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XVII)
말씀: 열왕기상 19:7-13
요절: 열왕기상 19:13
하나님의 사역에 신실하였고, 한 순간도 그분의 말씀에서 떠나 보지 않았던 충성스런 주의 사역자가 더 이상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대신 도망쳐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은혜의 손길로 어루만지실 때 회개와 감사 대신 냉담하게 돌아누워 버렸습니다. 이는 자신의 문제만이 크게 보이고, 모든 것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일 때 성도들에게 흔히 찾아오는 영적인 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주님은 여전히 은혜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귀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신앙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이런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청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항해하다 파선한 배요, 깨어진 그릇과 같습니다. 깨어진 그릇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습니다. 깨어진 그릇은 아름답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깨어진 그릇의 파편 조각들을 어루만지시는 도공처럼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네게 머니라, 하므로](7). 주님은 한 번 더 엘리야를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갈 길이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갈 길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있는 그곳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갈구하는 성도가 갈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겠습니까? 갈보리의 언덕 십자가가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 라고 울었다면, 갈보리의 십자가 아래서 “오 주여, 주의 은혜가 내게 충분하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감격의 울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믿음이 적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갈구하는 기도를 드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새 힘을 돋우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지쳐 쓰러져 있는 성도들을 찾아오시고, 어루만지시고, 또 다시 어루만지시는 자애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2:4 [이는 그분께서 고난받는 자의 고난을 멸시하거나 몹시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음이로다.] 주님은 곤비한 자, 지쳐 쓰러진 자들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주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네게 머니라, 하므로](7). 주님은 한 번 더 오셨습니다. 한 번 말씀하신 것으로도 충분하신 주님께서 두 번째 오셔서 어루만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듣기에 둔한 귀,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주님은 두 번 찾아오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시편62:11,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 베드로는 두 번째 닭 울음 소리가 났을 때 주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막14:72). 사도가 된 이후에도 그는 두 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10:15, [그 음성이 다시 두 번째 말하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반복적인 교훈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한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완악하고도 더딘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한번 더 말해야 했습니다. 빌립보서 4:4,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선배 목회자들이 제게 매주 다른 것,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라는 권면을 했습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5:12a, [이는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하며, 거기서 매일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네게 머니라, 하므로](7). 일어나 먹으라. 이는 주님이 먼저 음식을 마련해 놓으셨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마련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먹으면 됩니다. 이는 구원의 방법이요, 사역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어나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여러분은 일어나 기도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은혜로이 준비하신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 누리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들, 하늘의 영적인 모든 복을 믿음으로 취하시면 됩니다. 사역을 한 후에 먹는 것이 아니라 먼저 먹은 다음에 사역을 합니다. 일을 한 후에 안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취한 후에 일을 합니다. 충분한 영적 양식을 취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사역은 너무나 힘들고, 그 길은 너무나 멀게만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 영적 양식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하루를 살아가기에는 24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밤낮 사십 일을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8). 이 구절을 읽는 회의론자들은 어떻게 엘리야가 한 번 먹은 음식으로 주야로 40일을 여행할 수 있었는가? 의심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한끼 먹은 음식으로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나, 40일을 견디게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더라도 40분을 견딜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주신 한 마디 말씀으로 40년의 신앙 생활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루를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간 호렙산은 모세가 주님을 만났던 곳이며,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던 곳입니다(신4:15). 엘리야는 왜, 무엇 때문에 호렙산으로 가고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역에 뜻을 이루지 못한 미완의 개혁자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 곳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말씀을 선포해도 씨가 먹혀들지 않을 때 대언자들이 찾아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호렙산이었습니다. 예레미야 9:2a, [오 내가 광야에서 여행자들이 묵을 곳을 얻어 내 백성들을 버려두고 떠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그들이 다 간음하는 자들이요, 반역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로다.] 엘리야는 임의대로 호렙산으로 갔다 할지라도 주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강의 물이 마음대로 흐르는 것 같아도 흐름이 있고, 물에는 순환로가 있는 것같이 주님의 종들의 발걸음 역시 그러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굴에 들어가 거기 거하더니,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하니](9). 40일간의 광야 길을 걸어 드디어 호렙산에 왔습니다. 