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실수로 배우는 교훈(XXVIII)
말씀: 열왕기상 19:1-4
요절: 열왕기상 19:1-4
오늘은 그동안 7개월 동안 설교했던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를 겸해서 엘리야의 일련의 실수로부터 우리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엘리야의 몇 가지 실수들이 일괄적으로 나옵니다. 전에는 본문에 충실한 강해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교훈을 뽑아내어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는 남이 흔히 하는 실수를 합니다. 또 한번 한 실수를 반복합니다. 대부분의 실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실수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한 첫 번째 실수가 거기에 나옵니다. [그가 이것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종을 거기에 남겨 두니라.](3).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주님이 함께 하신 장소, 주님이 내게 복을 주신 곳 그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는 비를 내렸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용하신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는 정신없이 평지로 내 달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달렸던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면 뭔가를 할 수 있을 줄로 알았던지,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실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떠났다면 빨리 돌아 와야 합니다. 룻기에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유다를 떠나 모압으로 가서 패가망신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아들 둘이 죽고 나서야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 올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약속의 땅, 축복의 장소를 경제적인 이유로, 사소한 개인적인 이유로 함부로 떠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삭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26:2,3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말해 주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머무르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네게 복을 주리라. 내가 이 모든 지역을 너와 네 씨에게 주고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행하며]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이 거하는 밧단아람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야곱을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8:15). [또,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데려오리라. 내가 네게 말한 것을 행하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창28: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축복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구약 성도들과 달리 우리는 지상에 주어진 어떤 특정 지역과 장소는 없습니다. 미국에 살든지 한국에 살든지 어느 나라에 살든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마십시오. 경제적인 이유로 신앙을 버리지 마십시오. 돈 버는 일에 충실한만큼만 주님에게 충실하십시오. 직장에, 주인에게 충성하는 신실함만큼 주님에게 신실하십시오.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가정적인 문제로, 자녀 교육 문제로, 직장 문제로, 학교 문제로, 어떤 문제로 교회를 떠나거나, 등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여러분을 양육하시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교회에 위선자가 많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에 목사가 엉터리라는 이유로 교회를 등지지 마십시오. 제 말은 여러분이 다니는 우리 교회, 이 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교회를 등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주, 두 주 빠지다 보면 한 달, 두 달 빠지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교회를 떠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의 땅이 있다면 신약 성도들에게는 교회가 있습니다.
성경을 떠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경이 여러분에게 복을 준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통해 소망을 가졌습니다. 나의 질문은 성경을 통해 답을 얻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성경을 떠나지 마십시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누구도 여러분에게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답을 줍니다. 여러분이 지치고 낙심했을 때 누구도 여러분을 위로하고 힘을 줄 수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힘과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영혼을 양육하고, 약하고 상한 심령을 싸매 주며, 일으켜 세워 줍니다. 전에 저는 어떤 분이 매일 하루 10페이지씩 성경을 읽었던 간증을 기억합니다. 성격이 급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을 잘 내어 일을 할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평화가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counselling을 받아 보라,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해 보라,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 보라는 등의 별별 충고를 다 들었습니다. 그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 역시 충고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되나, 제 버릇 개 주나...” 사람들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충고를 잘 합니다. 자신도 믿지 않는 해결책을 자연스레 이야기합니다. 그러던 중에 하루 10페이지씩 성경을 읽는 일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실천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어느덧 사람들로부터 놀랍도록 사람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니다. 뭘 했길래 사람이 저리도 달라졌는가? 성경을 읽고 달라졌습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이 주신 축복을 버리지 마십시오. 축복을 팽개친 채 축복을 얻기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로부터 멀어지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모두 말씀 침례 교인입니다. 말씀 침례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먹고 자는 일을 합니다. 돈 벌이를 위해 일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축복을 내 팽개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자느라, 먹고 일하느라, 먹고 학교 공부하느라 성경을 팽개쳐 버렸습니까?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의무적으로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분이 내키지 않는데 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억지로 성경을 읽는 것은 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핑계요, 위선이요, 가식입니다. 엘리야의 첫 번째 실수는 있어야 할 곳에서 떠난 것입니다.
