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멸망에 앞선 영적 기상도

멸망에 앞선 영적 기상도(XXII)

말씀: 열왕기상 22:1-14
요절: 열왕기상 21:14  


주의 종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아니라 주의 대언자 미가야라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대언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이 한 사람만이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오늘은 아합과 여호사밧 왕, 미가야와 궁중 대언자들이란 극히 상반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아합에게 선포된 심판이 유예되고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1). 아합은 이 3년 동안 자신에게 떨어진 심판에 대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회개하고,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하기는 고사하고 예전과 별반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멸망에 앞서 있는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 영적 기상도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삼 년 동안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지내었더라.](1). 아합 왕은 시리아 왕 벤하닷을 대파하였지만 그를 살려서 보냄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불씨를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다의 왕은 여호사밧이었습니다. 아합은 자신의 딸을 여호사밧에게 주어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었습니다(44). 2절, [셋째 해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2). 여호사밧은 아합과 달리 선하고 경건한 왕이었으며, 아버지 아사의 길대로 행했던 왕입니다. 41-46에 보면 그의 행적이 간략하게 나옵니다. 아합의 재위 4년에 35세의 나이로 유다의 왕에 등극하여 25년간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만큼 개혁적이지는 못했으나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43절, [여호사밧이 자기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걸으며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주 보시기에 정직한 것을 행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당들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백성이 여전히 산당들에서 헌물을 드리며 분향하였음이더라.](43). 이는 금주 정책을 쓰면서도 술 공장이나 제조업자들을 그대로 놔두는 꼴입니다. 산당들을 제거하지 못한 개혁은 미완의 개혁입니다. 여호사밧처럼 의롭고 정직하고 경건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저마다 육신에 한 가지씩 제거하지 못한 산당들을 남겨 둠으로써 후에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예가 허다합니다. 46절에 따르면 남색하는 자들(동성연애자들)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었다고 나옵니다. 이는 쫓아낼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대로 아예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잘한 것 가운데서도 뭔가 부족한 듯한 모습을 계속 보여 줍니다.

다시 2절을 보십시오. [셋째 해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2). 여호사밧은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내려갔습니다(down). 악인과 동맹을 맺음으로 그는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유다의 개혁자가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타락케 한 아합을 만나러 갈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3비(非) 원칙에 입각해야 합니다. 첫째 비동조, 둘째 비타협, 셋째 비일치입니다. 잠언 1:10, [내 아들아, 죄인들이 너를 꾈지라도 너는 동의하지 말라.](잠1:10). 우리는 세상에서 제안하는 어떤 달콤한 유혹이나 제안에도 No라고 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봇이 아합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듯이 우리는 모두 그러해야 합니다. 잠언1:11-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흘리자,...통채로 삼키자] -이는 연합에 대한 제안입니다. 이 때 역시 3비(非) 원칙을 고수해야합니다. 14절, [너의 제비를 우리 가운데서 뽑고 우리가 다 같이 돈 주머니를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잠1:14). 이는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 건설에 대한 제안입니다. 이런 제안에도 역시 3비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와 같은 정당, 같은 공동체에 가입해서 활동할 필요가 없으며, 비 그리스도인들과 사업을 벌이거나 동업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잠언 1:15절, [내 아들아, 너는 그들과 함께 그 길로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들의 길에서 떠나라.](15). 이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입니다.

