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XIX)

말씀: 열왕기상 20:1-43
요절: 열왕기상 20:13,28  


열왕기상 20장에는 대언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디론가 잠적했고, 시리아의 벤하닷 왕과 이스라엘의 왕 아합 간에 두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20:1에 따르면 시리아의 왕 벤하닷은 무려 32명의 왕과 연합 작전을 펴서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의 모든 국가들이 연합해서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다국적 군사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존재했습니다. 20:3을 보십시오. [네 금은은 내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 곧 매우 잘생긴 자들도 내 것이니라, 하매](20:3). 이는 공물을 요구하는 동시에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합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구나!! 실제로 이스라엘은 32개 왕들의 연합군을 맞아 싸울 수 없었습니다. 아합은 이미 전쟁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4,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대로 나와 내 모든 것은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4). [이에 이스라엘 왕이 그 땅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너희는 이 사람이 화를 끼치려는 줄을 보고 주목하라. 이는 그가 내 아내들과 자녀들과 금은은 취하려고 사람을 내게 보내었으나 내가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였음이라, 하니](7). 이는 세속사가들이 보는 것처럼 단순히 군사력의 문제나 외교력의 부재, 경제적 빈곤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가 아닙니다. 이 전쟁은 주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조차 포기한 이 전쟁을 역전시킨 것은 다름아닌 한명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보라, 한 대언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와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이 날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내가 주(LORD)인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나이다.](20:13). 주님은 전사이시며, 모든 전쟁은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주님은 아합을 멸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벤하닷을 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는 아직 심판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이 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벤하닷이 아니라 하사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가 아닌 다른 대언자 하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 땅에 7,000명의 자기 종을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3년반의 기근을 통해, 갈멜산의 불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아합에게 주님은 전쟁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주 하나님을 알라]는 것은 주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표적과 이적을 보이시고, 안식일을 주시고, 여러 가지 율법을 통해 보이시고자 했던 한 가지는 이런 일을 통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것을 알라]였습니다. 몇 마디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 출애굽기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속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또 편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속하며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 곧 이집트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자인 줄 너희가 알리라.](출6:6-7). 표적에는 이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바론 이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에도 이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간략하고도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 안에 새기시기 위함입니다.

? 출애굽기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는 것도 들으십니다. 우리의 소원, 우리의 기도, 우리의 불평에 대해 주님이 응답하시는 이유 역시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의 주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요, 근본입니다. 아직 나의 구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누구인지 고백하지 못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십시오.

? 에스겔 20:5, [또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전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의 집 씨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려 주었고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르기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겔20:5). 출애굽기에 기록된 모든 주님의 역사의 목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집트 사람들이든 간에 그 역사를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 역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참 신(神)은 주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란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신교와 우상 숭배, 미신과 점성술, 점과 마술, 일월성신에게 절을 하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시며, 장차 오실 심판자란 사실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과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전파되고, 증거될 때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에는 사용 목적이 있고, 만든 이유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은 이유는 증거와 증언을 통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 에스겔 20:20,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노라.](겔20:20). 주님께서 안식일을 표적으로 주신 이유 역시 주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매주 쉬는 안식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세계의 어느 민족과도 완전히 구별되는 독특한 백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의 첫날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세상과 완전히 구분됩니다. 교인, 크리스찬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주의 첫날에 교회 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만약 주의 첫날에 교회를 가지 않고 낚시를 가든지 등산을 간다면 세상은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감사 기도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표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란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옴으로써 내가 얼마나 거룩한 성도인가를 세상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말씀과 기도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육신적 쾌락과 쉼보다 영적인 것을 소중히 함으로 주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화장을 하지 않고, 금이나 은으로 치장하지 않고, 겉치레에 정신을 쏟아 붓지 않고, 속 사람을 고요한 영으로 단장하는 것 역시 주님을 증거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유행가 대신 찬양을 부름으로써, 욕설과 험담대신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매순간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한다는 한마디 말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란 사실이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 에스겔 20:44, [오 너희 이스라엘의 집아, 내가 너희의 사악한 길과 너희의 부패한 행위대로 너희에게 행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할 때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것을 교회사에서는 흔히 영적 부흥의 시기라고 합니다. 죄악된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 대신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회개와 심령의 부흥을 일으키는 거룩한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우리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됩니다. 마을에 술집과 도박장, 여관으로 즐비하던 곳에 주님의 심판의 불이 임하는 대신 챨스 피니를 보내셔서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술집은 문을 닫았고, 도박장은 폐쇄되었습니다. 각종 오락장이 있던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시대 이 지역에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아합 왕은 바로 이 말씀대로 심판을 받는 대신 승리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왕상20:1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이 없습니다. 악인들은 죄악을 행하고 속히 심판이 집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없나보다! 잘못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반복된 죄악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이대로 살아도 되나 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지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죄악 가운데 계속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실 때, 그것은 질병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경제적 파산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주님의 이름, 성도들 사이에 잊혀진 주님의 영광을 주님은 친히 찾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회개해야 할 때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할 때 부흥의 불길을 붙여 주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의식과 신앙이 완전히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죄악에 대해 애통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고, 세상에 대해서 돌아서려는 마음이 없이 짝하여 살아왔던 죄악을 지금 바로 회개하십시오. 우리에게 영적 각성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도록 간절히 부르짖읍시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하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 에스겔 23:49, [그들이 너희의 음탕한 행위를 너희에게 보응하리니 너희가 너희 우상들을 위하던 죄들을 담당할 것이요,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23:49). 하나님은 아합에게 오래 참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처럼, 이세벨에게는 심판을 통해 주님이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세벨은 끝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 엘리야의 모든 예언대로 철저하게 심판이 집행되었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주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각성과 회개를 통한 부흥이 오지 않으면 완악함에 따른 심판이 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저는 평생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세벨 역시 평생동안 심판이나 징계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비참하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개들이 먹었고, 그의 두개골은 박살이 났습니다. 멸망은 결코 졸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결코 더디지 않습니다. 다행히 이 세상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여생을 마쳤다 해도 아직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남아 있습니다.

