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의 최후(XXIV)
말씀: 열왕기상 22:29-53
요절: 열왕기상 22:43
사람의 삶은 태어나는 것보다 끝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잘 마무리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 이루었다”란 말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나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라고 한다면 이는 멋있는 삶이요, 후회없는 삶입니다. 스데반처럼 죽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원수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위인의 삶보다 더욱 큰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삼손처럼 원수들을 죽이는데 자신의 한 몸을 그대로 바치는 죽음도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 죽고 평안히 죽는 것도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생의 결말입니다. 유년기, 청년기 보다는 장년기, 그리고 말년이 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점점 영적 성장을 이루고, 열매맺는 삶을 살다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사울 왕처럼 청년기 이후에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서는 안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죽는 순간입니다.
오늘은 평생동안 불신과 불순종으로 자신을 죄에 팔아 버린 아합 왕의 최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합의 대언자들의 입에 들어가 그들의 입에 거짓말을 넣자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라못 길르앗으로 올라가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무려 400명의 대언자들이 승리를 예언했고, 주님의 도우심이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한 명 ‘주의 대언자’ 미가야만이 이 전쟁을 반대했고,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진리는 몇 명의 사람이 그렇게 믿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바를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짓습니다. 미가야는 왕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왕과 백성들의 귀에 다시 한번 외쳤습니다(28).
문제는 그들은 들을 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모든 소리를 다 알아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만큼은 들리지 않는 부분 청각 장애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들어도 믿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역동안 수십 번에 걸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13:9,13:43, 막4:9, 막4:23, 7:16, 눅8:8, 14:35)라며 듣기에 둔한 귀를 가진 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뉴스를 들을 때 확인없이도 잘 믿습니다. 떠도는 소문도 잘 믿습니다. 거짓말도 잘 믿습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도 잘 믿습니다. 심지어 앞으로 20-30년 후에 일어날 가상 이야기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도 가능성있는 이야기라며 믿습니다. 후에 속임수로 결말 날 지언정 그 순간에는 믿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정작 전지전능하신 말씀의 하니님께서 하신 말씀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아합과 백성들 역시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채 거짓말을 믿고, 진리를 배척하였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가니라.](29). 드디어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죄의 길은 결코 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자 하는 자들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먼 길이라도 단숨에 치고 올라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악인들은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도박을 위해 라스베이가스로 달립니다. 전 세계에서 이리로 몰려듭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로 죄를 짓기 위해 관광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죄의 길은 아무리 막고, 조언해도 오히려 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인양 묵묵히 올라가는 것이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아합 왕은 주의 뜻을 행하는데는 한 발짝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주의 뜻을 거스리는데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싸움에 들어가려 하거니와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싸움에 들어가니라,](30). 아합은 지금 상당히 잔머리를 굴리며, 자기의 안전을 최대한 도모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봉을 서서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뒤로 빠지고 반대로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은 채로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잔머리는 악인들에게나 통할 뿐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내게 정해진 주의 심판,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징계의 손길을 거슬러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온 마음을 다해 회개하는 길이지 잔머리를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악인들에게 내려진 주님의 저주와 심판을 눈물과 금식의 통회하는 기도와 회개로 돌이킨 일이 자주 나옵니다. 아합 역시 전에 엘리야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겸손하게 행함으로 위기를 벗어난 전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혹시’, ‘만약에’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죄인들의 어리석은 생각과 악인들의 생각을 흩어 버리시며, 우롱당하지 않습니다. 잠언 21:30,31, [어떤 지혜나 명철이나 계략으로도 주를 대적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에 대비하여 말을 예비해도 안전은 주로부터 오느니라.](잠21:30-31).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시리아 왕이 자기 병거를 다스리는 서른 두 명의 대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와 큰 자와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하니라.](31). 시리아 왕은 매우 쉽고도 단순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아합 왕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최단시간에 아합을 죽이거나 체포함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병거들을 다스리는 기병 대장 32명에게 아합 왕을 향해 직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때로 가장 위협적이고도 강력한 전투 방법입니다. 장기로 말하면 항우가 주로 썼던 차(車)의 진법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병거의 대장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는 분명히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지르니라.](31). 