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남은 자 나봇

남은 자 나봇(XX)

말씀: 열왕기상 21:1-16
요절: 열왕기상 21:3


아합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시리아 왕 벤하닷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지만 적장(敵將) 벤하닷 왕을 죽이는 대신 ‘내 형제’라고 선포하며 그를 돌려보냄으로써(왕상20:32) 대언자로부터 저주를 선고받았습니다(왕상20:42). 아합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왕상20:43).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불순종으로 받아친 아합 왕은 승리의 기쁨과 환호대신 근심과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않을 때 평안 대신 근심이 찾아들며,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주님과 내가 다툼이 있다면 순종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헌신의 순간까지 평안과 기쁨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성도는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까지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사야 48:22,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화평이 없다, 하셨느니라.] 또 이사야57:21에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사57:21). 우리는 아합과 같이 받은 은혜를 저주로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대신 자기 기준대로, 자기 눈에 좋은대로 함으로써 스스로 화(禍)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언자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아합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왕궁으로 돌아와 회개하거나, 슬픔 가운데 속죄제를 드리거나, 금식을 하거나, 대언자를 불러 기도를 부탁하는 일을 하는 대신 왕궁 곁에 있는 포도원 하나에 눈독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언자를 통한 엄중한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 잠시 동안 경건한 슬픔을 불러 일으켜 회개하는가 했지만, 그는 더욱 악한 길로 들어 서고 말았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이들 후에 이러한 일이 있으니라.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예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더니 이것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궐에서 매우 가까이 있더라.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집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로 하여금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 그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혹시 네가 보기에 좋거든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하니](1-2). 세상 말로 하자면 아합은 참으로 배짱이 있고, 적극적인 삶의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가 저주의 선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잊어버리고 왕궁 곁에 있는 포도원이나 사서 그것을 가꾸며 소일할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잠시 근심하고 슬퍼했지만 다 털어 버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죽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언제나 고민도 슬픔도 잠시이며, 또 다른 악을 계획합니다. 그는 포도원의 주인인 나봇을 불러 두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첫째, 다른 더 좋은 포도원을 줄테니 바꾸자. 둘째, 값을 쳐 줄테니 팔아라. 권력과 돈이라면 안될 것이 없으며, 못할 것이 없다고 믿는 아합 왕에게 힘없는 민초(民草)인 나봇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NO 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늘 있지만, 나봇처럼 원칙과 법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 역시 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 조상들의 상속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3). 나봇은 성경적인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살았기에 왕의 제안에 고민하고 앞뒤를 재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봇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제안을 성경을 인용하여 지체없이 물리치신 것처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상속의 땅에 관련된 말씀을 들고 아합 왕의 제안을 단칼에 물리쳤습니다. 레위기 25:23,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나니 이는 땅이 내 것이며 또 너희가 나그네요, 나와 함께 거하는 자이기 때문이니라.] 힘없는 백성이요, 왕의 명령에 따라야 할 백성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았기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요, 자세입니다. 나봇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한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장의 눈치를 보느라, 상관의 비위를 맞추느라, 때론 친구들이나 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너무나 쉽게 타협해 버립니다. 말씀으로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십시오. 나봇이 왕을 존경하지 않거나, 무시해서 반역하거나 거스리는 영을 지녔기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을 소리입니다.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 조상들의 상속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3). 악한 아합조차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답변하는 나봇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혈과 육에 대항한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들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trouble은 마귀가 뿌리는 불화의 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칼로 대적함으로 단번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봇은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아합 왕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왕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고서는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나봇은 왕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가? 선택의 문제가 놓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험을 받습니다. 독재 권력을 타도하고 그들이 내린 명령에 불순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종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지난 수십 년간 조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숙제였습니다. 인간의 법에 추종하는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하는가? 선택의 문제는 성경에도 자주 언급되어 나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런 선택을 강요받았고(단3:14-15), 다니엘 역시 그런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사도들 역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이상 설교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런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행4:18). 우리 역시 이런 선택의 문제에 늘 부딪히며 삽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기 알맞게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신자들의 신앙을 돕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도록 되어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다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스스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문제들 앞에 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패하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희생하게 하는 제안은 언제나 NO라고 하십시오. 예배를 드리는 일은 생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죄의 유혹이 오면 언제나 NO라고 하십시오.

