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시야와 엘리야(XXVI)
말씀: 열왕기하 1:13-17
요절: 열왕기하 1:16
우리는 때로 인간의 완악함과 회개치 않는 마음의 끝이 어디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해 대적하는 마음은 심판이 집행되어도 더욱 굳어져 가고, 그 반역은 심해져만 가는 한 죄인의 모습을 통해 타락한 육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은 세 번째 다시 오십인 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 엘리야를 잡아오게 했습니다. 이전에 두 번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 부하들이 죽어 나갔지만 왕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져 갔습니다. 왕은 침상에서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대언자 엘리야는 꼭 잡아 죽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엘리야에 대한 미움이나 복수를 떠나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반역이요, 대항이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오십인 대장과 두 번째 온 오십 부장은 엘리야를 조롱하였지만 세 번째 온 오십부장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엘리야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세 번째 온 오십부장을 통해 위에서 내려오는 부당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 왕이 또 다시 오십인 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세번째 오십인 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청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13). 그는 전의 오십인 대장들과는 달리 엘리야를 조롱하지도, 하나님을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의 명을 받아 엘리야를 잡으러 왔지만 왕의 명령과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는 모순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려 했습니다. 자리에 누워 죽어가면서도, 부하들이 두 번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욱 완악하게 행하는 왕의 부당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고민이 얼마나 클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때로 세 번째 오십인 대장과 같은 처지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고민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명령을 수행해야 할 때 그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실예) 루마니아의 한 경찰 간부는 상부로부터 반정부 또는 국가 지도자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매주 교회들을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목사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가장 성경적인 설교를 하는 한 교회 목사님이 바로 걸렸습니다. 그 경찰 간부는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경을 믿는 신자였기에 신실한 설교자들을 연행하는 일이 몹시도 부담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명령을 집행하러 어느 교회로 갔습니다. 주일 설교가 끝나자 바로 강단의 목사에게 다가가 지금 한 설교는 반국가적인 내용의 설교라며 연행하고자 했습니다. 목사님은 잠깐 기도한 후에 데려 가 달라며 기도를 시작했는데, 국가와 민족, 정부의 지도자들과 올바른 법이 제정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일어섰습니다. 그의 기도는 구구절절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한편의 설교 같은 기도였고, 이 기도를 들은 경찰 간부는 명단에서 그 목사님의 이름을 지우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국가나 법에 대한 사심(邪心)이나 악한 마음이 전혀 없어 위해(危害)로운 인물이 아님”하며 연행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종교를 이용해, 강단을 통해, 청중들에게 시국 시위를 하도록 유도하거나, 국가에 대해 악감을 품도록 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기도하도록 만드는 설교자란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 번째 온 오십인 대장은 왕명과 엘리야 사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미련한 아하시야 왕의 명령에 불복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엘리야 대언자를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그는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이 또 다시 오십인 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세번째 오십인 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청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13). 그는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어서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무릎을 꿇고 얻어야 합니다. 그는 엘리야를 두려워하여 왕명을 거역하거나 회피하지도 않았고, 왕명이라는 이유로 엘리야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로 우리는 명령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이와같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세 번째 온 오십인 대장과는 달리 매우 어리석고도 완악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하시야 같은 완악한 죄인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잠언 27:22, [네가 비록 어리석은 자를 절구에 넣고 밀과 함께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어리석음은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7:22). 출애굽기의 파라오나 아합이나 아하시야와 같은 왕들은 아무리 징계를 가해도 점점 더 완악해 질 뿐인데 이는 그 마음 속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9:3b, [또 참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며 그들은 그들의 평생토록 마음 속에 미친 것을 품고 있다가 뒤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가느니라.](전9:3).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려고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는 마음, 교만한 마음 앞에는 주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십인 대장은 엘리야 앞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그는 앞의 죽은 오십인 대장들의 죽은 원인과 이유를 정확이 알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난번의 오십인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오십 명씩을 태웠사오니 그런즉 이제 내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하매](14). 이것은 간절한 기도이며, 감동스런 호소입니다. 이 오십부장의 이런 호소는 조금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불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히 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시며,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방법은 그 앞에서 엎드려 간구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오십인 대장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과 엘리야의 자비를 입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과 투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완고함의 치명적인 끝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Matthew Henry).