유서 깊은 이 곳에서 그는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첫마디로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엘리야는 광야를 걸어오면서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었겠습니까? 호렙산의 동굴에 와서 기거하는 엘리야를 주님이 동굴로 찾아 오셨습니다.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하니](9). 주님은 엘리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엘리야야!” 이 부르심의 음성은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주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 에덴의 동산으로 오셔서, [아담아,...](창3:9)하고 부르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을 찾아 오셔서, [카인아...](창4:9)하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누워 자고 있는 사무엘을 찾아 오셔서, 몇 차례나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의 호수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요나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을 부를 때, [사울아, 사울아](행9:4)하고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엘리야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 음성은 책망이든지 사명이든지 간에 고귀한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런 부르심 가운데 대부분이 질문입니다. 주님이 부르시고 물으실 때,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하니](9). 주님은 전에도 몇 차례 엘리야에게 은밀히 말씀하시고, 사역을 주셨지만 이렇게 물으신 적은 처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리로 부르신 적이 없는데, 왜 여기에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주님의 명을 받아 한 가지씩 일을 해야 하는데 호렙산의 동굴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전쟁이 무서워 전방에서 탈영한 군인이 고향집의 헛간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엘리야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 하니](10). 엘리야는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왜 여기에 있는지를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쏟아낸다고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나 호렙산의 동굴에서나 주님을 만난 지금 이 시간이나 변함없는 한 가지가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10절 말씀입니다. 이 말은 엘리야의 심중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첫째,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내가 이토록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했는데 왜 이 모양 이꼴인가?하는 원망이 썩여 있습니다. 그의 말은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물음에 항상 하나님을 원망하는 답변을 토로해 냅니다. 아담도, 이브도, 가인도 모두 다 그러했습니다. 회개하기 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더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말함으로 자신을 높이고, 강조함으로 실패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열심히 이를 이루셨나이다”란 고백이 필요했습니다. 이사야 9:7c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라.] 물론 엘리야의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심이었지만, 자기 열심에 눈과 귀가 멀 때 주님의 열심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둘째,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고,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엘리야가 걱정하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주의 대언자들이 죽임을 당함으로 이스라엘에는 이제 더 이상 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율법이 다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주의 사역은 사람이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하십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으로만 하나님의 왕국은 이스라엘에서 영원히 끝장났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에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주의 대언자들이 모두 죽고, 자신도 죽고 없어진다 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가 없으면 이 세상에 참된 교회는 없는 줄 아는 사람들이나, 내가 없으면 이 세상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없는 줄로 아는 교만한 종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전에 어떤 형제님은, 얄팍한 기초 성경 공부 교재를 한 권 배우고 가르친 일천한 경험으로 이 세상에 자기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아는 목사님이 없는 줄로 생각했고, LA 지역에는 자기 외에 성경대로 믿는 신자가 없는 줄로 아는 영적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럭크만 박사의 주석서 몇 권 읽고 그것을 밑천으로 목회하고, 성경은 혼자 다 아는 척 설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2사도가 죽고, 그 이후의 속사도들, 교부들이 죽고, 믿음이 뛰어난 선배들이 다 죽어 없어 나가도 교회는 더욱더 강력하게, 생명력 있게 역사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교회사에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습니다. 셋째,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자기 도취에 빠진 착각입니다. 후에 나오지만 엘리사도 있습니다. 오바댜도 있습니다. 주님은 7천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엘리야의 영적 망상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헌신과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했기에 자기 혼자만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인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이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신자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지나친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오직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주의”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교단은 다 썩었고, 다른 형제들은 다 가짜고, 다른 교회는 다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대언자가 되게 하라’고 하심으로 엘리야의 말이 가당치도 않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지상에서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혼자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혼자만 남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6:32, [보라, 너희가 각각 자기 길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 둘 때가 오나니 과연 이제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넷째, 엘리야는 ‘그들이 내 생명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불신과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외에 하나님의 종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믿음으로 ‘저의 생명은 주님의 품에 있습니다. 이세벨이 저를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장면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란 신앙적 고백 대신 어찌하여 하나 남은 나마저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하시나이까?