다시 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것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종을 거기에 남겨 두니라.](3). 엘리야는 자신을 시중들고, 자신을 따라 멀리 브엘세바까지 동행한 종을 남겨 두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목자가 양을 포기할 수 없듯이, 양은 목자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목양을 받아야 할 중요한 시기에 다른 일들, 다른 사람들에 빠져 있으면 영원히 양육받을 수 없게 됩니다. 엘리야가 왜 지금까지 동고동락을 하던 종을 브엘세바에 남겨 두고 혼자 떠났습니까? 엘리야가 평생동안 한 일 중에 가장 어리석은 일을 하기 위해 종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룻 길 더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을 데려 가 옆에 함께 있다면 엘리야는 ‘주여, 내 생명을 취하소서’란 기도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믿음으로 같은 길을 걷던 믿음의 동료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사람은 어리석은 짓을 행할 때, ‘날 좀 혼자 내 버려 두세요.’, ‘혼자 있게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이 때 동료가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막아 줄 자기 종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란 항로를 여행하다 예기치 않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 목자와 동료와 가족 가운데 그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고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 밑에 앉아 죽기를 스스로 구하여 이르되,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이는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하고](4).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거기는 생명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도 없는, 생명도 없는 그 땅으로 하룻 길을 갔습니다. 그는 단단히 죽기로 결심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로뎀나무 밑에 앉았습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로뎀나무는 키가 12-18인치에 불과합니다. 그 밑에 앉으려면 등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아마 허리나 등이 꽤 아플 것입니다. 거기는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자신에게 연민과 동정을 지나치게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힘들고 괴로울 때 자신도 모르게 내 뱉는 기도가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몇번이나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람이 자신을 동정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자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저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많은 증언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집안도 괜찮고,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면서 토로하는 말 중에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놈이야...”, “사실 내가 더 큰 피해자이지...”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내 마음 알아 주는 사람은 ***밖에 없어”라며 위안을 받습니다. 그러나 단 한명도 그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면 급격히 절망 가운데 빠져 “오 주여...”란 장송곡 같은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동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한 분 하나님이 늘 저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시편 44:25, [이는 우리의 혼이 진토(塵土)에 꿇어 엎드리고 우리의 배가 땅에 붙었음이니이다.], 시편103:14,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4).
다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고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 밑에 앉아 죽기를 스스로 구하여 이르되,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이는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하고](4). 엘리야는 죽기를 구했는데, 정말 죽기를 원했다면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정말 죽고자 했다면 이미 이세벨이 내일 이맘 때까지 반드시 죽여 주겠다고 사신(使臣)까지 보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죽고 싶었다면 도망칠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만약 종이 이렇게 질문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주인님, 왜 그렇게 빨리 달리십니까?’ - ‘이세벨이 날 죽이려고 해...빨리 더 멀리 도망쳐야 해...이제 충분히 도망친 것 맞아?’- 예, 충분합니다. 못 잡을 겁니다. - ‘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를 안전하게 지키셨군요.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 시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죽박죽 섞어서 내 뱉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리석은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젊은 상관이 부임하면 회사 때려 치운다고 말했다가 정말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당장 그만 두겠다고 큰 소리쳤다가 사표를 정식으로 수리해 버리면, 그 때가서 진심이 아니었다며 살살 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목숨을 취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다, 내일 오후에 트럭 한 대를 보내줄테니 거기 깔려 죽어라!”, 오 주님, 저는 죽고 싶다고 했지 차에 깔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죽여달라고 한 것은 정말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고, 네가 뭐라고 했는지는 안다. 내일 오후에 네가 말한 뜻이 무엇인지 여기 와서 계속 이야기 해보자, 그럼 내일 여기서 보자.’ 우리 주위에는 정말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한 말로 이런 곤란과 어려움을 겪으며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에 교회를 다닐 때 어떤 형제가 몇 달인지 몇 년만에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다시 돌아온 어린양을 맞이하듯이 즐겁게 맞이했는데, 그 형제 입에서 느닷없이 나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안 나올겁니다.” 그는 교회에 중요한 투표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교회에 왔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 안 나왔고, 다음 주부터 다시 안 나올 형제라면 교회 회원의 자격이 없다고 하자, “형제님이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저는 본래 말을 그렇게 합니다.” 형제들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부모나 가족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는 버릇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농담이나 유머란 이름으로 너무나 허황되고 비속한 말을 자주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 공부 시간에, 모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험담과 악평을 농담이란 이름으로 내 뱉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지금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리석은 기도에 다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하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쓰십시오. 전도서 5:6, [/너는/ 네 입이 네 육체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말며 천사 앞에서, 그것이 실수였노라, 말하지 말라.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인하여 분노하사 네 손으로 행한 일을 멸하시게 하겠느냐?](전5:6).
