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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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문턱에서(XXVII)

말씀: 열왕기하 2:1-11
요절: 열왕기하 2:11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이며, 우리의 기다리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주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지는 이 사건이야말로 신약 성도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소망이며, 복된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휴거 사건은 두 번째입니다. 처음은 에녹이었습니다. 그는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에녹의 휴거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신약 성도들의 휴거를 예표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에녹과 달리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불병거와 불말이 대동되었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엘리야의 미래 사역이 무엇인지를 예표해 줍니다. 그는 하늘로 들림받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처럼 또 들림 받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11:12, [이 두 대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큰 음성이 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계11:12). 엘리야의 마지막 사역은 주님께 들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역시 엘리야와 같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들어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나가더니](1). 엘리야가 아하시야 왕의 죽음을 선포한 후에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동안 제자 양육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언자들의 학교를 세워 많은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이전에 혼자서 모든 것을 헤치우려 했던 조급함을 벗어나 곳곳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키워냈습니다. 이스라엘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단언했던 엘리야가 이제는 곳곳에 대언자의 아들들을 키워냈습니다. 이들은 벧엘에도, 요르단에도 있었습니다. 이 사역은 엘리사에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자 양육, 이것은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이 3년 반 동안 무리들을 회심시킨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11명의 제자들을 양육하신 일입니다. 교회 사역에서 단연 으뜸가는 일은 당연히 제자 양육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제자들을 양육하지 못한다면 그 사역은 금방 사그러 들고 말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일순간 짜릿한 흥분과 전율을 느끼게 하지만 그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주지 않습니다. 표적과 이적은 결코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하며, 열매맺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꾸준히 배운 성경 공부와 말씀의 묵상과 같은 제자 훈련은 시간이 걸리고, 더딜지라도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디모에에게 권면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네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교회 내에는 100가지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뛰어난 사람보다 한 가지씩 일을 해 낼 수 있는 100명이 있는 것이 낫습니다.

[[주]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들어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나가더니](1). 이제 엘리야의 지상 생애는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하늘에 들어올리시고자 했습니다(1). 그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온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접어 두고 어디에서 은둔하며 기도와 성경만 읽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사와 함께 평소 생활하던 그대로의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에서 자신이 하늘로 들림받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통고 받았다는 것은 평소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인 그의 행적을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평소 늘 주님이 가라고 할 때 갔고, 머물라고 한 곳에 머물렀던 그는 마치 군대의 병사가 제식 훈련을 받듯이 철저히 주님의 명을 따랐기에 그가 마지막 인생에서 가야 할 길 역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언제쯤 가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와 처음 머문 곳이며,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을 할 때 지휘 본부였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처음 유월절을 지켰고, 만나가 그치고 땅의 소산을 먹던 곳도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에서 영적 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 엘리야는 이 땅의 생을 정리하는 순간에도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고향 산천을 찾거나, 유언을 남기거나, 이 땅에서 못다한 일들을 서둘러 정리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명령을 받아 가라고 하는 곳, 벧엘로 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너는/ 여기에 머무르라. 이는 [주]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셨음이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그들이 벧엘로 내려가니](2). 엘리야는 길갈을 떠나며 엘리사를 남겨 두려고 했습니다. 혼자서 벧엘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엘리사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어 주던 수종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엘리야가 불렀을 때 소를 잡고 농기구를 불태워 버린 채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따를 때,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왕상19:20)고 한 말에 대해 시험한 것입니다. 10년을 따라 다녔던 엘리사였지만 그는 무엇하나 뚜렷한 공식 직함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대신해서 직무를 수행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정도면 지칠 만도 하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원하건대 너는 여기에 머무르라’(2)는 엘리야의 말은 비수를 꽂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나 가리라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가려고 굳게 결심한 것과 같습니다. 룻기 1:15-18,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 돌아가나니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나보고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强勸)하지 마소서. 이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 것임이니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나와 어머니를 갈라놓으면 [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 나오미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1:15-18). 스승을 따르는 제자는 이런 굳은 결심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굳게 따르는데 룻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의 결심은 하루 밤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때로 험하고, 때로는 섭섭하고, 때로는 아무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엘리야 역시 엘리사의 마음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그들이 벧엘로 내려가니](2). 엘리야와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갔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돌베개를 배고 자다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고 일어나 서원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있는 대언자들의 아들들에게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 갈 것이란 사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벧엘에 있는 대언자들의 아들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참으로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3). 대언자들의 아들들은 엘리사에게 나아와 자신들이 받은 계시를 알려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은 거의 다 동일한 조명을 받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아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안다고 보면 됩니다. 때로 나만 아는 것처럼, 나만 조명을 받고 계시를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주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계시와 조명을 주십니다. 가장 겸손한 자세는 ‘내가 아는 것은 만인이 알고, 내가 모르는 것은 나 혼자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교회 내에는 몇 권의 주석서나 신앙 서적 읽은 것을 가지고 신비한 성경의 독특한 지식들을 혼자 섭렵한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교 단체에 가보면 저마다 자기 선교 단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복음적이고, 가장 근본주의를 지향하며, 가장 경건하고, 가장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제대로 안다는 자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말합니다. [참으로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5).