3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에 있는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시리아 왕의 손에서 그곳을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3). 그는 이전에 시리아와의 두 차례 전쟁을 통해 이 땅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시리아 왕을 살려 보내는 아량을 베풀었다가 지금 와서야 다시 전쟁을 일으켜 그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승리를 주셨을 때 불순종하고 마음대로 적을 살려 보내고 전쟁을 대충 끝내 버린 결과 그는 이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Finish your job!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나 성도들이나 구분없이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정복 전쟁을 마치지 못한 이스라엘의 비극이 사사기의 전체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들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7차례나 종살이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울 역시 아멜렉을 전멸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멸시키지 않음으로(삼상15:3vs 9) 결국 아멜렉의 청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8-10). 아합이나 사울과 같이 주님께 주신 말씀에 불순종하여 잃어버린 기회를 자신의 힘으로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진리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가나안 입성을 포기함으로 주님이 주신 기회를 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후회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전쟁을 하러 나갔지만 대패(大敗)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주님이 주시는 많은 기회들을 스스로 포기한 후에 다시 그것을 얻고자 전쟁을 하고, 별별 수고를 다하지만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출석하여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다가 막상 그 기회가 찾아오면 여러 가지 이유로 기회를 버림으로 영원히 바른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헌신해야 할 때 훗날로 미루어 버림으로써 평생동안 육신대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모두 아합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살며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취하는 대신 버림으로써 우리는 아합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지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4절입니다.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라못길르앗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하니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나이다, 하고](4). 이런 제안에는 한 마디로 잘라서 거절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아합 왕을 찾아간 이상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없으면 죄를 피해야 합니다. 악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군대의 지휘권까지 아합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이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는 말이며,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아무리 외교적 격식에 따른 말이라 해도 우상 숭배자와 동일시한다면 그 역시 우상 숭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정(情)에 약하고, 단호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군대를 청할 때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왕하 3:7을 볼 것).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사악한 세상 사람들의 말에 화답하며 거기에 넘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실 아합에게 설득된 것입니다. 역대기하18:2에는 이 내용이 좀 더 상세하게 나옵니다. [몇 해 뒤에 그가 사마리아로 내려가 아합에게 이르렀더니 아합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위하여 양과 소를 많이 잡고 그를 설득하여 자기와 함께 라못길르앗으로 가려 하였더라.](대하18:2).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호사밧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끈질긴 설득이나 부탁에 끌려 들어가 YES로 응답해 버린 후 후회해도 늦습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오늘 주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소서, 하니라.](5). 여호사밧은 아합과 달리 모든 일을 주님께 물어 보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먼저 자신이 주님께 물어 본 뒤에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임의로 먼저 결정한 후에 일의 성패(成敗), 즉 성공 여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아합과 달리 주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은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우선 순위는 바뀌어야 합니다.

이는 다윗의 예를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주님께 물어 보고 난 후 결정했습니다. 삼상 23:2- 블레셋을 치러 갈 때, 삼상23:4- 또 물었습니다. 삼상 30:8-추격할 때, 삼하 2:1-사울을 피해 도망갈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 물었습니다. 삼하5:19-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올라 갈 때, 삼하 5:23- 블레셋 사람이 다시 왔을 때 다윗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전에 받은 말씀이 아니라 지금 현재 또 다시 주께 여쭈었고, 주님은 이번에는 올라가지 말라는 다른 답을 주셨습니다. 만약 묻지 않았다면 그런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주님께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주님께 먼저 아룀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와 결단을 보이고, 주의 종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주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 보라는 것은 가장 훌륭한 조언입니다. 아합같은 사악한 왕에게 여호사밧 같은 사위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오늘 주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소서, 하니라.](5). 아합은 주님께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며,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마음에 우상이 가득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기도를 게을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주님이 차지할 공간을 우상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인입니다. 에스겔 14:3,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기도의 시간이 줄어든 것은 말씀의 씨앗이 마귀에게 빼앗기고 가라지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 물을 수 있다는 것, 주님의 말씀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언젠가는 물어도 대답이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마음이 타락한 자들은 물어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에스겔 20:3,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위급할 때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만큼 갑갑하고 힘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평소에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스라엘 왕이 대언자 사백 명 가량을 함께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라못길르앗에 가서 싸우랴, 아니면 삼가랴? 하니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니](6). 아합은 전에 바알의 대언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모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엘리야와 백성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400명의 대언자가 모입니다. 왕은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느냐? 싸우지 말아야 하느냐?를 대언자들에게 물었는데 그들은 싸우러 나가면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확답을 주었습니다. 이들의 답은 항상 왕의 기분과 이미 정해진 정책의 틀을 지지하고, 선동하는 일에 부응하는 것들뿐입니다. 이는 이 땅에 국가 조찬 기도회를 할 때 발생하는 대답과도 같습니다. 유명한 목사님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호텔에 모여, 진수성찬을 먹고 마시다가 위정자들이 물으면 무조건 “잘 한 일입니다.”,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답만 되풀이합니다. 악법이 만들어지고, 인권을 유린하는데 답은 늘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합의 대언자들에 불과합니다.

다시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니] 이말이 아합에게 얼마나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거짓 대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희망 사항이며, 바람입니다. 이것은 아합이 듣고 싶어하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에서 나온 조언은 맞으면 좋고, 틀려도 그만입니다. 아합의 대언자들이 하는 대언은 의로운 자들을 낙망케 하고, 사악한 자들에게는 위로와 힘을 주는 사악한 대언입니다. 악인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합리화 시켜 주는 것은 매우 사악한 죄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13:22, [이는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로운 자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슬프게 하며 사악한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함으로 그의 손을 강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의 사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였음이라.](겔13:22).