다음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라.”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세벨이 사자(使者)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 네 생명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욱 더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므로](2). 아합 왕과 450명의 바알 대언자들을 전혀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던 엘리야가 시끄럽게 떠드는 한 여자의 말에는 절절 매었습니다. 450명의 남자를 죽일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한 명의 여자를 못 죽이시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남에게 닥친 큰 문제들도 냉철하게, 어렵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문제나 위험은 지나치게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교회 문제, 다른 성도들의 문제를 보고들을 때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형제님을 연단 시키려나 봅니다.’, ‘인내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시려나 봅니다.’하면 갖은 영적인 조언과 충고를 쉽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엘리야는 전에 아합의 궁정 대신이요, 신하로 있으면서 주의 대언자 100명을 동굴에 숨겨 둔 채 빵과 물을 준 오바댜가 죽음을 두려워했을 때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오바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아합에게 발각되어 죽을까봐 두려워했고, 엘리야 문제로 자신에게 죽음의 형벌이 내려질까 두려워 할 때, 엘리야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열왕기상 18:14,15절을 보십시오. [이제 당신이 이르시기를,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하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이 날 반드시 아합에게 보이리라, 하니라.](왕상18:14,15). 그는 떨고 있는 오바댜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하며 힘을 주고, 걱정 근심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가 엘리야 자신에게 닥쳤을 때, 그는 오바댜 보다 더 떨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흘린 사형수가 막상 자신의 형 집행을 목전에 두었을 때, “나 지금 떨고 있니?”라고 묻는 것보다 더 희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지쳤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 돌파구를 찾고 싶다,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한다는 그런 심정일 때 우리는 엘리야의 실수로부터 뭔가를 배웁시다. 환경은 변하여도 나를 지탱해 주시고, 나에게 필요를 공급하는 공급자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내가 평안할 때나, 내가 힘들 때나 나를 구원하시며,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대로입니다. 마귀가 나를 아무리 공격해도 마귀는 나를 지탱하는 뿌리를 자를 수 없습니다. 나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죽음의 위험 앞에서 그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승리했습니다. 용광로에 던져지기 전의 믿음을 고백한 세 사람을 보십시오. 불타는 용광로를 보지 않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본 그들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다니엘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께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아니하나이다.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단3:16-18). 사자 굴에 던져질 때의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엘리야처럼 자신의 문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믿음은 어떤 사건 앞에서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의 꾸준한 기도와 성경 읽기,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통해서 믿음은 자라고 강화됩니다. 믿음이 형성되었을 때 나의 주변 환경과 나에게 닥친 시련 넘어 계신 주님을 바라 보는 안력(眼力)이 밝아집니다.
