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에게 선포된 심판(XXI)
말씀: 열왕기상 21:17-29
요절: 열왕기상 21:20,21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른 후에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20장에는 엘리야가 아닌 다른 하나님의 대언자가 시리아 군대를 맞은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이 있고,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후에 주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 심판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아합은 지금 하나님이 자신과 이세벨이 행한 모든 악행을 감찰하셨다가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른 채 즐겁게 나봇에게 빼앗은 포도원을 취하려 내려갔습니다. 지금 이땅에는 많은 아합과 이세벨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속이고, 빼앗아 취하면서 건배를 들지만 그 때 주님은 그들을 향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자신들이 마음 먹은 무엇이나 할 수 있고, 자기들의 말이 곧 법인 줄로 생각했겠지만 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5:8, [만일 네가 어느 지방에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과 폭력으로 공의와 정의를 굽게 하는 것을 보거든 그 일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이는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으신 이가 이것을 주목하기 때문이니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느니라.](전5:8).
우리는 이 땅에서 무심코 행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분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들, 마음의 생각들, 의도까지도 다 살펴보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을 살펴보십니다. 기도하는 모습, 회개하는 모습, 성경을 읽는 모습, 일하는 모습들을 다 보십니다.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의 이름을 가리켜 나를 보시는 하나님, 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나도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은 도망하는 하갈을 살펴보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압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보셨습니다(출4:31). 욥은 [이는 그분께서 땅끝까지 살피시고 온 천하를 보시며](욥28:24)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살피신다는 사실을 마음 가운데 새길 때 악을 근절할 수 있으며,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됩니다. 시편33:13,14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바라보사 사람의 아들들을 다 살피시고 자신의 거하시는 곳에서부터 땅의 모든 거주민을 보시는도다.](시33:13-14). 아합과 같이 교만하고 저급한 인생들은 주님이 자신을 살펴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거나 무시합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주님이 오늘 아침 내가 머리를 감을 때 머리 가락이 몇 개 빠지고, 지금 몇 개 남아 있는 지까지 다 헤아리신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오늘 아침 식사 때에 숟가락질을 몇 번했고, 어느 반찬에 손이 몇 번 갔고, 무슨 생각을 하며 먹었는지, 밥알을 몇 개 먹었는지, 몇 번 씹었는지까지 모두 다 살피시고, 기록에 남기십니다. 하물며 여러분의 먹고 입을 것이 필요한 줄을 모르시겠습니까? 잠언 15:3, [주의 눈은 어느 곳에나 계셔서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느니라.](잠15:3). 주님은 우리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마음들을 살피십니다. 잠언 21:2,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 우리는 모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 사실을 무시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아합의 집을 엎어 버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21:12,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게 사악한 자의 집을 깊이 살피거니와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그들을 뒤엎으시느니라.](잠21:12).
17-18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 갔나니](17,18).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아합의 죄를 지적하고, 그에 따른 주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무섭고 직접적인 저주요, 죽음이 이를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뭄을 선포하는 것이나 갈멜산으로 바알의 대언자를 모으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을 그냥 죽여 버리실 수도 있고, 병으로 앓게 하실 수도 있지만 자신의 종을 보내셔서 그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몇 년 만에 다시 아합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이 두려워 도망했던 엘리야가 아니라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진 엘리야입니다.
주님은 어떤 일을 맡기시기 전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믿음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또 엘리사를 세우고 제자들을 양육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아합이나 이세벨 같은 악한 죄인들은 그들보다 더 대담한 대언자가 나서야 합니다. 에스겔 3:7-9,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은 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스라엘의 온 집은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하니라. 보라, 내가 네 얼굴을 강하게 하여 그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하였고 네 이마를 강하게 하여 그들의 이마를 마주 대하게 하였도다. 내가 네 이마를 부싯돌보다 굳은 금강석 같게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 하시니라.] 남의 죄를 질책하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권세자들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들이 그것을 묵과한다면 그것은 짓지 못하는 개에 불과합니다. 미가서 3:8, [그러나 진실로 나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능력으로 충만하여 야곱에게는 그의 범죄를,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죄를 밝히 말하리라.](믹3:8).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 갔나니](17,18). 주님은 정보원이나 정탐꾼의 보고를 받지 않아도 아합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아십니다. 예레미야 23:24,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가 말하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느냐?](렘23:24). 욥기 34:21-22,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들 위에 두시고 사람이 가는 것을 다 보시기 때문이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아합은 원하는 포도원을 얻었다고 좋아했겠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이웃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손해를 보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좋아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은 내가 있는 그곳에 항상 계시며, 나의 발걸음까지 세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음성이 나의 귓전에 선포되지 않도록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의식하며 살아가십시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만 주님의 눈길과 임재를 의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집에서, 오고가는 길에서나, 누워 자는 자리에나 어디서나 주님을 의식하십시오.
