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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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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마지막 임무(XXV)

말씀: 열왕기상 23:01-12
요절: 열왕기상 23:3,4


열왕기하는 본래 열왕기상과 단권으로 되어 있던 책이 후대에 상,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하의 내용은 열왕기상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22장은 아합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된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왕상 22:52). 아하시야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 아합의 길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가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자기 아버지의 길과 자기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으니 이는 그가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기를 마치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같이 하였음이더라.](왕상22:52-53). 아히시야는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합이 어떻게 죽었는지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회개하거나 종교 개혁을 하는 일련의 조치없이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행했습니다. 이는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전대 아버지의 시대에 엘리야를 통해 주님께서 3년 반 동안의 기근을 보내신 것과 갈멜산에 불이 내려온 사건, 바알의 대언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신이 얼마나 무능한 우상인가에 대한 교훈을 듣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알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음을 보고도 그의 마음은 경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을 완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 화인맞은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고, 죄에 대한 심판이 두렵지 않고, 같은 죄가 반복되어도 양심에 깊은 고통과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미 그의 양심은 죽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회개하고, 말씀의 물로 깨끗이 씻어내는 작업이 없다면 쓰레기 더미에서 일한 일꾼이 옷을 빨지 않고, 몸을 씻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해 더럽혀지고, 양심은 그 기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가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자기 아버지의 길과 자기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으니 이는 그가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기를 마치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같이 하였음이더라.](왕상22:52-53). 여기서 주님은 아히시야가 무슨 무슨 죄를 지었다고 소상하게 사건 중심의 기록을 하는 대신 그의 인생 전체를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전체 인생관, 삶의 행로를 보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히시야는 자기 아버지의 아합의 길, 자기 어머니 이세벨의 길), 북왕국 이스라엘에 배교의 철로를 깔았던 여로보암의 길로 거침없이 내달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로 간 사람들의 종착역에 똑같이 도달할 것입니다. 아합의 길로 걸으면 아합이 같던 곳으로 갈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걸으면 결국 여로보암이 도착한 곳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길로 걸으면 주님이 계신 그곳이 우리의 종착역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죄의 길은 아무리 멀고 험난해도 멀고 험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이 죄에 익숙하고, 길들여져 종노릇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의 길은 힘들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믿음으로 순종해 보면 그보다 쉽고 평안한 길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몇 일간 밤을 세워 화투를 치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놀아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그들은 일어나면 또 그 짓을 합니다. 정말 강철같은 정신력, 무쇠같은 체력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막상 성경 한 줄 읽으려고 하면 온 몸이 왜 그리 피곤한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8시간 이상 온 몸으로 뛰는 중노동을 하는 것도 거뜬히 견디지만 휴일에 하루 한 시간의 성경 읽기와 한 시간의 기도를 못 견딥니다. 죄를 향한 육신의 성향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지겹지 않습니다. 죄를 향한 육신의 성향은 죄를 지을 때 주를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히시야는 악을 행하려는 확고한 마음과 아버지의 죄업을 그대로 계승한 나머지 2년간 통치한 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짧은 2년간 그에게 닥친 중요한 사건이 열왕기하 1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1을 보십시오. [그런데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1). 모압은 다윗 때에 정복되어 이스라엘의 식민지였습니다(삼하8:2).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는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다가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갈라지자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모압 족속은 해마다 새끼 양 십만 마리와 수양 십만의 털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왕실 재정에 큰 기여를 할 정도였습니다(왕하3: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그가 어린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를 그 털과 함께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왕하3:4). 그런데 아합이 죽자 모압은 즉시 독립을 선언했고,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항할 때 모압이 그로부터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반역하는 것에 대한 징계는 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의 반역으로 이루어집니다.’(Matthew Henry). 이는 비단 성경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에게 반항하고, 배반하고, 거역한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가 범하는 죄와 비슷한 형태로 징계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신실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나 부리는 종업원이나 친구가 여러분에게 신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것을 도둑질하면 누군가가 여러분의 것을 도둑질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아끼지 않고 허비해 버리면 사람들이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아 버립니다. 내가 주님께 불순종하면 여러분의 아내나 자녀가, 아니면 나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빨리 깨닫고, 돌이키게 하기 위한 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그의 아들 아히시야에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아합이 주님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라못 길르앗이 시리아 왕의 손에 떨어졌고, 모압이 그를 배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며, 한 가정과 개인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너무나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기를 마치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같이 하였음이더라.](왕상22:53). 