다섯째로 제가 이 시간 드리고 싶은 말씀은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축복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쉽게 잊음으로써 현재 쉬운 문제도 어렵게 풀어가는 실수를 자주 합니다. 키가 작은 광야의 로뎀 나무(Junifer tree-노간주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는 엘리야에게 주문하지도 않는 특별 룸써비스가 도착했습니다. 5-7절 말씀을 보십시오. [로뎀나무 밑에 누워 자더니, 보라, 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하므로 그가 바라본즉, 보라,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있으므로 그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주]의 천사가 두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네게 너무 머니라, 하므로](5-7). 엘리야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천사가 써빙해 준 숯불에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먹고 마시고 다시 드러누웠습니다. 엘리야는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고, 비를 내리신 위대한 역사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먹이시고, 필요를 공급하셨으며, 전능하신 손을 펴셔서 많을 일들을 이루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문제는 도저히 문제라 생각할 수 없는 가벼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역대기하 15:8절의 위대한 왕 아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사는 이디오피아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들어 왔을 때 어떻게 그들을 맞았습니까?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많은 사람들로 돕든지 능력이 없는 자들로 돕든지 주께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15:11).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여 백만 대군을 남김없이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치러 올라오자 어떻게 했습니까? 역대기하 16:2,3, [이에 아사가 [주]의 집 보고(寶庫)와 왕의 집 보고에서 금과 은을 취하여 다마스커스에 거하는 시리아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 맹약(盟約)이 있었던 것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도 있느니라. 보라, 내가 당신에게 금과 은을 보내었으니 부디 와서 당신과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의 맹약을 깨뜨려 그로 하여금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대하 16:2,3). 아사는 이전에 자신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능력을 모조리 잊어 버렸기에 훨씬 더 적은 군대라 쳐들어 왔을 때 더 큰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백만명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서 십만명으로부터 구원을 베풀지 못하시겠습니까?(대하16:8)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믿음에서 멀어진 증거입니다. 450명의 바알 대언자들을 죽이고, 아합 왕을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면 왕비 이세벨이란 여자 하나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전에 아플 때 고침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모자란 돈이 기적적으로 채워지는 체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내일이 없을 것 같던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렇지 않게 모든 일이 해결되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지금 예배도 빠진 채 부지런히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돈을 버느라 고생하는 분들에게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전에 받았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지금 깊은 절망 가운데서 은혜와 위로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고, 지난 날들에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복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자체는 주님께서 아직 나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금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집니다. 아이들은 주사 맞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방 주사는 필요하기 때문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는 몸이 괴로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때로 질병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파산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하십니다. 이전에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와 복을 기억함으로써괴롭고 힘든 시간을 다가올 축복을 맞는 기쁨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회개하는데 실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는데 실패했습니다. 9,13절에서 주님은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9,13)고 두 차례나 물었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 변명과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시간을 더 써버렸습니다. 10절과 1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주님의 이적과 세미한 음성을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듣기 전과 동일한 대답을 했습니다. 14절은 이런 대답이 기록되어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이곳은 “오, 주님 종을 용서하옵소서. 제가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주님께서 일하시고,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제가 보았으며, 주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셔서 불을 내리시고, 하늘을 닫으셨다가, 하늘을 여시고, 대언자들을 죽이셨으며, 이세벨의 목숨 또한 주의 손에 있음을 내가 확실히 아나이다. 이제라도 돌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들어가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런 회개의 기도와 고백 대신 여전히 목을 곧게 세웠습니다. 그는 앞서 했던 말을 동일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회개에 실패하는 것은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만회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엘리야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다마스커스의 광야로 가고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출신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대언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나님은 엘리야를 돌려 보내며 몇 가지 일을 지시하셨는데,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대언자가 되게 하라”라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대언자의 직무에서 해고되었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세워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돌아와서 이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는대신 겉옷을 던졌을 뿐입니다. 엘리사는 즉시 엘리야를 대신할 대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10년이나 그의 몸종 역할을 했습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이름없는 대언자를 보내어 예후에게 대신 기름을 붓게 했습니다(왕하 9장).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난 엘리야의 불순종과 죄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에게 영예를 주시고 하늘로 들어 올리셨지만 그는 분명히 회개에 실패한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실수를 하더라도 엘리야가 한 마지막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에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고요하게 내 마음 가운데 파고들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묵상을 통해서 세미한 주의 음성이 마음 가운데 들린다면, 뒤로 늦추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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