19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하셨다,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19). 그동안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징계와 심판을 받지 않았던 아합에게 드디어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주님은 아합이 한 일을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19). 이것이 바로 주님이 지적하신 죄입니다. 지금까지 지은 무수한 죄들을 다 제쳐 두시고 나봇에 관련된 죄만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 그에게 다 차지 않는 심판을 당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합의 죄는 완료되어 사망을 낳게 되었습니다.[욕심(lust-정욕)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된즉(when it is finished)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죄가 다 차기까지 아무 일이 없기 때문에 ‘이대로 살아도 되나 보다’ 생각합니다. 아니면 자기 보다 더 악하게 사는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고, 저렇게 살아도 아무 일없는데 나는 괜찮겠지 안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숨겨진 죄악들마저 모두 드러내어 비추어야 하며, 우리가 의도적으로 행한 모든 죄악들을 회개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19-20, [보라, 주의 회오리바람 곧 혹독한 회오리바람이 격노 중에 나아갔으니 사악한 자의 머리 위에 혹독하게 임하리라.]
오늘날 배교하고 타락한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은혜와 사랑의 설교 못지 않게 자주 해야 하는 설교요, 명심해야 하는 설교가 바로 죄에 대한 저주와 심판의 설교입니다. 여러분들은 악을 행하고서도 교회에 와서는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들음으로 죄에 대한 각성이나 회개의 마음이 전혀 없이 오히려 위로와 힘을 얻고 가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피를 짓밟고 은혜의 영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들으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한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만 해 주어야 하는 나약하고도 한심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영(靈)안에서 열심을 내기보다 나태하고 게으르며,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을 생활의 사소한 일이나 친구들이나 고객들과의 작은 약속보다 업신여김으로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반복적인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은 죄가 그 어떤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보라, 너희가 주께 범죄하였으니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을 분명히 알지어다.](민32:23). 세상이 점점 타락하는 것은 단지 아합과 이세벨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주의 경고와 심판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증거하고 선포하기를 거부하고 시류와 야합하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만을 고집하는 강단의 목사들과 그런 것만 요구하는 회중들에게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들고 죄를 책망하고, 그들에게 닥칠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믿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점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예레미야 23:22, [그러나 그들이 내 뜻 가운데 서서 내 백성으로 하여금 내 말들을 듣게 하였더라면 저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저들을 돌아서게 하였으리라.](렘23:22). 주님께서 가정법을 써가시면서 하시는 말씀,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일차적으로 바로 그들(대언자들, 주님의 사역자들)에게서 찾으십니다. 강단이 무너지지 않고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주님의 뜻 가운데 서서 백성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면 악을 근절하고, 배교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합이 배교하기에 앞서 주의 종들이 먼저 진리의 말씀에서 떠남으로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듭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만 하였더라도 오늘날 교인들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의 교인들은 철저한 이중 생활로 틀이 잡혀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한인 사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갔을 때를 제외하고 사회에서는 누가 교회를 다니는지, 누가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인지 구분이 갑니까? 주일날 단 하루, 그것도 예배시간만 빼고 나면 전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이곳 말씀 침례 교회의 성도들은 삶에서, 작업하는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뿜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비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지적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이나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그들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그에 따른 주님의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1) 우리의 역할은 제 2, 제 3의 아합과 이세벨의 출현을 막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내 원수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너를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20). 