다시 3절을 보십시오.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 조상들의 상속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3). 나봇은 아합 왕의 명령보다 기록된 주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나봇은 아합 왕보다 주님을 더 존중했습니다. 나봇은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두신 남은 자 칠천 명 중의 한 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런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타락한 아합 왕의 궁 옆에 이런 의롭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너무나 실망해서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불경건한 아합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 자랑스럽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망스럽고 귀찮은 존재요, 제거 대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약 백성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을 벌주고 혼내야 할 왕이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백성들로 하여금 어기도록 명령하고 유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저는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자기 딸이 미니 스커트를 입지 않고,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딸이 교회와 직장, 집 밖에 모르고 성경을 너무 가까이 한다는 것을 불안해하며 짜증내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성경대로 믿는 자녀가 독실한 교인임을 자처하는 부모에게 자랑이 아니라 짜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가족 중에 너무 성경적인 식구 한 명이 있다고 성질 내는 나머지 가족들도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장식용으로 겉치레로만 사용할 뿐 결코 삶의 좌표요, 행동 윤리로 삼지 않는다는 위선과 거짓된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들의 상속을 왕에게 줄 수 없나이다, 한 말로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니라.](4). 아합은 대언자의 말에 근심하여 기뻐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나봇의 말로 인하여 근심하며 기뻐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을 때보다 이번에 받은 충격의 강도가 훨씬 더 컸습니다. 대언자가 선포한 자신의 운명에도 근심하긴 했지만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부자들이 저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보다 자기가 갖고 싶은 소유에 훨씬 더 집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탐욕이 채워지지 않을 때 병이 듭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히13:5a)는 주의 말씀은 ‘술 마시지 말라’나 ‘열심히 전도하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순종하기 어렵고 아멘으로 화답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결코 부자가 되기 위해 꾀를 부리거나 자기 지혜를 동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은 “탐욕을 조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5,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탐욕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눅12:15). 탐욕에 찌든 교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니니이다. 그래도 우리는 돈이 있어야 하리이다” 하며 주님께 항변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코 말씀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멸망해 봐야 비로소 그것이 죄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 잠언 기자는 탐욕을 미워하라고 말합니다. 잠언 28:16, [명철이 부족한 통치자는 또한 크게 학대하는 자이거니와(아합처럼),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 날들을 길게 하리라.]

? 신약 성도들이 탐욕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경배(숭배)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곧 우상 숭배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재물의 신(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탐욕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다면 분명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곳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불순종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8,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잠언23:4,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 잠언 28:20,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단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탐욕은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주신 몫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탐욕은 언제나 고민으로 이끌며 우리로 우리 소유를 즐기지 못하게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영이 어찌하여 이같이 슬프게 되어 빵도 드시지 아니하나이까? 하니](5).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켜 곧바르게 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은 마귀가 보내는 전령입니다. 누워있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대언자가 찾아 와 조언을 주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주위엔 자신을 책망하고 바로 잡아 줄 대언자들이 없었습니다. 아합 왕에게 친절하게 그의 고민을 물어보고 들어주는 이가 이세벨이었다는 사실은 아합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 때로 여러분이 죄로 인해 낙담과 고민에 빠졌을 때, 여러분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누구인지 유의하십시오.

6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그 까닭은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혹시 네가 기뻐하거든 내가 그 대신 다른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하였으되 그가 대답하기를, 내 포도원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겠나이다, 하였기 때문이라, 하니](6). 사람은 언제나 자기 중심에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아합은 있는 그대로 말한 것 같지만 이는 진실처럼 위장된 거짓이었습니다. 자신이 한 말은 다 맞지만 나봇의 대답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아합은 “내 조상들의 상속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한 나봇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내 포도원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함으로 나봇이 완고하고 패역한 백성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하고](8). 이세벨은 하나님의 법을 알기를 우습게 알았기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합과 이세벨이 나누는 이야기를 다 보고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자기 백성에게 하는 악한 행위들을 그대로 두심으로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의(義)를 더하시고, 이들에게는 진노의 심판을 더하십니다.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쓴 방법은 매우 치밀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내니](8). 이세벨은 왕명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공권력이 악을 자행하는데 앞장서는 일은 고금을 막론하고 타락한 왕국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의 인으로 봉인된 살인 청탁의 내용이 도시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발송되었습니다. 이는 정권에서 사법부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군사 정권 시절을 기억나게 합니다. 재판의 형식을 빌어 사람들을 마구 감옥에 보내고, 죽이는 일에 이세벨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장로들과 귀족들은 성문에 앉아 백성들의 각종 민원 사항들과 형사 문제들을 처리하고 판결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봇의 도시에 있는 장로들이었기에 나봇을 잘 알고 있었고, 사건의 내막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은 나봇의 사정을 살펴 주기 보다 이세벨의 명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왕에게 미움을 받는 것보다 나봇을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봇은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벨리알의 아들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9,10). 나봇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는데, 이세벨은 역으로 그를 하나님과 왕을 모독한 사람으로 누명을 씌웠습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죄가 행해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갑작스런 금식 선포는 일종의 종교적인 위기 의식을 조장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지도 모른다는 겁을 줌으로써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이 있는가를 색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금식 선포를 통해 아무나 한명을 죽임으로 아무도 이 일에 이의를 달지 못하게 미리 조작한 것입니다. 증인 두 명을 세운 것은 모세의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민35:30, 신17:6).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레24:15-16). 나봇을 성 밖에 끌고 나가 돌로 쳐죽이는 것도 모세의 율법대로입니다(레24:15-16).