15절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시니라. 이에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15). 주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 함께 가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합당한 방법으로, 겸손하게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번째 온 오십인 대장은 왕명을 무사히 수행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주님 앞에서 은혜와 긍휼을 입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낮아지게 되며, 자신을 낮추어 엎드린 자들은 높아지게 됩니다. 엘리야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를 맞서 싸우는데 이용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들을 향해 친절의 법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왕의 군대와 함께 일어나 가는 것은 다시 한번 엘리야의 믿음과 순종, 용기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에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위협에 두려움에 떨며 도망했던 경험이 있던 엘리야는 이번에 비슷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아합 왕의 아들인 아하시야의 살기에 찬 명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군대에 연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고 확신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전의 실패와 실수를 만회하고,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하면 통과할 때까지 연단을 받고, 다시 재시험을 치르는 것이 성경적인 법칙입니다. 그것이 재물에 관련된 것이든, 두려움에 관한 것이든, 죄에 관한 것이든, 믿음에 관한 것이든 우리는 늘 시험을 받으며 삽니다. 그 시험에 승리하면 상급이 있고, 성장과 성숙을 통한 열매를 맺지만 패배하면 쓰라림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빠진 채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전의 실패를 통해 많은 연단과 믿음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한다면 원수들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시니라. 이에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15). 말씀이 임하고, 거기에 따르는 믿음의 순종은 언제나 승리로 직결됩니다. 반면 말씀이 없고, 행위만 있으면 패배의 쓰라림이 따라 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앞서 나가는 것은 화(禍)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말씀이 임했는데 불순종하면 징계가 따릅니다. “이에 엘리야가 곧 일어나...” 엘리야는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전에 예스르엘로 달릴 때 그는 말씀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 달렸습니다. 그 결과는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인간적인 의욕이 너무 지나쳐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는 처사는 불순종에 버금가는 죄입니다. 육신의 욕망은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산에 있었고, 주의 말씀이 임하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에 순종해서 오십인 대장과 함께 왕에게 갔습니다. 비록 왕궁에 수많은 왕실 근위대와 사람들이 둘러 쌓여 있다 할지라도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믿음 아래 당당히 나아갔습니다. 엘리야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만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를 따르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행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는 한 언제나 안전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편 27:1-3,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사악한 자들 곧 나의 원수, 나의 대적(對敵)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걸려서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시27:1-3).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말하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사자들을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에 네가 말씀을 여쭐 만한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16). 엘리야는 왕 앞에서 서서 전에 왕의 사자들에게 전해 준 말을 그대로 다시 전해 주었습니다. 내용을 약화시키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한 자도 틀림없이 주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왕의 죄를 꾸짖고, 왕이 지은 죄로 인한 심판이란 사실도 분명히 했습니다. 왕은 침상에서 누운 채 내려와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 지옥으로 가야 했습니다. 왕의 사자들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엘리야를 통해 직접 들은 말씀이나 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듣는다 할지라도 달라 질 것이 하나도 없는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가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이 누구의 말이냐?가 관건입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전한 후에 왕궁을 떠났습니다. 이세벨과 그녀의 무리들이 왕궁에 그대로 있었고, 격노한 아하시야와 그의 군대들이 왕궁에 가득차 있다 할지라도 아무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용기는 종종 교만한 죄인들을 소름끼치게 합니다. 대언자 엘리야의 말에 아하시야는 깜짝 놀라서, 그나 그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엘리야를 습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자를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죄 가운데 번영하는 것을 생각하는 많은 자들은 아하시야처럼 그들이 예상하지 못할 때 불려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때 찾으라고 경고합니다."(Matthew Henry).