아합은 엘리야가 도망쳐서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나자 분노에 찬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하필이면 자신이 범죄한 현장인 나봇의 포도원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나게 되자 더욱 당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아합에게도 직감이 있다면 아마 엘리야의 출현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나 재앙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범죄 현장에 있는 죄인에게 경찰이 출현하면 움찔 놀라고 당황하듯이 아합의 심정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친구 목사는 늘 말하기를, 제대로 된 설교는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든지 죄인들이 설교자를 미워하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고 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내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친구로 만드는 법은 자신이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든지, 엘리야를 자신의 수준으로 타락하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엘리야를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아합을 회개케 하는 대신 자신들이 먼저 아합의 친구로 자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변명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친구였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죄인들의 친구였지 회개치 않는 자들과는 언제나 원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는 나오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도 성경이 자기들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5:10, [그들이 성문에서 꾸짖는 자를 미워하며 올바르게 말하는 자를 몹시 싫어하는도다.] 교리와 책망과 바로 잡음과 의로 훈육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일진대 설교 역시 동일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 모임에서 젊은 목사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저를 문 앞의 신발깔개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고 불평을 토로하자, 한 노(老) 목사님이 “주님이 문이시니 주님 앞에 있는 것은 제일 좋은 곳에 있는 것이네.”라고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내 원수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너를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20). 엘리야는 순순히 대답하기를 [내가 너를 찾았노라.]했습니다. 이 말은 “남의 포도원을 훔치고, 포도원 주인을 죽인 살인자를 찾았노라”란 말입니다. 엘리야가 무엇 때문에 아합을 찾았는지는 아합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 말은 신약의 조명을 좀 받으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4에서, [그 까닭은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기 때문이라.](롬7:14). 바울은 육신적이어서 자신의 의지(意志)와 상관없이 죄아래 종으로,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아합은 어떻습니까?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스스로, 고의적으로, 자원해서 자신을 죄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발람이 스스로 불의의 삯을 탐하여 발락에게 간 것이나, 유다가 은 30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나 모두 스스로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아합은 평소 의롭고 경건하게 살다 아차 실수로 육신에게 져서 죄아래 팔린 것이 아니라 평소의 생활이 늘 좌악 가운데 걷는 자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한편 아합과 같이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음이더라.](25). 그는 주의 율법이 금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함으로써 삶 자체가 이미 주의 율법을 깨뜨리는 불법의 삶이었습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믿지 않는 불신자와 결혼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짓밟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사람이나 어린 자녀들에게 불신자와의 결혼이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그 역시 아합과 같이 자시 자신을 팔아 악을 행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4에 분명히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것이 바로 주의 종들이 죄인들을 향해 해야 할 일입니다. 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시편 7:1,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시는도다.] 주님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죄의 종이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어쩔 수 없이 죄의 종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원하여 죄의 종으로 남겠다고 귀를 뚫은 사람처럼 즐거이 죄 가운데 거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히 입을 열어 그의 죄를 지적하고, 그의 죄성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에게 법정 형량을 보십시오. 21절, [보라,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네 후손을 없애되 담에다 소변보는 자와 이스라엘 안에 갇힌 자나 남은 자를 아합에게서 다 끊어 버릴 것이요,](21). 죄의 결과는 자신에게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칩니다.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이는 그의 가족들 역시 아합의 죄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아무도 주님을 두려워하거나 악을 피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고 말씀대로 집행하셨습니다. 잠언 10:7 [의인을 기념(기억-memory)하는 것은 복된 일이거니와 사악한 자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잠10:7) 고 하십니다. 아합은 나봇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나봇의 아들들까지 죽였으므로(왕하9:26), 그에 상응한 보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2-24절, [또 네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같이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분노를 일으키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23. 이세벨에 관하여도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예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 도시에서 죽는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는 자는 공중의 날짐승이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22-24). 둘째로 주님은 집안의 멸망을 말씀하셨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같이,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례를 참고하라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은 열왕기상 15:29에, 바아사의 집은 열왕기상 16:11에 있습니다. 왕비 이세벨도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23).