여호사밧은 악인 아합과 맺은 동맹으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를 따라 의롭고 경건한 왕이었으나 아합의 사위가 됨으로 멍에를 함께 졌습니다. 그는 사백명의 아합의 대언자들의 목소리가 거짓이란 사실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지혜와 분별력도 있었고, 주께 물을만한 대언자를 찾을 줄 아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합과 손을 마주 잡음으로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왜 철저히 세상과 분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함께 멸망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시편 1:1, [복있는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뜻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사밧과 같이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같이 함으로써 영적 위기를 자초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과 연합하고 동행하는 순간부터 영적 생명은 극도의 위기에 빠지고, 적들이 몰려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이 세상과 동행하는 순간, 악인들과 함께 걷는 순간 증인의 자격은 박탈되고, 증거의 능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위기는 아합에게 먼저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여호사밧에게 먼저 찾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이 세상과 연합하면 손해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더 많이 당합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결혼을 하는 일은 주님의 뜻을 온 몸으로 거스리는 간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침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에 대한 순종을 세상에 보여 준 간증이라면 불신자와의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배교와 단절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하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여호사밧처럼 인간적 관계, 혈연적 친족 관계 등으로 얽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 때문에, 친지 형제들 때문에, 동료들 때문에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따라 나서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연루됨으로 고역을 치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지금 본문에는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다고만 기록하지만 사실 이것은 급히 기도한 것입니다. 역대기하 18:31, [병거의 대장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를 둘러 싸고 싸우려 하였으나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지르매 주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시니라.](대하18:31).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응답하셔서 위기로부터 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둥이나 번개를 보내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시는 대신 시리아의 병거 대장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심으로써 그들은 떠났습니다. 전쟁 도중에 적군의 마음을 감동시켜 말머리를 돌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에 있는 어렵고 힘든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아합의 차이는 바로 위기의 순간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가?의 차이입니다. 아합은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대상이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같은 죄를 짓더라도 그에 대한 처리 방법이 다릅니다. 여호사밧이 큰 소리를 지른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성도의 울부짖음입니다. 그가 큰 소리로 자기 부하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주님을 부른 것은 믿음의 표출입니다. 고난의 날에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시편 50:15,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시편 91:15 [그가 나를 부르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고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5).
33절을 보십시오. [병거의 대장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닌 것을 보고 그를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33). 이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감동시킨 결과입니다. 이제 이들은 아합을 찾을 것입니다. 이 때 아합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이음매 사이를 쏘니 왕이 자기 병거를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을 당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를 군대에서 데리고 나가라.](34). 그는 변복을 한 채 병거를 타고 전장을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는 화살이 갑옷의 이음매 사이에 꽃이고 말았습니다. 활을 당긴 사람은 그냥 시험삼아 당긴 것이었습니다. 오발이 명중이라고 이 화살은 아합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고, 전쟁으로 인해 치료도 하지 못한 채 싸우다 흘린 피로 인해 저녁 무렵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았습니다. 무사히 돌아 올 것이라고 장담하며 왕궁을 떠났지만 그는 시체가 되어 돌아갔습니다. 악인에게 임하는 멸망은 갑작스럽게 닥칩니다. 아합은 지금까지 부족한 것이 없이 지냈고, 어떤 죄를 지어도 징계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3년 반 동안의 가뭄과 기근이 있었고, 엘리야를 통해 갈멜산에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두 차례나 승리했고 결코 평범하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영적 각성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는 어지간한 경고나 말씀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충분히 이기리라고 믿었지 죽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왕복을 벗고 변장을 했지만 주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열왕기상의 핵심 내용은 아합과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선포되었습니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신의 종들을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깊이 있는 교리는 몰라도 예수를 믿어야 하늘 나라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정도의 기본 구원 교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2000년 이상 이 지상에 전파되어 왔습니다. ‘예수’란 이름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시절에도 예수란 이름은 들어와 있었습니다. 