? 요엘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있어 주 너희 하나님이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 백성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천년왕국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지금 바로 현재 그대로 적용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이스라엘이 아닌 교회의 성도인 저와 여러분에게 곧 바로 가르쳤습니다. 고린도후서 6:16,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주님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시고, 우리 회중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거닐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떤 다른 이도 있을 수 없다는 성경적 진리를 확실히 압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알고, 자신 안에 거하시며 거니신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는 무슨 신비적 체험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 체험할 수 있는 영적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시되는 진리가 ‘내 안에 계신 주님’에 대한 진리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거하시고, 내 안에서 걸으시며, 내 안에서 일하시며,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며, 진리를 조명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깨닫게 해 주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오십시오. 열왕기상 20:14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대언자는 구체적으로 군사를 어떻게 뽑아서, 누가 싸우고 누가 지휘하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각 지방의 통치자의 청년들 230명과 7000명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항복 받을 일만 생각한 시리아의 벤하닷 왕과 32명의 왕은 먹고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16). 이 날 전쟁은 이미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이었고, 벤하닷 왕은 말을 타고 기병들과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렸다는 장면이 없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시리아 사람들을 쳐서 크게 살육하였더라.](21). 이는 역사에 남을 대승이었고, 민족을 구한 영웅적인 거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했다는 말 이외에는 해석이 불가능한 장면입니다. 아합 왕이 지혜가 무용이 출중한 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왕도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서 장인 이세벨의 아버지인 엣바알이 도와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할 때 ‘기적은 상식’이 됩니다.

한 번의 승리로 아합은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승리를 더 주셨습니다. 패했던 시리아의 벤하닷 왕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왔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왕에게 이르되, 그들의 신들은 산의 신들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로 하여금 평야에서 그들과 싸우게 하소서. 우리가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 것이니이다.](23). 시리아 왕의 신하들은 패전의 책임을 벗기 위해 다시 한번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 것이 산악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이스라엘의 신(神)을 산악신으로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사고와 인식의 폭은 항상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말씀을 통해 계시받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나름대로 정의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둔 하나님에 대한 자기 기준과 인식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하시고 계시며, 앞으로 무엇을 하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그분의 인격과 속성, 역사 방법과 원칙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의 계시와 조명을 제쳐두고 경험과 감각, 체험과 주워 들은 이야기, 나름대로의 자기 가치관에서 얻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마치 시리아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들’이라고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도 수를 세고 모두 참가하여 그들을 향해 나가서 그들 앞에 진을 치니 이스라엘은 두 무리의 작은 염소 새끼 떼와 같았으나 시리아 사람들은 그 지역에 가득하였더라.](27). 일단 군사의 수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리 예상한 전쟁이었고,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합에게 전쟁이 있을 것을 일러 주었지만 수적(數的) 열세는 확연히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에 항복하거나 협상하거나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죽거나 그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법이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아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리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무리를 다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8). 아합은 다시 한번 절대 열세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대언자가 하는 말만 믿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같이 악한 왕을 도우셔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심으로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LORD)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한 행위와 그들의 죄악대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결과입니다. 지금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조상 여로보암 때부터 치달아온 배교(背敎)의 철로를 걷어 버리고,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를 고백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3년 반동안의 긴긴 가뭄과 기근,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도 돌이키지 않았던 죄악을 지금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대군들과 두 번의 전쟁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이 아직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승리를 주심으로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주 여호와(LORD)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믿어야 했습니다.