아히시야는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여 주님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백성이 자기를 떠나 다른 신들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경배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복음에서 돌아서 이상한 다른 복음을 전했으며,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이상한 다른 신들을 하나님인 것처럼 설교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교회들에서조차도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를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증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축복의 사자들’만이 교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많은 성도들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고 부와 명예, 쾌락의 신들을 만들고, 교육을 우상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손길 대신 돈의 손길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교회를 돈으로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을 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돈이 있어야 교회도 하고, 돈이 있어야 효도도 하고, 돈이 있어야 뭐를 해도 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을 붙잡고 성경을 팽개쳐 버렸습니다. 성경의 권위, 교회의 가르침, 예배와 모임, 기도의 중요성, 경건한 삶 등이 돈을 버는 일보다 얼마나 뒤로 밀려 버렸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위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질투를 유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들은 설교는 결코 성경에서 나온 설교가 아니며, 우리 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매우 적은 소수이지만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현대의 우상들, 성도들이 속으면서 섬기는 물질과 교육, 돈과 쾌락이라는 육신의 만족들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바알 숭배를 향해 경고와 질책의 설교를 하지만 몇몇이나 그런 설교에 귀를 기울이며, 비뚤어진 자신의 생각과 인생관, 가치관을 바꾸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주님, 아멘이란 경건한 성경 용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그들이 과연 아합의 길, 아히시야의 길을 포기하고 주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使者)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알아보라, 하니라.](2). 우리말에는 없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접속사 And(그리고)란 말로 2절이 시작됩니다. 이는 1절에 이어 2절 역시 주님의 징계의 연속적인 손길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아하시야는 격자창, 지금 말로 하면 난간에서 떨어졌습니다. 재앙은 연속적으로 닥치는 법입니다. 모압의 배반으로 나라가 어려워진 동시에 왕은 또 뜻하지 않는 사고로 중상(重傷)을 입었습니다. 아히시야는 모압의 배반에 대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거나, 주님의 뜻을 구하거나, 자신을 낮추거나 하는 일련의 신앙적 행동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우연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의 백성들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압이 배반했을 때 아히시야가 해야 할 일은 금식하고, 기도하고, 무엇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는지, 왜 이런 일이 임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했습니다. 아하시야는 영적으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진 일’은 한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은 자신과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타락한 성도가 사고로 몇 주간, 몇 달간 침상 신세를 짐으로써 지나온 길들을 생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예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아히시야는 자신이 다락방에서 떨어져 병든 일로도 전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에게 질병을 주심으로서, 또 이와같이 사고를 통해 회개의 시간을 갖게 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팔이나 다리가 불어 지든가 교통 사고를 통해서 병원에 드러눕게 하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때로 시한부 인생이란 극적인 선고를 통해서, 암이나 다른 불치병을 통해서 목전에 죽음을 두심으로 삶과 죽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징계인 동시에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매주 주일 예배를 나오면서도 때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너무나 게으른 나머지 주님의 오심이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내일 죽을지 아니면 일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런 경우의 수에서 완전히 제외시킨 채 70-80년은 무난히 살아 갈 것처럼 정신없이 삽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한 발자국 안에 있습니다. 그가 집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집이 성(城)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를 안전하게 지킬 수는 없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사람들의 죄의 무거운 짐에 신음하면서 결국에는 격자처럼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부러지고 가라앉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 사람은 결코 안전할 수 없으며,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아니하는 자는 그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때에, 원하지 않던 것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Matthew Henry).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使者)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알아보라, 하니라.](2). 침상에 누워있는 아하시야가 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역경의 날에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냅니다. 그는 번영의 날에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했듯이 역경의 날에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멸시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울이 신접한 여자를 찾아갔듯이, 다락방에서 떨어져 병든 아히시야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아히시야가 자신의 병든 몸보다 영혼이 더욱더 병들어 있는 상태란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바알세붑, 바알브올, 바아스본, 바알베리스 등 바알로 된 합성어로 된 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는 그 지역과 직급에 따라 사람들이 나누어 부른 것입니다. 바알세붑은 파리떼의 왕이란 뜻으로 당시에 파리들이 주로 퍼뜨리는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바래새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던 말씀입니다. 바알세붑의 헬라어식 표기가 바로 바알세불인데 마귀들의 왕이란 뜻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아히시야는 바알세붑이 앞날을 예측할 능력이 있는 신으로 믿고,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레위기에 엄히 금하는 법입니다. 자신을 점쟁이, 점술가, 신접자들의 충고에 맡기는 것은 악의 권세에 자신을 맡기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이 이교도의 신에게 자신의 병에 대한 앞날을 물으러 신하들을 보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대내외적으로 바알세붑을 참 신으로 인정하는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하시야의 이런 행위는 아합의 행위보다 한 수 더 뜨는 도전행위였으며, 주님을 공개적으로 거절하는 죄악이었기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그의 행위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3).