이세벨은 어떤 유대인보다도 더 철저히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주님의 백성을 죽이는데 사용했는데, 그녀에게 모세의 율법은 신앙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부릴 수 있는 통치 수단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형식을 빌어 정치를 하는 이세벨이나 종교의 형식을 빌어 사업을 하는 교인들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형식과 절차를 사용해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이세벨의 본을 따르는 후예들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솔로몬은 말하기를,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사악함이 있고 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불법이 있도다.](전3:16).

이세벨은 나봇의 이름을 백성들 가운데서 더럽게 하여 죽였고, 그가 받은 하나님의 상속을 빼앗았습니다. 장로들과 귀족들은 이세벨에게 동조했습니다. 이 때 죽은 이는 나봇 혼자가 아닙니다. 나봇이 죽으면 자동으로 나봇의 아들들에게 유산이 상속되기 때문에 상속자들까지 다 죽여야 했습니다. 결국 나봇의 일가족을 모두 죽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9:26,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하시고...] 이는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악인이 의인의 피를 흘릴 때, 심판의 때는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세벨이란 여자는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를 하며, 주의 백성들을 통제하고, 마음대로 조정하며 우상을 숭배케 하는 악한 여인으로 요한계시록에도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으니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로마 카톨릭을 잘 예표하는 여자입니다. 이세벨이 유대인 여자가 아니라 이방인이었듯이,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세벨이란 의미는 시돈의 말로는 순결한 처녀이고, 히브리어로는 ‘똥더미’란 뜻인데 로마 카톨릭은 전자의 의미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후자라고 말씀합니다. 아합 왕이 이세벨의 꼭두각시였듯이 지금 카톨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유럽의 왕들은 모두 로마의 꼭두각시들에 불과합니다. 이세벨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직을 세웠는데, 로마 카톨릭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직을 세웠습니다. 이세벨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모함해서 죽였듯이 카톨릭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모함해서 죽였습니다. 이세벨이 무시무시한 최후를 맞듯이 로마 카톨릭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이세벨과 대조적인 인물인 나봇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잘 보여 줍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주님의 사셨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런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주님과 동떨어져 있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삶과 인격에서 주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는 성도들에게는 아무리 적어도 거기에는 주님의 흔적(mark)들이 남아 있는 법입니다.

① 나봇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소유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마21:33). ②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가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어했듯이 그리스도의 포도원 역시 그런 사람들이 탈취하고 싶어했습니다(마21:38). ③ 나봇과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는 제안을 받아 들이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마4:9). ④ 나봇과 예수님은 둘 다 말씀을 인용해 유혹자의 말에 귀기울이기를 거절하고 단번에 물리쳤습니다. ⑤ 나봇과 예수님은 둘 다 자신들의 죽음을 구하는 자들로부터 거짓 고소를 받았습니다. ⑥ 나봇과 예수님은 둘 다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신성 모독과 왕의 모독이란 비난을 받았습니다(마26:65,눅23:1-2). ⑦ 나봇과 예수님은 둘 다 자기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⑧ 나봇과 예수님은 둘 다 성 밖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히13;12-14). ⑨ 나봇과 예수님을 정죄한 자들은 결국 그 죄에 대해 비난을 받았습니다(왕상21:19, 행2:23). ⑩ 나봇과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왕상 21:19-23, 마21:41, 22:7).

주님은 나봇이 어떻게 죽었는지 다 살펴 보셨습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누구인지도 불꽃같은 눈으로 다 보셨습니다. 때가 되면 악인들의 악독들이 그들의 몸에 보응할 것입니다. 주님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거부하던 포도원을 소유로 취하소서. 이는 나봇이 살아있지 아니하고 죽었음이니이다, 하니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이 듣고 일어나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로 취하려고 거기로 내려갔더라.](15-16). 아합과 이세벨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사기와 거짓말과 부정직으로 잔인하게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켜 왔습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서 얻게 된 재물이나 명성을 자기 것인양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소원했던 나봇의 포도원을 얻었지만 포도원이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2:3,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영벌은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욥기 20:5, [사악한 자의 승리는 잠시 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깐 뿐이니라.]

하나님은 나봇이 억울하게 죽고, 그의 아들들이 죽고, 땅을 빼앗기는 일련의 과정을 소상히 살피시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신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엘리야를 보내 이들이 행한 악에 대한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심판관이십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어떤 심판을 내렸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악인에게는 화평과 기쁨 대신 근심과 불안만 있다. 2. 악인의 제안에 말씀의 칼로 영적 전쟁을 승리하는 나봇 같은 신자가 되자. 3. 탐욕을 조심하고, 탐욕을 미워하라. 탐욕은 우상 숭배이다.- 자신의 생활 방식을 점검하라. 4. 나봇처럼 의롭고 경건하게 살 때 이세벨의 박해가 온다. 5.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그 안에서 주님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6. 의인이 피를 흘릴 때 주님의 심판은 그만큼 더 가까이 온 것이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