리야를 돕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짐승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를 직접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벧전5:10). 자신의 종을 은혜로 대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은혜란 우리가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어떠하심에 관계없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비록 영적 도망병의 신세이며, 믿음으로 행치 않아 사서 고생하는 처지에 있다해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사람을 섬기게 하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히브리서 11:14절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14). 오늘날과 같은 불신의 시대에 천사의 존재나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천사들은 언제나 주의 종들을 돌보십니다. 시편 34:7,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주의 종들을 구해내고, 돌본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돔 성에서 롯을 건져낸 것은 천사였습니다(창19:15,16).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건져 낸 것도 천사였습니다(단6:22).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풀어 주고, 옥문이 저절로 열리게 한 것도 천사였습니다(행12:7,10). 바울에게 그와 함께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죽지 않으리라 확신시켜 준 것도 천사였습니다(행27:23). 지금 교회 시대에 구약에서처럼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천사의 활동이 없어지거나, 천사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천사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의 후사들을 위한 섬기는 종으로서의 천사는 분명히 있으며,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여러분에게 사심없이 도와주는 손길이 천사의 손길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천사는 때로 손님으로, 나그네로 여러분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는 이로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이로써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바라본즉, 보라, 머리 밑에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있으므로 그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6). 엘리야가 눈을 떠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이었습니다. 전에도 기적적으로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 먹은 적이 있지만 오늘은 천사가 직접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믿음이 충만할 때,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술술 풀려 갈 때 주님의 사랑을 믿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피해 광야에 도망쳐 온 도망자에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일어나 먹으라”는 말 외에 일체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그의 잘못에 대해서 꾸중하지 않았고, 죄를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엘리야를 사랑하셨고, 돌보셨습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78:19,20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상을 준비할 수 있으리요? 하였거니와 보라, 그분께서 반석을 치시매 물들이 쏟아졌고 시냇물이 흘러 넘쳤도다. 또한 그들이, 그분이 빵도 줄 수 있으리요?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고기도 마련할 수 있으리요? 하니](시78:19,20).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의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근 가운데 있든, 전쟁 가운데 있든,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든 주님께서 마련하신 빵과 물 한 병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바라본즉, 보라, 머리 밑에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있으므로 그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6).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교훈은 천사의 행동입니다. 하늘의 천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비천한 피조물을 위해 숯불에 빵을 굽고, 물을 한 병 준비하는 serving을 감당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 특히 자신보다 못한 자들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비롯하여 모든 존귀한 자들은 섬김받기 보다 섬기려 하였고, 그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죄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에 전혀 불평이 없었다면 우리가 같은 성도들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여 섬기는 일에 일말의 불평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음은 엘리야의 행동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가 눈을 떠서 천사와 그가 준비해 준 빵과 물을 마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찬양하고 경배하고, 회개의 눈물을 쏟으며 주님께 감사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압도되고, 은혜의 풍성함에 목이 매어 눈물로 인해 빵이 넘어 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바라본즉, 보라, 머리 밑에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있으므로 그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6).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워 버렸습니다. 잘못한 아이를 용서하고 밥을 챙겨 주어도 투정하며 먹고는 여전히 성질을 내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신 뒤에는 다시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태도, 기운을 회복시켜 준데 대해서 ‘생명을 취해 가랬더니...웬 빵과 물’ 하는 식으로 여전히 쓴 뿌리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께 역정을 내며, 투정을 부리고, 반항을 하는 성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은혜에서 떨어지고, 주님이 정하신 길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는 어떤 믿음도 감사도 찬양도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은혜의 성령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어떤 은혜와 긍휼도 그대로 내게 전달되지 않으며, 그대로 반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엘리야가 몸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적인 공급이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주는 빵과 물에도 다시 드러누워 자는 것이 은혜에서 멀어진 성도의 태도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는 이상 어떤 소망도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깊이 들어와 혼을 자각하고 깨우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 매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눈으로 보면서도 정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악한 종자(種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지 않을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이 시험만 무사히 합격하면 평생 주님을 잘 섬기겠다고 약속하지만 막상 합격한 후에는 타락합니다. 파산 직전에 몰린 사람들은 이 위기만 넘기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기도하지만 막상 재기한 후에는 어떻게 삽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만큼 넉넉하게 해 주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까? 타락한 인간 본성은 언제나 동일하며,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라고 일반 교회 다니는 성도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시편 49:20, [존귀함 중에 거하는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여러분이 바른 말씀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육신적인 교회 신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6). 엘리야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믿음을 통해 우리도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동시에 엘리야의 패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잠언 27:19, [물에 비추면 얼굴이 얼굴과 일치하는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과 일치하느니라.] 남의 인생, 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인생을 배웁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신앙이다.’란 각본없는 삶의 진솔한 모습을 성경은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깊이 투영해 보며, 교훈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불신과 두려움에 굴복해 버린 뒤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것으로 바로 “영혼의 무감각”입니다. 마음이 믿음에서 떨어지고, 그 안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됩니다. 주님의 주신 선하심과 은혜에도 감사할 줄 모르게 되고, 다 소비해 버립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에 대해 다시 누워 버렸습니다. 이는 타락한 영혼들이 예외 없이 겪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19장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한 후에 격노한 이세벨의 저주와 보복의 맹세를 듣습니다. 그는 이 때 자신의 처지를 주님께 아뢰고 응답을 구하는 대신 자기의 의무를 버리고 남 왕국의 브엘세바로 도망가 버렸습니다(3). 엘리야는 주를 위하여, 또는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갔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나 백성의 영적 유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인해 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을 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듯이,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25,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찾을 것임이라.]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어리석음에 메이게 됩니다.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갔는데 유다의 왕은 아합의 사위였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채 자신의 지혜로 사는 사람, 자기 명철로 꾀를 부리는 사람은 건전한 상식조차 활용하지 못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하룻길 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있는 탈출구는 점점 더 어렵고 힘든 막다른 골목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들의 행로입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드디어 기도를 드렸는데,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은 언제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먼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자기의 지혜를 그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피로한 심신에 잠을 주셨습니다. 또 천사를 보내어 육체에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구하지도 않았지만 주님은 그 필요를 채워 주시는 신실함과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시중을 들었지만 그에 대한 엘리야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의의 길, 생명의 길을 벗어나 버린 성도들,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성도들에게 주님이 질책하는 대신 부어주시는 물질적 축복과 공급이 그 사람을 결코 회심시키거나 돌이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타락한 상태에서 받는 은혜와 축복은 아무런 감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법입니다. 마음의 회개가 없는 상태에서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는 그 사람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엄숙한 교훈을 또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은혜가 헛되이 버려지고, 무시되고, 왜곡되어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시 드러눕는 엘리야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의무나, 지금까지 저지른 불신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하나님의 종, 은혜에 냉담한 하나님의 종을 주님은 어떻게 다루셨는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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