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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XXIII)

말씀: 열왕기상 22:15-53
요절: 열왕기상 22:23


오늘은 그동안 성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는 매우 엄중하고도 무서운 경고요, 성도들이 마음 속 깊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교와 간증을 많이 듣지만 주께서 악인을 더욱 완악하게 하시고, 심판할 자들을 속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이런 설교와 성경 구절들에 익숙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하기로 정하신 한 죄인 아합 왕에게 수십번에 걸쳐 기회를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몇 차례나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사밧 왕의 권고로 미가야 대언자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아합도 인정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단지 그가 자신에게 좋지 않는 대언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덕분에 그의 주위에는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줄 줄 아는 그런 대언자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였으며 이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는 성경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드디어 미가야가 왕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왕에게 나오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랴, 아니면 삼가랴? 하니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성공하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매](15). 이것은 왕이 원했던 답입니다. 지금까지 미가야는 다른 대언자들처럼 아합이 원하는 대답을 할 줄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였기에 하나님의 말씀만 한 것입니다. 아합은 즉시 미가야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는 미가야가 평소대로 ‘주의 이름으로...’ 또는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언자들이 왕의 눈치를 보고, 왕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충성 경쟁을 벌일 때, 미가야는 오히려 그 말을 가지고 조롱하였습니다. 다른 대언자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기쁘게 해 주려고만 할 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을 두려워하고 기쁘시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만군의 주시며, 만왕의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아합이 찾을 수 있는 성경적인 설교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미가야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했습니다. 자기 기분을 맞춰 주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언이나 충고를 들을 때 내게 힘을 주고, 나를 합리화해 주고, 변호해주고, 정당화해 주는 말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의 유무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세의 특징은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내게 고하겠느냐? 하니](16). 왕은 미가야의 말이 조롱이란 사실을 알고 주의 이름으로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언자 미가야는 다른 400명의 대언자들과 달리 ‘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고, 죄를 죄라 하지 않고 육신의 연약함이라 변명해 주는 것은 다 거짓이요, 진실이 아닙니다. 흔히들 사람들의 입에서 ‘불쌍한 죄인’이란 말을 잘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곳도 불쌍한 죄인이란 말이 없습니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악한 죄인이면 악한 죄인이지 불쌍한 죄인이라고 죄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회개한 죄인일 수 있지만 불쌍한 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조언은 언제나 성경적이어야 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아합은 미가야에게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고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주의 말씀을 듣고 싶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네가 감히 이번에는 나에게 뭐라고 말하나 보자 하는 식의 객기로 말한 것입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아합과 같이 자신의 뜻을 정해 두고 요식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까?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결정한 일을 복 주시기만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충고나 조언을 할 때면 성질을 내거나 그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매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셨나이다.](17). 미가야는 아합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여기서 중단하고 군대를 해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아합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최소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들었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들었을 뿐 믿지 않았습니다. 알았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많은 성도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뿐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합에게는 주의 말씀이 주어졌고,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상대로 대승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적은 군대로도 크게 이겼습니다. 이는 아합이 잘나서 이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시리아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패배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고, 나름대로 외교를 펼쳐 유다 왕 여호사밧까지 끌어 들여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오해하거나 과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보다 승리 자체에 마음이 빼앗긴 결과입니다.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이 크다해도 그것은 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 때문이란 사실을 알 때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지만 받은 은혜만 기억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것입니다.