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참되시고,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 바알세불에게 간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로 아히시야의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합이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죽음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모독했다면 그 역시 아합이 맞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선대 아합에 이어 다시 한번 그의 아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왕의 죄를 묻고,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대언자 엘리야의 마지막 사역이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누구라도 점(点)을 보거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관상, 수상, 별자리 보기 등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장래를 알아보려는 호기심에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일이란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묻는 대신 다른 무엇에게 묻는 다면 그는 지금 아하시야의 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묻느냐? 하나님이 없어서 counsellor에게 묻느냐? 하나님이 없어서 네 혼자 모든 일을 고민하고 걱정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사에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께 묻고 그분께 달려 가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높여 드리는 작은 출발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자신의 문제나 진로를 여러분에게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고 다른 부모님들에게 상담하러 간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존경하고, 두려워 하는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묻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묻지 않고 다른 남편, 다른 아내와 진진하게 상담하고 토론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엘리야가 떠나가니라.](4). 배교한 왕에게 엄숙히 죄를 꾸짖고, 그에게 죽음의 심판을 선고하는 것 이것이 엘리야의 임무였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저주와 심판을 불러오는 기회로 만들어 버린 아히시야는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술에는 언제나 저주와 축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생명의 향기였습니다. 반면 아합과 아히시야에게 엘리야는 언제나 사망의 향기요, 저주의 사자(使者)였습니다. 주의 대언자들, 주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들의 입에는 저주와 축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대적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설교에는 절대 저주와 심판이 없어야 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설교에는 “화있을진저...”와 “복되도다...”란 말씀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언급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복되도다!”란 설교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화있을진저!”란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누구를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정신, 죄악과 짝하는 세상의 조류와 그런 사람들의 죄와 악행에 대해서는 경고와 주님의 심판을 엄중히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왕의 신하들은 갑작스런 엘리야의 등장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으로 인해 가던 길을 멈추고 즉시 왕궁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말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왕의 사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9). 그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상적 친교를 위해서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언제나 혼자 조용히 무리들과 떨어져 있었듯이 우리 역시 주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밑에 거하리로다.](시91:1).

5절을 보십시오.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매 왕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지금 돌아왔느냐? 하니] 왕은 이들이 블레셋의 에그론까지 갔다가 올 시간이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이 말에는 왕으로서 이들이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도중에 돌아 온 것에 대한 질책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던 발길을 돌려 돌아온 이유에 대해 왕은 무척이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왕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아히시야의 신하들은 그들이 받은 경고와 심판에 대해서 왕에게 빨리 전해 주는 것이 그냥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말하기를, 가서 너희를 보낸 왕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6). 왕의 신하들이 대언자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말하기를,” 이라고 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엘리야가 누구인지 잘 몰랐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아히시야에게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임을 알았지만 엘리야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 오늘날 강단에서 회중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임시변통으로 속물같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보다는 백배 이상 훌륭합니다. 솔직히 이런 말을 왕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보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종 엘리야의 말에 더 잘 순종하고 있습니다. 때로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거듭난 신자들보다 경고의 심판에 대해 더 두려워 하고 떨려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를 통해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아합조차도 죽음의 선고 앞에서는 잠시나마 겸손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하니](7). 아히시야는 말을 듣자 마자 그 말씀이 주께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란 메시지는 주의 대언자들이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즉시 말한 사람의 외모와 생김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외모는 어떤가? 옷 차림은? 말투는? 어디서 온 사람이란가? 대학은 어디를 나왔는가? 이런 것들이 비단 아하시야의 관심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인들이 주로 따지는 주요 관심사입니다. 타락한 본성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말씀과 그 내용보다는 그 전하는 사람의 배경과 인물, 개성과 말하는 태도, 외모, 어느 종파, 어느 대학, 어느 지역 출신인가? 등에 더 관심을 둠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찔림을 회피하고 맙니다. 설교의 본문과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자의 외모와 배경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우편물의 내용보다 우체부가 누군가에 더 관심을 갖는 자들과 같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하매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하니라.](8). 이 모습은 신약의 침례인 요한의 옷 차림을 연상하게 합니다.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왔는데, 하는 사역이 매우 비슷했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듯이, 침례 요한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준비하는데 사역을 집중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 줍니다. 양복을 입고 목수의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역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고급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베옷은 회개할 때, 겸손과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입었고, 잔치 집에서는 예복을 입었습니다. 장례식에 입는 상복이 있고, 학생들이 있는 교복이 있습니다. 옷만 보아도 그 종교를 알 수 있습니다. 사제들이 입는 옷, 승려들이 입는 옷이 다릅니다. 목사들 조차 그런 분위기에 동조해서 바리새인들처럼 옷단을 넓혀서 가운을 입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을 속이려고 털 옷을 입었습니다.