마을에 신문을 보는 집이 단 한 집도 없는 그런 시절에도 동네 사람들은 모두 예수란 이름을 알았으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정도의 교리는 다 듣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계신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이음매 사이를 쏘니...](34) 사람들에게는 우연도 많고, 운도 많지만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생각없이 활을 당겨 시위를 날린 사람은 이것이 우연의 사고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바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교회사, 성도들의 삶에서 우연이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걸음을 다 세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싸움이 더 커지므로 왕이 자기 병거에 남아 시리아 사람들을 막다가 저녁때에 죽으니 상처에서 나온 피가 병거의 한가운데로 흘렀더라.](35). 왕궁 옆에 있는 포도원을 얻기 위해 나봇과 그의 자식들을 다 죽인 피의 대가를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아합이 죽은 원인은 자신이 행한 악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죄입니다. 열왕기상 17:13, [주께서 모든 대언자와 모든 선견자를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증거하사 이르시기를, 너희는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내 명령과 내 법규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대언자들을 통해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왕하17:13). 주님은 여전히 증거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해가 질 무렵에 군대에서 선포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각 자기 도시로 각각 자기 본향으로 돌아가라, 하더라.](36). 전쟁은 하룻만에 끝났습니다. 아합 왕이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아합의 죽음은 누가 참 하나님의 종이며, 누가 거짓된 예언을 하는지 온 백성들에게 다 보여 주었습니다. 미가야 외에 모든 대언자들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아합의 죽음은 우리에게 경고와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왕이 죽으매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메고 가서 왕을 사마리아에 묻으니라. 한 사람이 그의 병거를 사마리아의 연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사람들이 그의 갑옷을 씻으니라.](37-38). 이 말씀은 예언의 정확한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열왕기상 21:19 참조). 개들이 나봇이 피를 핥은 그 자리에서 아합의 몸에서 흘린 피를 핥았습니다. 예언의 정확한 성취는 주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의 기록된 예언과 성취를 통해 그 일은 우연이 아니며, 자연적인 결과도 아니고, 오직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지 전능하심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면 믿지 않기가 어렵고, 성경을 모르면 믿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미리 말씀하셨고, 행하셨듯이 저희들에게 주신 약속 역시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십니다. 이사야 48:3-5, [내가 처음부터 이전 일들을 밝히 알렸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 일들을 갑자기 행하매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내가 알거니와 너는 고집이 센 자요, 네 목은 쇠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내가 처음부터 이것을 네게 밝히 알렸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네게 이것을 보였나니 이것은 네가 말하기를, 나의 우상이 이 일들을 행하였으며 나의 새긴 형상과 부어만든 형상이 이 일들을 명령하였도다, 하지 못하려 하려 함이었노라.](사48:3-5). 주님은 재앙과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수십 번에 걸쳐, 수년에 걸쳐 미리 경고의 말씀을 주심으로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완악한 죄인들은 그 시간들을 회개의 시간으로 삼기보다는 더욱더 범죄를 쌓아 나가는 시간으로 삼아 버림으로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한 진노와 심판을 제거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아들들로 삼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고난의 때에 우리를 건지십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실이든 우리가 행한 악한 행실이든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의롭다 칭하십니다. 아합과 같은 삶을 살고, 죄에 자신을 팔아 버린 인생일지라도 회개할 때 주님은 기쁘게 영접해 주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쉽고 가벼운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메도록 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분께 경배와 영광을 돌려 드립시다. 특히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더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들에 주목하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이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39-40절을 보십시오. [이제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 궁과 그가 건축한 도시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아합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그의 아들 아히시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니라.](39-40).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아합이 전혀 치적이 없는 왕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상아 궁을 건축하였고, 도시들을 건축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외교적 수완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죽긴 했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 영토 확장을 꾀하는 정복 전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순종함으로써만 평안과 번영이 보장됩니다. 그가 다른 민족들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전제 군주의 노릇을 하고,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그친다면 재앙과 심판 외에 달리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잊은 채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 때만 다른 모든 것이 보장됩니다.
아합이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모압이나 암몬 족속의 왕이었다면 바알을 숭배하든, 주의 대언자를 무시하든, 마음에 드는 포도원을 빼앗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은 흔히 그렇게 하기 때문이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라면 교회를 늦게 오든지, 술을 마신든지, 도박을 하든지, 자기 일신의 평안을 위해 무슨 짓을 하든지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백성이요, 그분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이 중요하고, 그것을 들어야 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엘리야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하시야와 엘리야 (1) | 2006.12.24 |
---|---|
엘리야의 마지막 임무 (0) | 2006.12.22 |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0) | 2006.12.18 |
멸망에 앞선 영적 기상도 (0) | 2006.12.10 |
아합에게 선포된 심판 (0) | 2006.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