아합은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가 보인 반응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 상태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그가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려 한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18). 아합은 벌컥 화를 내었고, 분노에 찼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가야에게 먼저 화를 내기에 앞서 여호사밧을 향해 말했습니다. 만약 여호사밧이 이 말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거나 전쟁에 못나가겠다고 하면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대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여호사밧은 말씀을 듣는 즉시 전쟁을 포기하고 유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합에게 그대로 걸려들어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그는 아합과의 사귐을 통해 한 순간이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아합의 말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고, 전쟁에서 목숨이 날아갈 뻔한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과 사람의 말들 중에 올바른 선택을 위해 주님과의 친교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영적 사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과 영적 교제를 갖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회가 필요하고 모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 성경을 통해 체험한 것, 패배한 것, 잘못한 것 들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19-22절은 아합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상의 신탁 회의를 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은혜와 용서의 빛만을 보내 주셨던 주님께서 드디어 죽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는가?에 관한 회의입니다. 아합은 지금이라도 대언자 미가야의 말에 순종해서 얼마든지 살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죽음을 보내는 그 순간까지 주님은 자신의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주께서 자신의 왕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분 옆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데](19).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군사 회의를 주제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전사(戰士)이시며,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지금까지 아합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자리에서 아합의 군대를 지원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모든 일은 하늘에서 결정됩니다. 특히 성도들의 생활은 저 하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20, [이는 우리의 생활권(conversation)이 하늘이기(in heaven-하늘 안에 있기) 때문이라...](빌3:20a).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저 하늘에서 그대로 기록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뭔가를 구하고, 청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미가야를 통해 하늘의 군사회의가 이 땅에 생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일은 저 하늘에 그대로 보여지고, 중계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다른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20). 이 부분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귀를 이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군대에서 직접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천군 천사들 가운데 지원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일에 주님은 침묵하시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 즉시 응답을 가지고 가도록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때로는 주의 천사가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때도 천사를 보내셔서 지키셨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는 주의 천사가 직접 하룻밤에 앗시리아 군대를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은 좌, 우편에 세워둔 군대를 이 땅에 파견하십니다.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하고 주님이 묻습니다. 저마다 의견을 내었지만 한 명이 자원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한 영이 나아와 주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그를 설득하겠나이다, 하매](21). 이 땅과 저 하늘의 통신 수단이 없다면 이런 사실은 도무지 알래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이 꿈엔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미리 대언자 미가야를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아모스 3:7,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주님의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통해 주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사람이 속는 경우는 세 가지이입니다. 첫째,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속이시면 아무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합을 속이시려고 하십니다. 문제는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재앙입니다. 지금도 주의 오심과 공중 들림, 대환란, 천년 왕국, 불 심판 등과 같은 수많은 성경의 경고들을 말해 주지만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사오니](22). 드디어 하늘의 보좌 앞에 있던 한 영이 하나님의 재가를 얻어 아합의 곁에 있는 사 백명의 대언자들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입니다. 이는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한영은 주의 대언자의 입이 아니라 ‘그(아합)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400백 명의 아합의 대언자와 한 명의 주의 대언자 미가야가 있는데 400명의 입에는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갔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23). 미가야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 전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미워하는 왕 앞에서 주의 말씀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미기야가 대언한 이 구절을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주님께서 과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속이시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도 속일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울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의 말씀을 버렸을 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성령 충만이 기쁨과 담대함을 주는 반면 악한 영은 괴로움을 줍니다. 사무엘상 18: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삼상18:10).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혔을 때 악령이 찾아 왔습니다. 악령이 임해도 대언을 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표적과 기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입니다. 재판관기 9: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판9:23).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자식들이요, 자기 형제들을 하룻만에 73명이나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 악령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하실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지금 아합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대언자들이 거짓말로 대언할 때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교회들에 주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셨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과 상관없는 거짓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교회, 귀신쫓는 교회, 성공 신학, 축복 신학으로 무장한 교회들을 시무하는 목사들의 입에는 이미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악령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근본주의자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악령에 들릴 수 없다, 마귀들림은 오직 거듭나지 않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라도 언제든지 마귀에게 속을 수 있고, 마귀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살후2:3)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인류 6,000년 역사에서 사람을 속이는데 단 한 명(예수 그리스도)을 제외하고 실패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이는데는 고도의 전문가입니다. 특히 마귀의 전공 분야가 바로 기독교인들과 성경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둔다면 그는 분명히 속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우상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셨습니다. 에스겔 14:4, 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4), [만일 대언자가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속임을 당하였으면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 위로 내밀고 그를 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그치게 하리라.](9). 이런 이유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체험이란 이름 아래 성경적 진리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우상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신 줄로 압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것, 집 한 채 장만하는 것,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채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래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들이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는 줄을 모르고, 주님께 속은 줄도 모르고 성경과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No로 응답하시는 편이 속이시는 경우가 얼마나 더 큰 은혜인 줄 아셔야 합니다.

①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속입니다. 마귀는 매우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 어느 종교에나 구원이 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고 편협하다...

② 자기에게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속은 것입니다(요일1:8).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구원파)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속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죄인 중의 우두머리니라”(현재)고 했지 “우두머리였느니라”(과거)고 하지 않았습니다(딤전1:15).

③ 죄를 지어도 자백하면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7). 물론 자백하면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다윗, 삼손, 바울...)

④ 자신이 뭔가 된줄로 아는 교만한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3).

⑤ 세상 지혜로 인해 속을 수 있습니다(고전3:18). 철학, 과학, 전통, 문학, 고고학, 역사학, 천문학 등의 학문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고대 아람어, 라틴어 등에서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땄다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속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⑥ 우리가 영적 성장을 멈추면 속습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 수준에 만족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진리의 지식의 보화를 캐는 일을 멈추면 속게 됩니다(엡4:14). 현재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교리의 풍조는 수없이 많습니다.

⑦ 이 세상에 완전 무오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하면 이미 속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자라나고 튼튼하게 세워지고, 깨끗하게 되며,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록된 주의 말씀에 가감없이 읽고, 읽는 그대로 믿는다면 주님께서 거짓 영을 내게 보내시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입니다. 하지만 마음 가운데 우상을 두고, 주의 율법에서 귀를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실한 마음 가운데 내버려두시거나 속이실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나아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하니](22). 미가야의 말을 듣고 있던 사백명의 대언자들 중 하나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쳤습니다. 때로 거짓 대언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여 주의 대언자들을 압도해 보입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는 말은 그가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 있는지, 얼마나 철저히 속았는지를 웅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뺨을 맞으셨습니다(요18:22). 미가야의 뺨을 친 사람이 같은 대언자였듯이 바른 성경으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하겠다고 할 때 가장 박해하는 자들 역시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일은 핍박과 모욕과 위협이 뒤따릅니다. 미가야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변장한 채 전쟁에 나갔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살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지만 주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죄인들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죄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와 같이 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며,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처럼 사람의 죄성과 죄악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가야처럼 있는 그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의와 행위가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섬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매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미가야처럼 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감옥이든 죽음이든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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