우리에게는 위대한 조언자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Counsellor-조언자),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 우리에게는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조언들이 담긴 주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시편119:24, [주의 증거들은 또한 나의 기쁨이요, 나의 모사(Counsellors-조언자들)이니이다](시119:24).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과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갈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민족적인 패망이 있기 전에 가장 큰 문제는 대언자들의 부재와 타락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언자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제사장직과 대언자들이 얼마나 타락했든지 주의 말씀을 제대로 증거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 이야기를 설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성직 제도가 타락할 때 이스라엘이 멸망했듯이, 교회의 급격한 타락, 목회자들을 비롯한 사역의 직분자들의 타락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면서 말세를 논하지 말고,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고, 성직자들이 얼마나 주의 말씀을 배척하는가를 보고 마지막 때를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5:30,31, [이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도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예레미야 8:10-11, 14:13-14, 23:14-17에 그들의 타락상이 너무나 잘 나옵니다. 이 시대에도 거짓 대언자들은 넘쳐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파고 든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거룩한 직분을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데 이용하며, 주님의 대속의 사역과 피의 속죄를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마태복음 7:15,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으로는 약탈하는 이리니라.](마7:15). 아합과 같은 자들은 거짓 대언자들을 더 좋아합니다. 이는 그들만이 입맛에 맞는 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진리의 지식을 배제하고 자기 성향에 맞는 설교를 찾아 부흥회, 기도원, 교회를 순례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크리스찬 집시들이라 부릅니다. 디모데후서 4:3-4,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 진리에 자신을 맞추고, 순종하는 대신 반대로 설교와 신학을 자신에게 맞추어 모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사회 단체에 불과합니다. 베드로후서 2:1-3,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 오는 자들이라....](벧후2:1).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합이라면 여러분 주위에는 아합의 대언자들이 있을 것이며, 여러분이 여호사밧이라면 주님의 대언자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들 말고 여기에 우리가 물을 만한 주의 대언자가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매](7). 여호사밧은 아합과 달리 이들이 주의 대언자들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그들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들이 아니라 “주의 대언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주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있고, 주의 대언자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이들이 가짜란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위조지폐를 잘 감별하기 위해서는 항상 정폐를 손에 쥐고, 그것으로 감각을 익혀야 합니다. 늘 정폐만 만지던 사람들은 손에 위조 지폐가 잡혔을 때 눈보다 손이 먼저 알아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늘 주의 말씀을 듣던 귀는 다른 이상한 음성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테잎들을 통해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습니다. 들으면서 이상한 설교들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기독교 방송이나 여러 테잎을 통해 설교를 들을 때나 상담을 들을 때, 이것이 성경적이다, 비성경적인 자기 이야기다!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그런 것들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른 설교와 성경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은 다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목소리가 늘 진리는 아닙니다. 그가 찾았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말해 줄 주님의 대언자였습니다. 전에 어떤 미국 목사님이 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는 죄수에게서 온 한 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성경을 읽고 싶은데, 모두 성경이 성경 같지 않아서 “Old 킹제임스 성경”을 보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죄수는 오랫동안 주의 말씀에 떠나있었고, 죄를 지어 감옥에 있었지만 새 역본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아 내었습니다. 이는 신학의 문제나 신앙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위대한 왕 아합의 아들로서 신앙 부흥 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대언자들을 보았기에 아합의 거짓 대언자들의 말을 귓전으로 날려보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 이물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를 통하여 주께 여쭐 수 있으나 그는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니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하지 마소서, 하매](8).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주의 대언자의 말을 들어보자고 다시 부드러운 충고를 했고, 미가야를 향한 아합의 악한 감정과 거친 언사를 제지시켰습니다. 아합이 생각한 미가야는 주의 대언자가 아니라 자신의 점괘를 나쁘게 풀이 해 주는 심보가 못된 점쟁이 정도였습니다. 주의 대언자는 주의 말씀을 하는 사람이요, 그에게 주의 말씀을 듣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주의 대언자를 미워하는 것은 주님을 미워한다는 항의의 표시이며, 반역적 시위입니다. 미가야 역시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칠천명 가운데 한명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역사의 무대에서 엘리야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미가야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만나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주의 대언자가 바로 미가야였습니다. 아합이 미가야를 미워한 진짜 이유는 그가 자신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죄인들에게 전할 때 미움을 받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도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있는 그대로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미워합니다. 성경은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5:10, [그들이 성문에서 꾸짖는 자를 미워하며 올바르게 말하는 자를 몹시 싫어하는도다.](암5:10). 미워하는 것은 아합의 자유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심판입니다. 시편 34:21,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요,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자들은 황폐하게 되리로다.](시34:21). 아합과 여호사밧? 여러분은 이 둘 중 누구에 해당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이에 관원 하나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여기로 오게 하라, 하니라.](9). 아합은 할 수없이 미가야를 불러 오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합에게 베푸신 마지막 은혜입니다. 그는 여호사밧 덕분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의지와 기호, 감정과 무관하게, 전혀 뜻하지 않게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다 창가에서 소리내어 성경을 읽는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듣고 삶의 일대 전기를 맞았습니다. 어떤 이는 군대에서 영창을 갔는데 감방의 벽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을 통해 회개하고 후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끊임없이 주의 종을 보내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의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입구의 빈 곳에서 각각 왕좌에 앉았고 모든 대언자가 그들 앞에서 대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쇠로 뿔들을 만들고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시리아 사람들을 찔러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대언자도 그와 같이 대언하여 이르기를 라못 길르앗으로 올라가 성공하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더라.](10-12). 이들은 마치 충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왕 앞에서 아첨을 했습니다. 그중에 단연 돋보인 아첨꾼은 그나니아의 아들 시드기야였는데, 쇠로 뿔을 만들어 왕이 이것들로 시리아 사람들을 찔러 진멸할 것이란 대언을 했습니다. 그는 능란하게도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거짓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횡횡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멸망이 있기에 앞서 일어나는 종교계의 영적 기상도이며,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은 주의 성령과 주의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악한마귀의 영으로 대언하고, 그들의 삶은 세속적인 사람들 못지 않게 더럽습니다. 얼마전에 터진 캐톨릭 사제들의 동성연애, 성추행 사건이 지금 몇몇 교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집사, 부흥사, 성경 교사들의 타락상도 비일비재하게 터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13-16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의 대언자들- 1. 그들은 바알을 의지하여 대언한다(13). 2. 그들은 주의 백성들을 잘못하게 한다(13b). 예루살렘의 대언자들- 1. 그들은 간음을 행한다. 2. 거짓 속에서 걷는다. 3.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강하게 한다. 4. 그들을 회개하지 못하게 한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이니 그들이 말한 환상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6b)