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원하건대 /너는/ 여기에 머무르라. 이는 [주]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셨음이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4). 엘리야는 다시 한번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에 머무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번에 여리고로 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다시 여리고로 주님은 엘리야를 계속 여행하도록 했습니다. 벧엘은 엘리사가 머물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대언자들의 무리도 있고, 직업적인 목회를 하려면 가장 좋은 장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는 일을 자신의 삶의 안녕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럼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라고 말할 만한 곳이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한번 마음의 결심을 굳혔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4). 롯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데마는 바울을 따랐지만 엘리사와 달리 중간에 떠났습니다. 마가 역시 선교 여행 도중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 사람은 의사 누가였습니다. 엘리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가?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를 따르는 길에서 그가 얻은 영광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따랐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마지막 순간에 엘리야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도들은 이 땅에서 받지 못하는 것들을 마지막 순간에 다 돌려 받을 것이며, 넘치도록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던 무리들이 다 떠나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 6:67-68, [이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7-68).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정말 죽기까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다시 여리고로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대언자들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들림받기 전에 자신이 세운 대언자들의 학교를 둘러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리고에 있는 대언자들의 아들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주]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나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참으로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5). 이곳의 대언자들의 아들들 역시 엘리야가 하늘로 들림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엘리사에게 단지 자신들이 아는 영적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오히여 엘리야 곁에 있는 엘리사가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하는 이 말은 ‘당신의 선생은 곧 가버릴텐데 왜 그렇게 따라 다니느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자’는 일종의 제안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곧 떠날텐데 무엇 때문에 계속 따라다니는가?’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이 말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문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참으로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5)고 그들을 일축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동료, 선·후배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아서는 것을 자주 봅니다. 먼저 목회를 했던 선배들이 주님의 길을 가는 나의 길에 충고란 이름으로 방해를 합니다. 동료들이 나의 길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저의 선배라고 할 수도 있고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목사님은 제게 메일을 보내서 집요하게 full time 사역을 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제가 성경 교사로는 훌륭한데 목사 재목은 아니라고 이리 저리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지금 사역하는 이 미국 교회는 영적으로 완전히 헌신된 가정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며 다른 교회들이 선교 헌금을 보내는 것을 못하도록 막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냉엄한 영적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길을 멈추거나 돌아서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뜻을 정하고 길을 정했으면 사람들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가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완전한 헌신에서 한발 물러나 타협하고 싶을 때 엘리사와 같이 혼을 다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낙심하고 지칠 때에라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주시기를 빕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너는/ 여기에 머무르라. 이는 [주]께서 나를 요르단으로 보내셨음이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두 사람이 계속해서 가니라.](6). 엘리야는 여리고에서 다시 요르단으로 갔습니다. 엘리야의 여행은 오직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제 여기 여리고에 머물 것을 권면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엘리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가는 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곳이란 확고한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기꺼이 순례의 길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먼 거리를 여행하다 보면 그만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의 부르심에 신실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동역자를 따라 하나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출4:16), 갈렙과 여호수아(민14:6), 다윗과 요나단, 엘리야와 엘리사(왕하2:6), 바울과 바나바(행13:2), 바울과 실라(행15:40) 등이 그렇습니다. [이에 두 사람이 계속해서 가니라.](6c).