아합은 수십 번의 반복적인 주님의 자기 계시와 주님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완악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들 역시 아합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설교를 통해서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사건을 통해서 징계를 해도 끝까지 버티며, 더 고집스럽게 집착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내 앞에 들이 닥칠 때에 비로소 하는 수 없이 교회 형제, 자매들의 도움에 의지합니다. 이 때는 이렇게 망하나 저렇게 망하나 별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면 잠시 후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맙니다.

지금 본문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지 않고서 친히 어떻게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다루시고 계시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도 없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대언자를 통해 유유자적하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과 임재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속에 각인하고 계십니다. 이 전쟁에서 바알의 대언자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가뭄의 때에나 갈멜산에서나 전쟁의 때에 바알은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우상에 지나지 않음이 거듭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를 통해 계속해서 “내가 주인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이 승리가 하나님의 역사요, 백성들이 바알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레동안 서로 마주 보며 진을 치니라. 일곱째 날에 싸움이 붙어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시리아 사람들의 보병 십만명을 죽이니라.](29). 이 정도 규모의 군대가 죽는 것은 현대전에서도 그 규모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룻 만에 10만명의 보병이 죽었다면 이는 단순히 전쟁의 차원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가 존립마저 위협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겼는지 졌는지 모를 그런 승리가 아니라 아주 끝장을 보았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자주 패했던 것이나,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에 승리를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주님이 거기에서 철저히 승리하도록 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주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도록 하십니다. 구원받기 전이나 구원받고 나서도 같은 문제로 자꾸 넘어지고,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들, 더 이상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로 인정하는 문제들을 주님을 통해 승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점차적으로 서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완벽하게 주어집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이 아벡으로 도망하여 도시로 들어갔더니 성벽이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져 내리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도시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쳐 죽이지 못한 병사들은 성벽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완벽한가를 보여 줍니다. 성벽이 무너진 것이 운(運)의 문제입니까? 시리아 병사들이 지지라도 운(運)이 따르지 않아서 전멸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아합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의 대언자의 말을 들었던 것 뿐입니다. 그가 일생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일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위대한 교훈을 줍니다. 성도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도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란 사실입니다. 지혜도 용기도 없는 불신자요, 악한 아합일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했을 때 그는 어느 위대한 장군이 거두었던 승리보다 더 위대한 승리를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아합의 보물들과 자식들까지 다 자기 것이라고 큰 소리쳤던 벤하닷 왕은 목숨을 건지려고 골방에 숨어들었습니다.

아합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굵은 베를 허리에 두르고 밧줄을 머리에 묶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나를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하니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니라.](32). 하나님께서 붙여 주셔서 철저히 멸한 시리아 군대를 아합은 오히려 ‘그는 내 형제니라.’(32)고 말합니다. 아합이 자기 의지대로 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과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할 시점에서 그는 전쟁의 불씨를 살려 준 것입니다. 당연히 찾아내어 죽여야 할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고 병거에 타게 하고 그와 언약을 맺고 보내 주었습니다(34). 그는 아직 피아(彼我)의 구분도 없고, 하나님의 편에 선 자와 하나님의 대적자들에 대한 구분도 없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산들의 신이라며 이기겠다고 전쟁을 걸어온 벤하닷을 풀어 줌으로 그는 스스로 재앙을 뿌렸습니다. 만약 아합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대언자에게 물어서 처리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42절을 보십시오. [그가 왕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아 주었은즉 네 생명이 그의 생명을 대신하고 네 백성이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매](42). 그는 결국 3년 후 라못 길르앗이란 곳에서 시리아의 병사가 쏜 활에 맞아 죽습니다. Finish your job!!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분명히 “이 큰 무리를 네 손에 념겨주노라”(34)고 말했음에도 그냥 살려서 보내 줌으로써 그는 최상에서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든지 주님의 손길에 힘입어 일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매우 작은 일 하나에도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완수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고백했듯이 우리의 삶 역시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합시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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