13절을 보십시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제 대언자들의 말이 한입으로 왕에게 좋게 고하니 원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가운데 한사람의 말처럼 되게 하여 좋은 것을 말하소서](13). 왕의 사자는 그에게 나머지 사백명과 입을 맞추도록 권고했습니다. 한마디로 오케스트라의 합창에서 혼자 다른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이며, 동시에 압력입니다. 대세에 순응하라는 지혜로운 충고처럼 보입니다. 어차피 미가야가 바른 말을 한다 해도 들을 아합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바른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은 결과를 예상해서 유, 불리를 따져가며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미리 결과를 예측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죄악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미가야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니라.](14). 미가의 이 고백은 주의 종들이 모두 가져야 할 투철한 자세입니다. 이전의 대언자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 보십시오. 미가야는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적당히 돌려서 전하지 않습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전한 말씀의 결과에 대해서 앞 뒤를 재어 보지 않습니다. 아합과 같은 악한 배교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엘리야 외에도 미가야 같은 주의 대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엘리야를 숨기시면서도 미가야를 남겨 두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통로를 남겨 두셨습니다.

사악한 아합 앞에서 아합을 대적하는 증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라면 마땅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특히 이 세대에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조롱받기 일쑤입니다. 이웃에게 전하면 이웃과 거리가 멀어지고, 친구에게 전하면 친구 지간이 서먹해지고,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전하면 빤히 쳐다보며 못마땅해합니다. 내가 전해 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란 지레짐작이나 결과를 예단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2:5,7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그들이 알지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심히 반역하는자들이니 그런즉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너는 내 말들을 전할지니라.] 에스겔 3:17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집에게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가 주는 경고를 그들에게 줄지니라.](겔3:17). 미가야 역시 아합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의 말씀만 전하고자 결단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아합의 대언자들이 아니라 한 사람 남은 미가야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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