7절을 보십시오. [대언자들의 아들들 가운데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르단 /강/가에 섰더니](7). 대언자들의 아들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멀리서 쳐다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었지만 엘리야를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엘리사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엘리야의 초자연적인 승천 사실을 알게 해 주셨지만 그 광경을 실제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르단 강을 갈라지게 하여 건너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취하여 둘둘 말아 물들을 치매 물들이 여기저기로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가니라.](8). 요르단 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상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듯이, 엘리야가 하늘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배를 타고 건너지 않고 강을 갈라 맨땅처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홍해 바다를 건널 때 지팡이를 사용했으나 엘리야는 겉옷을 사용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의 언약궤를 먼저 건너게 함으로써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목자의 상징입니다. 언약궤는 말씀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홍해와 요르단 강은 목자의 지팡이와 주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23:4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23:4). 홍해나 요르단 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건너는 것은 죽음의 침례를 받는 것이며, 죽음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달리 엘리야는 이 죽음의 요르단 강을 건너 이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저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육신이 장막을 벗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실한 자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 죽음은 그들이 지나쳐야만 하는 요르단 강이며, 그것을 통과하는 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시도록 죄를 갚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물을 가르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구하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의 영이 두 배나 내 위에 있기를 원하나이다, 하매](9).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를 보면 그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합니까? 솔로몬처럼 백성들을 재판할 지혜와 명철을 구합니까?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라는 영광과 권세를 구합니까? 눈먼 소경처럼 눈을 뜨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이 두배나 자신 위에 있기를 구한 것은 자신의 영적 결핍을 토로하는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결심을 밝힌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솔직히 고백하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능력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기도에 즐겁게 들어주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너왔지만 이제 잠시 후면 혼자서 요단강을 건너 가야 합니다. 엘리야의 빈 공백을 메꾸어야 하는 엘리사는 그만큼 더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사가 [원하건대 당신의 영이 두 배나 내 위에 있기를 원하나이다, 하매](9)란 말은 자신이 스승보다 우월해 지려는 욕심이나 야심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엘리야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주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볼 때, 주님 앞에 “원하건대 당신의 영의 열배, 백 배나 내 위에 있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아무 힘도, 지혜도, 믿음도 없는 것을 발견한다면 오직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시고, 도우시도록 맡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당신의 영이라고 할 때 엘리야의 영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성령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엘리사가 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10). 엘리야는 엘리사가 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일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2:17,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 주님은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1:37).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9:2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마19:26). 그런데 엘리야가 어려운 일을 구한다고 한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엘리사가 가장 큰 가치, 가장 중요한 것을 구했다는 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구하기 어려운 것, 사람들이 좀처럼 구하지 않는 것을 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주로 부귀와 권세, 명예와 장수 등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현세의 복을 구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주의 대언자로서 사역할 수 있는데 가장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아마 역사상 이런 것을 구한 사람은 엘리사가 처음일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들은 참으로 큰 가치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능히 받을 수 없을만큼 초라하고 가치없는 존재란 사실을 깨다는 겸손함이 사실은 가장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가장 잘 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구한 기도의 응답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10). 엘리사는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를 주목하고 눈을 떼지 않아야 했습니다. 엘리야가 옮겨지는 그 순간을 주목해서 보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주목해서 보는 것이며, 영적 실체를 통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 주님의 권능의 손이 나타나는 현장에서 그 일의 표면만 보고, 그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면 표적은 일시적 흥분과 놀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신성, 주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지금 하늘로 들어 올리시는 이 장면을 통해 엘리야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이상 엘리야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인격적인 관계가 맺을 때 엘리사는 자신이 구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통해 성경 속에서만 아니라 현재 나에게 동일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여전히 가면서 이야기하더니, 보라,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11).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천사에 의해 낙원으로 옮겨졌듯이(눅16:22), 엘리야 역시 하늘로 올리워진 것은 천상의 존재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 시편 104:4,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며] 불병거는 천사들이 타고 다니는 운송 수단입니다. 시편68:17, [하나님의 병거는 이만이니 곧 수천의 천사들이 모는 병거라. {주}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나니 시내/산/ 곧 거룩한 곳에 계시는 것과 같도다.](시68:17). 엘리야가 하늘로 옮기워진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초자연적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한 보증과 상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최후는 믿는 성도들의 최후입니다(눅16:22). 모든 신자들이 다 육체가 하늘로 들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영과 혼은 엘리야처럼 천사들에 의해 하늘로 옮겨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지상에 살아 남은 존재들은 엘리야처럼 몸도 변화될 것이며 하늘로 들림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며, 공중에서 주님을 뵐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이미 저 하늘로의 승천은 완전히 보증되어 있습니다. 전에 엘리야는 죽음을 통해 하늘로 가기를 간절히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어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우리의 길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비천한 이 땅에서 영광스런 저 하늘로 들어 올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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