25-26절을 보십시오. [한편 아합과 같이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음이더라. 그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족속이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우상들을 따르는 일에서 매우 가증하게 행하였더라.](25-26). 주님은 이스라엘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것인 자신의 몸과 영혼을 죄에 팔아 버린다면 이는 공금횡령이요, 엄청난 절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에게 자신을 팔았습니다. 열왕기하 17:17, [자기 아들딸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점치는 일과 마술을 행하고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니라.] 이사야 52:3, [이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고 너희 자신을 팔았으니 돈을 내지 아니하고 구속을 받으리라, 하시며](사52:3).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죄에게 파는 사람은 자신의 몸 값이 단돈 1센트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합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을 죄에게 파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이란 뜻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도가 마귀의 식구들과 함께 놀고 있다면 그 얼마나 우습고 황당한 일입니까?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끔찍한 심판의 말씀을 들은 아합은 평생에 하지 않던 귀여운 짓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부인 이세벨, 가족들이 모두 멸문지화에 처해 진다는 말씀에 금방 사람이 달라 진 것처럼 보입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파멸에 대한 두려움도 큽니다. 아합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과 자신의 집에 미칠 화(禍)에 대해서 두려웠던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이 말씀들을 들을 때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천천히 가니라.](27). 사람들이 볼 때 아합의 이런 행동은 얄팍한 꼼수로 보입니다. 심판이 선포되자 금방 돌변하여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천천히 걷는 모습에 감동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합은 일시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외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 2:13a,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a). 위선자라도 위험에 처하거나 심판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 일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한번만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는 아합처럼 주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믿음에서 나온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서 피하고 보자는 심산에서 나온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합의 행동에도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이르러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28-29). 주님은 특별히 엘리야에게 아합의 행동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즉시 심판이 집행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또 아합이 하는 행동이 얄팍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가증스럽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라면 ‘그런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합이 더 미웠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표면적으로 사과하고, 몇 마디 말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잠시 동안만 근신하는 것 같아 보이는 형제들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모두 인정해 주시고,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유예해 주시거나, 경감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과 저는 아합보다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죄인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합보다 더 위선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어려움이 지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죄악된 생활로 돌아간 경험이 수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합을 정죄하기에 앞서 내가 아합같이 행하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선하게 나를 대해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아합은 겸손히 행했지만 결코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악된 길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아합은 버리지도 않았고, 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합이 겸손하게 행했다고 인정하셨지만 그가 회개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두려워하면서도 완전히 죄를 버리지 못하는 신자들과 같습니다. 아합이 회개했다면 이세벨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들을 혁파하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부활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가 회개했다면 포도원을 다시 돌려 주고, 율법에 따라 변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악행을 바로 잡는 일이 없고, 그 다음에 주님께로 돌아와 진지하게 의로 훈육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이 그의 심판을 유예했지만 결국 말씀한 모든 심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임했습니다.
아합이 회개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 [주께서는...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뜻-willing)하시느니라.] 죄인들이 회개하면 주님 역시 회개(뜻을 돌이킴)하십니다. 요나서 3:10,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이 시간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겸하여 마음을 낮추고,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주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주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언행과 마음 속까지 살피시고, 영의 무게를 달아 보시며, 불꽃같은 눈동자를 가지시고 계신다는 이 엄연한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주님의 심판과 죄인에게 임할 재앙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상대가 아합 왕이라 할지라도 그의 죄를 말해 주고, 주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 말해 주고,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셋째, 자신을 죄에게 팔지 마십시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사신 바 된 주인있는 몸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넷째, 주님은 죄악을 범한 죄인에 대한 심판보다 회개하는 죄인들의 모습에 더욱 감동하시며 마음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아합의 겸손에도 심판을 유예해 주셨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긍휼이 심판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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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인이 애완용 개/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취미가 아닙니다. [시간을 사서 얻으라]고 했는데, 이들은 시간을 사서 버리는 자들입니다. 애완용 개에게 드릴 시간을 주님께 드리시고, 기도와 말씀 읽는데 들이십시오. 애완용 개/고양이에게 쏟아 붓는 돈을 선교 헌금을 하십시오. 개/고양이에게 쏟는 애정과 보살핌을 형제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개를 키우는 것을 비난하지 말고, 그에 따른 적절한 충고와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취미 생활을 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 빠져 들지 마십시오. 난을 치는 일, 분재, 화예, 골동품 수집, 비디오 보는 것, 컴퓨터 인터넷, 텔레비전, 신문, 잡지, 소설, 쇼핑 등 모든 일에서 죄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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