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허리에 가죽 띠를 띠어는데 이 한 마디만으로도 왕은 그가 디셉 사람 엘리야란 사실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엘리야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아합 때부터 주의 말씀을 전해 오던 엘리야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말이 지금까지 한번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겸손해졌습니까? 주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했습니까? 그는 아버지로부터,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가 앓고 있는 병도, 모압의 반란도 그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화되는 줄로 압니다. 성경을 없애면 성경의 예언이 없어지거나 연기되는 줄로 압니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만 죽이면 엘리야를 통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거나 묻히는 줄로 알았던지 엘리야를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에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오십인대장이 엘리야에게로 올라가더니,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았으므로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9). 엘리야를 잡아 오도록 오십명의 군사를 보내었는데, 오십인 대장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말씀하셨나이다.”며 임의 동행 형식으로 연행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이방인들은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는 저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를 취소하게 하거나, 저주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자신에게 임한 저주를 풀기 위해 엘리야를 불러서 그 저주를 취소하게 하거나 죽여야겠다고 생각해서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그는 엘리야만 보았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른 것은 존경의 의미가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쟁이여, 그리스도인들여,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며 은근히 멸시의 뜻을 담고 있는 말과 같습니다. 오십인 대장은 주제넘게 엘리야를 개인적으로 모욕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의 일컫는 말을 비난과 조롱의 말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욕하기 이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과 행동은 농담삼아 가볍게 하는 것 같지만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 모독입니다. 엘리야는 오십인 대장의 신성 모독적인 발언에 대해 금방 그 죄를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분명히, 네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리라...고 말했는데, 왕의 부하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왕께서 내려 오라’ 말함으로써 극적인 대조를 보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누구도 하나님의 대언자를 자기 밑에 두고 명령하고, 지시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왕들이 대언자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통치하는 신정체제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의 이런 일련의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며, 강력한 반역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곧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10). 엘리야는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에 대한 그 진실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에 대한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에 대한 간단한 증거도 겸한 것이었습니다. 전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불이 제단 위에 놓어 제물에 떨어지도록 기도했는데, 오늘은 제물이 아닌 죄인들 위에 바로 임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대속 제물이 없을 때 우리가 받을 심판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 주고도 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주님의 진노의 불은 바로 우리의 머리 위에 임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과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받을 형벌은 그대로 집행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괴로움을 당하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의로운 일인즉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눈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永存)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7-9).

이 사건이야말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사건입니까? 그러나 아히시야 왕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다시 오십인 대장과 부하 오십 명을 보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릴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지만 타락한 왕의 마음은 더욱 완악해져만 갔습니다. 내성이 생긴 몸에는 약이 더 이상 약효를 발휘하지 않듯이, 죄와 탐욕으로 마음이 단련된 악인들에게는 주의 징계와 심판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왕이 또 다시 다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응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속히 내려오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11). 아마 그들은 번개로 죽었다고 생각했던지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속히 내려오라 말씀하셨나이다.”(11)라며 조롱과 멸시를 했습니다. 앞절과 비교해 보면 두 단어(오, 속히)가 더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들, 반기독교인들, 우상 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죄는 정도를 넘어서며 더 심해저 갑니다. 그러나 주님이 앞으로 그 일들에 대해 이와같이 갚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곧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12). 하나님께서 전지(全知)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시란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51명을 불태우는 일이나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있거나, 주님을 배척한 온 인류 전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달리 더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겨루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사야 45:9, [화 있을진저, 자기를 만드신 이와 다투는 자여!... ](사45:9). 전도서 6:10, [지금까지 존재한 것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으며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졌나니 그가 자기보다 강하신 이와는 다투지도 못하느니라.](전6:10).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무모한 죄인들을 소멸시켰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군병들이라고 무죄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오만하고 무모한 죄인들을 소멸시킬 불을 하늘에서부터 불러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집행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입증하고 불의하고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구세주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눅9:54). 성령과 은혜의 법이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고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명성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책략을 그들의 행동 원리에 따라 판단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진리에 따릅니다.”(Matthew Henry).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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