17-18절을 보십시오. [¶왕이 엘리야가 말한 [주]의 말씀대로 죽고 그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이년에 통치하니라. 이제 아하시야의 남은 행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17-18). 엘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하시야는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2장에서 엘리야의 승천을 다루기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그의 믿음의 행로를 잠깐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첫째, 엘리야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신비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산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신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가장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삶으로서 현장에서의 체험이 동반되는 일상적인 삶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믿음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부딪혀 오는 삶의 파편들 가운데서 기록된 주님의 말씀의 신실함과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주는 빵과 고기를 통해 약속을 너머서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 보고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만큼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둘째, 엘리야의 삶은 분리된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과의 연합과 혼합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이겨 올 수 있는가?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죄악에 대한 핑계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분리됨으로, 그들과 철저히 달라짐으로써 차별화를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해 증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엘리야의 삶은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 삶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타락한 백성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질책하는 입장에 섰는데, 이런 그의 자세는 분명히 배척받을 수 밖에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은 세상이 나를 못박고, 나를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해서는 안됩니다. 어차피 세상은 나를 이해할 수 없으며, 알 수도 없습니다(요일3:1).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증인으로서 증거의 능력을 소유한 채 살아가려면 필연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과 분리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밖에 없습니다.
셋째, 엘리야는 평지보다 산을 택했습니다. 그는 본래 길르앗의 산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싸운 곳은 갈멜산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평지가 아니라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 갔습니다. 그는 실패한 후에도 호렙산을 찾았습니다. 아하시야의 군대를 맞을 때도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더 자세히,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산 정상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덜 보고 하늘을 더 바라 보기 위해 산 정상을 택했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은 산상 설교를 하셨고, 산에서 기도하셨으며, 거룩한 산에서 변화되셨고,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는 이 땅을 살면서 저 하늘을 추구하는 앙천(仰天) 의지를 잘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엘리야는 위대한 중보자였습니다. 엘리야의 중보 기도의 최고의 동기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다음이 백성들의 영적 각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중보 기도를 할 때 상대에게 유익한 것들을 대신 빌어 주는 정도로 생각하지만 때로는 상대에게 벌을 내리시고, 징계해 주시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그의 원수들을 심판해 주실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타락하고 완악한 자신의 백성들을 벌해 주실 것을 요구하는 기도로 3년 반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이 방해 받지 않도록 몇몇 믿음에서 파선한 형제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적이 있습니다(딤전1:20). 예레미야 역시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렘10:25). 우리 주님 역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향해 불리한 기도도 하셨습니다(시109). 엘리야는 하늘을 열고 닫는 일을 모두 기도로써 해결했습니다.
다섯째, 엘리야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영적 담대함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타고난 성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격과 영적인 성령의 열매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내나 온유나 부드러움과 같은 것을 타고난 성격에서 찾으려 한다면 아무 의미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의 열매로 맺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영적인 담대함, 즉 용기는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배짱으로 튕기는 무모함과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퀴 벌레 한 마리에도 무서워 하는 자매들이 막상 다가오는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하는 신앙을 철회하지 아니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바로 그런 것이 영적인 담대함이며, 용기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면전에서 심판을 선포하고, 혼자서 갈멜산의 전투를 수행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천성적인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기질이요, 열매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섯째, 엘리야는 영적 타락과 육신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변명하기 위해 핑계거리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뭔가 우리와 달라 보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닌 육신의 성정은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가 우리와 달랐던 점은 질 그릇의 차이가 아니라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의 차이였습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영적인 승리를 한 후에 아합보다 앞서 달려 예스르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잠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주도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분노에 찬 이세벨의 척살 명령을 들었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승리를 위해서도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에도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엘리야는 실족하였을지라도 주님은 그에게 계속적인 은혜를 베푸셨고, 낙심한 상태에 있는 그를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이전과 같은 용기와 힘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엘리야가 살았던 것과 동일한 배교의 시대, 영적 혼돈의 시대를 살아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껍질만 남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을 버리고 아합과 아하시야처럼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 준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의, 심판과 절제를 설교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단지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죄에 대한 심판, 세상을 향해 내리치는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믿는 자들에게 무한대의 은혜와 긍휼을 보장해 주는 위대한 능력인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향하는 불타는 지옥행을 확증해 주는 심판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믿음의 삶, 분리된 삶, 거룩한 삶, 중보하는 기도의 삶, 위로부터 오는 담대함을 지닌 용기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흘리신 보혈을 바로 이 시간 우리 마음에 되 새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달리 말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요, 행동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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