란 논조가 깔려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능력의 주님에 대한 믿음이 수증기처럼 사라져 버렸음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호렙산의 굴에서 행해진 주님과 엘리야의 대화는 짧지만 심중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대화였습니다. 엘리야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앞으로 나아가 주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보라, 주께서 지나가시는데 주 앞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지진이 있은 뒤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이 있은 뒤에 고요한 작은 소리가 있으므로](11-12). 동굴에서 나와서 주 앞에서 산에 서도록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하여 온 이스라엘이 호렙 산에 도착했을 때, 주님은 불 가운데서 내려 오셨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으며, 우레와 번개가 임하였습니다(출19:16,18).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 앞에서 산을 가르고 바위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고, 땅을 흔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셨고,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반복적으로 세 번이나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불을 내리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땅을 가르시고, 무서운 바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수여하실 때의 주 하나님의 모습을 전형적인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18,22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수 있는 산도 아니요, 불이 붙는 산도 아니요, 깜깜한 어둠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하시는 음성도 아니라. 그 음성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마시기를 간청하였으니,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엘리야는 율법을 수여받은 그 산에서 출애굽기의 그 모습 속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접한 하나님은 신약에 계시된 살아 계신 말씀이신 “고요한 작은 소리”(세미한 음성), 즉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극적인 하나님, 기적을 일으키시고, 불을 내리시고, 하늘을 열고 닫으시는 하나님, 바알의 대언자들을 한 순간에 다 때려잡는 그런 사역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단번에 이루어 보고자 갈구했던 대언자였습니다. 그의 기질은 불과 같았고, 강한 바람과 같았고, 땅을 흔드는 지진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엘리야에게 보여 준 것은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지진도, 강한 바람도, 불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소리없는 조용한 빛으로 임하셨고, 조용히 마음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의 불을 내렸지만 아합이나 백성들은 아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고요한 작은 소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영혼을 구원하며, 새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불은 우리 교회에나 각 성도들에게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고요한 작은 소리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세미한 음성보다 강한 불과 바람을 원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골방에 들어가서 아니면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십시오. 한 권의 성경과 기도하는 두 손만 있으면 언제나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시끄러우면 절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이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의 어귀에 서매, 보라,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하니] 엘리야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있을 때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고요한 작은 소리]에는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의 어귀에 섰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존전과 임재 앞에 죄인된 사람은 얼굴을 가릴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주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가렸습니다. 말씀을 통해 임하는 주님의 영광은 불이나 바람이나 지진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엘리야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새겨 두어야할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할 때 표적이나 강한 체험이나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짜릿한 흥분을 원합니다. 아니면 꿈이나 특별한 환상이라도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 영혼의 깊은 곳에 조용히 스며드는 확신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자신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 받고 싶어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더러운 본성과 육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보여 주심으로 내가 죄인 중의 우두머리란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자연을 통한 이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고요한 작은 소리로 말씀하심으로 성령의 역사 역시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게 임한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이적이나 표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란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고요한 작은 음성이 주는 또 하나의 영적 진리는 주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우리는 밤에 내리는 이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자라고,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조용하게 일하십니다. 그러나 이슬은 내리고, 나무와 풀은 자랍니다. 주님의 은혜의 역사도 동일합니다. 주님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눈에 띄지 않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흥분과 인기만 노리고 시끄럽게 일하는 풍조가 난무하는 것은 주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엘리야에게 임한 주님의 고요한 작은 소리는 이 시대의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나 일꾼들에게 큰 힘을 줍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교인의 수는 줄어들고, 설교는 먹혀들지 않고, 성도들은 성장이 없을 때,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회의가 찾아 듭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엘리야가 거두지 못한 사역을 엘리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만 묵묵히 감당한다면 주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완수해 나가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답변하십시오.
2. 주님의 “고요한 작은 소리”(세미한 음성)를 들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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